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9화 〉 별 하나에 그대(1)
* * *
의외로 황태자는 우리의 오랜 부재에 대해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손을 잡은 채 돌아오는 우리 모습을 바라보며 흐뭇하게 웃었을 뿐,
아이린이 피곤해하여 돌아가야 할 것 같다며 얘기하자 내게 슬쩍 다가온 황태자가 입을 열었다.
“음, 꽤 오래 걸렸군 그래.”
“조금 얘기를 나누다 왔습니다. 혹여 제가 실례를 저지른 것은 아닐지...”
“으음, 아니야. 그것보다도 궁금한 게 있는데. 얘기만 하다가 온 건가?”
“...네?”
눈살을 찌푸리며 되묻자, 이내 피식 웃은 황태자가 손을 내저으며 고개를 저어보였다.
방금의 질문은 잊으라는 듯, 살짝 아쉬운 기색을 내비친 그가 우리에게 종이 한 장을 건네주었다.
“돌아오자마자 다시 공작령으로 갈 거라 생각했지. 오늘 했던 얘기는...뭐, 잠시 잊고 살아도 좋을 걸세. 나도 조금 성급했던 감이 없지 않으니.”
“배려 감사합니다.”
“배려라니, 고작 이 정도로 감사 인사를 받을 만큼 염치가 없지는 않네.”
그렇게 말한 황태자는, 내 옆에 있던 아이린을 향해 작게 고개를 숙이며 다시 입을 열었다.
“그대에게도 미안하다고 생각하고 있네. 피곤해보이니, 이제 그만 돌아가봐도 좋아.”
“...감사합니다 전하. 에반젤리움에 광영이 일기를.”
“유리스에도 광영이 일기를 바라지.”
그렇게 간단한 인사를 나눈 뒤 황궁에서 빠져나온 뒤, 나는 여전히 내 손을 잡고 있는 아이린을 빤히 바라보았다.
가볍게 잡고 있으려고 했는데, 어느새 깍지까지 껴진 손에 절로 웃음이 새어나왔다.
어째 점점...표현이 노골적이 되어가는 것 같은데. 황태자의 앞에서 숨길 생각도 안 하는 건가.
허나 그리 나쁘지만은 않아서, 그대로 손을 잡은 채 게이트까지 다다랐다.
분명 황실에서 거리가 꽤 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오늘따라 유독 짧게 느껴지는 이유가 무엇일까.
아이린 또한 그것을 느꼈는지, 게이트 앞에 멈춰선 채 잡고 있던 손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이제는 아까와 달리 피곤한 기색이 역력해 보이는 모습, 돌아가면 곧바로 쉬었으면 했지만.
그녀가 과연 내 말을 들어줄지는 잘 모르겠다. 그렇게 잡고 있던 손이 떨어진다.
손에 닿았던 체온이 흩어지고, 이내 찬 바람이 불어와 텅빈 손바닥 안을 차갑게 식히기 시작했다.
무어라 해야 할까. 평소보다 조금 더 허전하게 느껴지는 것은 과연 나의 착각일까.
잠시 텅 빈 손을 바라보다가, 이내 게이트 안으로 사라진 아이린을 따라 발걸음을 내딛었다.
속이 울렁거리는 감각에 눈을 감기를 잠시, 이내 뜨자 어두워진 공작령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아주 잠깐, 하룻동안 겪었던 일들이 머릿속을 빠르게 스쳐지나갔다.
그 모든 일들이 고작해야 몇 시간 동안 일어났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발코니에서 겪었던 일에 뺨을 조심스레 긁적이다가, 옅게 한숨을 내뱉은 채 앞으로 향했다.
"너무 섭섭해하진 마시죠, 나중에 다시 잡아드리겠습니다."
"...안 섭섭해요."
"정말 그러십니까?"
"......"
이제는, 다시 현실로 돌아올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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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흐른다. 아이린은 여전히 가주 대행으로써 공작령의 업무를 대신하고 있었고,
정신을 차린 공작은 몸의 회복에 힘쓰기 시작했다.
‘고맙다.’라는 단 한마디만 내게 전한 그였으나,
그의 눈에서 읽은 감정은 그보다 더한 것이었으니. 어쩌면 나중에 나를 따로 부르지 않을까.
처음 며칠동안 밤새가며 업무를 처리한 덕인지,
이제는 아이린이 여러 가신들의 도움을 받으며 여유롭게 휴식을 취할 수 있게 되었다.
처리되는 업무만큼 공작령 또한 안정을 되찾아 이제는 공작이 쓰러지기 전이라 보아도 무방할 정도였고.
거기에 내가 흑마법사를 토벌한 공적이 널리 알려져, 이제는 공작령 내에서 내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물론 평복을 입으면 얼굴까지 알아보진 못하겠지만...이제 몰래 활동할 일이 생긴다면 가명을 써야 하지 않을까.
이런 상황에서 내가 할 일이라곤 그리 많지 않았다. 당연하게도 아이린의 호위를 하는 것과, 내 경지의 상승.
로만가의 토벌이 시행되면, 당연하지만 로만 공작과도 검을 맞대어야 했다.
제국의 검, 제국 시조황제 알라르의 피를 이어받은 가문의 수장.
세간에 마스터라 알려져 있지는 않았지만,
그건 마나를 다루는 경지일 뿐 검을 다루는 실력은 이미 테오라드 경을 뛰어넘었다는 얘기마저 들릴 정도였다.
그런 그를 상대한다고 가정했을 때, 과연 나는 그의 상대가 될 수 있을 것인가.
‘...힘들지.’
용혈을 각성하고, 마스터의 문턱에 다다랐다.
허나, 그걸로 로만 공작을 상대하기엔 아마도 무리이리라.
베르뎅 산에서 만났던 쟌지르의 힘은 일반적인 트롤 로드가 지닌 힘의 궤를 뛰어넘은 것이었다.
흑마법이 가져다주는 힘의 증폭, 제물만 보충할 수 있다면 반영구적으로 이어갈 수 있는 그 증폭과 로만 공작이 합쳐졌을 때.
어쩌면 테오라드 경조차 그를 상대하기는 꽤나 힘들 터였다.
그리하여 떠올린 방법. 말로릭과 싸울 때 느꼈던 묘한 감각을 계속해서 유지할 수 있다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무아의 상태를 유지할 수 있다면.
오로지 일념만을 떠오를 수 있는 그 무아(無?)에서 조금 더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다면. 로만 공작이 지닌 검술을 파훼할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나하고 대련을 하고 싶다고?”
“그렇습니다.”
코 밑으로 길쭉하게 양옆으로 뻗어난 수염을 매만지는,
길쭉한 얼굴상과는 달리 우람한 체격을 지닌 테오라드 경이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늘 황태자와 대련하던 내가 직접 대련을 부탁했으니, 그의 입장으로썬 꽤나 의아하겠지.
하지만 부탁할 사람이 테오라드 경 한 사람뿐이었다.
현재 내게 가르침을 줄 사람, 그 중에 가장 믿을 수 있는 사람이 그였으니까.
내가 청하자, 잠시 나를 바라보던 테오라드 경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못해줄 것은 없는데, 보아하니 뭔가 목적이 있는 것 같군. 그게 뭔지 알려줄 수 있나?”
“저번에 본 드래곤과 싸우면서 느낀 감각이 있습니다. 그것에 익숙해지고 싶습니다.”
“아하. 대충 뭔지 알겠군. 그럼 조건 하나 걸어도 되겠나.”
“조건 말입니까?”
잠시 그 긴 콧수염을 잡아당긴 테오라드 경은, 이내 눈을 게슴츠레하게 뜬 채 말을 이어갔다.
“내 몸 어딘가를 베어 보게. 그럼 그대에게 도움이 되는 조언 하나를 해줄 지도 모르니까.”
“...베라는 말씀은.”
그 말에 살짝 힘이 탁 하고 풀리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아무리 그가 마스터라 한들, 이제는 마스터의 문턱에 닿은 것이 나였다.
그 또한 그에 대해서 알고 있을 텐데, 단지 몸 어딘가를 베어 보라니.
괜스레 피어오르는 호승심에 입을 다물자, 피식 웃은 테오라드 경이 자신의 검을 뽑으며 조용히 마나를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왜, 못하겠는가?”
“하.”
그 말이 도화선이 된다. 예전에, 막 피아니스트가 되었을 때가 떠올랐다.
신성이라는 칭호와 함께 내게 도전했던 수많은 사람들,
대결을 그리 좋아하진 않았으나 그들이 내 실력을 모욕한다면 나는 예외 없이 그들의 모든 도전을 받아주곤 했다.
물론 지금은 그 입장이 반대가 되어 내가 테오라드 경에게 도전하는 것이지만...
화르륵
“호오.”
적어도 그가 나를 무시한 것에 대해서는, 사과를 받아야 하지 않을까.
두근. 박동하는 심장에서 마나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용혈은 일단 배제한다.
지금 확인하고 싶은 것은, 오로지 내가 지닌 순수한 기사로써의 역량.
검과 마나, 이 두 요소와 무아(無?)였기에. 검을 든다. 마나의 반응한 검이 푸른 검신을 뽑아내었다.
촤르르
아마도 흑마법의 기운이 없어서일까, 이전과는 달리 푸른빛을 띠는 검신을 물끄러미 바라본 테오라드 경의 눈에 이채가 일었다.
무언가 익숙한 것을 본 듯, 잠시 턱을 쓰다듬은 그가 입을 열었다.
“그 검, 이름이 뭔가?”
“...이름은 모릅니다. 본 적 있으십니까?”
“아니, 그냥 어디선가 본 기억이 있는 것 같아서. 지금 일과는 상관없는 일이니, 신경 쓰지 않아도 될 거야.”
‘그나저나.’
테오라드 경이 뿜어내는 기세는 과연 예사롭지 않았다.
지금은 그 힘을 온전히 내뿜지 않고 있음에도 피부가 따끔할 정도의 마나.
이 공간을 가득 메운 그의 마나를 느끼며, 천천히 백염을 몸에 둘렀다.
마스터라는 경지에 다다른 기사는 그야말로 한계를 초월한 이라 할 수 있었다. 검을 든 자들이 꿈꾸는 ‘이상’.
세상이라는 것을 자신의 마나로 물들일 수 있는 경지가 바로 마스터가 아니던가.
검기를 뽑는다거나, 지닌 마나로 좁은 공간을 가득 메우는 것과는 비교가 안 되는 행위를 해내는 자들.
그래서일까, 그가 지닌 마나가 품은 밀도에 절로 감탄이 새어나왔다.
마나로 승부한다면 필히 패한다. 그렇기에, 그 어느 때보다도 무아의 감각을 느끼는 것이 중요했다.
타닥, 가볍게 땅을 밟은 채 앞으로 튀어나간다. 표현은 가볍게였으나,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파앙!
패도적인 속도에 바람이 찢겨나간다. 순식간에 이루어진 도약,
어느덧 시야의 코앞에 보이는 테오라드 경을 향해 곧바로 검을 휘둘렀다.
카앙, 검이 부딪힌다. 초반에 몰아쳐야 했다. 시간이 길어질수록,
소모되는 마나가 많아질수록 불리한 것은 내가 아니던가.
화르륵, 심장의 맥동이 빨라지며 날개처럼 뻗어나간 백염이 주변을 더욱 화려하게 불태우기 시작했다.
속전속결, 그것을 노리고 있는 만큼 행동에는 거침이 없었다.
무아(無?)에 다가가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것은, 이 순간 행동에 이어지는 생각을 지우는 것.
무엇을 벤다고 생각하며 베는 것이 아니었다.
손이 움직이는 대로,발이 뻗어지는 대로.
경로를 지운다. 투로를 떠올리지 않는다. 오로지 감각에 의존한 채, 그렇게 검을 휘두를 따름이었다.
“빠르군!”
테오라드 경이 감탄했으나, 이 속도에 만족할 생각은 없었다.
더 빨라질 수 있었고, 더욱 더 이 전투에 집중할 수 있었다. 그래, 전투.
대련이 아닌 전투라 생각하자 끓는 것만 같던 피가 차갑게 식기 시작했다.
그리고 상황을 직시한다. 내가, 밀리고 있지 않은가.
언뜻 보면 내가 우위를 점할 수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틀렸다.
‘...묵직해.’
반응할 수 없는 것은 아니었다. 눈으로 그 궤적을 쫓을 수 있을 만큼이나 느릿한 검.
허나 검과 검이 맞댈 때마다 엄청난 충격이 전해져 와 자연스레 힘을 소모할 수밖에 없었다.
검을 따라 공간이 휜다고 생각할 만큼이나, 그가 휘두르는 검의 궤적에 휘둘린다는 생각이 들 만큼이나 특이한 검이었다.
그러다가, 그의 검이 지닌 또 다른 이름을 떠올리며 눈살을 찌푸렸다.
둔검, 느릿하지만. 절대로 피해낼 수 없는 검이라 했던가.
그 느린 검속에서 연상할 수 없는 파괴력에 점차 체력을 소모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조금이라도 긴장이 느슨해진다면, 어느샌가 목을 위협하는 그 검에 조금도 긴장을 늦출 수가 없었다.
콰아앙! 한 번에 힘을 쏟아낸다는 느낌으로 검을 휘두른다.
당겨진 어깨에 힘을 주어, 허리를 돌린 채 그대로 다가오는 검을 튕겨내었다.
손목이 저릿했다. 두 번 다시는 아마 이런 방법을 쓸 수는 없으리라.
스으으 숨을 들이 마시며, 폐를 가득 채우는 그 숨을 느꼈다.
손가락을 쥐었다 펴며 검을 고쳐 쥐었다.
아무래도 마스터를 상대하며 조금 여유를 둔 것이 문제가 아닐까.
...조금은 진지하게. 천천히, 심장이 있는 가슴팍에 손을 얹었다.
심장에 있는 마나 중에, 조금은 다른 마나가 하나 있었다.
뜨거운 화염과 같은 원래의 마나와는 달리 조금 더 차갑고, 이질감이 느껴지는 마나.
이것이 에반 프리드라는 한 사람이 타고난 본질. 창공을 누비던, 저 태양과 가장 가까운 마나였다.
우웅
말로릭과 싸우기 전 느꼈던 고양감을 느낀다.
심장이 터질듯이 박동하는, 당장이라도 한계까지 모든 힘을 쥐어짠 것만 같은 희열과 쾌감.
검을 쥔 손등의 핏줄이 튀어나와 팔딱 거리는 맥박이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불꽃의 열기가 더욱 뜨거워진다. 훨씬 더 넓고, 맑아진 시야에 눈을 부릅뜬다.
“후우...”
폐를 가득 채운 숨을 내뱉자, 작은 불꽃이 담긴 숨결이 튀어나왔다.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이윽고 앞으로 튀어나갔다. 투쾅!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속도였다.
나와 마주한 테오라드 경의 눈이 커진다. 놀라움, 그리고 당황이 섞인 눈을 한 그가 입을 열었다.
“눈 색깔이 달라졌군?”
“...그렇습니까?”
눈 색깔이 달라진다는 건 알지 못했는데, 어쩐지 조금은 진지해진 것 같은 그의 표정을 지켜본 채.
그대로 검을 휘두른다. 검이 교차한다. 무쌍, 그리고 난무. 서로를 죽이려 하는 것이 아닌,
그저 베기 위한. 그저 막기 위한 검이었다.
살기는 담기지 않았다. 그렇기에 더욱 정순한 이 검의 교차 속에서, 조용히 기세를 더 끌어올렸다.
화르륵! 이윽고 불길이 테오라드 경의 마나를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나를 배려하여 익스퍼트 수준보다 조금 높은 밀도의 마나였으나,
용혈을 일깨운 마나에는 덧없이 사라질 따름이었다.
까앙! 둔탁한 쇳소리에 테오라드 경이 이를 악물었다.
이제 그의 둔검을 상대하는 것에 무리는 없었다. 비로소 비등해진 승부.
허나 만족할 수 없지 않은가. 용혈을 일깨웠음에도, 고작해야 비슷한 수준이라는 것에 눈살이 찌푸려졌다.
부우웅
그만이 지닌 특유의 둔검이 더욱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이대로라면, 또 다시 그에게 밀리는 형세가 되리라. 감각,
일깨워진 감각이 그의 검을 차츰 느끼고 있었다.
그 궤적을 바라보며, 이윽고 검과 맞닿음과 동시에 비튼다. 충격을 그렇게 상쇄한다.
그대로 맞대면 부서지는 것은 나였기에. 일련의 동작을 물이 흐르듯 이어나갔다.
타오르는 불꽃은 분명 그의 행동을 불편하게 만들고 있었다.
그 또한 이 이상의 힘을 이끌어내려면, 그 만의 ‘영역’을 보여주는 것 말고는 없지 않을까.
그렇기에, 이제는 생각을 지우기 시작한다. 말로릭의 날개를 베어내고자 했을 때,
그 부서지지 않던 것을 부수려 했을 때. 도무지 대적할 수 없는 것과 맞서 싸우는 그 상황에서 느꼈던 감각을 떠올린다.
지워진다.
내 존재가 차츰 사라져, 이윽고 검을 휘두르는 내 손이 흐릿하게 보였다.
기분 좋은 감각이었다. 마치 하루 종일 물속에서 헤엄치다 나온 것처럼,
흐물흐물해진 몸이 검을 느릿하게 휘두르고 있었다. 아니, 느리지 않았다.
다만 그렇게 느낄 뿐. 오로지 일념만이 남는 것이 무아였기에, 검 이외에 다른 것은 차츰 사라지기 시작했다.
검이 맞닿는 충격이, 검을 휘두르는 감각이.
호흡이, 심장의 박동이.
그리고 그 끝에는, 나라는 존재가 사라졌다.
소리가 들려왔다. 무언가가 끊임없이 부딪히는 소리가.
묵직하고, 둔탁한 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음에도,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단 하나 뿐이었다.
검. 휘두르고, 찌르고, 맞대고, 막고, 튕겨낸다.
이 동작만을 생각하며, 그렇게 무아(無?)속에 젖어들어 모든 것을 잊기 시작했다.
허나 그래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기에, 찰나 일깨워진 상념에 이를 악물었다.
입 안의 연한 살을 깨물며 고통을 일깨운다.
이대로 무아 속에 빠져들어서는 안됐다. 이 감각을 이용해서, 저 검을 똑바로 바라보아야만 했다.
검이 휘둘러지며 그리는 선을 본다. 수십, 수백 개의 선이 허공에 그려진다.
사선으로, 직선으로, 수직으로 그려지는 어지러운 검의 경로에서 한 가지 틈을 찾을 수 있다면.
그를 베어낼 수 있지 않을까. 자신이 검을 다루는 자와 싸워본 적이 얼마나 있던가?
잠시 떠올렸지만, 황태자를 제외하곤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경험이 부족했다. 이 한정된 검로에서 창의적인 무언가를 그려낼 경험이 부족했다.
그렇기에, 입꼬리가 비틀렸다. 더 나아갈 수 있다. 자신은 아직 더 성장할 여지가 남아있었다.
“...하하!”
찰나의 순간 수십 번의 공방이 이루어진다.
조금이라도 흐트러지면 누군가가 베이는 그 아슬아슬한 간극은 쉽사리 깨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기분이 좋은 듯 한껏 웃어 보인 테오라드 경을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그가 눈치 채지 못하도록 발로 땅을 밀어내었다. 아주 조금, 그와의 간격이 조금 더 좁아지는 선택.
이 공간을 그리는 검로를 깨부수기 위한 유일한 수였다. 전력을 담는다.
맥동하는 심장에서 피어오르는 마나를 담아, 일직선으로 향한 검이 섬광을 내뿜었다.
카가가각! 찰나보다도 더욱 빠른, 일순간 대기가 찢어져 터질 만큼이나 빠른 속도에도 그는 반응했다.
검이 쏘아나간 허리를 틀며, 이내 검을 휘둘러 내가 뻗어낸 검을 튕겨내었다.
터엉
한 합에 모든 힘을 담아내었기에, 힘없이 내 손을 벗어난 검이 허공에 치솟았다.
테오라드 경이 일순간 그 광경에 미소 지었으나, 나 또한 그를 따라 웃어 보였다.
패배한 나머지 허탈해서도 아닌, 그저 내 목적을 이루어냈기 때문이었다.
“뭘 그리 웃나, 아쉬워서 그렇게 웃는 겐가?”
“베지 않았습니까.”
슬쩍 그의 허리춤을 가리키자, 내게 베여 깔끔하게 잘려나간 그의 옷자락이 보였다.
잠시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테오라드 경은, 이내 나를 바라보며 헛웃음을 지었다.
“...진짜 해낼 거라 생각하진 못했는데.”
“약속, 지키실 거라 믿습니다.”
“뭐, 그리 어려운 것도 아니니 지금 당장 말해줄 수 있지.”
그렇게 말한 테오라드 경은, 이윽고 품속에서 한 장의 종이를 꺼내 내게 건네며 입을 열었다.
“자네 혹시, 용언이라는 것을 알고 있나?”
그리고 이어진 예상치도 못한 말에 내 입이 작게 벌어졌다.
용언,
오로지 원작 여주만이 다룰 수 있었던 마법이 그의 입에서 나왔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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