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판 속 악녀의 호위기사가 되었다-74화 (74/181)

〈 74화 〉 별 하나에 그대 (6)

* * *

내가 무엇을 들었는지 파악하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수습해야 한다. 오로지 그 일념을 떠올리며 아이린을 바라보았다.

허나 그 촉촉한 눈동자와 마주치자 숨이 턱 하고 막히는 것만 같아서, 이내 시선을 겨우 돌린 채 입술을 달싹였다.

“이러시면 안 됩니다.”

“왜요?”

정말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듯, 순수하게 되묻는 목소리에 침음을 삼킨다.

흘러내린 머리카락이 땀에 살짝 젖어 반짝였다.

은은히 풍겨오는 과일향에 섞인 알코올향,

귓가를 간질이는 숨결에 내 얼굴이 금방이라도 터질 것처럼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움찔거리는 손에서 핏줄이 돋아나왔다.

그녀가 말한대로 해주는 것, 그리 어렵지는 않았다. 허나 그럴 수는 없지 않은가.

이런 식으로 ‘처음’을 맞이하고 싶지는 않았다.

내...실책이었다. 그 사실을 뼈저리게 통감하며,

내게 가까이 붙은 아이린의 어깨를 움켜쥔 채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어깨를 붙잡자 어쩐지 야릇한 숨결을 내게 불어오는 아이린이었지만, 눈을 질끈 감아 그 숨결을 모른 채했다.

“헤헤.”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던 그 순수한 웃음소리에 입꼬리가 씰룩였다.

아이린이 이렇게 웃을 수 있는 사람이었구나 싶었다.

늘 살짝 미소만 지었던, 진정으로 웃는 것은 내 손에 꼽을 만큼이었기에.

갑작스레 들려온 웃음소리에 심장 박동이 점차 빨라지기 시작했다.

어느새 내게 손을 내민 아이린이 내 뺨을 쓸어내렸다.

뺨을 쓰다듬는 손길이 부드러웠다. 평소엔 손에만 닿았던 그 보드라운 손길...참 조그맣다는 생각이 들었다.

“잘생겼다....진짜. 늘 생각하는 거지만, 어떻게 이렇게 잘생겼는지 모르겠어요.”

늘 생각하고 계셨구나. 어쩐지 부끄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스로도 알고 있었지만, 막상 아이린에게 그런 말을 들으니 부끄러움을 주체하기가 힘들어서,

이내 헛기침을 뱉은 채 가까스로 그녀에게서 몸을 떼어놓을 수 있었다.

태어나 인내해야할 때가 있다면 그것이 바로 오늘이리라.

‘술에 이렇게 약할 줄은 몰랐는데.’

소설에 간간히 그녀가 와인잔을 들고 있었다는 묘사가 나왔기에,

술에 대해서는 약간의 면역이 있다고 생각했다. 허나 과일주 한 잔에 취할 정도라니.

잠시 입맛을 다셨다가, 그대로 아이린의 어깨를 잡은 채 자리에서 일으켰다.

이대로 이곳에 있을 생각은 없었다. 그렇다고 공작저로 돌아갈 생각도 없었고.

만약 취한 아이린을 그대로 데려갔다간...아마도 내가 죽지 않을까.

그녀가 조금 제정신을 차렸을 때까진 자신이 함께 있는 것이 좋을 듯 했다.

게다가 아이린이 취한 모습을 보는 건 아마 이번이 마지막일 테니, 조금은 오래토록 보고 싶기도 했다.

“가시죠 아가씨. 머리를 식히실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어깨 잡지 마요.”

그렇게 말한 아이린은, 자신의 어깨에 놓인 내 손을 떼어내며 차갑게 대꾸했다.

갑자기 변한 태도에 당황하길 잠시, 이내 내게 슥 다가온 그녀가 자연스럽게 팔짱을 끼며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기 시작했다.

“이제 좀 낫네요. 이게 더 좋잖아요. 그렇지 않나요?”

“아...예. 그렇긴 합니다...”

팔짱은 이번이 처음이었는데. 순식간에 순결을 빼앗긴 기분에 잠시 눈을 가늘게 떴다가,

이윽고 한숨을 내뱉으며 내 팔을 붙잡은 아이린을 빤히 쳐다보았다.

도대체 어떻게 대처해야할지 감이 잡히질 않았다.

내가 하나를 생각하면 이미 그것보다 두 걸음은 앞에 있는 그녀의 행동이란, 내가 휘둘리기에 충분했으니까.

...허나 이런 것도 나쁘진 않았기에,

아이린의 팔짱이 빠지지 않도록 어색한 발걸음을 내딛기 시작했다.

“그래서, 키스는 언제 해줄 건가요?”

이건, 못 들은 것으로 하는 게 나을 터였다.

#

깍지를 낀 손이 허공에서 부유했다.

시계추가 움직이듯 규칙적으로 흔들리는 손, 무엇이 그리 신이 난 건지,

팔짱을 낀 손을 풀은 채 그리 걷는 그녀의 발걸음에서 리듬감마저 느껴질 정도였다.

나쁘지는 않았다. 가끔은 그녀가 이렇게 행동하면 어떨까 상상하곤 했는데, 생각보다 훨씬 잘 어울리지 않는가.

‘평소에 이런 걸 하고 싶었던 걸까.’

그녀가 정신을 차린 뒤에 이렇게 행동할 리가 없으니,

어쩌면 내가 먼저 이렇게 해주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고 손을 이렇게 붕붕 휘두를 생각까진 없었고,

그냥...팔짱을 끼는 정도야 얼마든지 해줄 수 있었으니까.

“에반.”

상념을 깬 것은 아이린의 목소리였다.

무언가가 불만인 듯, 살짝 퉁명스러운 목소리가 들려 고개를 돌리자 아이린이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나한테 집중해줘요. 오늘은...둘만 있는 날이잖아요.”

그 말에 헛웃음을 흘린다. 그리 치고 들어오면, 듣는 사람 입장에서는 감정을 주체하기가 꽤나 힘들지 않은가.

깍지를 낀 손을 꽉 쥔 채로,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허공을 바라보았다.

술기운은 용기를 불러일으킨다고, 그걸 핑계로 솔직하게 속마음을 털어놓으려 했건만.

막상 솔직해진 것은 그녀라 괜스레 미묘한 감정이 피어올랐다.

이것이 그녀가 평소 생각하고 있던 속마음인 것일까.

취중진담이란 걸 전부 믿지는 않았으나, 적어도 지금 그녀가 거짓을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진 않았다.

조금은 섭섭한 건지, 어깨를 살짝 늘어트린 모습에 옅게 미소 지으며 입을 열었다.

“항상 보고 있습니다. 말하지 않았습니까.”

툭툭, 두 눈을 두드리며 조용히 읊조린다.

“아가씨만 담고 있다고, 자주 말했던 것 같은데요.”

“...어, 음. 그래요.”

붉게 물든 뺨을 숨기고자 고개를 숙인 아이린의 모습에 웃는다.

참으로 귀여운 분이었다. 내가 모시는 아가씨는.

스타우트가 시작되면, 거리에 돌아다니는 사람은 현저하게 줄어든다.

그 때문일까, 텅 빈 거리에는 이제 지나치는 사람조차 찾기 힘들어 주변을 공허함을 메우고 있었다.

사람들이 시끄럽게 떠드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불어오는 바람소리,

그 바람이 나뭇잎을 긁어 스치는 소리. 풀벌레 우는 소리, 맺힌 물방울이 땅에 떨어지는 소리.

세상은 고요를 허락하지 않았다. 설령 그 모든 소리가 사라진다한들,

심장이 뛰는 소리가 남아 어색함을 남길 터였다. 작게 숨을 들이쉬었다.

찬연하게 반짝이는 별 아래에서, 이 순간을 만끽하기 위해 그렇게 여운에 잠긴다.

“별 좋아해요?”

그 와중에 갑작스레 들려온 목소리에 고개를 돌린다.

그 자리에 멍하니 멈춰 서서, 하늘을 빤히 바라보는 아이린이 내게 물었다.

별을 좋아하냐고 묻는다면, 글쎄. 솔직히 말해 별 자체는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허나 별과 같은 존재가 되라고 한다면 거절하지 않을까.

“좋아하진 않습니다.”

하늘을 밝히는 별은 아름다웠다. 그 사실을 부정할 만큼 감정이 모자라지는 않았으나,

그 별을 볼 때면 문득 떠오르는 생각에 눈살이 찌푸려질 따름이었다.

이토록 하늘을 메우는 별이었지만, 막상 그 별들은 추정하기도 힘든 거리 사이에 떨어져 있지 않던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새까만 어둠 속에서,

서로를 분간할 근거라곤 쉽사리 포착하기도 힘든 희미한 빛뿐이라니.

“외로워 보이지 않습니까.”

“특이하네요.”

그녀의 말에 그저 어깨를 한 번 으쓱여 보였다. 사람마다 감상은 전부 다르지 않겠는가.

그나저나 이젠 조금 정신이 돌아온 것일까, 하는 생각에 그녀를 쳐다봤지만.

뺨에 떠오른 옅은 홍조는 그녀에게 남은 취기를 보여주고 있었다.

하기야, 고작해야 몇 분 만에 취기가 전부 날아갈까.

저벅, 저벅.

손을 맞잡은 채 한참을 걸으면서도, 그녀의 시선은 여전히 밤하늘을 향했다.

혹시 무언가 특별한 것이라도 있는 걸까.

허나 보이는 것이라곤 반달과 함께 반짝이는 별무리뿐, 무엇 하나 특별할 것이 없는 평범한 밤하늘이었다.

“나는 별이 좋아요.”

“그러십니까?”

“정확히는, 좋아했었죠.”

꽤나 후련한 표정으로 미소를 지은 그녀는,

공원의 입구에 들어서자 내게 달라붙으며 다시 팔짱을 꼈다.

조금은 지친 것일까. 그녀의 얼굴에서 살짝 피로감이 느껴진 터라, 나는 큰 의자를 하나 찾아 그곳에 자리를 잡았다.

“...힘드네요. 헤헤.”

“그러실 만 합니다. 이리 오래 돌아다니신 것은 꽤 오랜만이지 않습니까.”

히끅.

잠시 딸꾹질을 한 아이린은, 대답을 하기 보다는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댄 채 조용히 숨을 내뱉었다.

가늘게, 그리고 조용히 내뱉어진 숨이 허공에 흩어진다.

어깨에 닿은 머리카락 탓일까, 뺨이 간지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용했다. 서로의 숨소리가 간간이 들려오는,

바람에 나뭇잎 사박거리는 소리만이 들려오는 이 와중에. 아이린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술이란 거, 생각보다 별로네요. 어지럽고...몽롱해서...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잘 모르겠어요.”

“그런 게 좋은 것 아니겠습니까. 때로는 술을 핑계로, 솔직하게 마음을 털어놓을 수도 있으니까요.”

“...꼭 많이 마셔본 사람처럼 얘기하네요. 처음이라면서.”

방금은 역시 조금 그랬나, 머쓱하게 웃어 보이자.

내 눈을 바라본 아이린이 피식 웃으며 다시 하늘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무얼 그리 볼 것이 있다고 보는 건지, 하여 묻자 가만히 있던 아이린이 별 하나를 가리키며 입술을 떼었다.

“예쁘지 않나요? 이렇게 어두운 데도, 저렇게 반짝이잖아요.”

“예쁘긴 합니다.”

내가 별을 보며 느끼는 감상과는 달리, 아이린은 그 별을 멍하니 바라볼 따름이었다.

꼭 무언가에 반한 사람처럼, 그런 모습에 질투를 느낀다면 우스운 것일까.

허나 차오르는 감정은 참으로 솔직해서, 결국 나는 그녀를 향해 물을 수밖에 없었다.

“별을 참 좋아하시나 봅니다.”

“별처럼 되고 싶었으니까요.”

그 말에 잠시 입을 다문다. 별처럼 되고 싶었다는 말을 이해하는 것엔 꽤나 오랜 시간이 필요했으니까.

허나 그럴 거라 생각했는지, 나를 힐끔 쳐다본 아이린이 옅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나는 소가주라는 자리가 참 싫었어요. 아니, 지금도 싫어하는 건 마찬가지일까요.”

잠시 그녀를 바라본다. 지금은, 내가 입을 열 때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저 묵묵히, 그녀가 하는 얘기를 들어주어야 할 시간이 아닐까.

어깨에 기댄 그녀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쓸어내린다.

아이린이 조금 더 편히 얘기할 수 있도록, 어깨를 살짝 낮춘 채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어렸을 때는, 외로웠던 것 같아요. 아버지도 그렇고, 매일 같이 내게 바라는 게 참 많았어요. 나는 그것들 중에 하나 하는 것조차 벅찬데, 하지 못하면 나를 구박하니까. 나한테 왜 그러는지 이해도 못하겠고, 그냥 혼자 울었던 적도 많아요.”

“......”

“다락방에 혼자 몸을 웅크리고 있을 때 고개를 들면, 자그마한 틈새가 하나 보였어요. 그 사이로 보였던 게 뭔 줄 알아요?”

“별...아닙니까.”

그리 대꾸하자, 고개를 한 차례 끄덕인 아이린이 크게 숨을 들이 쉬었다.

“맞아요, 별이었어요. 그 틈새에서도 그 빛이 참 잘도 보여서...항상 몸을 웅크린 채 그 빛을 빤히 쳐다봤죠. 부럽더라고요. 그 별이. 나는 이렇게 어두운 곳에서 있는데, 별은 홀로 빛낼 수 있잖아요. 그것도 옆에서 다른 별이 함께 하니까, 별은 외롭지 않겠구나. 그렇게 생각했어요.”

그 말에 나는 이렇다 할 대답을 내뱉지 못했다.

그녀의 심정을 조금이나마 공감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단칸방에 홀로 있을 때면. 나도 그녀처럼 하늘을 멍하니 바라보지 않았던가.

허나 같은 풍경을 보며 느낀 것은 서로 다른 감상이라,

아무 말 없이 그녀의 어깨를 잡은 채 하늘을 바라보았다.

이윽고, 아이린의 손이 하늘을 가리켰다.

“별 하나에 사람 하나를 담아요. 저기엔 로페나를, 저기엔 크리스 경을. 또 저 별엔 리제를. 그리고 남은 별 하나를 나라고 생각하면...신기하게도, 별로 외롭지가 않았어요.”

시선이 닿는다.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일렁이는 푸른 눈동자를 마주한다.

한껏 별을 담은 눈동자가 반짝였다. 동시에 담긴 것은 슬픔이었고, 옅어진 외로움이었다.

동경, 이제는 잃어버린 동경을 떠올리는 그녀가 천천히 입꼬리를 끌어 당겼다.

별을 좋아했다고 말했다.

그렇다는 건, 이제는 외로움을 느끼지 않는다는 말인 것일까.

묻고 싶었으나, 구태여 묻지 않았다. 그녀가 스스로 말할 때까지.

그렇게 어깨를 빌려준 채 입을 다물었을 뿐이었다.

“유치하죠? 다 커서도 그랬다는 게.”

“...그렇지 않습니다.”

그녀보다도 훨씬 나이를 먹고도 비슷한 상상을 했던 것이 나였다.

어찌 유치하다고 생각하겠는가. 어깨를 끌어안은 손을 떼어서, 다시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내 무릎 위에 놓인 아이린의 손은 따스했다. 술에 취한 탓일까,

묘하게 달뜬 숨 또한 뜨거웠기에. 나는 애써 그 열기를 무시한 채 허공을 바라보았다.

“근데, 이제는 별을 잘 보지 않게 되네요."

“어째서입니까?”

“더 이상 외롭지가 않거든요. 나를 노려보던 시녀도, 내게 완벽을 기대하던 사람들도...이젠 없으니까요.”

하늘을 향해 손을 뻗은 그녀가 이내 푸흐,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무엇이 그리 우스운지, 한참을 그렇게 웃던 아이린이 손을 내리며 조용히 입술을 달싹였다.

“별이 되어서, 수많은 사람들이 나를 봐주길 원했어요. 나를 아껴주길, 보듬어주길, 사랑해주기를. 그러기를 바랐는데. 이제는 그게 다 무슨 소용인가 싶네요.”

“그러십니까.”

“더 이상 스스로 반짝이지 않아도 좋아요. 별이 되고 싶다는 생각은 이제 하지 않아요. 내게 온 한 사람 때문에, 어느 순간부터 별을 보는 걸 잊게 되었어요.”

어깨에 머리를 두었던 아이린이 일어나서, 천천히 내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어깨를 감싸고, 또 남은 손으로 가슴팍을 건드리며. 아주 가까운 거리에 다시 숨결이 닿는다.

옅어진 과일향이었지만, 마치 미약처럼 전해져오는 열기에 심장이 박동했다.

쿵, 쿵. 열기가 피어오른다. 아직 여름이 오지 않았건만, 이 주변을 감싼 열기는 한여름보다도 뜨거웠다.

뜨겁고, 뜨거워서. 오로지 앞에 있는 상대에게 집중하기조차 버거운 열기였다.

“그게 누군지 알아요?”

그 가녀린 손가락이 가슴팍을 간질인다.

툭, 툭. 명치로부터 시작된 움직임이 가슴에 닿는다. 쇄골에 닿는다.

그리고 목에 닿고, 턱에 닿아 이내 입술까지.

이내 입술에 닿은 손가락이 떼어져서, 그제야 숨을 토해낸 채 그녀를 바라보았다.

“...에반이에요.”

알고 있었다. 어렴풋이, 그녀가 말하는 존재가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허나 그녀 스스로 대답해주길 원했기에, 일부러 입을 다문 채 답을 기다렸다.

그녀의 뒤로 별이 보였다. 참으로 찬란한 별이었다.

그러니 그녀가 저 별을 닮고 싶었다 얘기한 것이 아닐까.

허나 이 순간, 내 눈에 가장 반짝이는 것은 앞에 있는 여인이었다.

달빛이 흐르는 백발이 흘러 얼굴에 닿았다. 아무도 없는 이 공원, 흐르는 정적 속에서 심장 소리가 들려왔다.

두근, 서로 맞춘 것처럼 동시에 뛰는 심장 소리에 웃음을 흘렸다.

가로등 하나 없는 중세의 공원, 달빛만이 주변을 밝히는 이 어둠 속에서도 선명하게 보이는 것은 푸른 눈이었다.

눈이 마주친다. 붉게 물든 뺨이 보였다.

취한 것인지, 아니면 순전히 이 상황이 부끄러워 그런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이 분위기가 무엇을 의미하는 지 어찌 모르겠는가. 용기를 낼 시간이었다.

허나 그것이 말처럼 쉽지가 않아서, 움찔거리는 손을 들어 천천히...아이린의 머리카락을 쓸어내렸다.

“...이번엔 저번처럼 인내하지 못합니다.”

“알아요.”

단호하게 대답하는 그녀를 바라보며 옅게 미소 지었다.

거리가 가까워진다. 아주 조금, 조금만 더 움직이면 살결이 닿는 그 거리에서. 이번에 입을 연 것은 아이린이었다.

“아까 에반이 말했죠, 술을 핑계로 솔직하게 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다고.”

“...예.”

“나는 솔직하게 말했어요. 이제...에반 차례에요.”

솔직하게. 안타깝게도, 나는 말주변이 없는 편이었다.

그녀가 원하는 것처럼, 내 속마음을 말로 풀어나갈 만큼 말을 잘 하지 못했다.

다가온 아이린의 뺨을 부드럽게 어루만진다.

그녀의 긴장을 조금 풀어주고 싶은 마음에, 흐르듯이 움직인 손이 아이린의 귀를 스쳐지나갔다.

머리카락이 손에 닿았다. 그 새하얀 머리카락이 손을 간질여, 이내 그녀의 뒷덜미를 살짝 당겼다.

아주 가까운 거리였다. 조금만 움직이면 서로의 살결이 닿을 만큼이나 가까운 거리였건만.

당겨오는 그 순간이 영원처럼 느껴졌다.

시선이 맞닿는다. 뜨겁게 달아오른 뺨이 맞닿아, 이윽고 서로의 입술이 맞닿았다.

온기가 겹친다. 뒷덜미를 잡은 손이 내려가 그 가느다란 허리를 끌어안았다.

제 자리를 찾지 못했던 아이린의 손 또한, 이내 내 어깨를 부여잡은 채 움찔거렸다.

꿈처럼, 몽환처럼.

참 부드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색하게 닿은 입술에 아이린이 몸을 살짝 떨었다.

허나 놀라서 떨어지지 않도록, 허리를 감싸 안은 손에 힘을 더했다.

이 뜨거운 열기가 맴도는 공간 속에 어울리지 않는 훈풍이 불기 시작했다.

맞닿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지는, 이제는 끝나버린 봄의 온기.

살짝 벌어진 입술에서 혀가 맞닿았다. 이 순간 서로의 온기를 조금이라도 더 느끼고 싶다는 것처럼,

서로를 탐하는 그 욕망이 얽혔다. 차마 말하지 못한 속마음을 갈구하듯, 다음에는 그 마음을 듣겠다며 대답을 촉구한다.

능숙하지 않았다. 누구하나 경험해본 적 없던 것 이었기에, 자연스럽게 본능에 이끌려 움직일 뿐이었다.

이 다음은? 그런 것은 생각하지 않았다. 다만 서로에게 닿아있는 이 순간이 영원하기를 바랐다.

시간이 멈추기를, 이 다음에 찾아올 시련 따위는 무시한 채. 오로지 이 행복이 오래 이어지기를 바랐다.

별은 더 이상 반짝이지 않았다.

이 순간, 서로에게 닿아있는 이 순간에.

가장 반짝이는 것은 오로지 자신의 앞에 있는 이였으니까.

허전했던 가슴을 가득채우는 감정이란, 오로지 행복뿐이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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