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9화 〉 어둠을 가르고(3)
* * *
쏴아아
비가 내린다. 때 아닌 봄비에 숲이 젖어들고,
빛 한 점이 힘겹게 새어 들어오던 숲은 어둠에 가려져 나름의 우중충한 분위기를 띄기 시작했다.
축축하고, 어둡고, 추적이는.
그림자로 뒤덮여 음산한 분위기마저 띄는 그 숲에서 한줄기 빛이 피어오르니,
이윽고 숲 한 켠의 동굴에서 목을 빼든 남자가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비가 금방 그칠 것 같지는 않군 그래.”
“이래서 마법사들을 믿을 수가 없다니까. 오늘은 화창하다더니, 이렇게 쏟아질 줄을 누가 알았겠는가.”
불만스러운 듯, 두터운 눈썹을 잔뜩 찌푸린 제이크가 투덜거리기 시작했다.
애꿎은 돌부리를 걷어차며...비가 들어오지 않는 동굴의 입구에서 어둑해진 하늘을 바라보는 것이 그들이 할 수 있는 전부였다.
부르르, 서늘한 바람에 습기가 섞이자 절로 몸이 떨려왔다.
이러다가 감기에 걸리는 것이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한 제이크는 이내 품속에서 담배 하나를 꺼내 입에 물었다.
“불 좀 있나?”
“마법으로 하게.”
“쯔, 그건 조금 귀찮은데.”
틱, 틱.
허나 가지고 있던 성냥은 모두 습기에 젖어버린 지 오래라,
제이크는 하는 수 없이 허공에 마법진을 그렸다.
자신들의 스승이라면 이런 불꽃은 쉽게 만들 수 있겠지만,
이제 겨우 수습 딱지를 뗀 자신들은 마법진을 일일이 그려야 하는 것이 영 불편했다.
화르륵
이윽고 거뭇한 색을 띈 불꽃이 허공에서 나타나자,
담배를 가져다 댄 제이크가 그제야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어보였다.
비에 젖지 않는 불꽃, 마법이란 꽤나 편리하지 않은가.
마법에 대한 생각은 이내 최근 들어 진행되는 한 계획으로 이어져서, 문득 떠오른 생각에 제이크가 중얼거렸다.
“생각해보니, 스승님이 최근 들어 무언가를 준비하고 있다하시던데.”
“...아, 그거 말인가?”
“그거라니, 잭 자네 그게 뭔지 알고 있는 겐가?”
허공에 피어오르는 연기를 바라보던 잭은 이내 피식 웃으며 제이크를 빤히 바라보았다.
아직도 모르고 있었냐며, 비아냥거리는 것 같은 얼굴에 제이크의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말을 하란 말이야. 사람 화나게 하지 말고.”
“그냥 간단한 소환 작업일세. 소실된 몬스터를 복구한다 들었는데, 아마도 이번에 소환할 녀석은 꽤 거대하다더군. 어쩌면 제국에서 소환학파를 정식으로 인정해줄 지도 모르겠어.”
“얼마나 거대하길래 그런 소리가 나온단 말인가? 소환학파가 배척된 지 벌써 300년이 지났네.”
“대충 소문만 들었지만, 이 숲 정도는 단숨에 쓸어버릴 수 있는 녀석이라더군. 스승님이 계신 방을 지나칠 때마다 소름이 끼칠 정도야. 자네는 느끼지 못했는가? 스승님의 방에서 내뿜어져 나오는 그...마나 말일세.”
마나라, 제이크는 스승의 방을 떠올리자 어쩐지 스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방에서 뿜어져 나오는 그 검은 연무, 그런 것을 과연 마나라 칭할 수 있는 것일까?
소환학파 특유의 마나라며 자신 또한 배우긴 했지만, 조금 꺼림칙한 것은 사실이리라.
어쨌든 소환학파가 정식으로 인정받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입꼬리가 씰룩이긴 했다.
이제는 이런 어두컴컴한 동굴에서 몰래 마법을 배우는 것이 아닌,
다른 마법사들처럼 학파의 탑을 세워 당당하게 자랑할 수 있으리라.
“음?”
그렇게 피식 거리며 새어나오는 웃음을 자제하길 잠시, 잭의 목소리에 제이크는 숙였던 고개를 들었다.
“왜 그런가?”
“아니...저쪽에 저거 사람 아닌가. 이쪽으로 오는 것 같은데.”
이 숲에 난데없이 사람이라니,
그 말에 시선을 돌리자, 정말로 저 멀리서 거뭇한 인영이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로브로 몸을 가린 탓에 정확한 얼굴을 볼 수 없어도, 꽤나 체구가 커 보인다고 해야 할까.
언뜻 봐도 수상한 그 모습에 몸을 움츠리자, 잭이 목소리를 높였다.
“이보게 거기! 이쪽으로 들어오면 안 되네, 인증을 받은 마법사만 들어올 수 있어!”
“이쪽으로 오는 게 아닐 수도 있지 않은가.”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아무리 봐도 이 쪽으로 오고 있는데. 나오게, 내가 얘기해서 막을 테니까. 스승님이 동굴 안으로 아무도 들이지 말라 하셨지 않은가.”
제이크는 저 혼자 훌쩍 앞으로 나서는 잭을 바라보다,
이내 울컥 치솟는 두려움에 잭을 따라 함께 앞으로 나서기 시작했다.
그저 말 몇 마디 나누면 될 것을, 어찌 이런 두려움이 생겨나는 건지.
영문 모를 상념을 천천히 털어내며, 그렇게 로브를 두른 남자 앞에 선 제이크가 잭의 뒤편에 서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 스승님이 이 안으로 아무도 들이지 말라 하셨소. 이 안으로 들어올 거라면, 신원을 밝히시오.”
“근데, 어째 처음 보는 얼굴인데. 도대체 당신 누구요?”
“......”
허나 여전히 침묵을 지키는 남자의 모습에, 제이크는 그 영문 모를 두려움이 점점 커져가고 있음을 깨달았다.
당장이라도 이 자리에서 벗어나라며, 파들거리는 다리가 발걸음을 재촉하고 있었다.
여러 생각이 뒤엉켜 이내 시야가 뿌옇게 뒤덮였을 때 즈음,
로브를 두른 남자와 시선이 마주친 제이크가 주춤거리며 뒷걸음질 쳤다.
어둠 속에서도 선명히 반짝이는 녹안.
자신의 모든 것을 꿰뚫어보는 것만 같은 눈동자는 이윽고 잭을 향하더니,
이내 남자가 몸을 두르고 있던 로브를 천천히 벗기 시작했다.
그리고 드러나는 찬란한 금색의 머리카락,
바라보고만 있어도 위압감이 느껴지는 남자의 얼굴은 선량하기 그지 없었다.
허나 어째서일까, 숨조차 쉬기 힘들 만큼의 압박감이 전해지는 이유는.
잭 또한 그런 것을 느꼈는지, 그의 입에서 내뱉어지는 목소리는 전과 달리 꽤나 떨리고 있었다.
“다, 당신. 도대체 누구요. 신원을 밝히시오!”
“신원이라.”
잔잔한 목소리가 울려 퍼짐과 동시에. 세상이 찬란한 불길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사람의 몸에서 피어오르는 백색의 염화.
숲에 어스름히 끼어있던 그림자를 단번에 걷어내며, 저 홀로 이 어둠 속에서 찬란한 광휘를 머금은 남자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호위 기사다.”
촤아악, 아주 가까운 곳에서 들려온 소리에 제이크는 저도 모르게 가슴팍을 매만졌다.
도대체, 언제 베인 것일까. 끈적이는 피가 흥건히 묻어나오는 손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이윽고 전해져 오는 아릿한 통증에 제이크가 소리 없는 비명을 질러댔다.
이해할 수가 없었다. 자신이 이렇게 눈치 챌 틈조차 없이 베인 것도,
자신을 벤 남자의 눈에서 망설임이란 것이 없는 것도.
그리고 그 녹색의 눈동자에서 보이는 것이, 한없이 절제된 분노라는 것도.
흐릿해지는 의식, 그 속에서 제이크가 마지막으로 품은 감정이란.
자신을 호위 기사라 칭한 이에 대한 공포였다.
#
아무래도, 이걸 해결하려면 방법은 단 하나 뿐일 것 같군.
단 한 가지의 방법, 아제스트의 말을 떠올린 에반은 주변에 쓰러진 시체들을 빤히 바라보았다.
미약하지만, 그럼에도 분명하게 느껴지는 마력은 분명 흑마법사들이 지닌 어둠이리라.
저주를 건 이를 찾아 죽인다. 저주를 파훼하기 위한 방법이랍시고 알려준 것은 꽤나 간단한 편이었다.
물론 그만한 저주를 건 사람을 처리하는 것이 과연 간단하다 판단할 수 있는 지에 대해선 아직 의문이 일었지만.
‘복잡한 방법은 아니니까.’
그나저나 이런 곳에 흑마법사들이 있을 줄이야,
저 멀리 있는 동굴을 바라본 에반이 한 차례 쓰게 웃어보였다.
공작령에서 기껏해야 몇 시간 떨어진 거리,
마나를 다룰 수 있는 기사라면 달려서 몇 십 분이면 올 수 있는 거리에 존재하는 숲엔 흑마법사가 존재했다.
비록 지금 벤 것은 흑마법사라 부르기 민망할 만큼 약하긴 했지만...
‘저 안쪽.’
동굴의 안쪽에서 희미하게 새어나오는 그림자는, 분명 흑마법사가 더 있을 것을 보여주는 증거나 다름없으리라.
몸에서 피어오르는 불길을 천천히 거두며, 에반은 동굴을 향해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시간을 길게 지체할 생각은 없었다.
최대한 빠르게, 저주가 오래 지속될수록 공작이 깨어났을 때의 상태만 나빠질 테니. 못해도 하루 안에 끝내는 것이 목표였다.
...그리고 아이린도.
아이린의 얼굴을 떠올린 에반은 눈살을 작게 찌푸렸다.
예전 같았으면 가지 말라고 한 번 정도 말 해주었을 법도 했건만,
이번엔 그저 묵묵히 이곳으로 오는 것을 허락했던 것이 못내 섭섭했다.
물론 자신을 신뢰하니 그런 것이겠지만, 괜스레 그런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팔랑
숲의 어둠 속에서 선명히 빛나는 깃털이 에반의 손에서 흔들렸다.
쏟아지는 비에서 오는 풍랑이 아닌, 오로지 흑마법의 방향만을 알려주는 일종의 마법이었다.
아제스트 머윈이 만들어낸 하나의 마법,
이 깃털이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가면 저주의 근원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이 아제스트의 전언이었다.
비에 젖어 찰랑거리는 머리카락을 조심스레 이마에서 떼어내며,
그렇게 조심스럽게 동굴을 향해 발걸음을 내딛는다.
철퍽, 동굴에 들어선 순간 예민하게 반응하는 감각이 주변을 살폈으나 이렇다 할 반응은 없었다.
적어도, 이 주변엔 아무것도 없는 것이 분명하리라.
이곳에서 살아 나오는 것은 오직 자신뿐이어야 했다.
이제는 누군가를 죽이는 것에 거리낌이 없어졌다는 사실이 영 껄끄러웠지만,
그 대상이 흑마법사라면 오히려 당연한 감상일지도 몰랐다.
3년, 그동안 죽인 흑마법사는 고작 10명에 불과했지만 그 흑마법사들이 죽인 사람은 수백 명이 넘어갔다.
어린아이, 노인, 여자, 평범한 사람 할 것 없이 전부 그들이 펼치는 흑마법의 제물로 바쳐진 것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그런 것을 보고도 흑마법사를 좋게 볼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잿더미가 된 마을, 수많은 시체들이 쌓인 산 위에서 광소하던 흑마법사를 보고도. 검을 뽑지 않을 기사가 과연 있을까.
적어도 자신은 아니었다. 혐오, 분노, 평소라면 품지 않았을 감정은 오직 흑마법사라는 대상을 떠올렸을 때만 품을 수 있었다.
녹안이 일렁여, 이내 억눌린 분노가 담겨진 그 눈동자가 주변을 천천히 훑기 시작했다.
흑마법사들을 여러 번 상대해보면서 느꼈던 것이지만, 그들이 펼치는 마법이란 일반적인 마법과는 궤를 달리했다.
어쩌면 정직하다고도 할 수 있는 일반 마법사와는 달리,
흑마법사의 마법은 질척이고, 조금 더 음험한 습성을 지니고 있었다.
저주, 함정, 제물을 바침으로써 소환하는 악마들까지.
상대를 갉아먹고 피로하게 만드는 그들의 저주는 마스터라 한들 경계해야하는 마법 중 하나였다.
“...흠.”
동굴을 어느 정도 지나왔음에도 아무런 일이 없음에 에반은 침음을 흘렸다.
미묘한 감각이 온 몸을 핥고 있었다. 너무도 조용한 이 상황,
자신의 발소리만이 들려오는 이 내부는. 너무도 조용해 어색함마저 느껴질 따름이었다.
한 걸음, 두 걸음. 그렇게 발걸음을 내딛던 에반이 이윽고 급격하게 몸을 틀어 벽에 붙었다.
콰드드득
“하...!”
동굴의 바닥을 뚫고 나온 거뭇한 창날이 번뜩였다.
뿌연 연무가 뒤덮인 창은 분명 흑마법의 일종, 그것을 깨달은 에반이 검을 뽑아내었다.
촤르르 오로지 흑마법사를 상대할 때만 나타나는 순백의 검신,
백색의 불꽃이 에반의 몸을 휘감자 동시에 그 신형이 흐릿해졌다.
‘셋.’
찰나의 시간이었지만, 주변에 있는 흑마법사를 알아차리기 충분한 시간이었다.
손에 들린 검이 허공에서 선명한 선을 그렸다.
그 선을 따라 피어나는 염화, 창에서 뿜어지는 연무를 걷어내자 동시에 흑마법사의 위치가 보이기 시작했다.
창과 이어진 마나를 포착한다. 황태자와 싸울 때 구태여 눈을 가리고 싸웠던 것은,
시각이 배제된 상황에서도 수월하게 싸우기 위해서였다.
마력을 느낀다. 보이지는 않지만, 마력이 가져다주는 특유의 미묘한 감각이 몸을 저릿하게 만들었다.
화르륵, 동굴 내부를 완전히 집어삼킬 듯 쏟아져 오는 흑염을 가르며 땅을 짓밟았다.
두근거리는 심장에서 마나가 피어오르고, 동시에 터질듯이 부풀어 오른 다리 근육이 마치 몸을 포탄처럼 쏘아나가게 만들었다.
기기기긱
동굴 벽을 갈랐다. 동시에 동굴 벽을 감싼 흑염을 염화가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자신이 지닌 마나는 어둠을 걷어낸다. 즉, 이 흑마법의 상극인 것이 자신의 마나였다.
어쩌면 아제스트 머윈이 말한 ‘유일한’이라는 말은 자신의 이 마나 때문이 아닐까.
몸을 휘감은 불꽃은 흑염이 에반을 집어 삼키는 것을 막아주고 있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짧은 단말마. 흑마법사가 내뱉은 말에서, 에반은 상대의 호흡이 불안정함을 느꼈다.
불안해하고 있다. 긴장하고 있다. 즉, 자신을 상대할 수단이 더 이상 없다.
판단은 짧았고, 검을 휘감은 불길이 더욱 거세지기 시작했다.
흑염을 담은 불덩이가 쏟아졌다. 피하지 않았다.
몸을 비틀어 한 바퀴 돌면서, 그렇게 휘둘러진 검에 불덩이가 사그라 들었다.
촤아악, 자신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피를 본 흑마법사의 눈이 크게 뜨였다.
보이지 않았다. 분명 침입자가 시야에 보이는 것까지는 기억하고 있었지만,
자신을 벤 그 순간의 일격을 포착할 수는 없었다.
허나, 이토록 쉽게 쓰러질 수는 없었다. 보랏빛의 눈이 불길함을 담았다.
흑마법의 정수, 오로지 자신의 목숨을 불태웠을 때만 시전 할 수 있는 마법.
동굴의 벽을 뚫고 새하얀 가시들이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에반의 움직임이 그 가시에 의해 잠시나마 흐트러졌다.
갑작스러운 공격, 기척조차 느낄 수 없던 그 공격에 에반의 눈이 가늘게 뜨였다.
몇 번 봐서 알고 있었다. 흑마법사들이 이런 마법을 시전 하는 것은 오직 한 경우뿐이었으니까.
‘동귀어진.’
그것을 자신이 당해주리라 생각하는 걸까.
자신의 입꼬리가 비틀리는 것을 느낀 에반이 천천히 검을 쥐었다.
나머지 흑마법사 둘 또한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뼈로 만들어진 가시에 담긴 흑마법, 한번이라도 스친다면 쓰러지는 것은 자신이었다.
콰아앙, 땅을 밟는다. 동시에 진동하는 동굴에 흙무더기가 천장에서 쏟아지기 시작했다.
마나가 주변을 휘감아, 이내 새하얀 광휘가 뼈 가시를 천천히 집어 삼키고 있었다.
스으으
폐를 가득 채우는 숨은 서늘했다. 눈을 감는다.
여러 번의 공격은 필요 없었다. 지금 필요한 것은, 오로지 저 흑마법사를 베어낼 단 한 번의 공격.
날개처럼 등에서 피어난 불꽃이 속도를 더했다.
심장에서 피어오른 마나가 온 몸의 근육을 부풀렸다.
마치 수백 개의 다이너마이트를 동시에 터트리듯, 폭발적으로 불어난 힘이 공기를 떨게 만들었다.
화르륵, 마치 불꽃처럼. 그리고 질풍처럼.
단번에 튀어나간 에반의 몸이 공기를 찢어발기며 앞으로 나아갔다.
뿌드득, 검을 꽉 쥔 손에서 피가 튀었다. 놓지 않는다.
자신을 압박하는 압력 또한 흑마법 이었기에,
몸에서 피어오르는 염화를 몸에 덧대어 그 압력을 견뎌냈다.
흑마법사의 몸을 감싼 뼈 갑옷을 바라본다.
뚫을 수 있을까. 여러 생각이 교차했지만, 결국 저것마저 베어낼 수밖에 없었다.
콰가가가각!
그 끝에 독을 품은 뼈가시를 피한다.
몸을 비틀고, 머리를 돌려서. 허나 그 시야의 끝만큼은 흑마법사를 향했다.
흑마법사는 자신이 그 시야를 무심코 피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두려웠다. 자신을 바라보는 저 녹안이 미칠듯이 두려웠다!
동료들이 다가오고 있었지만, 그 먼 거리에서 자신을 도울 방법이라 해봤자 마법의 보조였다.
자신이 죽여야 한다. 허나...죽일 수 있을까.
등골 끝에서 느껴지는 서늘함에 오싹함을 느꼈다.
계속해서 뼈 가시를 쏘아내고 있었지만, 에반은 계속해서 그것들을 피하고 있었다.
부수고, 베어내고, 오히려 그것을 밟고 자신에게 다가옴에 온몸에 전율이 일 정도였다.
“에반 프리드!”
흑마법사를 사냥한다는 기사의 이름은 이미 자신들 사이에서 유명했다.
언젠가는 만날 것이라 생각했다. 허나, 그것이 지금일 거라곤 상상하지 못했다.
빠드득, 악문 이 사이에서 피가 흘렀다. 몇 남지 않은 마력,
자신을 감싼 뼈 갑옷을 제외한다면 공격할 수 있는 횟수는 많지 않았다.
휘익, 허공을 가르는 손길에 거대한 뼈가 튀어나온다.
자신에게 다가오는 저 침입자를 짓누를 만큼 강력한 힘이었으나,
이내 힘없이 베어지는 모습에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화르륵, 분명 자신이 쏘아 보냈던 흑염이 있었건만.
어느 샌가 저 새하얀 불꽃에 집어 삼켜져 이 동굴의 대부분이 새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이토록 허망한 것이었나, 자신이 평생토록 추구해온 마법이란.
그리고 그 텅 빈 눈을 바라보는 에반은, 이윽고 뼈 갑옷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채앵 뼈에 부딪혔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만큼이나 청명한 소리였다.
단단하고, 그것을 휘두른 자신에게 충격이 전해져 올 만큼이나 견고한 갑옷이었다.
이 순간, 세상이 느리게 보이기 시작했다.
극도로 민감해진 감각이 전해져 오는 정보란 꽤나 쓸만했다.
반짝이는 점, 뼈 갑옷에서 피어오르는 그 작은 점은 분명히 가장 견고하지 않은 부분이었다.
내리친다. 한 번이 아니더라도 좋았다.
그것이 안 된다면 여러 번, 이 갑옷이 부서져 저 속에 있을 흑마법사를 가를 그 순간까지.
에반의 검이 끊임없이 허공에 선을 그리기 시작했다.
선을 그린다. 그 한 점에, 평범한 사람이라면 두 번 이상 겹치지도 못할 만큼이나 얇은 그 선에 또다시 선이 그어졌다.
콰드득, 뼈 갑옷을 가르는 소리가 차츰 달라지기 시작했다.
자신을 덮치는 뼈 가시를, 그리고 흑마법을 피하면서도 에반의 공격은 계속 한 곳을 때리고 있었다.
조금, 아주 조금이면 닿는다. 어느덧 동굴을 가득 채울 만큼이나 피어오른 염화가 검에 담겼다.
마지막 일격, 에반이 그렇게 생각했고. 흑마법사또한 그렇게 생각했다.
섬뜩함,
식은땀이 잔뜩 흐르는 와중에도 흑마법사는 아무런 말을 할 수 없었다.
그저 자신을 덮치는 염화를 멍하니 바라볼 뿐. 그 압도적인 기세에 숨이 턱 막히는 듯 했다.
폐가 죄여온다. 자신을 향하는 그 압도적인 공포에, 커진 동공이 빛에 뒤삼켜졌다.
“잘 가라.”
뼈를 파고드는 섬뜩한 소리와 함께 흑마법사의 신형이 뒤틀리기 시작했다.
쇄골을 파고든 검이 그대로 흑마법사의 몸을 베어나가기 시작했다.
그대로 심장이 찢어지고, 그 속에 가득 담겨진 어둠이 흩어져 주변에 비산했다.
허나 에반은 이를 악물었다. 반응이 심상치 않았다.
주변에 흩어진 어둠이 불안정한 기운을 가득 내뿜고 있었다.
익숙한 반응, 분명. 흑마법사들이 ‘무언가’를 일으키려 할 때 벌어지는 현상임을 깨달은 에반이 다급히 거리를 벌리기 시작했다.
촤르르르
달을 머금은 듯, 그 선명한 어둠 속에서 저 홀로 반짝이는 사슬이 주변을 감싸기 시작했다.
물론 닿지 않았다. 에반의 몸을 감싼 불꽃이 마치 보호막처럼 감싸져,
사슬이 다가와 몸을 휘감는 것만큼은 막아내고 있었다.
이렇게 불안정한 기운, 점차 이 주변에서 멀어지려 하는 흑마법사들.
폭발.
그 단어를 떠올린 에반이 사슬을 부수며 앞을 향해 달려 나갔다.
허나 불안정한 기운이 터져 나가는 것이 더욱 빨랐다. 검을 든다.
그리고 주변을 향해 휘두르자 새하얀 염화가 그 폭발들을 가르기 시작했다.
몸을 웅크려 폭발을 최대한 받아낼 준비를 한 그 때에,
쿠구궁
대지가 진동하기 시작했다. 전조, 상상도 못할 거대한 폭발이 일어날 전조였다.
허나 지금 당장 피할 방법은 없었기에, 마나를 이끌어 자신의 몸을 휘감는 것이 전부였다.
투두둑, 흙이 떨어지고. 이윽고 에반이 눈을 감자 눈꺼풀 너머로 새하얀 섬광이 보였다.
이 근방을 집어삼킬 만큼 거대한 섬광.
마나로 몸을 휘감고 있음에도 몸이 떨릴 정도의 힘이었다.
오로지 파괴를 위한 힘, 땅을 온힘을 다해 딛고 있음에도 밀려날 정도의 광풍에 절로 이가 악물렸다.
버틴다, 걷어지는 마나를 다시금 덧대며 그 폭발에 버티기를 잠시.
이윽고 폭발이 잠잠해지자, 에반이 천천히 눈을 떴다.
어두웠다.
처음 느낀 감상이 그것이라, 에반은 검을 뽑으며 주변을 천천히 바라보았다.
웅크린 몸을 천천히 일으키며, 그렇게 어둠 속에서 완전히 일어났을 때.
에반은 비로소 이 어둠이 무엇인지 깨달을 수 있었다.
흑마법의 잔재, 공작의 몸에서 피어오르는 연무와도 같은 그 어둠.
흑무(??).
한치 앞조차 보이지 않는 그 어둠 속에서 들려오는 목소리가 있었으니,
이윽고 고개를 들자 그 방향의 시야만이 뚫려 한 사람의 모습이 눈에 띄었다.
“에반 프리드, 우리의 공적(??)이여. 언젠간 만날 거라 생각했지만, 생각보다도 성격이 급하구나.”
“......”
공기가 떨릴 만큼이나 중후한 목소리였다.
보이는 것은 오로지 그 어둠 속에서도 반짝이는 금발과 보랏빛의 눈.
얼굴을 볼 수 없을 만큼 먼 거리였지만, 에반은 그 흑마법사의 얼굴이 어쩐지 익숙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투욱.
“...안 닿네.”
눈치 채지 못하게 단검을 던져 봤지만, 주변을 감싼 흑무가 마치 생물처럼 그 단검을 막아내고 있었다.
그걸 확인함과 동시에 알 수 있던 것, 이 주변에 있는 것은 저 흑마법사 혼자가 아니었다.
앞, 옆, 뒤. 폭발로 인하여 움푹 파인 이 공간을 감싼 수십 명의 인기척. 돌파하려면, 저들 전부를 죽이려 할 터였다.
아니면, 자신이 죽거나.
그 생각을 한 에반은 헛웃음을 흘렸다. 아무래도, 외통수였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