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3화 〉 별 하나에 그대 (5)
* * *
해가 진다. 하늘을 밝히던 해가 지고,
동시에 축제를 알리는 폭죽이 터지기 시작하자 공작저엔 묘한 기운이 감돌기 시작했다.
전투를 준비하듯 비장한 표정을 지은 몇몇의 시녀들이 일사분란하게 어디론가 사라지고,
숨이 턱 막힐 만큼의 긴장감이 도사린다.
지금 즈음이면 어슬렁거리며 주변을 돌아다닐 로페나 또한 보이지 않았다.
“흠.”
예상이 아예 안 되는 건 아니었다. 계절제가 막 시작된 지금,
내가 이렇게 차려입은 이유가 계절제를 위해서 였으니말이다.
이 공작저의 시녀들이 바쁠 이유라 해봤자 한 가지 뿐이 아니던가.
혹여 긴장이 되어 나오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사실 떨리는 것은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오늘 계절제는 단순히 둘이서 나온다는 것에 의미를 두는 것이 아닌,
이 애매한 관계에서 한 발자국을 내딛기 위한 아주 중요한 행사였으니까.
‘스타우트.’
특히 마지막에 참가할 그 행사는...절대 놓쳐선 안 될 주요 행사였다.
다른 것들은 모두 포기하더라도 그것만큼은 참가해야 한다.
그 생각을 하며 목에 걸린 브로치를 매만지길 잠시, 이내 복도의 웅성거림이 점차 커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도 확연하게 들리는, 청명하게 울려 퍼지는 구두 소리.
고개를 든다. 그리고, 이어 마주치는 시선에 옅게 미소 지어 보였다.
“준비 다하셨습니까?”
“조금 오래 걸렸네요. 미안해요.”
그리 화려한 옷을 필요가 없다는 건 그녀도 알고 있었다.
축제에 참여하긴 했으나, 만약 무도회에 가는 것처럼 화려하게 입었다간 다른 이의 눈에 금방 띠게 될 테니까.
그래서 이런 오랜 기다림에 의문을 가졌건만,
그녀의 모습을 막상 보자 그런 의문이 단숨에 해소되는 기분이었다.
수수하고, 옷만 보자면 일반 평민들이 입을 법한 그런 옷이었다.
물론 공녀인 그녀가 입는 것인 만큼 옷감의 재질은 다른 옷에 비할 바가 되지 않았으나,
이 어둠 속에 섞인 그녀의 옷은 분명 수수하게 보이리라.
허나 그녀의 외모만큼은 그렇지가 않아서,
저도 모르게 얼굴을 붉힌 채 조심스럽게 눈가를 쓸어내렸다.
적어도 내가 여태까지 본 사람 중에서, 아이린 만큼 예쁜 사람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 사실에 속으로 감사하며, 조심스럽게 그녀를 향해 다가가기 시작했다.
나 또한 평소에 입던 옷과는 달리 평범하게 입었는데, 혹여 잘 어울릴까.
하여 묻자, 날 빤히 바라보던 아이린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했다.
“괜찮네요.”
“그렇습니까?”
잘 어울린다면 다행인데, 평소와는 묘하게 다른 그녀의 태도에 눈살이 작게 찌푸려졌다.
무언가...평소와 달리 조금 날카롭다고 해야 할까.
기분이 안 좋은 것 같진 않은데, 다른 시녀들처럼 비장해 보이는 그녀의 태도에 고개를 갸웃거릴 따름이었다.
그저 긴장을 한 것이리라. 그런 생각에 손을 내밀었지만.
아이린은 그런 손을 무시한 채 나를 휙 지나쳐 갔다.
‘도대체...’
갑작스레 변한 그녀의 태도에, 나는 그 자리에 멍하니 서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것이 전부였다.
#
그때 떠오른 게 그거죠. 그냥 눈 딱 감고, 자기가 먼저 저질러 버리자!
로페나의 말이 머릿속을 어지럽혀서, 도저히 에반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볼 수가 없었다.
차라리 그 자리에서 어떻게 저질렀는지 들었으면 조금 나으련만,
무얼 했길래 그 답답한 진도를 단 번에 나갈 수 있었던 것일까.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다른 영애들의 말에 조금 귀를 기울이는 것도 좋았으리라.
그저 생각 없는 이들이 하는 것이 연애 이야기인줄 알았건만,
막상 그 입장이 되어 보니 그 만큼 관심이 생기는 분야가 없었다.
손...잡았다. 끌어안는 것도 했으니 남은 것은 역시...입을 맞추는 것뿐이 아니던가.
하지만 막상 입을 맞춘다고 생각하니 부끄럽기 짝이 없었다.
입을 어떻게 맞댄단 말인가. 상상으로도 그런 것은 차마 해본 적이 없었다.
그렇다고 에반이 그런 것을 해줄 때까지 기다리기엔...너무 많은 시간이 흘렀다.
제게 향하는 에반의 마음이 연심이라는 걸 알고 있지만, 그 마음이 언제까지고 굳건할 지는 미지수였다.
‘여자가 너무 많아.’
자신 말고도, 그를 사랑해줄 여자는 이 세상에 널렸음을 잘 알았다.
특히나 무도회에 갈 때면 그를 노리던 여우가 한둘이던가.
일부러 경고하기 위해 편지까지 불태웠건만, 그럼에도 그에게 몰래 편지를 전하기 위해 수신인을 바꾸는 이들도 있었다.
그럴 리야 없겠지만, 에반이 만약 자신의 이런 태도에 질리기라도 한다면?
...절대로 그렇게 둘 수는 없었다. 고개를 살짝 돌리자 에반의 얼굴이 보였다.
오늘따라 달빛이 밝은 건지, 유독 하얗게 보이는 얼굴에 뺨에 열이 피어올랐다.
참 잘난 사람이었다. 성격도 그렇고, 특히나 외모에 대해서만큼은 흠잡을 곳이 없었다.
외모라, 그 생각을 하자 자연스레 시선이 닿는 곳이 입술이라서.
다급히 시선을 돌린 채 조용히 달뜬 숨을 내뱉었다.
잠시 눈을 감았다가, 천천히 뜨며 그의 얼굴이 아닌 다른 생각에 집중했다.
로페나가 제게 들려주었던 말을 곰곰이 생각하면서,
에반에게 이리저리 휘둘리는 자신이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 지가 가장 큰 고민이었다.
이대로 그에게 휘둘려야 하는가? 아니, 이번만큼은 자신이 주도권을 잡겠다 다짐하지 않았던가.
그때 시선에 들어온 것은 텅 빈 손이었다.
생각해보면, 늘 손을 잡아주는 것은 그가 먼저 내민 것이 전부이지 않던가.
고민은 길지 않았다. 조금 부끄럽더라도, 오늘만큼은 자신이 에반보다 빠르게 행동하리라.
툭,
자신 있게 뻗은 손 이었지만, 안타깝게도 에반의 손등에 겨우 닿았을 뿐이었다.
용기가 모자랐다. 혹시 그가 알아차리진 않았을까?
그런 생각에 그의 얼굴을 힐끔 바라보았다가, 다시 손을 뻗어 그의 손목을 건드렸다.
‘...잡아야 하는데.’
어쩐지 그게 잘 되지 않았다. 주변 사람들이 너무도 많은 탓일까.
꼭 자신이 하는 행동을 모두가 보고 있는 것만 같아 얼굴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심호흡을 내쉬며, 눈을 질끈 감은 채 다시 에반의 손을 향해 힘껏 손을 뻗었다.
잡았다. 그 생각에 저도 모르게 주먹을 치켜들 뻔 했다.
손을 완벽하게 맞잡은 그 순간에 느껴진 희열이란 꽤나 짜릿해서,
씰룩이는 입꼬리를 빈손으로 쓸어내리며 조용히 속으로 웃을 따름이었다.
사람은 시련을 거치며 성숙해진다고 했던가.
아마도 아이린 유리스라는 여인은 이번 일을 통해 크게 성장했을 터였다.
맞잡은 손을 살짝 흔들자, 그제야 자신을 향한 에반의 시선이 묘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꼭 동물을 보는 것만 같은, 고양이나 강아지 같이 작은 생물을 보는 듯 꽤나 흐뭇해 보이는 그 표정에 어쩐지 가슴이 쿡쿡 찔리는 듯 해서.
그의 시선을 마주한 채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왜 그렇게 보는 거죠...?”
“손을 잡아 달라 하셨으면 잡아드렸을 텐데요.”
“무, 무슨 소리를.”
에반이 눈치 채지 못하게 손을 잡지 않았던가.
모든 걸 알고 말하는 그의 태도에 잠시 당황했다가, 이대로 있다간 또 다시 그에게 휘둘리게 될까 덜컥 겁이 났다.
차라리 당당하게 말하면 조금 낫지 않을까. 잠시 고민하다가,
이윽고 그의 눈을 똑바로 마주한 채 입술을 달싹였다.
“손잡고 싶은 게...잘못인가요. 잡고 싶어서 잡았어요.”
이렇게 말하려고 한 것이 아닌데, 순간 낭패감이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허나 말을 고칠 시간은 제게 주어지지 않았다. 꽈악, 에반의 손이 자신의 손을 움켜쥐었다.
놓치지 않겠다는 듯 깍지까지 낀 탓에 당황했지만,
자신을 바라보며 웃는 그 얼굴에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고개만 푹 숙이는 것이 할 수 있는 전부였다.
피슈우
펑!
고개를 숙여도 폭죽의 빛은 바닥에까지 비쳤다.
밤하늘을 수놓는 노랗고, 붉은 빛의 세례들. 건국제때 자신이 보았던 폭죽의 빛은 녹색이었다.
에반은 그런 것을 본 적 없다고 제게 말했지만, 한동안 녹색의 폭죽을 보았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이제야 그 빛이 무엇인지 알 것 같은 느낌이 드는 이유는 무엇일까.
폭죽이 내는 빛에 반짝이는 에반의 눈 또한 어둠 속에 찬연하게 빛나고 있었다.
얼핏 보면 폭죽이라 착각할 만큼, 그토록 반짝이고 있었던 것이다.
어쩌면 그때 자신이 보았던 것은 에반이 아니었을까.
어쩌면 자신은 그때부터 에반을 지켜보고 있던 것이 아닐까.
괜스레 떠오른 과거의 기억은 건국제를 허망하게 날렸던 자신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저 홀로 수심에 잠겨 에반을 무시한 채 이곳저곳을 걷던,
그러다가 결국 마지막 폭죽을 제외하곤 무엇 하나 보지 못했던 4년 전.
“에반.”
이번에는 그렇게 시간을 허무하게 날리지 않으리라.
자신이 다짐한 것도 있었지만, 이번만큼은 그와 함께 축제를 즐기고 싶었다.
추억을 조금이나마 남기고 싶은 이 마음은 분명 욕심이었다.
그렇기에 맞잡은 손을 바라보며, 조용히 그 이름을 중얼거렸다.
“부르셨습니까?”
“아니요, 그냥.”
사실 축제랍시고 무언가에 참여하고 싶은 마음은 그리 크지 않았다.
축제의 행사야 전부 비슷하지 않던가. 그냥 이렇게 같이 있는 것에 의미를 둘 뿐,
행사 자체에 대해서는 이미 어떻게 이루어지는 지 전부 애기를 듣지 않았던가.
그저 지도를 보며 일정을 정하는 시간이 즐거웠다.
사소했지만, 그 시간이 소중했음은 결코 부정할 수 없으리라.
“혹시 하고 싶은 거 있어요?”
“글쎄요. 일단 저번에 몇 개 봐두었던 것을 보면 되지 않겠습니까.”
“하기 싫으면 그냥 걷는 것도 괜찮아요. 어차피 잠시 쉬러 나온 거잖아요.”
저벅저벅,
불규칙하게 이어지는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수많은 사람들이 이 주변을 지나가지만, 이렇게 둘이 있는 주변만은 고요하게 들리는 이유가 무엇일까.
호객 행위를 하는 상인의 목소리, 사람들 틈바구니에 섞여 울고 웃는 사람들,
취한 사람들이 저 홀로 성을 내는 소리. 그 모든 소리들이 섞여 이 커다란 장소에 제멋대로 뒤섞이고 있었다.
허나 그럼에도 선명하게 들려오는 것은, 서로의 심장 소리였기에. 얼굴이 붉어진다.
가슴으로부터 피어오른 열이 온 몸으로 퍼져나가는 듯 했다. 발걸음 소리가 교차한다.
이윽고 점차 그 간격이 빨라지고, 느려져서. 어느 순간부터는 마치 짜고 맞춘 것처럼 동시에 들려오기 시작했다.
하여 웃는다. 그런 사소한 것마저 즐거워서,
이 순간 가장 즐거운 것은 서로가 함께 있다는 그 사실 자체였다.
언젠가는 서로의 마음을 터놓고 얘기하는 날이 올까.
로만의 일을 잘 처리한다면, 그리하여 약혼이 깨지게 된다면.
자신은 그런 관계에서 자유로운 사람이 된다.
여태껏 서로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것은, 이 약혼이라는 굴레 때문이 아니던가.
만약 그때가 온다면, 자신은 그에게 무어라 말하며 마음을 밝혀야 할까.
생각만 하더라도 부끄러운 그 망상에, 이윽고 고개를 푹 숙인 채 한숨을 내쉬었다.
#
지도를 볼 때만 하더라도 이런저런 행사에 참여하기 위해 많이 얘기한 것 같았는데,
막상 돌아다니다 보니 참여한 것은 딱 한 가지뿐이었다.
그것도 이제야 막 줄이 끝나 참여하게 된 행사.
10분이면 그림을 그려준다는 화가가 있길래 찾아왔는데, 생각보다 그림을 잘 그리는 것 같아 한 번 참가해봤다.
카메라가 있었다면 사진을 찍었을 테지만, 안타깝게도 마법으로도 구현하지 못한 것이 카메라였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마법이 첨가된 물감은 몇 십 년이 지나더라도 변색되지 않고 보존된다는 점이겠지.
“연인이십니까?”
훅 치고 들어온 화가의 질문에 아이린의 어깨가 움찔거렸다.
파들거리며 떨리는 입꼬리가 꼭 웃는 것을 참는 것만 같아서, 나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아니요. 친구입니다.”
“에반.”
내게 향하는 시선이 따끔했다.
허나 일부러 그런 표정을 보려고 그런 것이니, 내가 빙그레 웃자 그녀가 불만스러운 듯 나를 한껏 쏘아보았다.
어차피 조금 뒤면 화를 풀 것이 뻔했다. 미안하다며 어깨를 살짝 끌어안자,
눈을 크게 뜬 아이린이 안절부절 못한 채 그 손을 보다 이내 고개를 푹 숙여보였다.
“...연인 맞는 것 같은데.”
눈살을 찌푸리던 화가가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자,
정면을 바라보던 아이린이 괜스레 내 옆구리를 쿡 하고 찔러왔다.
아무래도 내가 친구라 한 것이 맘에 들지 않았는지, 가늘게 뜨인 눈에 괜스레 웃음이 새어나왔다.
그럼 무어라 한단 말인가. 솔직히 말해 아직 연인 사이도 아닌데.
친구라 하면 그나마 잘 대답한 것이 아닐까. 어쩌면 다음에 올 때는...그 대답이 바뀔 수도 있으리라.
그렇게 의자에 앉아 정면을 바라본 채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붓을 휘두르던 화가가 씨익 웃으며 우리에게 캔버스를 건넸다.
“어떠십니까. 마음에 드십니까?”
보자마자 감탄이 새어나올 만큼, 정말 그림이 아닌 사진이란 생각이 들 만큼이나 정교한 그림이었다.
이런 그림을 10분만에 그리는 것이 정말 가능한 건지 의심이 들었다.
허나 그가 10분 동안 그림 그리는 것을 직접 보았으니, 그저 입을 벌린 채 멍하니 그림을 볼 뿐이었다.
옅게 미소 짓고 있는 우리의 모습이 그려진 그림.
자그마한 캔버스에 그려져 큰 액자에 걸기엔 무리가 있었지만, 책상 한 구석에 놓기에 충분한 크기였다.
하기야, 이런 그림을 크게 그리면 어디에 걸어두기도 애매하지 않을까.
그 자그마한 그림을 살피다가, 이내 행사장에서 빠져나오며 아이린에게 그림을 건네주었다.
“가지시죠, 저는 그림을 둘 곳이 없습니다.”
“...그럴게요.”
아무런 말없이 받는 그녀였지만, 아까 그림을 보던 눈빛을 보곤 그럴 거라 예상하고 있었다.
그림을 뚫어져라 보던 눈동자에 잠깐 어렸던 것은 분명 욕심이 아니던가.
종이 봉투에 포장된 그림을 넣고 돌아다니기를 잠시,
이윽고 내가 꼭 가고자 했던 행사가 열리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떠올렸다.
스타우트, 여름에 열리는 계절제에서 가장 중요한 행사이자 오늘 계절제에 참가한 이유이자 목적.
그렇게 아이린과 함께 스타우트가 열리는 주점으로 향하자,
이내 주점에 북적이는 사람들을 발견한 아이린이 눈살을 찌푸렸다.
사람이 꽤나 많긴 했다. 허나 이 주점에서 숨겨진 공간이라면,
이미 크리스 경에게 들어 알고 있었기에 그녀를 데려가 주점의 지하로 향했다.
“여긴...”
주점의 지하는 어둡지만 화려한 불빛이 주변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위층에 비해 현저히 적은 사람들, 그 몽환적인 분위기 속에서 홀로 잔을 닦고 있는 사람이 있었으니.
이윽고 그에게 다가가자 가늘게 눈을 뜬 바텐더가 우리를 바라보았다.
“주문하시겠습니까?”
“스타우트로 1잔”
“아니, 2잔 줘요.”
끼어든 아이린의 말에 바텐더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 또한 술에 관심이 생긴 것일까.
허나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무지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은 아이린은,
이윽고 한 구석에 있는 자리에 앉아 내게 이리로 오라며 손짓했다.
스타우트는 이 행사의 이름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과일주의 이름이기도 했다.
사과와 포도의 향을 합친 것 같은 맛이 나는 술이라, 이 공작령에서 꽤나 유명한 술이었다.
이윽고 자리에 앉자, 맞은편에 앉은 아이린이 나를 바라보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갑자기 술이라니, 설마 성인이라 얘기했던 게 이 얘기였나요?”
“네, 계절제에서 가장 중요한 행사가 바로 스타우트니까요.”
그 말에 무언가 불만스러운 듯 한숨을 내뱉은 아이린은, 나를 힐끔 쏘아보며 말을 이어갔다.
“술 좋아해요?”
“처음 마셔봅니다.”
거짓말은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에반 프리드가 되어 술을 마시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으니까.
혹여 아이린이 술을 마시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묻자,
그녀는 고개를 저은 채 자신의 앞에 놓인 잔을 골똘히 바라보았다.
술병을 가져온 바텐더가 다가와 잔을 채운다.
연한 녹색을 띄는 술이 잔에 가득 따라지고, 동시에 찰랑거리는 술이 주변에 과일향을 풍기기 시작했다.
“저 홀로 마셔도 괜찮습니다. 정말 마셔도 괜찮으신 겁니까?”
“고작해야 한 잔이에요. 설마 내가 취할 거라 생각하는 거예요?”
“...그런 건 아닙니다.”
고작해야 한 잔 가지고 취하겠는가.
술을 마주한 채 앉은 이 분위기가 나쁘지 않아서, 나는 순간 내 본분을 망각한 채 잔을 들어올렸다.
그래, 한 잔이었다. 목을 타고 느껴지는 뜨거움에 눈을 질끈 감았다.
술을 누군가가 차가운 불이라 하였던가.
비록 달을 담지는 않았으나, 이 몽환적인 분위기가 담긴 술은 몸을 달구기에 충분했다.
달콤 쌉싸름한 맛이 입 안에 감돌았다.
숙성된 과일의 향이 가득 퍼져서, 술을 마신다기 보다는 꼭 주스를 마시는 듯 했다.
취기는 돌지 않았다. 몸에 퍼진 마나가 취기마저 정화하여,
잠깐 감돌았던 뜨거움을 떠올린 채 멍하니 잔을 바라볼 따름이었다.
이래서야, 술을 마시는 것 같지도 않았다.
조금 아쉬웠지만, 그래도 이 분위기만큼은 꽤나 만족스러웠다.
술기운은 용기를 불러일으킨다. 비록 취하지는 않더라도,
술기운을 핑계 삼아 서로의 속마음을 얘기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흐으.”
앞에서 들려오는 야릇한 소리만 아니었다면,
그런 생각을 하며 천천히 분위기에 젖어가지 않았을까.
갑작스레 들려온 소리에 고개를 들자, 게슴츠레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아이린의 눈이 보였다.
특별히 변한 점은 없었다. 여전히 반짝이는 눈이었고,
이 어둠 속에서도 아이린의 눈동자는 푸른빛이 선명하게 감돌고 있었다.
다만, 붉게 물든 뺨이. 불규칙적으로 내뱉은 달뜬 숨이.
계속해서 내게 경고를 보내고 있었다.
아무래도 무언가가 잘못되었다고, 머릿속을 울려대는 경종에 심호흡을 내쉬었다.
한 잔, 고작 한 잔이었다. 그리 도수가 높은 술도 아니었건만, 그 술에 취했다고?
말도 안 되는 일이었기에, 설마하는 마음에 조심스럽게 아이린을 불렀다.
“아가씨, 갑자기 왜...”
“나 부르지 마세요.”
히끅
딸꾹질 소리가 울려 퍼진다. 그 소리에 침음을 삼킨다.
순간 눈앞이 새하얘지는 것은 내 착각일까.
잠을 움켜쥔 손이 펼쳐지고, 이윽고 나를 향해 손가락을 들어 올린 아이린이 입을 열었다.
“지금 기분 안 좋으니까.”
“...취하신 겁니까?”
“안 취했어요. 내가 히끅, 취한 것처럼 보여요?”
비아냥거리는 목소리에 딸꾹질 소리가 섞인다.
아무리 보아도 취한 사람이었다. 저게 연기라면, 아마도 그녀에게 적당한 상을 하나 수여해주는 것이 옳을 만큼.
낭패였다. 새하얘진 시야에 눈가를 천천히 쓸어내리며,
그녀를 일으키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무래도 돌아가셔야 할 것 같습니다. 공원에서 잠시 바람 좀 쐬시다가 돌아가시는...”
훅,
어느 순간 목덜미가 잡혀 앞으로 당겨진다.
조금도 예상하지 못했기에, 그녀의 우악스런 손길에 순식간에 그녀의 얼굴 코앞까지 몸이 움직였다.
숨결이 닿았다. 과일향이 가득한, 스타우트 특유의 술 냄새가 얼굴에 퍼졌다.
조금만 움직이면 입술이 닿을 만큼이나 가까운 그 거리에서,
아이린은 서러운 표정을 지은 채 나를 향해 입을 열었다.
“왜, 왜 자꾸 내 기분을 안 좋게 만들어요?”
“......”
입술을 꾹 씹은 그녀가 한숨을 내뱉었다.
고개를 도리도리 젓다가, 생각을 정리한 듯 나를 빤히 쳐다보며 말을 이어갔다.
“왜 그렇게 사람을 애태우게 만드냐고 묻잖아요.”
“...그런 적 없습니다.”
“그러면.”
툭, 당긴 목덜미를 건드린 아이린이 입술을 핥았다.
심장이 두근거려서, 이내 미칠 듯이 뛰기 시작했다. 당황스러웠다.
아이린이 이렇게 내게 행동한 적은 처음이었기에, 도무지 그녀에게 무어라 말을 해야 할 지 알 수가 없었다.
순간 정신이 몽롱해져서, 이 보랏빛 조명에 그대로 파묻힐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몽롱하고, 우주를 유영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그 때.
귓가에 들려온 소리는 내 정신을 확 들게 하기에 충분했다.
“키스해주던가요.”
내가 지금...뭘 들은 걸까.
조금도 정신 차릴 틈을 주지 않는 그 말의 향연 속에서, 아이린은 여유롭게 웃어 보이고 있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