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7화 〉 연인인 듯, 연인 아닌 (5)
* * *
아이린이 그렇게 떠난 뒤에, 나는 힘없는 발걸음을 움직여 다시 황태자가 있는 곳으로 돌아왔다.
그런 나를 잠시 바라보던 황태자는, 이내 내게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표정이...안 좋군. 공녀와 만나지 못한 건가?”
“만났습니다.”
그리 말한 뒤 침묵을 지키자, 대충 상황을 파악했는지 황태자가 한차례 쓰게 웃어보였다.
내가 아이린을 만나기 위해 사라진 것에 대해 별 말은 안 하는 것일까.
그 배려가 나쁘지만은 않아서, 어깨를 한 차례 으쓱인 채 벽에 조용히 머리를 기댔다.
‘...미치겠네.’
입맛이 썼다. 내가 그 상황에서 무어라 말했으면 좋았을까.
아이린의 생각을 짐작하지 못하는 것도 아니었으면서, 조금 더....잘 말할 수 있지 않았을까.
머릿속이 복잡한 나머지 황태자와 함께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자각했다.
그의 앞에서 한숨을 쉴 수는 없는 노릇이라, 그를 향해 작게 고개를 숙여 보이며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생각이 조금 많아져서.”
“괜찮네. 그녀가 걱정하는 부분은 나도 충분히 인지하고 있으니까. 솔직히 말해서, 나도 염치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네. 그대가 한 공적을 치하하기에도 모자란 이 상황에...다시 흑마법사를 토벌해달라고 부탁하고 있는 거니까 말이야.”
“괜찮습니다. 흑마법사에 대해서는 이미 예전에 얘기를 나누지 않았습니까.”
황태자의 호의를 얻기 위해서, 흑마법사를 토벌할 때 적극적으로 나서겠다고 한 적이 있다.
절멸의 존재는 당연하게도 아이린의 비극과 관련이 있으니 그리 말한 것이지만.
그게 아이린을 걱정시키게 만들 거라곤 상상하지도 못했는데. 도대체, 내가 어떻게 했어야 옳았던 걸까.
“하탄에 관련해서는 조금 더 고민해봐도 되겠습니까? 아무래도, 5개의 가문 중 하나를 치는 것은 여태껏 있던 토벌과는 차원이 다른 일이니까요.”
“그 정도야, 고민할 시간 정도는 얼마든지 줄 수 있지.
그렇게 말한 황태자는, 분위기를 환기시키려는 듯 허공에 박수를 치며 말을 이어갔다.
입꼬리를 끌어올린 채, 씨익 웃은 그가 내게 고개를 까딱이며 입을 열었다.
“자, 그렇게 우울한 표정 짓지 말고. 나를 따라오게. 그대를 위한 연회가 준비되어 있으니, 어쩌면 연회에 공녀가 올지 모르는 일 아닌가?”
“연회 말입니까...”
“자자, 그렇게 울상 짓지 말고. 의외로 별 일 아닐 수도 있으니 말이네.”
어깨를 툭툭 치며, 그렇게 과장스럽게 웃어 보이는 황태자의 얼굴을 보다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즐길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아이린이 혹여 찾아온다면...하고 싶은 말이 많았다.
#
수많은 사람들, 화려한 치장과 아름다운 선율이 흐르는 연회장은 에반젤리움에서 화려한 장소라 할 수 있었다.
과거 알라르가 도읍 삼았던 에반젤리움, 그 황궁의 이름 또한 에반젤리움이었으니.
형형색색의 마법등으로 아름답게 반짝이는 연회장은 저마다 멋을 뽐내는 귀족들로 가득 차있었다.
수정궁 때의 연회와는 달랐다.
황태자가 ‘직접’ 모습을 드러낸다는 소문이 자자하게 퍼져있는 이 곳은,
평범한 때와 달리 유명한 귀족들의 모습을 쉽사리 찾을 수 있었다.
5대 가문 중 하나인 메디브의 차기 가주인 루테인,
그 외에도 카마인 후작과 같이 5대 가문에 준하는 세력을 지닌 귀족 또한 모습을 드러낼 정도였다.
하여 같은 귀족이더라도, 세력이 미미한 귀족들은 그들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다.
황태자의 눈에 띄고 싶다한들, 그들보다도 먼저 나선다면 무엇을 하기도 전에 쥐도 새도 모르게 죽지 않겠는가.
시끄러운 연회장이었지만, 그 시끄러움은 적막이나 다름없었다.
황태자가 나타나기 전까지, 누가 먼저 황태자의 눈에 들 것인지에 대해 눈치를 보는. 그런 조용한 아우성이 주변에 가득했다.
저벅
허나 그 적막이 깨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황태자가 들어옴과 동시에, 아니. 정확히는 황태자의 뒤를 따라 들어온 한 남자 때문이었다.
“...흐으.”
한 영애의 입에서 몽롱한 신음이 새어나왔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마치 짜기라도 한 것처럼 모든 여인들이 동시에 옷매무새를 다듬기 시작했다.
놀라운 풍경에 눈살을 찌푸리는 귀족도 있었으나,
황태자에 뒤를 따른 그 기사를 알아본 이들은 그저 익숙한 광경에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 전부였다.
적어도 에반 프리드라는 기사의 이름을 아는 자라면, 모두 그리 행동했다.
곁에 늘 있던 아이린 유리스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영애들의 눈이 크게 뜨였다.
그 탓일까, 평소와는 달리 수심에 잠긴 것 같은 에반의 얼굴은 이전과는 다른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조금 더 날카롭고, 차가운 분위기. 진한 녹빛의 눈동자가 담은 것은 스산함이라,
그와 눈이 마주친 영애들은 하나같이 치맛자락을 움켜쥔 채 붉게 달아오른 뺨을 숨기기에 바빴다.
‘도대체.’
어디 있는 것일까. 에반의 두 눈이 주변을 담았다.
허나 보이지 않는 존재에 이윽고 눈살을 찌푸렸다.
아이린, 한참을 둘러보았으나 결국 연회장에 다다를 때까지 찾을 수 없었다.
황궁에 있는 것은 맞을까. 혹여나 밖에 있다면, 괜스레 그녀를 끝까지 쫓아가지 않았다는 사실에 후회가 밀려왔다.
이토록 시끄러운 연회장에 순간 고요해지고,
황태자가 다른 이들에게 말하는 와중에 자신에게 꽂히는 시선을 충분히 느끼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에반의 시선은 황궁 너머, 허공을 향하고 있을 뿐이었다.
“생각이 많아 보이는군. 여기 있는 영애들이 그대를 쭉 쳐다보고 있다는 건 알고 있나?”
“...관심 없습니다. 애초에 이런 곳이 아니면, 만날 일조차 없는 사람들이 아닙니까.”
이런 시선들에 너무도 익숙해진 터라, 이제는 별 다른 감흥조차 느끼지 못했다.
한 사람으로도...이미 충분했다. 한 사람만을 생각하기에도 벅찬 시간이라,
다른 이에게 관심을 가질 생각은 없었다.
한 사람조차 제대로 간수하지 못하는 자신이, 무슨 자격으로 다른 이를 만난단 말인가.
그 생각에 에반의 얼굴이 더욱 어두워지자, 헛기침을 내뱉은 황태자가 주변을 천천히 둘러보기 시작했다.
자신과 에반이 가까이 있는 것은 그다지 좋지 못했다.
같이 들어온 시점에서 이미 글렀지만,
그렇다한들 이리 사담을 나누는 모습이 길어지는 건...아무래도 구태여 보여줄 필요는 없지 않은가.
잠시 고개를 까딱였다가, 이내 에반의 얼굴을 보며 입을 열었다.
수심에 깊이 잠긴 표정, 누가 보더라도 커다란 고민이 있어 보이는 그의 기분을 풀어주는 건 단 한 가지뿐이리라.
“다녀오게.”
“네...?”
“공녀를 찾아야 하지 않겠나. 내가 자네를 데려오긴 했지만, 설마 가기 싫은 건 아니겠지?”
장난스레 웃은 황태자의 얼굴을 바라보던 에반은, 이내 깊이 고개를 숙인 채 등을 돌렸다.
아까와는 달리 실례하겠다는 말도 없이 사라진 에반의 모습에, 황태자는 옅게 한숨을 내뱉었다.
언제 즈음이면 저 둘이 교제한다는 소식을 들을 수 있을까.
3년 동안 참 많이 시달렸지만, 어쩐지 이제는 그 소식을 들을 날이 그리 멀지 않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
아이린이 어디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마음 같아서는 그녀를 추적할 수야 있었지만, 그런 방법은 원치 않았다.
그녀가 어디에 있을까, 혹시 이 황궁 밖에 있는 것은 아닐까.
그렇게 한참을 생각하다가 생각이 닿은 장소가 있어서, 그곳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이 상황이 익숙하게 느껴졌다. 선율이 울려 퍼지는 복도, 수많은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오는 이 곳.
어쩐 수정궁과 비슷하지 않은가. 물론 입장은 반대였다.
그때는 내가 기다리는 입장이었고, 아이린은 나를 찾았지만.
지금은 내가 그녀를 찾고 있지 않은가. 천천히 걸었다.
어쩐지, 내가 방금 떠올린 장소에 아이린이 있을 거란 확신이 들었다.
운명이 있다면 그건 바로 지금이라며 바람이 속삭이고 있었다.
찬연하게 복도를 비추는 월광, 그것이 길게 드리우는 내 그림자가 복도의 끝을 가리켰다.
복도의 끝, 서늘한 바람이 불어 뺨에 닿고. 입에서 나온 숨결이 새어나와 흩어진다.
그녀가 그때 느낀 감정이 어땠을까를 떠올리면서, 그렇게 복도의 끝을 향해 걸었다.
발코니, 아마도 그곳에 있지 않을까.
만약 보게 된다면...무어라 말을 해야 할까. 여전히 해야 할 말을 정하지 못한 것이 사실이었다.
단지 충동만으로 뛰쳐나왔으니, 막상 본다한들 아무 말 못하고 고개를 푹 숙이게 될 지도 몰랐다.
그래도 만나야겠지. 이대로 가만히 있는 것보다야, 그것이 훨씬 낫지 않겠는가.
그렇게 복도를 걷기를 한참, 발코니가 있는 곳에서 익숙한 인영 하나를 발견했다.
무어라 말할까 하다가, 조용히 그녀의 뒤로 다가갔다.
눈치 채지 못하도록, 일부러 발소리를 죽인 채 그렇게.
추운 듯 팔을 감싸 안은 그녀의 어깨에 망토를 걸쳐 주면서, 조용히 입을 열었다.
“날이 춥습니다.”
자연스럽게 그런 말이 나왔다.
무슨 말을 할지 여러 차례 고민했지만,어쩐지 입에서 말이 술술 나오는 것은 기분 탓일까.
놀란 듯 잔뜩 줄어든 동공을 바라보다가, 이내 옅게 웃으며 어깨를 한 차례 으쓱여보였다.
당황했는지, 허둥지둥 흔들리는 눈동자가 퍽 우스울 따름이었다.
“에반이 왜, 여기에.”
“제가 연회 같은 거 안 즐기는 걸 아시지 않습니까.”
무도회에 갔던 이유는, 그곳에 아이린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전에 황태자가 부탁한 무도회에 참석한 것 외에는 단 한 번도 홀로 가지 않았던 것 같은데.
그리 말하자, 내 눈을 힐끔 바라본 아이린이 입술을 달싹였다. 이제는 조금 기분이 괜찮은 것일까.
아까보다 조금 나아진 안색에 그나마 안심할 수 있었다.
무슨 말을 하려나, 그런 생각으로 그녀를 지그시 바라보다가. 이내 그 입에서 들려온 말에 무심코 웃음을 흘렸다.
“...화 안 났어요?”
화가 나다니, 도대체 어떤 생각을 했길래 자신이 화가 났으리라 생각한 것일까.
저도 모르게 아이린의 머리를 쓰다듬으려다가, 이내 황급히 손을 거둔 채 천천히 입을 열었다.
“왜 화가 납니까. 제가 그리 속이 좁아 보이셨습니까?”
그 말에 나를 빤히 바라보던 아이린이 퉁명스레 대꾸했다.
무언가가 맘에 들지 않는 듯, 눈을 가늘게 뜬 채로.
전하께서 나를 위해 연회를 주었다는 그 말에 그저 빤히 그녀를 바라볼 따름이었다.
정말로 내가 그냥 돌아가는 것을 원하고 있을까. 정말, 진심으로?
그 시선에 아이린은 조용히 고개를 돌렸다. 그럴 리가 없을 거라 생각했다.
내가 여기서 다시 돌아간다면, 그녀가 꽤나 섭섭해 할 것임을 정확히 알고 있었으니까.
“여기 있으실 거라 생각했습니다.”
단순히 수정궁에서의 기억만을 떠올린 것은 아니었다.
묘한 이끌림을 느꼈기에, 어쩐지 그녀가 여기에 있을 것이란 강렬한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허나 그것을 말하기엔 조금 부끄러워서, 잠시 뺨을 긁적인 채 다시 입을 열었다.
“왜 찾아왔냐고 물으신다면, 간단합니다.”
눈이 마주쳤다. 여러 감정들이 담겨 일렁이는 눈이 그토록 찬란하게만 보였다.
저 눈이 오직 나만을 바라본다면 어떠할까. 허나 지금은 그리 말할 수 없었기에.
그 욕망을 억누르며, 속마음의 편린을 그녀에게 속삭였다.
“보고 싶었습니다. 그게 전부입니다.”
수많은 영애들이 내게 구애함에도 시선조차 주지 않았던 것은,
다른 이에게 쉽사리 미소 지어주지 않았던 것은 전부 한 사람 때문이지 않던가.
마음 속에 품은 사람은 이 세상에서 단 한 사람뿐이었다.
아이린, 그 이름을 떠올리며. 고개를 숙인 그녀의 손을 천천히 잡아당겼다.
아무래도, 내가 방금 한 말이 그녀에게도 잘 전해졌나 보다.
붉게 물든 귀 끝이 보여 옅게 웃었다. 고개를 숙인 것은 아마도 제 얼굴을 숨기기 위해서가 아닐까.
손을 잡았음에도 아무런 반응조차 보이지 않는 것에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가,
문득 떠오른 생각에 잡고 있던 아이린의 손을 툭, 하고 가볍게 놓았다.
그리고 놓은 손을 천천히 들어, 고개를 푹 숙인 아이린의 뺨을 부드럽게 감쌌다.
힘을 살짝 주자 그대로 들어지는 아이린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이내 붉게 물든 그녀의 눈에 살짝 당황하고 말았다.
설마 우는 것은 아니겠지. 허나 영락없이 울먹이는 것만 같은 그 얼굴에 입술을 작게 벌리면서,
축축히 젖은 눈가를 조심스레 닦아내며 입을 열었다.
“왜...갑자기 울고 그러십니까. 제가 잘못했습니다.”
“아, 안 울었어요.”
“흑마법사 토벌 이제 그만 두는 걸 원하십니까? 그걸 원하신다면 그만 둘 수 있습니다.”
물론 ‘공식적’으로 그만 두는 것이겠지. 몰래 라도 나가 절멸을 처리하겠다만, 그녀가 모르는 때에 행해질 것이었다.
내가 그리 묻자, 내 가슴팍을 밀며 거리를 벌린 아이린이 작게 고개를 저어보였다.
그런 게 아니라는 듯, 내가 만졌던 뺨을 쓸어내린 그녀가 입을 열었다.
“내가 허락한 거잖아요. 그냥 걱정이 될 뿐이에요. 매번 그렇게 다쳐서 돌아오면서, 또 흑마법사랑 싸운다고 하니까...걱정한 것뿐이에요.”
그리 말하며 내 눈치를 힐끔 바라 본 그녀는, 여전히 붉은 눈가를 닦아내며 다시 말을 이어가기 시작했다.
“그리고...안 울었어요. 정말로.”
“그러십니까?”
“안 울었어요.”
그 말에 손가락을 매만지자, 여전히 남아있는 물기가 축축하게 손가락을 적시고 있었다.
울었다는 사실이 부끄러운 것일까. 구태여 그 부분을 지적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아서,
고개를 한 차례 끄덕인 뒤 그녀의 옆으로 천천히 다가갔다.
이렇게 발코니에 단둘이 있었던 것도 벌써 3년 전의 일이었던가.
수정궁에서 있을 때만 하더라도 이런 감정을 품게 되리라곤 상상도 못했건만,
꽤 많은 것이 달라졌다는 생각에 괜스레 두 눈에 우수가 담겼다.
봄, 이제는 저물어가는 계절이 바람에 담겨 흩날렸다.
분홍빛의 꽃잎이 천천히 흔들리고, 허공에서 춤추던 꽃잎이 뺨에 닿아 천천히 손 안으로 들어왔다.
그 꽃잎을 조심스레 손가락으로 집어 들다가, 이내 입으로 바람을 불어 날아가는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았다.
허나 갑작스레 불어온 바람이 꽃잎을 예상치 못한 곳으로 움직이게 만들었다.
휘잉, 우리가 있던 방향으로 불어온 바람에 꽃잎이 하염없이 휘날리다가, 아이린의 머리 위에 부드럽게 내려앉았다.
“......”
자신의 머리 위에 꽃잎이 있는 건지 모르는 것일까.
아무 말 없이 허공을 바라보는 그 시선에 여전히 걱정이 스며들어있어서,
이내 씨익 웃으며 그녀의 머리 위에 있는 꽃잎을 조심스레 들어올렸다.
내 손가락이 닿자 화들짝 놀란 아이린이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방금 무얼 한 것이냐면서, 눈을 가늘게 좁힌 그 시선에 손에 들린 꽃잎을 보여주며 입을 열었다.
“이런 게 날아와서요.”
“...깜짝 놀랐잖아요.”
“아직도 걱정하고 계신 겁니까. 원하신다면 흑마법사 토벌에 참여하지 않겠다고도 얘기하지 않았습니까.”
“갈 거잖아요. 그렇게 말해놓고선, 내가 모를 때 몰래 떠날 거란 걸 내가 모를 것 같나요.”
그 말에 한차례 쓰게 웃었다. 틀린 말이 아니었다.
방금 떠올린 생각과 소름 돋게 똑같은 말에 순간 움찔거리자, 나를 바라본 그녀가 조용히 말을 이어갔다.
“...또, 그렇게 다쳐서 오면. 그때는 그대에게 무어라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이제 그만하라고 해야 할까. 전부 놓고, 모든 것을 황실에게 맡기자고 해야 할까. 그렇게 말해봤자 그대는 듣지도 않겠지만요.”
“아마 그렇게 말씀하셔도 가겠죠.”
그리 답하자, 눈살을 찌푸린 아이린이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내가 한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다는 것을 노골적으로 표현하는 그 모습에 옅게 웃으며, 그렇게 다시 입을 열었다.
“가지 않으면, 아가씨가 다칠 수도 있지 않습니까.”
“...나는 괜찮아요. 어차피 그런 위험은 평소에도 충분히 감수”
“제가 괜찮지 않습니다.”
그렇게 말하면서, 아이린의 두 눈을 마주했다.
“...소중히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로페나, 크리스 경, 리제. 공작저에서 만났던 인연들 중 누구도 잃고 싶지 않았다.
이미 소중했던 사람을 한 번 잃었기에 그럴지도 몰랐으나, 이번만큼은.
다시는 그런 후회를 겪고 싶지 않았다. 필사적으로,
어쩌면 남들이 무모하다 생각할 만큼 위험한 곳에 스스로 향했던 이유는 그런 것이었다.
나는 스러져도 괜찮았다. 다만, 내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들 만큼은 행복하기를 바랐다.
조금은 이기적인 생각일지도 몰랐지만...그것을 내가 바랐으니까.
하지만 그런 소중한 사람들 중에서도 가장 먼저 떠올리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아주 당연하게도 한 사람뿐이었다.
“그 중에 가장 지키고 싶은 것이 아가씨입니다.”
“......”
“절멸은 위험합니다. 순식간에 사람의 목숨을 앗아가고, 이번에 공작 각하처럼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사람에게 저주를 걸어 생명을 위협하죠.”
지금 이렇게 있을 수 있는 이유는, 어쩌면 내가 흑마법사들을 베었기에 그런 것일지도 몰랐다.
그래서 포기할 수 없었다. 적어도 모든 흑마법사가 사라져서,
소설 속에 나왔던 모든 비극이 사라지는 그 순간까지. 나는 내가 행하고자 하는 일들을 포기할 수 없었다.
“아가씨를 잃고 싶지 않습니다. 지켜드리고 싶습니다. 아가씨는 차가운 표정을 짓는 것보다 웃는 것이 더 잘 어울리시니, 언제까지고 그 얼굴에 미소만이 깃들었으면 하는...그런 작은 바램이 있습니다.”
그 말을 끝맺으며 옅게 웃었다.
괜스레 무거워진 분위기를 풀기 위해서, 멋쩍게 미소 지은 채 허공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이런 말을 하려고 이렇게 나온 것이 아닌데, 괜히 부담을 준 것이 아닐까.
그런 생각에 조용히 한숨을 내뱉으려는 찰나에,
갑작스럽게 손에서 느껴진 온기에 저도 모르게 고개가 돌아갔다.
텅 비어있던 손이었건만, 어느샌가 그 손을 잡고 있는 자그마한 손에 천천히 아이린을 바라보았다.
화를 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어쩌면 그녀에게 부담을 줘서.
내가 하는 행동을 그녀의 탓으로 몰아간 것이 아닐까 하고 걱정했는데도.
아무렇지 않게 평소의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는 그 모습에 괜스레 볼이 간지럽게 느껴졌다.
차라리 무슨 말이라도 하면 좋을 텐데.
그녀가 침묵을 지키는 탓에 저 멀리서 들려오는 왈츠 소리가 더욱 선명하게 들려왔다.
왈츠, 그 선율에 문득 한 생각이 떠올랐다.
지난 번 수정궁에서는 하지 못했던 그걸, 이번에는 해볼 수 있지 않을까.
“...춤 출 줄 아십니까?”
“갑자기요?”
“나름 연회이지 않습니까. 아직 음악도 있고...음, 솔직히 말해 너무 분위기가 무거워 진 것 같아서 말입니다.”
그녀의 눈을 슬쩍 피하며 그리 말하자, 그 말에 피식 웃은 아이린이 입을 열었다.
“에반은 춤 출 줄 알아요?”
“알고 있습니다. 꼭 알아야 하는 교양이라고, 이전에 리제가 알려준 적이 있으니까요.”
“...리제.”
어쩐지 스산해진 그녀의 눈을 잠시 바라보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두근거리기 시작한 심장 소리가 이 고요 속에 들릴까, 혹시나 하는 마음에 목소리가 살짝 커졌다.
“아가씨, 저와 한 곡 추시겠”
“그게 아니에요.”
툭. 가슴팍을 살짝 건드린 손길에 멈칫하자.
나를 지그시 쳐다본 아이린이 미소 지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오늘은...아가씨가 아니라 아이린으로. 이름으로, 불러주세요."
순간 숨이 턱 하고 막히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토록이나 애처롭게 묻는 그녀의 입술이 유독 반짝여 보여서.
온 몸을 휘감는 충동을 간신히 억누른 채 간신히 무거운 숨을 토해내었다.
어째서일까, 그녀가 지금 지어보인 미소가 이렇게 아름답게 보이는 이유는.
달빛에 반짝이는 눈가가 호수처럼 투명해보였다. 부드럽게 호선을 그은 그 눈이 나를 담고 있어서,
그동안 보았던 그 어떤 순간보다도 아이린의 모습이 확연하게 눈에 들어올 따름이었다.
이름,
언제나 속으로만 생각했던. 한 번도 입 밖으로 꺼내본 적 없던 그 이름을, 조심스럽게 중얼거렸다.
“...아이린.”
달빛이, 그리고 별빛이. 더 이상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이 순간 가장 아름답게 반짝이는 사람이 내 앞에 있었기 때문에.
이 맞잡은 손을 조심스레 쳐다보면서, 그렇게 천천히 입을 열었다.
잔잔히 울리는 선율에서도 확연히 들리는 목소리는, 다행히도 그녀에게 확실히 닿은 듯 했다.
붉게 물든 뺨, 조금씩 젖어드는 그 푸른 눈동자를 바라보면서.
조용히.
그녀에게 청한다.
“제가 그대와 함께하는 영광을, 허락해주시겠습니까?”
이윽고 손이 맞닿는다. 섧게 지는 꽃마저 아름답게 보이는 이 발코니에서, 미소 지은 그녀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좋아요.”
여전히 선명하게 들려오는 왈츠, 이 밤에 흐르는 그 선율 속에서.
찬연하게 빛나는 것은 오직 아이린 한 사람 뿐이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