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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판 속 악녀의 호위기사가 되었다-56화 (56/181)

〈 56화 〉 약혼 파기는 신중히(6)

* * *

“...후우.”

아까 만졌던 손의 감촉을 떠올리며, 그렇게 홀로 한숨을 내뱉는다.

잠이 오지 않았다. 애초에...그런 일을 겪고도 잠이 올 리가 없지 않은가.

우리가 잡았던 숙소가 있었지만,

카심 백작이 숙소를 따로 제공해준 탓에 조금 더 좋은 숙소를 얻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숙소에 있던 정원.

그 한 가운데에서, 나는 두근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기 위해 멍하니 서있을 따름이었다.

만약 연인이라는 단계에 다다르는 데에 ‘선’이라는 것이 있다면,

아마도 오늘 그 선을 한 단계 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에스코트라는 명분도 없는, 그저 잡고 싶었기에 손을 잡았을 뿐이었으니까.

‘3년 만에.’

3년이라는 시간을 생각하면 조금 우습긴 했지만, 그래도 장족의 발전이라 할 수 있었다.

긴가민가했던 아이린의 마음을 확실하게 파악할 수 있기도 했고,

어쩌면 이보다도 더 나아갈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기도 했다.

물론, 지금 당장 더 나아가기엔 힘들겠지만.

그나저나, 아이린이 먼저 그런 신호를 보낼 줄은 상상도 못했는데.

그때를 떠올리자 괜스레 웃음이 피식하고 새어나와서, 씰룩이는 입꼬리를 손으로 가린 채 조용히 웃어댔다.

손등을 그렇게 손가락으로 툭툭 건드리고, 막상 말은 못해서 얼굴은 빨개지고.

그녀의 나이가 이제 19살이니, 어쩌면 딱 그 나이에 걸 맞는 행동이리라.

아이린도 나도, 연애에 관련해서 아는 거야 뭐 비슷하겠지만.

나도 누군가를 좋아해보는 건 처음이었으니,

이 이상 어떻게 해야 할 지 갈피도 잘 잡히지 않는 것이 사실이었다.

고백...많이 받아봤다.

하지만 내가 고백을 하게 될 날이 오게 될지도 모른다 생각하니 어쩐지 얼굴이 뜨거워지는 것 같았다.

도대체 뭐라고 말을 해야 잘 될지. 그에 대해 잠시 생각하다가,

이내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천천히 검을 꺼냈다.

조금 들떴던 기분을 진정시키는 데에는, 아마도 이만한 것이 없을 테니까.

예전 같았으면 피아노에 앉았을 텐데, 어느새 검을 자연스럽게 꺼내는 모습이 왠지 우습게만 느껴졌다.

생각해보면, 이젠 원래 세상으로 돌아가겠다는 생각도 잘 하지 않고 있지 않은가.

‘...만약, 미래가 달라지는 것이 확정된다면.’

강제로 나를 원래 세상으로 돌려보내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결국 그런 건 행복한 상상에 불과했다. 아직 조금도 처리하지 못한 절멸, 원작 여주의 등장.

이 두개만 상상해도 머리가 아픈데 아직 한참 남은 미래를 생각한다라.

무언가 놓친 게 있나 생각했으나, 이내 고개를 저으며 검을 쥐었다.

3년 동안 검을 휘두르면서내 마나에 대해 많은 생각을 했다.

남들과는 완전히 다른 이 백색의 마나. 알라르조차 가지고 있던 마나의 색은 푸른 색이라 하지 않았던가.

물론 개인마다 그 색이 조금씩 달랐지만, 이토록 확연하게 다른 백색은 눈에 띌 수밖에 없었다.

촤아악­

허공을 가르는 검의 색은 푸르렀다. 쟌지르와 싸울 때 만들어 냈던 하얀 검신은 자주 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 하얀 검신이 나오는 것은, 오직 흑마법사와 싸울 때만이었으니까. 도대체 이유가 무엇일까.

내 마나가 어둠을 걷어내는 건, 그리고 하얀 검신이 오직 흑마법사와 싸울 때만 나타나는 이유는.

쟌지르가 말했던 그 혈통이란 것에 집중했다.

에반 프리드, 하여 프리드 백작가의 시조부터 조사했지만 알아낼 수 있는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자료가 적은 탓에, 본가에 가지 않는 이상 확실한 자료를 알아내긴 힘들지 않을까.

황태자도, 테오라드 경도 이런 마나에 대해서는 태어나 처음 본다고 하니 내가 알아낼 수 있는 건 고작해야 한 가지 사실 뿐이었다.

어둠을 몰아낸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사특한 것을 몰아낸다. 즉, ‘정화’에 가까운 성질을 지녔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그 ‘정화’라는 성질에 집중했을 때 내가 다다른 것은.

‘용.’

처음에는 그저 우연이라 생각했다.

지금은 그저 전설로만 남아버린 용,

용이 지닌 마나또한 하얀색이었다는 문헌을 읽으며 잠시 체크해두었던 부분에 불과 했으니까.

허나 점점 자료들을 읽을수록, 내가 지닌 마나와 겹치는 부분이 한두 가지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고룡 ‘마베트’가 지녔던 성질이 흑마법과 비슷하다고 생각한다면,

아무래도 용이 지닌 마나와 내 마나는 완전히 같다고 할 수 있었으니까.

흰 색의 염화, 마치 불꽃처럼 피어올라 사특한 모든 것들을 정화하는 특수한 힘.

물론 일반적인 마나와 그 본질적인 힘에서 차이가 있는 건 아니었지만, 분명한 건 내 마나가 특이하다는 점 이었다.

“용혈이라.”

쟌지르가 말한 혈통이라는 것이 과연 그걸 말한 것일까.

허나 어렴풋이, 쟌지르가 말한 것의 뜻을 전부 헤아리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 놓친 것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부분은...아마도 내 본가. 프리드 백작가에 직접 가야 알 수 있으리라.

저벅­

집중이 깨진 것은 저 멀리서 들려오는 발걸음 소리였다.

묵직하고, 그와 동시에 풀이 짓밟히는 소리.

어둠 사이에서 짧막한 인영이 비쳤을 때, 나는 그 인영을 향해 작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이런 시간까지 검을 휘두르고 있을 줄은 몰랐는데. 하기야, 그러니 흑마법사들을 처리할 수 있던 거겠지.”

“...그저, 늘 하던 것을 하고 있던 것뿐입니다.”

“그래. 소문은 들었지만, 참 특이한 마나로군.”

너털웃음을 지은 카심 백작은 이내 자신의 수염을 매만진 채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흥미가 잔뜩 섞인, 이따금 드워프들이 보여주는 특유의 눈빛에 움찔거리자.

카심 백작이 그런 나를 바라보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호위 기사가 너무 자기 일에 소홀한 것이 아닌가? 소가주는 저 안에 있을 텐데, 그러다가 예상치 못한 일이 있으면 어쩌려고.”

“괜찮습니다. 늘 경계하고 있으니까요.”

어느 정도의 경지에 올랐을 때, 이미 내 기감은 더 이상 초인이라 부르기 쉽지 않은 수준에 다다랐다.

눈을 감고 있어도 모든 것을 느낀다. 마치 쟌지르와 싸울 때처럼 극도로 향상된 감각,

언제나 이 주변의 모든 것을 보여주고 있었기에.

이렇게 그녀와 떨어져 있어도 그녀의 기척을 자세히 느낄 수 있었다.

화르륵, 내 말을 증명하듯 주변에서 피어오르는 염화를 본 카심 백작이 껄껄 웃었다.

“하얀색의 마나라, 꽤나 오랜만에 보는 마나군. 아마도 한 300년 정도 된 것 같아.”

“...300년 입니까.”

시간 개념이 다른 건지, 300년을 마치 어제 있던 일처럼 얘기하는 그의 모습에 헛웃음을 흘렸다.

허나 그의 말에서 중요한 점은분명 나와 같은 마나를 본 적이 있다는 것이 아닐까.

하여 묻자, 하늘을 바라보며 기억을 회상하던 카심 백작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드워프의 수명은 약 천 년에 달하지. 인간의 10배, 보통의 인간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아득한 시간을 보내기에 우리는 그리 많은 것을 기억에 담으려 하지 않네.”

“특이하군요. 오히려 많은 것을 기억할 줄 알았는데요.”

“머릿속에 든 것이 많다는 건, 그만큼 아파할 것이 많다는 얘기니까.”

머리를 쿡 찌르며 대꾸한 카심 백작은 한차례 씨익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

“그럼에도 300년 전은 잊을 수가 없지. 제국에 흑마법사가 처음 등장했을 때, 그 흑마법사를 물리친 건 황제도 기사단장도 아닌. 단 한 마리의 용이었으니까.”

용, 그 단어에 내 눈이 커졌다. 카심 백작 또한 용의 마나를 알고 있는 걸까.

내가 다급히 물으려 하자, 손을 휘휘 내저은 그가 나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너무 급하게 생각하진 말게. 그저 추측에 불과해. 자네도 아직 마나에 대해 확신을 가지고 있는 건 아닐 테고, 천천히 생각해도 좋아.”

“...제 마나가 용이 가진 것과 비슷한 건 확실합니까?”

“비슷해. 아니, 어쩌면 정말 용이 가진 마나일지도 모르지.”

그렇게 말한 카심 백작은, 잠시 턱을 툭툭 두드리며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검은색의 눈동자가 달빛에 비쳐 반짝였다. 일렁이는 눈.

그는 아마도나를 그 용이라는 존재와 비교하는 것이리라.

화르륵, 한번 터져 나왔던 마나는 계속해서 내 몸에 붙어 타오르고 있었다.

내가 뿜어내는 이 마나에서, 카심 백작은 과연 어떤 것을 보고 있을까.

허나 이윽고 그의 입에서 나온 대답이란, 내가 상상한 것과는 궤를 달리했다.

“혹시 자네의 가문이 어떻게 시작했는지 알고 있나?”

“네...?”

“프리드 백작가의 기원, 어쩌면 자네의 마나는 그것과 관련이 있을 지도 모르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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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반, 잠을...안 잔 건가요?”

“그냥 조금 설쳤을 뿐입니다.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방문을 열고 나오는 아이린에게 작게 고개를 숙이자, 문 옆에 있던 나를 발견한 그녀의 눈이 가늘어졌다.

명백히 걱정이 묻어나는 눈이었지만, 나는 애써 웃으며 괜찮다고 답했다.

잠을 잘 수 있을 리가 없지. 카심 백작에게 들은 말이란, 아무래도 꽤 많은 생각이 필요했으니까.

...아무래도 곧 본가에 들려야 하지 않을까.

허나 그 전에 가장 먼저 확인해야 할 것은, 내가 방 한 구석에 버려두었던 그 편지였다.

에반 프리드에게 왔던, 꽤나 오래된 그 낡은 편지. 진즉에 그 내용을 확인했다면 조금 편했을 텐데.

그 생각에 한숨을 잠깐 내쉬다가, 이내 아이린의 등을 바라보며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편히주무셨습니까?”

인사차 묻자 아이린이 나를 힐끔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제 그런 일이 있었는데도 잘 잔 걸까. 괜히 이상한 마음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조금 유치하지만, 괜히 나만 어제의 일 때문에 깊게 생각했단 생각에 입꼬리가 살짝 비틀렸다.

그러니 아주 조금, 살짝 장난 쳐볼까.

“저는 잘 못 잤습니다.”

“그래 보여요. 푹 쉬랬더니, 왜 잠을 안 자고 거기 서있는 거예요.”

눈 밑을 매만지며 그리 말하자, 아이린이 걱정스런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런 눈빛이 미안해 머뭇거리기를 잠시, 이내 그녀를 스쳐지나가며 조용히 말을 내뱉었다.

정말 아무렇지 않게, 아주 가볍게 툭.

“아가씨 때문이죠.”

“왜 저 때문...”

“어제 그렇게까지 하셨는데, 어떻게 잠이 오겠습니까?”

그 말에 잠시 눈살을 찌푸린 그녀는, 내가 한 말의 뜻을 알아차렸는지 주먹을 꽉 쥔 채 입술을 다물었다.

그러게 왜 그리 편히 주무셨습니까. 그런 마음을 담아 그녀를 장난스레 쳐다보자, 아이린이 내 눈빛을 받으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누가 들으면 오해하겠어요.”

“맞는 말 아닙니까. 아무도 없는 곳에서 손가락을 툭툭, 저를 막 매만지시고­”

“손만, 잡았잖아요...”

“그게 더 오해할 만한 말입니다.”

손만 잡았다니, 그게 오해하기 더 쉬운 말이겠지.

꽁한 표정을 지은 아이린을 보자 어쩐지 웃음이 새어나와서, 이내 옅게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장난입니다. 그러니 표정을, 윽.”

“...조금 진중해지세요. 전에는 안 그랬는데, 요즘엔 왜 그러는 건지.”

옆구리를 세게 누른 그녀가 나를 흘겨보기도 잠시,

그렇게 앞을 향해 걷던 아이린이 발걸음을 멈춘 채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무언가를 말하려는 듯, 입술을 달싹이던 그녀는 이윽고 옷깃을 살짝 부여잡은 채 옅은 숨을 내뱉었다.

아니, 숨이 아닌 목소리였다. 어쩌면 내가 아니었다면 듣지 못했을, 그런 아주 자그마한 목소리.

“나도...잘 못 잤어요. 그대 때문에.”

부끄러운 것인지, 그 말과 함께 곧바로 시선을 돌린 그녀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이내 피식 웃으며 그녀의 뒤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여러모로 수줍음이 많은 아가씨였다.

허나 그런 면이 좋은 것이 아닐까. 가끔 적극적인 모습을 보이면서도,

자신이 한 행동에 부끄러워 하는 것이 아이린이었으니 말이다.

문득 붉어진 뺨이 살짝 보여서, 손을 뻗으려다가 거두었다.

마음 같아선 머리를 쓰다듬고 싶지만, 그녀는 로페나가 아니었으니까.

그렇게 계단을 타고 숙소 아래로 내려가자 카심 백작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제 얘기했던 것을 떠올리며 흠칫 놀라자 그는 나를 바라보곤 피식 웃어보였다.

“편안히 주무셨습니까? 제가 준비해둔 숙소가 불편하지는 않으셨을까 걱정이 되는 군요.”

“그대가 이렇게 준비해둔 덕에 편히 쉴 수 있었어요. 고마워요.”

“유리스의 소가주님께 고맙다는 말을 듣다니, 평생 잊지 못할 것 같습니다. 흐흐.”

한차례 웃은 카심 백작이 손을 뻗어 소파를 가리키자,

한 구석에 앉은 아이린이 자연스레 앞에 놓인 차를 홀짝였다.

잠시 침묵이 오가고, 조금 시간이 흘렀을 때 카심 백작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어제 부탁 받은 아티팩트, 만드는 것이 가능할 것 같습니다. 새벽 내내 조사해봤는데, 아무래도 자금만 있다면 확실하게 만들 수 있을 것 같더군요.”

“다행이네요. 자금은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유리스에서 전부 지원해줄 테니. 그리고 한 가지를 덧붙이자면, 백작과 유리스 외의 그 어떤 이도 이 사실을 알지 않았으면 해요.”

“여부가 있겠습니까. 아티팩트 자체는 이전부터 구상하던 것과 맞아 떨어지는 부분이 있어 착착 진행되겠지만, 그걸 감안해도 한달 정도는 걸릴 것 같습니다.”

“...그 정도면 충분히 빠른 거겠죠. 차질이 생기지 않길 바랄게요.”

아이린이 그리 말하자, 이내 카심 백작이 그 널찍한 가슴팍을 두드리며 주먹을 쥐어 보였다.

걱정하지 말라는 듯, 그 자신 만만한 태도에 분위기는 자연스레 풀어지고.

이내 아티팩트 얘기가 아닌 이런저런 얘기가 오가기 시작했다.

그도 그럴 것이, 카심 백작은 이 제국에 얼마 존재 하지 않는 ‘야장’중 하나였다.

드워프 장인 중에서도 그 실력을 인정받아 그들 사이에서 최고라는 평을 받는,

그야말로 가장 뛰어난 손재주를 지닌 이라 할 수 있었으니까.

비록 이번에는 흑마법을 밝혀내는 아티팩트를 만들기 위해 만났지만, 그와 좋은 관계를 만드는 것은 서로에게 좋은 일이었다.

카심 백작에게는 5대 가문이라는 동아줄을 쥐게 되는, 그리고 유리스에게는 뛰어난 장인과 연결될 수 있는 기회였으니까.

비록 마법과 오러가 있는 시대였지만, 그럼에도 한 가문이 지닌 야장이란 존재는 결코 가벼이 여길 수 없었다.

당장 이런 마법검을 뚝딱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 야장이란 존재이지 않은가.

그렇게 아이린과 카심 백작의 대화를 지켜보길 한참,

저 멀리서 들려오는 다급한 발소리에 눈이 가늘게 뜨였다.

예민해진 청각이 호흡소리를 잡아낸다. 다급하고, 또한 벅찬 호흡 소리.

아무래도 보통 소식이 아닐 거란 생각에 문을 바라보자,

이내 문을 열고 들어온 이가 아이린을 바라보며 입술을 달싹였다.

우리와 함께 왔던 시녀인 그녀는, 무언가 안 좋은 소식을 들은 것인지 창백하게 질린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순식간에 무거워진 분위기, 이윽고 시녀가 아이린의 귓가에 무언가를 속삭였을 때. 나는 눈살을 찌푸린 채 얼굴을 쓸어내렸다.

‘...잊고 있었어.’

시녀가 아이린에게 얘기한 것은 아주 짧은 말 하나였다.

‘공작님이 쓰러지셨다.’ 허나 그 말과 함께 떠오르는 기억은 분명 내가 기억하는 미래의 일이었으니, 그건 바로.

공작이 올해 죽는다는 것.

입 안이 쓰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제 내가 놓치고 있던 것이 무엇인가 했더니, 바로 공작이 이렇게 된다는 거였나.

소설처럼, 내가 알고 있는 원작의 비극처럼 흘러가게 둘 수는 없었다.

그걸 대비하기 위한 3년이 아니었던가.

다급히 자리에서 일어나는 아이린을 따라 움직이며, 이전에 했던 다짐을 다시금 마음속으로 떠올렸다.

공작을 살린다.

설령 그것이 불가능할지라도, 가능케 하는 것이 내 일이리라.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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