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5화 〉 연인인 듯, 연인 아닌 (3)
* * *
“어울려?”
“잘 어울리세요. 근데 솔직히 이런 질문 의미 없잖아요?”
입고 있는 옷을 보며 슬쩍 묻자, 로페나가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하기야, 이 정도 되면 무얼 걸치든 어울리는 수준이 아닐까.
외모 자체는 에반 프리드로 빙의하기 전과 큰 차이는 없었지만.
아무래도 검을 열심히 휘두른 탓인지 체격 자체가 꽤 괜찮은 편이었다.
크게 우람하지도, 그렇다고 너무 마르지도 않은 딱 적당한 체격이라 해야 할까.
...괜히 편지가 쌓이는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나도 그 점에 대해선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고, 나름 조심도 하고 있었지만.
내가 조심한다 한들 어쩔 수 없지 않은가. 관심이 내게 쏠리는 것마저 아예 차단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런 걸 보면서 반응하는 아이린을 보는 게 나름 즐겁기도 했으니, 가끔은 이런 점을 이용하는 편이기도 했고.
“그런데, 바로 출발하셔도 괜찮으시겠어요? 새벽에 돌아오셨는데, 조금 몸을 회복한 다음에 가는 게 좋지 않을까요.”
“괜찮아. 어차피 거기 가서 몸을 쓸 일도 없을 테니까.”
아이린이 준 손수건을 가슴팍에 꽂으며 그리 말하자,
로페나가 입술을 삐죽이며 마음에 들지 않는 듯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기껏 3일 만에 만났는데, 곧바로 황실에 가는 게 영 별로인 듯 했다.
녀석이 이러는 이유를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어서,
나는 달래주기 위해 로페나를 향해 입을 열었다.
“너무 서운해 하지 마. 돌아와서 같이 있어줄게. 알았지?”
“제가 뭐 애도 아니고, 그렇게 말씀하신다고 뭐 서운한 게 금세 풀릴 줄 아세요?”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조용히 말했건만,
여전히 토라졌는지 고개를 휙 돌린 모습에 절로 웃음이 새어나왔다.
어찌 이렇게 하는 짓이 똑같을까. 그런 로페나를 쳐다보길 잠시,
이내 녀석의 이름을 부른 채 손가락을 조용히 들어올렸다.
“로페나.”
“아, 왜요.”
쿡,
로페나의 고개가 돌아감과 동시에 내 손가락과 닿아서, 녀석의 뺨이 우스꽝스럽게 눌려 마치 푸딩처럼 움푹 파였다.
잠시 멍하니 제 뺨을 바라보던 로페나는, 이내 나를 쳐다보며 헛웃음을 흘렸다.
“이건 또 뭐에요?”
“글쎄.”
그렇게 말하며 어깨를 한 차례 으쓱였다가, 로페나의 볼을 부드럽게 쓸어내리며 옅게 웃어보였다.
“나는 괜찮아. 그러니까 너무 걱정 안 해도 돼.”
“...걱정 안했어요. 어제 다친 걸 봤으니까, 그냥 조금 신경 쓰는 거예요.”
“그걸 걱정한다고 하는 거야.”
조금은 기분이 풀렸는지, 아까와는 달리 입만 꾹 다문 로페나가 이내 한숨을 내뱉었다.
로페나 때문이라도 금방 돌아와야 하지 않을까.
이러다간 나중에 어디 간다고만 해도 말리는 건 아닐지.
그러나 그 마음이 기꺼운 것은 사실이라, 조용히 날 바라보는 로페나를 향해 그저 웃어 보일 따름이었다.
몸 상태도 꽤 괜찮아졌으니, 황실에 들리는 것 정도야 괜찮지 않을까 싶었다.
그나저나 너무 부담스럽게 대우하는 건 조금 사절인데, 황태자가 그런 것을 신경 써줄 지는 모르겠다.
이걸 흑마법사들을 향해 경고하는 것이라면 꽤 성대하게 환영해줄 거란 생각이 들었지만...일단 가봐야 알지 않겠는가.
진녹색의 셔츠 위에 걸친 하얀색의 제복,
견장 아래로 달린 흰색 망토의 주름을 조금씩 펴며 천천히 문밖으로 향하자.
문 앞에 서있던 리제가 빙그레 웃으며 입을 열었다.
“잘 어울리네?”
“그렇습니까?”
수줍게 웃는 모습이 영 불편해서, 리제의 시선을 피한 채 어색하게 웃는 것이 전부였다.
저택에서 마저 표정 관리를 해야 한다는 것이 불편하긴 했으나, 어쩔 수 없는 일이리라.
표정 관리를 하지 못했던 내 업보가 아닐까. 그렇게 복도를 천천히 거닐다가,
이내 저 멀리서 느껴지는 익숙한 기척에 발걸음이 가벼워지기 시작했다.
그녀가 같이 간다 한 의도를 알지 못하는 건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좋은 것은 사실이지 않던가.
오히려 황실에 나를 홀로 보낸다면 그것으로 꽤나 섭섭할 뻔 했다.
나도 내심 기대하고 있었는지, 아이린이 입고 있을 옷을 떠올리자 입꼬리가 저도 모르게 씰룩였다.
또각,
대리석으로 이루어진 복도에 울리는 구둣소리에, 다시금 심장이 두근거리며 뛰었다.
설렘, 두근거림. 긍정적인 감정을 이루 담은 그 기분 좋은 울림에 입가에 미소가 지어진다.
그렇게 복도를 몇 걸음 더 나아가자, 이내 마주한 두 눈에 입술이 작게 벌려졌다.
“...하.”
평소와는 달리 힘을 준 것인지, 확연히 다른 모습에 절로 탄성이 새어 나왔다.
이전에도 외모가 누구에게 밀린다고 생각하지는 않았건만.
오늘 보는 아이린의 모습은 그야말로, 누구와도 견줄 수 없다 말하기에 충분하지 않을까.
윤기를 머금은 채 찰랑거리는 백발이 눈에 띄었다.
자칫 차가워 보일 수 있는 암청색의 드레스 중간에 들어간 프릴이 그녀의 차가움을 옅게 만들었으니,
도도한 공녀라는 이미지를 잘 살린 그 옷차림에 흐뭇한 미소가 지어졌다.
그리고 목에 걸린, 예전에 내가 선물해주었던 사파이어 목걸이까지.
지그시 나를 쳐다보는 아이린의 시선이 꼭 잘 어울리냐 묻는 것 같아서,
일부러 아이린을 바라보는 표정에서 미소를 슬그머니 지웠다.
내 표정이 조금 싸늘해지자, 잠시 나를 보며 멈칫한 아이린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왜 아무 말 안 해요?”
“제가 무어라 해야 합니까?”
짐짓 아무것도 모르는 척 말하자, 눈을 가늘게 뜬 아이린이 잠시 뒤 나를 휙 지나쳤다.
기대했던 대답이 들려오지 않아 실망한 것일까.
그 모습이 못내 우스웠지만, 나는 조금 만 더 참자는 심정으로 그녀의 뒤를 따랐다.
무어라 말하면 그녀의 기분이 거짓말처럼 풀릴까.
겉으로 보기엔 꽤나 차가워 보였지만 이런 반응을 보일 때면 영락없이 그 나이대의 소녀였으니, 이렇게 아이린을 놀리는 걸 꽤 즐기는 편이었다.
그녀를 따르는 시녀들은 하나같이 내 눈치를 힐끔 보고 있었다.
점차 스산해지는 분위기, 봄과는 어울리지 않는 냉기가 주변에 퍼질 때 즈음.
나는 그녀의 곁에 있는 시녀들을 물리며 조심스레 아이린의 옆에 섰다.
“왜 그리 기분이 상하셨습니까.”
“......”
“잘 어울리십니다.”
아이린의 귀가 쫑긋, 하고 움직이는 모양새에 피식하고 웃는다.
고작 잘 어울린다는 말로 끝낼 생각은 없었기에. 그런 그녀에게 몇 마디를 덧붙이고자 다시 입을 열었다.
“제가 여태껏 봤던 아가씨 중에서, 오늘이 제일 아름다우십니다.”
“...그런가요.”
그제야 입을 여는 아이린의 볼에 옅게 홍조가 피어올라 있어서,
나는 한 차례 어깨를 으쓱인 채 주변의 시녀들을 바라보았다.
이 정도면, 아이린의 기분을 충분히 풀었다고 할 수 있겠지.
이제 남은 건 황실로 향하는 것, 그렇게 다시 황실과 이어진 텔레포트 진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
부우우
텔레포트를 하자마자 들린 것은 가슴이 요동칠 만큼이나 거대한 나팔 소리였다.
순간 놀라 아이린을 감싸며 주변을 둘러보자, 텔레포트진을 가득 메운 군사들이 하나같이 나팔을 든 채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일렬로 이어진 사람들의 행렬, 하늘에 휘날리는 꽃가루.
영락없이 누군가를 위해 이루어지는 그 모습에 멍하니 있자, 이윽고 행렬의 가운데에서 나타난 이의 목소리에 상념이 흩어졌다.
“생각보다 빨리 왔군 그래. 에반젤리움의 온 것을, 황태자의 이름으로 환영하지.”
검은 색의 머리를 뒤로 넘긴, 오로지 황족만이 지닌 붉은 눈을 지닌 남자.
황태자가 나타남과 동시에 누구를 축하하기 위한 것인지 단박에 깨달을 수 있었다.
다급히 무릎을 숙이자, 우리를 향해 다가온 황태자가 아이린을 향해 입을 열었다.
“구태여 예의를 차릴 필요는 없네. 지금은 그대들이 이 제국을 위해 이룬 공적을 치하하기 위해 부른 것을 뿐이지 않나. 일어서게, 그대들은 그럴 자격이 있으니까 말이야.”
그리고 이어서, 우리를 향해 고개를 숙인 황태자가 덧붙였다.
“자세한 얘기는 궁에 들어가서 하지. 여긴 사람이 워낙 많으니.”
“...알겠습니다.”
그나저나, 이토록 많은 사람을 세어놓을 줄이야.
예상한 것보다도 훨씬 거대한 규모에 그들을 멍하니 바라보자, 나를 본 황태자가 내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유리스 북부에 있는 흑마법사들과 본 드래곤 전부를 수습했네. 조금 바쁘긴 했지만, 곧바로 수도에 공표하는 것도 성공했지. 내가 왜 이렇게 급하게 했는지 알고 있나?”
“경고하시는 거겠죠. 아직 제국에 온존하고 있는 흑마법사들을 향해서.”
“그 말이 맞네. 유리스의 소가주가 의심하고 있는 ‘그쪽’에게, 그리고 내가 의심하고 있는 ‘다른 쪽’에게도 말이야.”
다른 쪽이라, 내가 그에 대해 물으려 하자 고개를 저은 황태자가 피식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
“내가 안에 들어가서 말하자 하지 않았나. 지금 여기서 하기엔 사람이...너무 많네.”
혹여나 밖으로 얘기가 새어나갈 것을 걱정하는 것일까.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자, 이내 황태자가 주변을 향해 손을 흔들며 앞으로 걸어 나가기 시작했다.
그의 말대로 이 주변에 있는 사람은 그야 말로 수천 명에 이르렀다.
그 중에는 내게 선망어린 시선을 보내는 사람들도 있어서, 그저 어색한 손짓으로 그들의 환호에 호응해줄 따름이었다.
수많은 사람들에게 박수를 받아본 적은 있었지만, 이런 순수한 시선은 아무래도 처음이지 않던가.
나를 영웅이라며 칭송하는 이도 있기에, 어쩐지 쑥스러운 마음이 피어올라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부끄러워요?”
“조금...그렇습니다. 부담스럽기도 하고요.”
그런 나를 보며 옅게 웃은 아이린은, 이내 내 손을 툭툭 건드리며 조용히 중얼거렸다.
“잡아도 돼요, 너무 떨린다 싶으면.”
처음에는 스치기만 하더라도 얼굴이 붉어지던 것이 아이린이었는데,
이제는 아무렇지 않게 손을 내미는 그 모습에 웃음이 새어나왔다.
허나 거절하고는 싶지 않아서, 앞을 바라본 채 조심스럽게 그 손을 움켜쥐었다.
남들이 보면 그저 에스코트를 하는 것처럼 보이도록, 가볍게 쥔 손의 손가락이 서로를 강하게 붙잡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황태자는 우릴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고개를 돌린 채 입을 열었다.
“사이가 참 좋군. 단 둘이서 온 것은 그런 이유인가? 시녀도, 그렇다고 다른 기사를 데려오지도 않았더군.”
“시녀를 데려올 필요는 없었으니까요.”
필요가 없지는 않았다. 그저, 아이린이 다른 시녀들이 오겠다는 것을 모두 거부한 것이니까.
그 이유가 무엇인지는...구태여 알고 싶진 않았다. 너무 뻔한 이유이지 않던가.
그리고 다른 기사를 데려오지 않은 이유도 단순했다. 그저, 다른 기사가 필요하지 않았을 뿐.
마스터의 문턱에 걸친 이상, 이 제국에서 공식적으로 나보다 강한 기사는 오직 테오라드 경 하나였으니까.
어설픈 익스퍼트 수준의 기사라면 홀로 수십이 달려든다 한들 내 앞에서 의미를 잃었다.
그러니 호위는 나 한 사람으로도 충분하지 않은가.
그런 말을 들은 황태자는 우리를 떨떠름한 표정으로 바라보다가, 이내 옅게 웃어 보이며 궁 안으로 향했다.
우리를 따르던 기사들이 하나씩, 시녀들마저 모두 사라졌을 때.
비로소 자신의 방에 도착한 황태자가 몸을 돌리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조금 장난기 섞여 있던 방금의 표정과는 달리 꽤나 진지한 표정을 지은 그는, 아까보다 조금 더 진중한 목소리를 내뱉었다.
“상황이 꽤나 심각하네. 어쩌면, 이전에 있었던 절멸 사태가 다시 일어날지도 모르겠어.”
“...저를 부른 이유는, 그 사실을 알려주기 위해서 입니까?”
어쩐지 조금 일처리가 생각보다 많이 빠르다고는 생각하고 있었건만,
그리 묻자 황태자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어갔다.
“그대들이 로만을 주시하고 있는 걸 알고 있네. 나도 진즉에 5대 가문에 대해서, 그렇다고 그대들을 의심하고 있다는 소리는 아니야. 에반 경이 있는 한, 난 5대 가문에 한해서 유리스에게 비공식적으로 가장 많은 신뢰를 보내고 있으니까.”
“...그럼, 저희에게 그런 말씀을 하시는 이유가 무엇이죠?”
아이린이 묻자, 한차례 쓰게 웃은 황태자가 조용히 말을 이어가기 시작했다.
“그대들이 의심하고 있는 로만과 더불어서, 아무래도 흑마법사와 내통하는 가문이 하나 정도 더 있는 것 같네.”
그 말과 동시에, 이 공간이 차가운 정적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로만뿐만이 아닌 다른 5대 가문도 흑마법사와 내통하고 있다.
그것은 단순히 농담으로 치부하기엔 너무도 무거운 사실이지 않던가.
5대 가문의 전력은 제아무리 황실이라 한들 무시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제국을 지키는 기사단 중 가장 유명한 것을 꼽으라면 황실 기사단, 유리스, 그리고 로만이었다.
이 중에 하나가 흑마법사와 관련이 있다고 의심이 가는 것만으로도 아찔한 사실일진데, 내통하는 가문이 하나가 더 있다니.
그 말에 눈살을 찌푸린 아이린이 잠시 입술을 달싹거리다가, 이내 황태자를 향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설마, 하탄인 건가요?”
“그대도 어느 정도 의심을 하고 있었나 보군, 그 말이 맞네. 하탄이...아무래도 그 쪽과 관련이 있는 것 같아.”
그렇게 말한 황태자는 이내 품속에서 한 인장을 꺼내 보였다.
하탄의 문장인 검은 색의 늑대가 새겨진 인장.
그걸 매만지던 황태자는, 옅게 한숨을 내쉬며 나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대가 처치한 흑마법사들 중 하나가 이런 것을 지니고 있더군. 물론 이런 걸 지니고 있다 해서 확정이 났다고 할 수는 있지만. 의심을 하기엔 충분한 증거지. 어쩌면 최근 들어 하탄이 유독 조용한 게 이런 이유이지 않을까 싶네.”
그렇게 말한 황태자는, 이내 내 어깨를 두드린 채 미안하다는 듯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황실 기사단만으로는, 하탄과 로만 모두를 감당하기가 힘드네. 특히나 로만과 하탄의 가주는 개개인이 가진 무력을 쉬이 짐작할 수 없는 상대야. 그러니 이렇게 부탁하지. 자네의 도움이 앞으로도, 쭉 필요할 것 같네.”
“...제가 답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황태자와 얘기하고 있지만, 내 시선은 아이린을 향했다.
옆에서 나를 바라보고 있는, 입술을 짓씹은 채 흔들리는 시선을 내게 던지는 아이린을.
불안해보였다. 어찌 그렇지 않겠는가.
당장 사선(死?)에서 살아 돌아온 것이 바로 어제의 일이었는데,
이제는 자신의 옆에서 떠나 보내지 않겠다고 말한 것이 새벽의 일이었다.
그녀의 걱정을 이해하고 있기에. 그렇기에 내 걱정은 순수하게 그녀를 향할 수밖에 없었다.
위험했고, 언제든지 목숨을 잃을 수 있는 일이었다.
말로릭보다도 강한 것이 얼마든지 나타날 수 있었다. 황태자에게 답하는 것,
그리고 그를 돕는 것 또한 아이린을 위한 것임을 알고 있었다.
결국 절멸이라는 단체를 이 세계에서 지워야 한다는 것은 변하지 않을 터였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그것보다도 신경쓰이는 것이 아이린의 표정이었기에.
나는 황태자에게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조금, 제게 생각할 시간이 필요합니다. 이해해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그대를 보채는 것이 아니네. 생각할 시간이야, 얼마든지 줄 수 있지.”
황태자가 그리 답하며 물러났음에도, 아이린의 표정은 여전히 복잡하기 그지없었다.
조금 창백한 빛을 띈 얼굴로 나를 빤히 바라보던 아이린은, 이내 등을 돌린 채 그대로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섰다.
그 모습을 그저 바라만 볼 수는 없었다. 이대로 그녀를 잡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가득 차, 이내 황태자를 향해 고개를 숙이며 다급히 입을 열었다.
“잠시실례하겠습니다.”
무례일지도 몰랐다. 허나 지금 이 순간 내 시야에 들어오는 것은 아이린 하나였다.
그녀가 무엇을 걱정하는 것을 알고 있었으니, 오직 그녀를 안심시키고자 하는 생각 하나만으로 움직일 따름이었다.
허나 무슨 수로 그녀를 안심시켜야 할까.
품은 뜻과는 달리 마땅한 수가 떠오르질 않아서,
그녀에게 향하는 발걸음은 꽤나 무겁게 느껴졌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