〈 76화 〉 오랜 날, 오랜 밤 (1)
* * *
빛 한 점 들어오지 않는 공동, 걸을 때마다 차가운 돌이이 밟히는 공간.
암순응한 눈으로도 희끄무리한 형태조차 잡을 수 없는 그 암실에서, 한 남자가 조용히 몸을 일으켰다.
신기하게도, 오로지 고요만이 가득한 그 공간에서 발걸음 소리는 울려 퍼지지 않았다.
마치 처음부터 아무런 존재가 없는 것처럼, 남자는 조용히 공간을 거닐었다.
동공을 지나침에도 보이는 것은 기다란 복도 하나뿐이었다.
그마저도 촛불 하나 없어, 오로지 감각만이 길을 보여주고 있었다.
흑무란, 애초에 감각을 허락하지 않는다. 어둠의 허락을 구한 이,
태초에서부터 이어져온 그 어둠의 안개 속에서 거닐 수 있다는 것은 오로지 한 가지만을 의미했다.
“에릭.”
화아악 허공에서 불꽃이 일기 시작했다.
복도의 끝, 두터운 나무로 만들어진 문이 보임과 동시에 남자가 중얼거렸다.
경첩이 낡아 당기기만 해도 시끄러운 소리가 울리는 문, 잔뜩 얽힌 넝쿨을 불꽃으로 태워가며 문을 열자.
이윽고 문 너머에서 다시금 거대한 공동이 보였다.
“말로릭을 부르는 의식을...실패했다고 들었다.”
“죄송합니다.”
그림자 속에서 나타난 형상이 고개를 숙였다.
스며든 어둠 속에서 자연스럽게 나타났지만, 남자는 아무렇지 않게 그 존재를 받아들을 따름이었다.
지금 이 상황에 가장 중요한 것은, 최근에 실패한 ‘의식’에 대한 것이었다.
베르만이 직접 나서 분명히 성공할 거라 생각했던 소환 의식이 어째서 실패했는가.
목표를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이 그 의식이었건만, 이번에 그 의식이 실패하면서 계획 자체가 한참 뒤로 밀릴 위기에 놓이게 되었다.
“죄송하다고 끝날 사안인가. 경위를 말해라, 어찌하여 말로릭 소환 의식이 실패했는지, 몇년 동안 자금을 끌어다 쓰며 억지로 만든 제물을 전부 어디에 사용한 것인지.”
꽤나 분노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붉은 달이 뜨기 까지 채 1년도 남지 않은 상황에서 그런 커다란 계획을 실패로 끝내다니.
제물을 다시 공수하는 것도 그렇고,베르만 같은 고위 흑마법사를 다시 찾는 것도 꽤나 고된 일이었다.
허공에서 보랏빛 눈동자가 사납게 이글거렸다.
그런 눈을 잠시 바라본 그림자 속의 사내는, 이윽고 조용히 입을 열었다.
“...에반 프리드라는 기사를 아십니까?”
“하, 내 어찌 그를 모르겠는가. 그 한 사람 때문에 수포로 돌아간 것이 한둘이어야지. 설마...이번에도 또 그 기사인가?”
“단신으로 말로릭을 잡았습니다. 어쩌면, 우리가 상정하는 것보다도 더 거물이 된 걸지도 모릅니다. 에반젤리움 광장에 말로릭의 머리뼈가 놓였다고 하니, 이제 그를 계속해서 무시하는 건 힘들 것 같습니다.”
후우, 격하게 숨을 내뱉은 남자가 허공을 바라보았다.
에반 프리드라는 이름을 들은 순간부터 3년이 흘렀다.
베르뎅 산에서 트롤을 잡았다고 할 때만 하더라도 그리 신경 쓰지 않았는데,
이제는 말로릭을 단신으로 격파했다는 소리까지 듣게 되다니.
“그냥 두어서는 안 되겠군.”
프리드, 그 성씨와 관련된 이야기. 허공에 떠오른 불빛이 서서히 공동을 밝혀나가기 시작했다.
어둠으로 가득 찼던 공간, 이윽고 밝은 불빛이 벽에 닿자.
그림자로 덮여있던 벽에서 글씨가 조금씩 드러나 남자의 시야에 들어왔다.
“용. 이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나?”
“...‘그분’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음, 아니야. 내가 지금 말하는 건 고룡이 아닌 조금 더 최근에 있었던 용이지. 알라르가 제국을 세운 뒤에도 제국에 있었던 용, 프리드를.”
벽을 훑는 손가락이 이윽고 한 글귀에 닿자, 남자는 옅게 미소 지으며 글귀를 읽어 내려갔다.
고대 제국어로 이루어진 벽면의 글귀들. 이제는 낡아 점차 색이 바래져가는 그림 사이에 적힌
글귀가 뜻하는 것은, 분명 자신들이 목표하는 것과 분명 관련이 있었다.
“프리드 가문의 가주들은 용이 품고 있는 힘을 알고 있었지만, 정작 직접 보지는 못했지.프리드가 죽은 뒤로는 어째선지 한 번도 용의 마나를 품고 태어나는 이가 없었으니까. 그런데...이번 세대에서, 용혈을 타고난 아이가 하나 태어났다.”
“그게 에반 프리드인 겁니까?”
“그럴 거라 생각하고 있네. 적어도 들려오는 소문이 거짓이 아니라면, 백색의 마나는 오로지 에반이라는 기사만이 가지고 있는 특징이니까 말이야.”
화륵, 불이 더욱 밝아지고. 이윽고 벽면에 그려진 벽화가 모두 보이기 시작했다.
이제는 흐려진 색, 그 형체만을 간신히 분간할 수 있는 그림을 보며 남자가 천천히 입술을 떼었다.
보랏빛의 눈동자에 담긴 것은 미약한 희열, 열망, 그리고 광기였기에.
떨리는 목소리가, 조용히 그의 입에서 새어나왔다.
“...언제 보아도 아름다운 광경이군.”
흑색의 비늘로 덮인 용이 세상을 짓밟고 있었다.
용암이 흐르는 대지, 부서진 산, 알라르가 세웠던 에반젤리움은 폐허가 되어 잿더미로 변해 있었고.
사람들은 모두 거대한 용 아래에 엎드려 목숨을 구걸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거대한 용 옆에 로브를 두른 채 서있는 3명의 인간.
그 자리는, 곧 자신의 자리가 될 것이라 남자는 굳게 믿고 있었다.
용이 내려앉은 자리 위에 떠오른 붉은 달, 남자는 그 달을 보며 한 이름을 중얼거렸다.
“에반 프리드.”
그를 처리하지 않으면, 모든 계획이 무산될 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생각이 떠올랐다.
단신으로 말로릭을 처치한 것부터 이미 마스터의 경지에 다다랐다고 보아도 무방하지 않은가.
허리춤에 걸린 검을 만지작거리며, 벽화에 두었던 시선을 허공으로 돌렸다.
“구태여 죽일 필요는 없지, 아니, 오히려 이용할 수도 있지 않은가.”
“설마, 그를 이용하실 생각입니까?”
계획을 위해서는 꽤나 많은 제물이 필요했다.
제물이 필요한 이유는 그 엄청난 양의 마나를 감당하기 위해서가 아니던가.
하지만 마스터 수준의 기사가 지닌 마나라면, 수천 명의 일반인이 지닌 마나를 월등히 뛰어넘을 터.
만약 그를 재물로 바칠 수만 있다면야, 지금 걱정하고 있는 재물 충당에 관해서 단번에 해결 할 수도 있었다.
“문제는 그를 어떻게 끌어 들이냐는 것이겠지.”
“...방법이 없는 건 아닙니다.”
그림자 속의 사내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사람에겐 누구나 역린이 존재한다.
그런 점에서 에반 프리드에겐, 그 누구보다도 커다란 역린이 존재하지 않던가.
아이린 유리스, 그 이름을 들은 남자는 허공을 바라보며 한 차례 크게 웃어 보였다.
“하하! 아이린 유리스라...”
분명, 위험했다. 실패하면 여태껏 대외적으로 쌓아왔던 명성이 한꺼번에 무너질 수도 있을 만큼.
계획의 성공 이전에 그 명성이 무너져서 안 된다는 걸 잘 알고 있었지만.
만약 유인하는 데에 성공한다면, 에반 프리드를 재물로 바치는 데에 성공한다면.
그 위험 부담을 전부 감수하는 것도 어쩌면 괜찮을 지도 몰랐다.
어차피, 유리스와 부딪히는 것은 머지않은 일이 아니던가.
아이린 유리스, 그 이름을 중얼거리던 남자가 벽화를 붉히던 불꽃을 꺼트렸다.
불꽃이 사라지며 남은 아주 희미한 불씨가 닿아, 검에 새겨진 문장이 아주 잠깐 반짝였다.
방패를 가로지른 검, 제국에서 오로지 로만 만이 가지고 있는 문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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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생각을 하길래, 갑자기 멍하니 서있는 건가요.”
“...아무 것도 아닙니다.”
갑작스레 섬뜩한 기분이 들었다고 구태여 말할 필요는 없으리라.
해가 환하게 떠 있는 대낮에 이런 느낌을 받는 것은 처음이라, 몸을 부르르 떨며 이내 옅게 한숨을 뱉었다.
아무래도 새벽에 잠을 자지 못한 탓일까. 흐려진 시야에 눈가를 매만지는 것도 잠시.
이윽고 천천히 소파에 몸을 맡긴 채 그대로 몸의 힘을 풀었다.
“...이제는 아주 자기 방처럼 있네요. 호위 기사 주제에.”
“그거 아십니까 아가씨?”
“무얼 말하는 거죠?”
“제게 요즘 유독 차갑게 대하시는 것 말입니다.”
계절제가 끝난 지도 어언 일주일이 되어간다.
솔직히 말해 그런 거사까지 치뤘으면, 관계의 진전을 상상하는 게 당연한 것이 아닐까?
허나 나를 대하는 아이린의 태도가 꽤나 차가워져서,요즘 들어 처음 만났을 때의 아이린이 어렴풋이 떠오르는 것 같기도 했다.
물론, 그녀가 그러든 말든 이젠 별 상관없었지만.
이번엔 또 어떤 앙큼한 상상을 하고 있는 걸까. 그렇게 그녀를 빤히 쳐다보길 잠시.
과연 내 말이 정곡을 찔렀는지, 한차례 어깨를 움찔 떤 아이린이 가늘게 뜬 눈으로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스산한 시선, 이번엔 또 무엇이 문제인 걸까.
그녀에게 소홀히 대했냐면 그건 또 아니라서,
아이린이 저러는 이유를 파악하지 못한 채 그저 멋쩍게 웃어 보일 따름이었다.
“웃지 마세요.”
“...이젠 웃는 것도 무어라 하시는 겁니까?”
“에반, 항상 생각하는 거지만. 그대가 어떤 위치인지 조금 자각할 필요가 있어요. 그대는...호위 기사잖아요? 주종관계로 따지자면 제가 훨씬 위에 있다는 걸 알고는 있나요?”
주종관계라는 말을 듣자 괜스레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런 것을 따지기엔 이미 너무 멀리 왔지 않은가.
허나 틀린 말은 아니라, 나는 소파에 앉은 자세를 고쳐 잡은 채 조금 진중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주종관계를 신경 쓴다면, 조금 맞춰주는 것도 나쁘진 않으리라.
그렇게 각을 잡은 채 자리에 앉자, 조금 놀란 듯 보이는 아이린의 입꼬리가 파들거렸다.
...분명, 좋아서 저러는 것이 분명했다.
“딱 좋네요. 평소에도 그런 태도를 지니도록 해요.”
“노력하겠습니다.”
로페나는 그런 아이린을 어쩐지 한심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아이린은 알고 있을까. 로페나가 우리 둘이 무엇을 했는지 전부, 무서우리만치 알고 있다는 점을.
물론 중요한 건 몰랐지만, 로페나라면 곧 그런 부분까지 알고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탁 하는 소리와 함께 주전자를 내려놓은 로페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더니, 한차례 쓰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주전자가 비었네요.”
주전자 안에서 찰랑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무래도 몇 번 따를 만큼은 차있는 것이 아닐까 싶은데.
아무리 봐도 이 자리를 피하고 싶어 하는 속셈이 빤히 보여 쳐다봤지만,
로페나는 그런 내 시선을 무시한 채 태연하게 말을 이어갔다.
“저 차 좀 다시 채워올게요.”
그리고 말을 덧붙이길,
“조금...오래 걸릴 수도 있어요.”
마치 당부하듯 말한 로페나였지만, 아이린은 아무것도 눈치 채지 못한 사람처럼 그저 고개를 몇 번 끄덕이는 것이 전부였다.
눈치가 없는 것인지, 아니면 모르는 척 하는 건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로페나가 아이린을 한심하게 쳐다보는 것을 이해할 것도 같아서, 나는 나가는 로페나를 향해 살짝 손을 흔들어 보였다.
그리고 찾아오는 정적.
둘이 있는 것을 싫어하는 건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반기는 편이라 하는 것이 옳지 않을까.
하지만...그럼에도 어색한 것은 사실이리라. 차라리 연인이라는 관계를 서로가 인정하면 몰라도,
아직 입을 맞췄음에도 불구하고 애매한 관계로 남았음을 부정할 수가 없었다.
이게 다 로만 때문이었다.
그렇게 로만에 대해 생각하자, 자연스럽게 떠오른 것은 이전에 제작을 부탁했던 아티팩트였다.
카심 백작에게 부탁했던 아티팩트, 로만과 흑마법사에 관한 연관을 밝힐 방법이란 그것뿐이었으니까.
허나 그 아티팩트를 만든다한들, 어떻게 사용할지에 대해서도 고민이 따르는 것이 사실이었다.
직접 접촉해서 드러내야 하는 것이라면, 나름 여러 상황에 대비한 뒤에야 비로소 사용할 수 있을 터였다.
아티팩트를 사용하는 과정에서 로만을 의심하고 있다는 것이 들킬 수도 있었으니 당연한 일이 아니겠는가.
최근 계속 고민하고 있는 것도 그런 점이었다.
만약 아티팩트를 사용한 뒤에 들키지 않는다면, 황태자와 협력하여 로만을 토벌할 생각이었다.
그 과정에서 아이린이 무사할 수 있을까. 물론 그녀는 안전한 곳에 둔 뒤에 진행되겠지만...아무래도 걱정이 되니까.
로페나나, 크리스 경이나 내게 소중한 사람인 것은 변하지 않았다.
허나 아이린이라는 여인은 내게 특별한 존재였다.
만약 내 실수로 그녀가 다친다면, 아마도 평생 그 실수를 자책하리라.
손에 잡힌 로만의 문장을 조심스럽게 매만지자, 그 모습을 보던 아이린이 서류를 보다 이내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노골적인 그 시선을 무시하다가, 꽤나 오랫동안 쳐다보는 탓에 그녀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시선이 마주쳤음에도 아이린은 시선을 떼지 않았다. 마치, 이런 내 모습을 꽤 오랫동안 담고 싶은 것처럼.
“그렇게 쳐다보시면 부끄럽습니다.”
덤덤히 입을 열자, 한차례 피식 웃은 아이린이 아무렇지 않게 대꾸했다.
“의외네요, 그렇게 부끄러워하는 사람이 저한테는 그렇고 그런 짓을 한 건가요.”
“누가 들으면 오해하겠습니다. 게다가...그렇고 그런 짓은 아가씨가 먼저 해달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부드럽게 미소 짓자, 얼굴을 붉힌 아이린이 헛기침을 내뱉으며 고개를 숙였다.
이제와 서류에 집중하는 척 한들 누가 믿을까. 외적으로 그녀와 내가 주종관계일지는 몰라도,
사적으로는...내가 그녀에게 우위를 점하고 있는 게 사실이었다.
그렇다고 내 마음대로 그녀를 휘두를 생각은 없었다.
그냥, 아이린이 이렇게 얼굴을 붉히는 모습을 보는 것이 즐거울 뿐이었으니까.
지난번의 경험은 내가 그녀에게 조금 더 과감하게 행동할 수 있는 용기를 주기에 충분했다.
그녀의 마음 또한 나를 향하고 있음이 확실했고, 그녀가 단호하게 거부하지 않는 이상 조금 과감하게 움직이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
“아가씨, 그거 아십니까?”
소파에서 조용히 일어서자, 나를 힐끔 바라 본 아이린이 내게 묘한 시선을 던졌다.
왜 갑자기 일어서냐는, 의문 섞인 시선에 그저 어깨를 한 번 으쓱인 채 자연스레 그녀의 앞으로 다가갈 뿐이었다.
그녀 앞에 놓인 책상을 바라본다. 서류의 내용 자체엔 관심이 없었지만, 아이린이란 사람에겐 관심이 있었다.
지금은 조금 토라진 그녀였지만, 그런 아이린을 풀어주는 방법은 잘 알고 있지 않은가.
다시 고개를 든다. 그렇게 아이린의 눈을 마주하면서, 다시 한 번 부드럽게 웃어 보였다.
“처음이 어려운 겁니다.”
“...뭐라고요?”
“무엇이든지, 처음이 어려운 거라 말했습니다. 제가 두 번은 못할 것 같습니까?”
“하.”
짧게 헛웃음을 터트린 아이린의 눈빛이 차가웠다. 손을 부드럽게 감쌌음에도 변하지 않는 시선에 살짝 놀랐다.
설마 정말 기분이 그리 좋지 않았던 것일까. 그런 생각에 살짝 물러나려는 찰나.
내 시야에 아주 가까워진 아이린의 얼굴이 보였다.
자연스럽게 목덜미를 잡히고, 당겨진 목이 그대로 앞을 향해 나아갔다.
쪽
순간 입술에 닿은 말캉한 감촉에 머리가 멍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코를 간질이는 장미향. 늘 아이린에게 나는 향이 어째서...이토록 진하게 나는 것일까.
“...아.”
무어라 말을 내뱉어야 하는데, 입에서 나온 소리란 내가 듣기에도 멍청해 보이는 소리였다.
입술에 닿은 감각이 생생했다. 이전처럼 혀를 섞지는 않았지만, 방금 그게 무엇인지는 분명히 알 수 있었다.
빙그레 웃은 아이린이 나를 쳐다보았다.
꽤 기분이 좋은 듯, 아까처럼 차가운 분위기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그녀가 입을 열었다.
“확실히, 두 번째는 쉽네요. 그렇죠?”
이번엔 제대로 당했다는 생각이 들어서, 이어지는 그녀의 말에도 그저 허탈하게 웃을 따름이었다.
그녀와의 관계에서 우위에 있다는 건, 아무래도 내 착각이었던 것이 아닐까.
방금 닿았던 그 부드러운 입술의 감촉을 떠올리며, 이내 붉게 달아오른 얼굴을 천천히 쓸어내렸다.
처음이든, 두 번째든.
이 감각에 익숙해지는 것은 꽤 오랜 시간이 걸릴 듯 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