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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판 속 악녀의 호위기사가 되었다-58화 (58/181)

〈 58화 〉 어둠을 가르고(2)

* * *

덜커덕­ 덜컹­

포장되어 있지 않은 도로, 곳곳에 돌부리가 가득한 도로는 바퀴가 닿을 때마다 마차를 흔들리게 하기에 충분했다.

소란스런 소리, 어느덧 공작저를 향해 움직인 지 이틀 째 되는 지금 머릿속에 맴도는 생각은 단 하나였다.

이 시간이, 조금이나마 길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그런 생각.

툭,

하얀색의 머리카락이 휘날려 콧등에 닿을 때면, 그 간질거리는 감각에 눈살이 찌푸려졌다.

머리카락에서 나는 향은 향긋한 장미향,

늘 아이린에게서 나는 체향과는 달리 조금 더 달콤한 그 향에 시야가 흐릿해졌다.

숨을 들이쉰다. 평정을 유지하기 위해서, 나는 그녀의 기사니 조금은 더 참을 필요가 있었다.

툭,

어깨에 닿는 중량감에 이를 악문다. 덜컹거리는 마차 안, 이해할 수 있었다.

잠든 아이린의 머리가 흔들려 내 어깨에 닿는 것 즈음은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허나 그걸 참아내는 것은 다른 이야기였다. 두근거리는 심장이 가슴을 찢고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벅차오르는 숨, 겨우 힘겹게 숨을 내뱉으며.

고개를 돌려 어깨에 닿은 아이린의 머리를 찬찬히 살펴봤다.

“...미치겠네.”

새근거리는 숨결이 코앞에서 느껴졌다.

그녀의 체온이 고스란히 담긴, 어쩌면 그녀가 지닌 체온보다도 조금 뜨거운 숨이 닿아 내 앞에서 흩어졌다.

늘 차가운 분위기를 담고 있던 눈은 곱게 닫혀있었고,

길게 늘어진 속눈썹이 이따금 내 숨결에 흔들렸다.

그걸 볼 때마다 움찔거리는 손가락은, 분명 내 속에서 들끓는 충동이리라.

마차의 좌석을 조심스레 움켜쥐며, 이내 달뜬 숨을 허공에 쏟아내었다.

어깨가 무거웠지만, 그것보다도 무거운 것은 가슴이었다.

이 흔들리는 마차에서도 미동 없이 어깨에 놓인 아이린의 머리가 너무도 신경 쓰였다.

옷이 있음에도 고스란히 느껴지는 그 머리카락의 까슬거리는 감촉에 헛웃음을 흘린다.

솔직히 말해서, 이 상황이 기꺼웠다.

흔들리는 마차, 어깨에 닿는 사람이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이라면...오히려 반가운 상황이 아니던가.

그녀에게 항상 남은 장미향이 마차를 가득 채웠지만, 그 향은 언제나 새롭게 느껴질 따름이었다.

코를 간질이는, 그리고 더 나아가 마음을 간질이는 그 향을 만끽하며 숨을 들이쉰다.

이틀 전 대화 이후로 조금 변한 그녀의 태도가 이런 상황을 만든 것일까.

미동도 없이 새근 거리는 숨을 내뱉는 그녀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어깨에 가벼운 무게를 더하며, 용케도 잠에서 깨지 않고 내게 기대있을 뿐.

그녀를 따라 조금 눈을 붙이고 싶었으나, 쿵쿵 거리며 뛰는 심장이 그걸 허락치 않았다.

혈류가 몸을 빠르게 맴돌아 신체를 뜨겁게 달구는 것만 같았다.

그래서일까, 내뱉어지는 숨이 이토록 뜨거운 이유는.

마차의 창문 밖으로 보이는 풍경을 응시하다가, 이내 보이는 익숙한 저택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공작저 도착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한결 후련한 표정으로 보이는 아이린은 공작이 쓰러졌다는 사실을 조금이나마 극복한 것 같았지만.

그래도 직접 보는 것과 얘기를 듣는 것은 아무래도 꽤 다르겠지.

만약 흑마법, 즉 저주라면 골치가 아파진다.

아는 마법사가 있다만, 그 사람이 곧바로 와줄 지에 대해서도 미지수였으니까.

어지간해선 잘 해결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유리스 공작령에서도 유난히 눈에 띄는 저택이 눈에 들어온다.

한쪽에 잔뜩 심어진 숲, 언제나 공작의 집무실을 어둠으로 가리는 그 나무들을 바라보기도 잠시.

아직까지도 용케 잠에서 깨어나지 않은 아이린의 볼을 조심스레 쿡, 하고 찔렀다.

“아가씨.”

“...음.”

“이제 일어나셔야 합니다.”

“으으음.”

눈이 가늘어진다. 그녀에게서 들려오는 호흡의 소리가 불안정했다.

심박 소리 또한 그랬기에, 설마 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휘감았다. 혹시, 이미 진즉에 일어나 있는 것은 아닐까.

“일어나 계신 겁니까?”

“......”

그녀의 머리를 조심스레 밀어내자, 스르륵 하고 눈을 뜬 그녀가 허공을 응시했다.

나와 시선을 맞추는 것을 피하듯, 그렇게 조심스레 눈동자를 굴린 아이린은 이내 옅게 한숨을 내뱉었다.

방금까지 어깨에 기대 누워있던 사람이 저렇게 자연스럽게 일어날 수 있던 걸까.

그 모습이 퍽 우스워 저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올 뻔 했다.

“도착했나요.”

덤덤하게, 아무렇지 않게 말하려 한 그녀였지만 나는 그 목소리가 잘게 떨림을 느낄 수 있었다.

허나 구태여 그걸 책잡을 필요는 없겠지.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자, 마차 밖을 바라본 아이린이 조용히 눈을 감았다.

“괜찮으실 겁니다. 어쩌면 그저 과로로 쓰러진 것일지도 모르죠.”

“...그랬으면 좋겠네요.”

그렇게 말하는 아이린의 목소리에 조금 진심이 섞여 있어서,

나는 묵묵히 공작저를 바라볼 뿐이었다. 일이 잘 풀렸으면 좋으련만,

아무래도 그렇게 될 일은 없을 거란 생각에 입맛이 썼다.

#

공작저의 분위기는 침울했다. 공작이 쓰러졌다는 소식을 알린 시녀의 말로는 일부만 알고 있는 사실이라지만,

며칠이란 시간동안 흉흉한 소문이 돌기엔 충분 했던 것일까.

늘 근엄해보였던 경비대장의 얼굴엔 그늘이 잔뜩 끼어 있어, 누가 보더라도 무슨 일이 있어 보였다.

도열한 기사들이 창대를 바닥에 두들기자,

한차례 손을 들어 올린 아이린이 눈살을 찌푸린 채 입을 열었다.

“이런 것은 필요 없어요. 일단 안으로 들어가죠, 다들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도록 하세요.”

그녀가 그렇게 공작저로 들어갈 때,저 멀리서 느껴지는 시선에 고개를 돌리자 크리스 경의 모습이 보였다.

평소와는 달리 한없이 침중한 그 표정에 사태의 심각성을 어렴풋이 짐작했다.

역시, 그냥 쓰러진 것은 아무래도 아니겠지.

사용인들이 아이린을 바라보는 시선이 꽤나 미묘했다.

공작이 쓰러졌다는 소문이 꽤 퍼진 지금,

아마도 공작이 죽으면 승계 받을 사람이라곤 아이린 한 사람 뿐이었으니까.

그들 나름대로 눈치를 봐야할지 고민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싶었다.

씁쓸하지만, 그것이 이 공작저에서 펼쳐지는 현실이리라.

“어느 정도 예상은 하고 있어요.”

문득 들려온 목소리에 고개를 들자, 아이린이 앞을 바라본 채로 말을 이어갔다.

“그대가 알고 있다는 마법사, 곧바로 연락해줄 수 있나요?”

“...해보겠습니다.”

마법사에 대한 얘기를 꺼냈다는 것은, 그녀 나름대로 공작이 어떤 상태인지 짐작했다는 것이리라.

확답은 할 수 없었다. 그를 알게 된지 벌써 시간이 꽤 흘렀으니,

그가 지금도 내 부름에 응답할 수 있는지는 미지수가 아닐까. 허나 가능성을 걸어봐야 했다.

지금 이 시점에 공작을 살릴 가능성이 제일 높은 것은 그가 잘 알고 있을 테니까.

내가 그리 답하자, 아이린은 이렇다 할 대꾸 없이 앞을 향해 묵묵히 걷기 시작했다.

계단을 통해 3층에 다다르고, 이내 그 삐걱거리는 복도를 밟아 용이 아가리를 벌리고 있는 문에 도착했다.

달칵, 익숙한 손놀림으로 아이린이 문을 열자 그 안에서 천천히 어둠이 새어나오기 시작했다.

빛 한 점 들어오지 않는 어두컴컴한 방, 창문이 가려져 빛이 없다고 생각했건만.

환히 열려있는 창문에서는 분명 빛이 들어오고 있었다.

허나 닿지 않았을 뿐, 방 안에서 뿜어져 나오는 어둠에 빛이 집어삼켜져,

한치 앞조차 볼 수 없는 그 심연 속에서 보이는 한 사람이 있었다.

“하.”

저도 모르게 탄식이 새어나왔다. 처음 보았을 때의 모습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진 그가 침대에 누워 있었다.

순간 몸이 저릿할 만큼의 위엄을 뿜어내어, 나를 시험하던 유리스의 가주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앙상한 뼈가 그대로 드러날 만큼 빠삭 마른 몸,

광대뼈가 툭 튀어나와 어찌보면 징그러워 보일 얼굴은 핏기가 가셔 창백하게만 보였다.

시체, 어쩌면 그런 생각이 들 만큼이나 위태로워 보이는 가롯 유리스의 몸에서 피어오르는 어둠이란.

분명히 단 하나의 답을 가리키고 있었다.

“...저주네요.”

공작에서 피어오르는 보랏빛의 연무, 그리고 주변을 잠식하는 시커먼 색의 그림자.

저주라는 것을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으나, 보자마자 그것이 저주의 편린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흑마법사들이 가지고 있는 존재감과 똑같은 그 그림자에 눈살을 찌푸리기도 잠시, 이내 아이린을 바라보며 입을 꾹 다물었다.

무덤덤하게 말을 내뱉은 아이린의 표정을 바라보고 싶진 않았다.

그녀의 심정을 감히 내가 이해할 수 있을까.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아 보이나,

과연 그럴지는 그녀만이 알고 있을 터였다.

손을 뻗어 그녀의 어깨를 감싸려다가, 이내 허공을 움켜쥐며 힘없이 손을 아래로 떨어뜨렸다.

그녀에게 필요한 것은 생각할 시간이었다.

내가 할 얘기는 그녀에게 했으니, 이제는 내가 따로 움직여야 할 시간이지 않을까.

조용히, 그녀가 눈치 채지 못하게 방에서 빠져나오자 익숙한 얼굴이 보여 그 자리에서 흠칫 하고 굳고 말았다.

“크리스 경.”

“공작님의 상태는 보았느냐.”

“봤습니다...아무래도, 꽤 골치 아프게 된 것 같습니다.”

로만 가에 대한 문제를 해결하기도 전에 흑마법사의 저주라니,

어쩌면 누가 의도적으로 이런 일을 벌였으리란 생각이 들 만큼이나 때가 좋지 않았다.

수십 년을 굳건히 버티던 유리스의 가주가 저런 상태가 되다니.

제국을 수호하는 방비가 옅어진다는 소리였고,즉 절멸이 자유롭게 활동하기에 딱 알맞은 시기라는 말이었다.

툭툭,

가슴에 달린 뱃지를 건드리곤 조용히 한숨을 내뱉었다.

신호야 이미 보냈지만, 그가 과연 이쪽을 향해 빨리 올 수 있을까.

크리스 경 또한 이번 일이 예사롭지 않게 느껴지는지, 턱을 쓰다듬으며 공작이 누워있는 방문을 빤히 바라보았다.

“절멸 사태를 이미 한 번 겪었지만, 이번에도 그때와 비슷한 느낌이 드는구나.”

“...그렇습니까?”

“느낌이 좋지 않아. 초장에 잡지 못한다면, 마치 산불처럼 걷잡을 수 없이 퍼져나갈 게다. 베르뎅 산에서의 사건도 그렇고, 묘하게 유리스를 겨냥한 사건들이 이어지고 있어. 아가씨와 공작님을 노리는...그들이 원하는 게 무엇인지는 몰라도, 네 역할이 중요하다는 건 변하지 않는다.”

그 말에 나는 한차례 쓰게 웃을 따름이었다. 알고 있었다.

애초에 이제 절멸이 본격적으로 나타날 시기라는 것 즈음 이전부터 알고 있던 사실이 아니던가.

이미 지고 있는 책임이었고, 내가 그려나갈 미래엔 분명히 공작과 아이린이 존재했다.

“잘 알고 있습니다.”

오히려 너무 잘 알고 있어서 문제가 아닐까.

가슴을 짓누르는 무게에 숨이 턱 하고 막히는 기분이었다.

입꼬리는 호선을 그리고 있지만, 눈은 휘지 않았다.

가늘게 뜨인 눈은 차가운 어둠을 담았다. 무거웠다.

내가 지켜내야 할 모든 사람들이, 내가 지닌 책임이, 내가 그려나갈 미래가.

“...그래, 네가 제일 힘들겠지.”

어깨를 가볍게 두드린 크리스 경이 지나치고,

나는 짙은 어둠을 헤쳐 나가며 조용히 아랫층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삐걱거리는 판자 소리가 거슬렸다.

평소와는 달리 이 복도를 감싼 위화감이 느껴지는 어둠에 숨이 가빠져 오는 듯 했다.

신경질적으로 피어오르는 염화를 거두며, 그렇게 아래를 향해 걸어가기를 잠시.

이윽고 마주친 얼굴에 피식하고 웃음이 새어나왔다.

“로페나, 여기서 기다리고 있었어?”

“괜찮으세요?”

“공작님은 잘 모르겠다. 조금 경과를 지켜봐야 할 것 같­”

허나 로페나는 그게 아니라는 듯, 이내 고개를 저으며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기사님한테 물어본 거예요. 표정이...별로 안 좋아 보이셔서요.”

표정이라, 그 말에 손으로 얼굴을 매만지자 이윽고 꾹 다물린 입꼬리가 만져졌다.

수평을 그리다 못해 축 늘어진, 거울로 보지 않아도 그 표정을 짐작할 수 있었다.

아마도 그리 좋은 표정은 아니리라. 로페나의 눈동자에 서린 것은 걱정이었다.

꼭, 내가 과거에도 자주 보았던 그 표정에 입술을 짓씹었다.

“걱정해주는 거야?”

“걱정이 아니라...뭐어, 걱정은 맞아요. 표정이 영 안 좋으시잖아요.”

“...고맙다.”

허나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 것은 사실이라서, 옅게 웃으며 로페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제는 반항도 하지 않은 채 자신의 머리를 손길에 맡긴 그 모습이 우스웠다.

동생을 닮은 녀석이 내뱉은 걱정 한 마디가, 내게는 꽤나 큰 위안이 된다.

가슴에 얹힌 무게감이 조금은 사라진 것 같아서, 어깨를 으쓱이며 과장스럽게 팔 한 쪽을 들어보였다.

“아주 좋아. 공작님이라면, 저런 병 즈음이야 아무렇지 않게 극복하시겠지.”

“믿고 있어요.”

“누구를?”

“그냥...기사님도, 아가씨도 믿고 있어요.”

“크리스 경은 안 믿는구나? 섭섭해 하시겠네.”

“아아니, 크리스 경도 믿고 다 믿죠.”

크리스 경은 믿지 않냐는 말에 로페나는 다시금 그 입술을 삐죽이기 시작했다.

18살이나 됐으면서, 아직도 하는 짓은 에전의 그 모습을 버리지 못하는 것이 웃기기만 했다.

로페나가 성숙해진 모습을 보면 조금 섭섭할지도 모르겠다.

그저 이렇게, 나중에 커서도 이런 모습을 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

조금 후련해진 기분이었다. 로페나가 가진 가벼운 분위기가 마음의 짐을 조금이나마 덜어주었다고 해야 할까.

그것이 고마워 로페나의 이마를 툭툭 건드렸는데, 녀석은 눈살을 찌푸리며 그 자그마한 입을 벌렸다.

딱딱, 부딪히는 이빨을 황급히 피하자 로페나가 씨익 웃으며 눈을 게슴츠레하게 떠 보였다.

내가 피했다는 사실이 못내 즐거운지, 실실 거리며 웃는 모습에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우씨, 때리지 마요.”

그냥 툭 친 게 전부인데. 어쩌면 그게 녀석에겐 아플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볼을 긁적였다.

빨갛게 달아오르지도 않았는데, 무얼 그리 엄살이 심한 건지.

허나 생각은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갑작스레 공작저에 나타난 기척,

공작저를 감싸는 일종의 결계가 흐트러진 감각에 내 고개가 그 방향을 향해 빠르게 움직였다.

“기사님?”

“...아니야, 여기에 있어.”

고개를 갸웃거리는 로페나를 두고 조심스레 움직이기를 잠시, 이내 그 기척이 익숙한 마력을 지니고 있음에 긴장을 풀었다.

공작저의 결계를 가볍게 뚫을 만큼의 실력자가 몇이나 있을까 했지만, 그래도 이 마나라면 단 한 사람 뿐이었으니까.

저 멀리서 다급히 뛰어오는 기사들을 물리며 천천히 밖을 향해 걷자,

이내 저 멀리서 손을 흔드는 한 남자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이런, 꽤나 오랜만이군 에반 경.”

“신호를 보내자마자 이리 급하게 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다른 사람들에게 언질을 두는 건데, 생각보다 빨리 도착하셨군요?”

얼굴에 화색이 번진다. 공작의 저주를 깨부술 방법 중 가장 가능성이 큰 것을 알고 있을 사람,

그의 보랏빛 눈동자에선 그 어떠한 불길함을 읽을 수 없었다.

그가 지닌 보라색의 눈은, 결코 흑마법과 관련된 것이 아니었으니까.

이 제국에서 마법의 정점에 이른 자. 마력에 통달하여, 마나 그 자체에 물들은 자.

그렇기에 마력이 물든 두 눈은 언제나 영롱한 보랏빛을 띄고 있었다.

아제스트 머윈, 이 제국의 대마법사인 그는 나를 바라보더니 이내 그 길게 늘어진 수염을 매만졌다.

“나를 이리 급하게 불렀다는 것은, 아무래도 유리스의 가주에게 무슨 일이 생겼다는 것이겠지.”

“흑마법입니다. 아무래도...저주 계통으로 보이고요.”

어차피 도움을 구한 이상 그에게 더 이상 숨길 것도 없어 그리 말하자,

그럴 줄 알았다며 고개를 끄덕인 아제스트는 이내 공작저를 향해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아마 자네 역할이 중요할 걸세.”

“저 말입니까?”

“저주의 근원을 끊어내는 것은, 오로지 자네만이 할 수 있으니까 말이야.”

조금은 의미심장한 말을 던지면서.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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