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판 속 악녀의 호위기사가 되었다-70화 (70/181)

〈 70화 〉 별 하나에 그대(2)

* * *

용언, 꽤나 오래 전에 사라졌던 용들이 사용했다던 하나의 언어.

원작에서는 오직 원작 여주인 스칼렛만이 사용했던 것들 중 하나였다.

그것을 테오라드 경이 먼저 얘기하는 것에 조금 놀라긴 했지만,

원작에서도 그가 알려주었던 것이니 어쩌면 당연하지 않을까.

용언은 마법이 아니다. 오로지 그것을 이해하고 해석하는 이만이 다룰 수 있는 하나의 ‘의지’.

시전자가 원한다면 그 원하는 것을 시행해주는 것이었다.

내가 검을 원한다면 검을, 더 빠른 속도를 원한다면 쾌속을,

물론 스칼렛은 용언을 마법의 형태로 사용했지만...

마법의 이해도가 적은 나로서는 그저 내 움직임을 보조하는 용도로 사용하는 것이 전부일 터였다.

“...그런데 용언을 제가 사용할 수 있는 겁니까?”

스칼렛이 용언을 사용할 수 있었던 것은 주인공인 것도 있지만,

조금 더 파고들면 그녀의 몸이 용언을 사용할 때 나타나는 반동을 훌륭하게 견뎌냈기 때문이었다.

타고난 마력의 고리, 남들과는 차원이 다른. 오로지 이 세상에서 스칼렛이라는 여자만이 지니고 있던 마나의 회로.

마법사들과 기사가 심장에 마나를 품는 것과는 달리 온 몸으로 마나와 감응할 수 있는 그녀였기에,

오직 스칼렛만이 용언을 다룰 수 있었다.

허나 내게 용언이라니, 사용 가능 여부조차 불투명 하다는 생각에 묻자.

나를 바라본 테오라드 경이 눈을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자네 눈동자가 무슨 색을 띄고 있는지 알고 있나? 평소에 말고, 싸울 때 말이야.”

“...글쎄요. 거울을 잘 보지는 않는 편이라.”

“금빛을 띄고 있네. 자네가 싸움에 진지하게 임하기 시작하면, 눈의 색이 바뀌지.”

금빛이라는 말에 눈이 가늘게 뜨였다.

금색의 눈이라면, 오직 용들만이 그런 눈을 지니지 않던가.

황족이 붉은 색의 눈을, 유리스가 푸른 눈을 타고 나는 것처럼.

금안은 오로지 용들만이 타고나는 눈이었다. 헌데 내 눈동자가 금색이라니,

혹여 내가 지닌 혈통 때문에 그런 것일까 하고 생각해봤지만.

그렇다기엔 프리드라는 가문의 눈 색깔이 금안이라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었다.

“왜 저만 그런 겁니까? 제가 가진 피가 조금 더 진하기라도 한 겁니까? 프리드의 시조가 용이라는 얘기는 들었지만...그렇다면 왜 여태까지 아무도 금안을 보여준 적이 없는 겁니까?”

“그렇게 한꺼번에 많이 물어보면, 내가 답하기가 꽤나 곤란하지. 허나...하나를 확실하게 말할 수 있다면, 그저 자네가 특별한 것 뿐이네. 아무도 사용하지 못했다는 이 용언도, 자네라면 사용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

그 말을 듣자 무언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필이면 왜 나란 말인가.

이런 재능을 타고 난 것도, 이렇게 소설 속에 빙의한 것도.

이 시간대에 절멸이 나타난 것도. 전부...이상하게 한 시기에 겹치지 않는가.

마치 스칼렛이 나타나기 전부터 모든 상황이 준비되는 것처럼.

차라리 스칼렛이 나타난 뒤에 그런 일들이 벌어졌다면 의심을 거두겠지만,

괜스레 떠오르는 의심이 원작 여주인 스칼렛이라는 존재를 향했다.

“...뭐, 일단은 감사히 받겠습니다.”

“용언을 본다고 해서 바로 사용할 수 있는 건 아니야. 일단 자네가 지닌 그 힘에 익숙해지는 것이 우선이겠지. 보아하니, 익스퍼트 수준에서는 전부 다룰 수 없는 힘인 것 같더군.”

나 또한 그렇게 생각은 하고 있었다. 비록 용혈을 깨우친 건 좋았으나,

무언가 부족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순간 힘을 폭발적으로 이끌어낼 수 있지만 단지 그뿐,

사용한 뒤면 여지없이 몸이 뻐근해져 검을 휘두르기조차 버겁지 않던가.

반동, 아마도 그것을 제대로 극복하려면 역시 마스터에 오르는 것뿐이리라.

스칼렛에 대해서도 꽤 고민할 것이 많았지만,

일단 보류하기로 마음먹은 채 테오라드 경에게 고개를 숙여보였다.

단지 무아에 대해 실마리를 잡으려고 온 것인데, 예상치 못한 수확에 꽤 기분이 괜찮았다.

용언이라, 이걸 다룬다면. 어쩌면 로만을 공략할 때 꽤나 도움이 될 지도 모른다.

당장 사용하는 것에 대해서는 의문이 일지만 말이다.

대련을 두 번 하기엔 몸 상태가 그리 좋지 않았기에,그렇게 감사를 표한 뒤에 곧바로 공작저로 향했다.

이제는 자유로이 게이트를 넘나들 수 있으니 다행이지 않은가.

만약 그렇지 않았더라면 왕복에만 나흘이란 시간을 썼을 테니까.

테오라드 경이 준 종이에는 알아볼 수 없는 문자들이 한 가득이었다.

괴상하게 생긴, 아무리 보아도 이 세계의 글자와는 완벽하게 다른 글자가 표로 정리되어 있었지만.

아무래도 당장 해석하는 것엔 무리가 있지 않을까.

아제스트 경의 도움을 받는 것이 가장 좋으리라.

용과 관련된 것에 관심이 많은 그였으니, 아마도 이 종이를 보여준다면 흔쾌히 도와줄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게이트를 건너 공작저에 도착하자, 기다리고 있다는 듯 내게 달려온 로페나가 수건을 건네주었다.

이 즈음 되면 내 전속 시녀라고 해도 손색이 없지 않을까.

평소에 아이린보다 나와 더 오랜 시간을 보내는 터라, 이제는 로페나가 없는 것이 더 어색할 정도였다.

“오셨어요? 오늘은 일찍 오셨네요.”

“조금 지쳐서, 쉬고 싶기도 했고.”

“쉬고 싶다는 말을 기사님한테 듣게 될 줄은 정말 몰랐네요.”

그 말에 머리를 긁적이자, 한숨을 내뱉은 로페나가 내 옷가지를 받아들며 나를 쏘아보았다.

왜 요즘 들어 그렇게 무리를 하는 거냐면서,

조금 쉬는 것이 어떻냐는 그 말에 살짝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요즘 들어 조금 바쁘게 살긴 했지.

매일 같이 황궁에 들려 검을 휘두르는 데에 전부 시간을 쏟았으니,

로페나 입장에서는 그것이 조금 불만스러웠나 보다.

허나 어쩔 수 없지 않은가. 한 번 무언가를 하겠다고 마음먹은 이상,

그것을 이룰 때까지 정신없이 몰두 하는 버릇이 있었다.

허나 이제는 조금 지친 거 같아서, 당분간은 용언에 대해 생각하며 쉬는 것이 어떨까 고민하고 있었다.

이제 곧...축제이기도 했으니까.

여전히 날 쏘아보는 로페나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으며 들어가자, 그 손을 떼어낸 로페나가 입을 열었다.

“아, 그러고 보니 공작님이 기사님 찾으셨어요. 알고 계세요?”

“나를?”

언젠간 찾을 거라 생각하곤 있었는데, 그게 하필이면 오늘이란 말인가.

뻐근한 어깨를 잠시 매만지자, 그 모습을 본 로페나가 조심스레 입술을 달싹 거렸다.

“...나중에 어깨 좀 주물러드릴까요?”

“됐어. 마음만 고맙게 받을게.”

“저 마사지 잘해요. 아가씨도 칭찬해 주셨다구요. 크리스 경도요.”

“그래?”

조금 솔깃하긴 했지만, 그래봤자 로페나가 아니던가.

크리스 경은 로페나가 하는 일이라면 설령 접시를 깨먹어도 칭찬하리라...

이렇게 돌아다니는 로페나여도,

자기가 맡은 일이 나름 많았으니 괜히 부담을 주고 싶지도 않았고.

내가 괜찮다고 말하자, 입술을 삐죽인 로페나가 아쉬운 듯 어깨를 추욱 떨어트렸다.

그나저나 공작이 나를 찾은 이유가 무엇일까.

역시, 저주에 깨어난 것에 대해 감사인사일까.

원래라면 곧바로 아이린에게 돌아가려 했지만,

나를 찾았다는 공작의 상태를 살피는 것이 우선인 것 같아 3층을 향해 발걸음을 돌렸다.

여전히 고요한 복도였다.

허나 다른 점이 있다면 이제는 촛불이 아닌, 창문으로 새어나오는 빛이 주변을 밝히고 있단 점일까.

꽤나 달라진 모습을 천천히 바라보며 걷기를 잠시,

이제는 바닥에서 삐걱거리는 소리가 없어졌다는 점에 피식하고 웃음이 새어나왔다.

죽음이란 것을 겪으며 심정에 변화라도 생긴 것일까.

이전의 어둡고 음습했던 복도의 광경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다른 층처럼 빛으로 가득찬 공간에 공작의 심정을 조금이나마 비추어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똑똑­

“들어오게.”

문을 두드리자,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너머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목소리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건만, 이내 드러난 방의 모습에 내 두 눈이 크게 뜨였다.

어두운 방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오로지 그림자 속에서 형형히 빛나던 눈동자도,

완전히 가려진 창문에 어둠만이 가득했던 공간은 그야말로 기억속에 남았을 뿐이었다.

천장에 달린 샹들리에에서 새어나오는 빛이 바닥에 깔린 하얀 대리석에 부딪혀 사방을 빛냈다.

완전히 밝아진, 그리고 조금은 편안해진 표정의 공작을 보면서. 나는 힘겹게 입을 열 수 있었다.

“많이...달라지셨군요.”

“이런, 에반 경이 아니던가.”

정말 많이, 어쩌면 내가 알던 공작과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라 생각할 만큼이나.

어울리지 않는 미소를 지은 공작이 내 모습을 보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다가왔다.

마치 친우를 대하듯 살가운 태도에 머뭇거리자, 피식 웃은 그가 입을 열었다.

“내가 조금 달라지긴 했지? 아이린도 내게 그러더군, 혹여 저주의 여파가 남은 것은 아니냐고.”

“...저도 그런 생각이 들긴 합니다. 정말 괜찮으신 겁니까?”

“괜찮네. 자네가 생각하는 것보다도 훨씬.”

내게 고마운 마음에 그러는 것은 알고 있지만,

그렇다한들 이런 태도는 너무 많이 변한 것이 아닐까.

만약 정말 그가 스스로 이런 행동을 택한 거라면, 긍정적인 변화임은 부정할 수 없었다.

어쩐지 위엄이 넘치던 이전과는 달리 훨씬 부드럽고, 유순해진 것 같았으니까.

완전히 귀족이라는 단어에 어울리는, 두 눈에 공허만을 담고 있던 그 때와는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보일 정도였다.

내가 그를 빤히 바라보자, 껄껄거리며 웃던 공작이 입을 열었다.

“이렇게 자네를 부른 이유는, 당연하지만 자네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어서네. 정말 평생 동안 시간을 쏟아도 이루 말할 수 없는 은혜를 입었지. 정말로 고맙네, 에반 경.”

“...해야 할 일이었을 뿐입니다.”

그가 내게 진심을 표하는 것처럼, 해야 할 일이었다는 내 말도 한 치 거짓 없는 진실이었다.

공작이 죽지 않아야 아이린이 사니까. 그리고 모든 비극을 전부 끝냈을 때,

그 끝에 공작이 살아남아 있기를 원했으니까.

옅게 미소 지은 채 그리 말하자, 내 대답이 맘에 들은 것인지 한차례 고개를 끄덕인 그가 말을 이어갔다.

“죽음이란 것은 생각보다도 기분 나쁜 것이더군. 솔직히 말하자면 다시는 느끼고 싶지 않은 감각이었어.”

“그래도 이렇게 살아계시지 않습니까.”

“전부 자네 덕이지. 그래도...죽다 살아나니 생각이란 것이 조금 바뀌긴 하는 것 같네. 어쩌면, 내가 여태껏 해온 모든 것이 틀린 것은 아닐까. 그런 생각도 들고 말이야.”

정말 수많은 생각을 한 듯, 조금 복잡해 보이는 표정을 지은 공작이 옅게 한숨을 내뱉었다.

마른 손으로 얼굴을 문지르며, 이윽고 한차례 차를 홀짝인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내가 아이린에게 한 일들을 자네에게 모두 말해 주었던가.”

“들었습니다. 아가씨에게도, 그리고 각하께도.”

“용서 받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네. 죽기 전에 아이린에게...한 번이라도 아빠 소리를 듣고 싶다는 마음이 생겼어.”

그렇게 말한 공작은, 천천히 허공을 바라보며 눈을 감았다.

“저주에 걸린 뒤로, 많은 생각을 했네. 죽지는 않아 의식만이 또렷하게 남아있던 터라, 이런저런 생각을 많이 했지만. 가장 많이 하게 되는 생각은 역시 후회더군.”

“후회 말입니까.”

“그래, 후회. 아이린에게 했던 행동들이 과연 옳은 것일까. 내가 아이린에게 추구하라 했던 완벽들이, 내 딸에게 하는 행동으로 옳은 것일까. 틀린 것을 알면서도 강행했지만...아무래도 이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네.”

씁쓸한 듯, 공작의 표정은 어딘가 아련해 보일 따름이었다.

과연 내가 이전에 보았던 공작이 맞는가 싶을 정도로 달라진 모습에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그가 했다는 후회, 아이린에게 했던 행동들을 뉘우친 그가 앞으로 어떻게 달라질 것인가.

그 의문에 답하려는 것인지, 공작은 이내 나를 바라보며 쓰게 웃었다.

“한 사람의 아버지가 되고 싶네. 너무 늦었을지도 모르지만, 이제는 귀족인 가롯 유리스가 아니라 아이린에게 아빠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싶어. 염치없을 지도 모르지만, 내가 한 행동들을 전부...용서 받고 싶네.”

“용서 받기 힘들 거라고 생각합니다.”

“알고 있네. 그러니 내가 이리 한탄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아가씨와는 대화를 나누신 겁니까?”

내게 이럴 것이 아니라, 아이린에게 먼저 사과를 하는 것이 먼저가 아니겠는가.

그런 생각에 묻자, 고개를 끄덕인 공작이 뺨을 긁적였다. 아무래도 성과가 그리 좋지는 않았겠지.

허나 당연한 결과였다.

아이린이 공작이 추구한 완벽에 의해 받은 상처가 얼마인지는 아직 나조차 전부를 알 수 없었으니까.

애초에 공작이 이렇게 태도를 바꾼 것도, 그리 기껍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죽음의 문턱에서 돌아와 심경이 변한 것은 이해하지만,

이제 와 아버지 노릇을 하고 싶다는 그의 모습이 과연 아이린에게 달가울까?

허나 공작 또한 그 점에 대해서는 인지하고 있는지,

조금 딱딱하게 굳은 내 표정을 바라본 채 입을 열었다.

“알고 있네. 이제 와 사과한다 한들 평생 용서 받지 못할 짓을 한 것을 내 어찌 모르겠는가.”

“...아가씨께서는 생각보다 더 힘들어 하셨습니다. 얘기를 나눠보셨다면,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트라우마로 남은 어린 시절의 기억들, 아직도 마차에서의 아이린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녀에게 가롯 유리스라는 존재는, 어린 시절의 그 악몽을 떠올리게 하는 사람에 불과하지 않을까.

아버지라는...그런 역할을 수행하기엔 가롯 유리스는 여태껏 너무 잘못한 일이 많았다.

옹호해주고 싶지도 않았고, 응원해주고 싶지도 않았다.

그가 진정으로 아버지 노릇을 해주고 싶다면,

지금은 그저 아이린을 가만 두어야 하는 것이 옳지 않을까.

시간이 흘러 그가 한 짓을 비로소 아이린이 용서할 수 있을 때,

그런 것이 아니라면. 솔직히 그의 말이 탐탁치않게 느껴지는 것이 사실이었다.

“당장 아이린에게 무언가를 하려할 생각은 없네. 부담스럽게 용서를 구할 생각도...이제 와 아버지라고 불러 달라 할 생각도 없지.”

“그러면, 각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지켜보고 싶네. 내 딸아이가 행복을 추구하는 모습을, 그리고 그걸 방해하는 이들을. 내 직접 막아주고 싶기도 하지.”

지켜보고 싶다는 것까지는 막을 생각이 없었기에 고개를 끄덕이자,

흐뭇하게 웃은 그가 물끄러미 나를 쳐다보았다.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듯, 빤히 바라보는 그의 눈과 마주치자 이내 그가 입을 열었다.

“아이린이 자네 얘기를 참 많이 하더군.”

“아가씨가 말입니까?”

“정작 나의 안부에 대해 묻기보다는...자네가 고생했다는 얘기를 더 많이 들었네. 자네가 크게 다쳐서 돌아왔다는 것도 들었고, 나를 위해 흑마법사 토벌에 단신으로 뛰어든 것 또한 들었지.”

아이린이 어떻게 얘기를 전했길래 저런 표정을 짓는 것일까.

어쩌면 음흉해보일 정도의 미소를 짓는 그를 불안하게 쳐다보자, 입꼬리를 씰룩인 공작이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내가 이전에 자네에게 부탁한 말을 기억하는가?”

“아가씨를 잘 부탁한다는 말씀 말입니까.”

“그래, 그런데...자네는 그걸 조금 다른 뜻으로 이해한 것 같더군.”

“...무슨 말씀이신지 잘 모르겠습니다.”

짐짓 아무것도 모르는 척 그리 말하자,

헛기침을 내뱉은 그가 턱을 쓰다듬으며 게슴츠레 뜬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정말 모르겠냐며, 자신이 이렇게 얘기한 이유를 모르겠냐는 그 눈동자에 끝내 고개를 돌려 그의 시선을 피했다.

“내 아이린의 여러 모습을 봐왔지만, 그렇게 들뜬 모습은 처음 보았네.업무와 관련된 얘기를 할 때는 내가 가르쳤던 것처럼 한 없이 차분한 아이였는데. 유독 자네 애기를 할 때면 그렇게 신이 나 얘기를 하더군.”

“그러십니까.”

“계절제에 간다지. 단 둘이서.”

그 말엔 결국 몸을 흠칫 떨 수밖에 없었다. 그런 얘기까지 한 걸까.

하기야, 그녀가 나가기 위해서는 다시 공작에게 가주의 인장을 맡겨야 하니 당연한 것이겠지만.

막상 그 이야기가 공작의 입에서 나오자 당황스럽기 그지없었다.

무어라 답해야 할까, 혹시 노여워하는 것은 아닐지 고민하는 그 찰나에.

“자네라서 다행이네.”

흐뭇하게 웃은 공작의 말에 저도 모르게 그를 빤히 쳐다보고 말았다.

화를 내지도 않은 채, 그저 다행이라는 말만 되풀이하는 그는 이내 텅 빈 찻잔을 바라보며 말을 이어갔다.

“지금은 자네에게 각하라고 불리지만...”

툭, 탁자를 가볍게 두드린 그가 이윽고 내뱉은 말에, 나는 그저 어색하게 웃어 보일 따름이었다.

“다음에는 장인어른 소리를 들을지도 모르겠군.”

"아...예..."

저도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라는 말을 구태여 덧붙일 필요는 없지 않을까.

장인어른이라, 상상만 해도 어색한 그 단어를 떠올리며, 조용히 차를 들이마셨다.

허브의 향긋한 향이 입에 감돌았지만, 어쩐지 입맛이 꽤나 쓰게 느껴졌다.

갑자기 공작과 함께한 이 자리가 불편하게 느껴지는 이유가 무엇일까.

"앞으로도 내 딸아이를 잘 부탁하네."

덧붙여지는 그의 말까지.

갑작스레 온 몸을 휘감는 불편함에 눈살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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