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5화 〉 약혼 파기는 신중히(5)
* * *
잠깐, 아주 잠깐 아이린이 달라졌다고 생각했다.
이전과는 달리 적극적인 모습을 보이는 것이, 그녀가 나름대로 어떤 결심을 했으리라 생각했는데.
“아가씨.”
“.......”
“아까 저를 벽에 밀치던 그 분 어디 가셨습니까.”
“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예요.”
아무래도 그저 한순간의 용기였던 것 같았다.
자기가 한 말이 계속 머릿속에 떠오르는 건지, 이따금 눈을 질끈 감는 모습에 웃음이 터져 나왔다.
자기가 그리 말해놓고 부끄러워하는 것이 귀엽지 않은가.
겉으로 보이는 표정은 여전히 차갑기 그지없었으나,
빨개진 귀 끝을 보곤 아이린을 빤히 쳐다보았다.
“...무얼 그리 보나요.”
“아가씨요.”
“아니, 그런 걸 묻는 게 아니잖아요.”
황당하다는 듯, 나를 흘겨보는 시선에 볼을 긁적였다. 틀린 말은 아니지 않은가.
어쨌든 내가 아이린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었으니,
금세 붉어진 그녀의 볼을 쳐다보길 잠시. 이내 그녀를 보고 있던 이유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저랑 있겠다 하지 않으셨습니까. 무얼 하실 생각입니까?”
이 부근의 지리는 조금도 알지 못했다.
이전에 아이린과 공작령을 다닐 때와는 다르게, 이 주변에서 무엇이 유명한지 하나도 모른다는 소리였다.
내가 주도적으로 무언가 할 수도 없고, 아이린 또한 마찬가지일 터.
이대로 숙소에 머물 생각은 없었기에 한 말이었지만, 아이린은 그 말에 옅게 미소 지었다.
그런 것은 걱정하지 말라는 듯, 꽤나 자신 있어 보이는 미소였다.
#
‘...흠.’
아이린은 며칠 전 자신이 했던 행동을 떠올렸다. 3년간의 조사,
그를 통해 만들어낸 증거들은 확실한 물증이라 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런 증거들을 확실한 물증으로 만들어낼 방법은 오직 하나.
아티팩트.
그걸 만들어낼 방법이 카심 백작에게 도움을 구하는 것 즈음은 잘 알고 있었기에,
아이린은 고민을 거듭했다. 이목을 이끈다.
마침 카심 백작령에서 정기적으로 여는 무도회의 초대장이 있는 상태였다. 그렇다면, 에반과 무도회를 가는 것이 옳을 터.
‘사심은 아니야.’
아델 로만과 가지 않는 일은 최근 들어 빈번했으니, 사람들 또한 그에 대해 큰 의문을 지니지 않았다.
다만 사이가 조금 틀어졌다는 말이 나오곤 했으나...그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어차피 이번 일이 제대로 끝을 맺는다면, 그 끝에 있을 것은 약혼의 파기였다.
신중하게, 그리고 치밀하게.
그 과정을 로만이 눈치 채게 할 필요는 없었다.
로만과의 관계는 당분간 유지하되, 이 이상의 관계로 나아가지 않는다.
툭.
손가락으로 탁자를 두드리며 고민하기를 잠시, 이내 에반의 얼굴을 떠올리곤 눈살을 찌푸렸다.
카심 백작과 일이 잘 성사되더라도 곧바로 공작령으로 돌아올 일은 없을 게 분명했다.
아티팩트 제작 과정을 확인할 수도 있고, 카심 백작과 대화한 뒤 곧바로 떠나는 것은 모양새가 영 좋지 못했으니까.
그럼 남은 시간 동안 무엇을 해야 하는 걸까.
눈을 가늘게 뜬 채 고민하고 있을 무렵, 옆에서 들려오는 까드득, 하는 소리에 아이린의 고개가 돌아갔다.
“...아.”
“로페나? 언제부터 거기에 있던 거니.”
“아까부터요. 아가씨 바빠 보이셔서 조용히 있었어요.”
그러면서도 쿠키를 오도독 씹어 먹는 로페나의 모습을 아이린은 그저 멍하니 바라볼 따름이었다.
로페나를 만난 지도 벌써 10년이 넘은 것 같은데, 조금도 변하지 않는 것은 어째서일까.
허나 차라리 그 편이 나았다. 로페나가 변했더라면, 오히려 어색함을 느꼈으리라.
그렇게 로페나를 빤히 바라보다, 이내 퍼뜩 하고 떠오른 생각에 침음을 흘렸다.
만약 이대로 카심 백작을 만난다면, 그 이후로 숙소에만 박혀있어야 할 것이 뻔했다.
공작령과는 달리 그곳에 무엇이 있는지 아무것도 모르지 않은가.
에반도 숙소에 계속 있는 것을 싫어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차라리 자신이 데리고 나가는 편이 나을 터였다.
답답한 실내에 있는 것보다야, 밖에서 산책이라도 하는 것이 훨 나을 테니까.
그렇게 생각한 아이린은 이내 로페나를 향해 입을 열었다.
카심 백작령에 무엇이 있는지 알아오라는, 그런 명령이었다.
장장 3일에 걸쳐 알아낸 정보, 질릴 만큼이나 봤던 것이 그것이었기에 아이린은 자신이 있었다.
물론 에반에게 그렇게 말한 것은 약간의 충동이 섞여있긴 했지만,
어쨌든 자신이 생각했던 것처럼 밖으로 나오지 않았는가.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에반을 쳐다보곤 옅게 웃은 아이린은, 이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 주변은 좀 알고 있어요.”
“아가씨만 따라다니면 되겠군요.”
그 말에 에반이 한 차례 웃자, 아이린은 눈살을 찌푸리며 그를 바라보았다.
말만 그러지 말고 실제로도 그랬으면 좋으련만.
다른 이에게 한 눈 팔지 않고, 오로지 자신만 따라다녔으면 했다.
허나 그걸 입 밖으로 내뱉을 용기가 나지 않아서, 아이린은 이내 옅게 한숨을 내쉬었다.
#
그렇게 무도회장에서 완전히 빠져나왔을 때, 아이린의 발걸음은 그야말로 거침이 없었다.
마치 이 주변에 무엇이 있는 지 전부 아는 것처럼,
주변을 스윽 훑자마자 곧바로 움직이는 모습이란. 아무리 봐도 조금 아는 사람의 모습이라 할 수 없지 않을까.
‘조금 안다더니, 아예 조사하고 온 것 같은데.’
허나 일부러 모른 척했다. 괜히 그런 모습을 트집 잡았다간 분위기만 어색해지지 않겠는가.
조금은 들떠 보이는 모습에 피식 웃기도 하고,
손가락을 들어 어느 방향을 가리키는 모습에 고개를 끄덕이며 같이 움직이기도 했다.
천천히 어둠이 깔리기 시작한 거리는, 내가 아는 공작령보다 조금 사람이 많아보였다.
아마도 무도회가 근처에서 열리는 탓일까,
귀족들에게 한 건 해보겠다며 아직까지 문을 닫지 않은 상점들이 즐비하여 대낮처럼 환한 불빛이 거리를 감싸고 있었다.
어찌 보면 운이 좋다고 해야 할까.
만약 오늘이 아닌 다른 날이었으면 볼 것은 커녕 정말 걷다가 숙소로 돌아갔어야 했을 테니까.
아이린의 기분도 나빠 보이지 않으니, 그냥 오늘은 그녀가 하는 대로 어울려주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이렇게 나오니 예전 생각도 나고 좋지 않은가.
3년 전이었던가, 아이린의 생일 전날 공작령의 시가지를 거닐었던 생각을 하자 어쩐지 흐뭇한 미소가 지어졌다.
만약 그날 세이렌을 가지 않았더라면 지금 어땠을지.
어쩌면 아이린과 여전히 그저 그런 사이였을지도 몰랐다. 지금처럼 아슬아슬하게, 닿을 듯 말 듯 바라보는 사이가 아니라.
그럼 조금 씁쓸했겠지. 아이린이 이따금 보여주는 매력적인 모습도 보지 못했을 거고.
아이린이 이렇게 나오자고 한 이유 즈음이야 진즉에 알아차리고 있었다.
내가 황태자를 만날 때면, 그리고 이렇게 무도회에 나올 때면 늘 눈썹을 내리깔지 않던가.
무언가가 불만스럽다는 듯, 내가 그런 행동을 할 때면 눈빛이 스산해지는 것도. 이유를 모르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다만 무시할 뿐, 아직까지는 이런 관계를 조금 이어나가고 싶었다.
그러기 위한 3년이었다. 그녀에게 조금이나마 마음을 빠르게 밝히기 위해서,
원작 여주가 등장한다한들 그녀가 악녀로 몰려 비극을 맞이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
그녀에게 조언을 했고, 황태자에게 부탁하여 경지를 조금이나마 올리려 애썼다.
아이린이 다른 귀족과 대화할 때 부드럽게 말할 수 있도록 돕기도 하고,
내가 아닌 완전히 다른 세력이 그녀에게 충성할 수 있도록 신경쓰기도 했다.
하여 지금은, 원작 여주가 온다한들 그녀를 쉽게 무너트릴 수 없을 것이 분명했다.
아직 유리스의 가주는 건재했고, 그녀의 정신이 피폐해지지도 않았다.
그 모든 것이 내 덕이라 할 수는 없더라도 어느정도 내 지분이 있음은 부정하지 못하리라.
허나 마음을 밝히는 것은 조금 다른 이야기였다.
주종관계, 그녀의 기사로써 서임한 내가 마음을 고백한다한들 연인으로 맺어질 수 있을까.
아이린과 내가 서로를 생각하는 마음이 같다한들,
곧바로 이어지는 것은 아무래도 꽤나 힘들 터였다. 게다가 지금은 그녀의 약혼자가 있기도 했으니까.
‘...로만.’
내가 아델 로만을 싫어하는 이유에 아이린이 없다는 것은...아마 거짓일 터였다.
원래라면 로만과 흑마법사과 연관된 것이 가장 좋겠지만,
사실 로만이 흑마법사와 연관이 있기를 바랐다. 그래야 약혼 파기가 조금 자연스레 이루어질 테니까.
이기적이라 해도 좋았다, 허나 아이린과 관련된 모든 것에서 만큼은.
어느 하나 포기하고 싶지 않은 것이 사실이었다.
허나 상념은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이런 생각을 하기엔, 아이린과 이렇게 단둘이 있을 시간이 너무도 적지 않은가.
잠시 고개를 흔들며 다시금 시선을 아이린을 향해 두었다.
찰랑거리는 백발이 달빛에 닿아 부서지는, 그 새하얀 선을 보며 옅게 웃는다.
“무엇을 찾으십니까?”
“...그냥, 이 근처에 유명한 곳이 하나 있다고 들은 것 같아서요.”
“천천히 걷는 것도 나쁘지 않습니다. 그냥 이렇게 둘러만 봐도, 그것 나름대로의 재미가 있으니까요.”
이 여유가 좋았다. 이 화려한 거리에서 단둘이 있을 수 있는, 이 시간이 좋았다.
하여 그리 말하자, 나를 빤히 바라본 아이린이 이내 고개를 조심스레 끄덕였다.
구태여 무언가를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녀가 바라는 것이 무엇일지는 몰라도, 적어도 내가 원하는 건 단둘이 있을 수 있는 시간이었으니까.
한 달, 그 시간이 지나면 로만의 처우가 결정된다.
그 전까지 누릴 수 있는 여유는 최대한 만끽해야 하지 않을까.
아마 로만이 흑마법사라는 사실이 밝혀지면여러가지로 꽤나 바빠질 테니까.
아이린도 나도, 이렇게 있을 수 있는 시간은 이번이 마지막일지도 모르리라.
그렇게 거리를 걷는다. 약속하기라도 한 듯 발걸음을 맞추며,
화려한 등이 떠오른 거리의 풍경을, 주변을 돌아다니는 수많은 사람들의 인파를 바라본다.
“축제 때가 생각나지 않습니까. 예전에, 그 건국제때 말이죠.”
“...그러게요.”
그때의 아이린과 지금의 아이린이라. 비교하기가 민망할 정도였다.
그녀또한 그 때의 기억이 떠올랐는지, 나를 힐끔 쳐다보며 입술을 달싹였다.
그리 깊게 생각하지는 않았는데, 그녀는 그 기억이 영 맘에 들지 않는지 눈살을 찌푸렸다.
“저랑 있는 게 맘에 들지 않으십니까?”
하여 장난스레 묻자, 아이린이 화들짝 놀라며 나를 바라보았다.
“그런 게 아, 아니에요. 갑자기 왜 그런 말을 하고 그래요. 사람 미안해지게.”
“그럼 그런 표정 안 지으셨으면 합니다. 저는 좋은데, 아가씨는 영 기분이 안 좋으신 거 같아서요.”
“...그냥 이렇게 걸어도 괜찮나 싶어서 그래요. 나오자고 해서 나왔는데, 계속 걷고만 있으니까요.”
“저는 괜찮은데, 가고 싶은 곳이라도 있으십니까?”
그 말에 아이린은 잠시 나를 빤히 바라보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그 뒤로는 이렇다할 대화가 오가지 않았다. 그저 그녀가 향하는 방향을 향해 따라 걸을 뿐,
가끔 힘들지 않냐고 물었지만 그녀는 괜찮다며 옅게 웃을 뿐이었다.
아무래도 그녀가 알아 보았던 곳들 중 하나로 가는 것이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며 한참을 걸었을 때.
나는 눈앞에 보이는 풍경에 작게 입을 벌릴 수밖에 없었다.
이제는 완전히 깔린 어둠, 허나 앞에 보이는 것은 그 어둠을 걷어낼 만큼이나 찬란한 빛무리였다.
세이렌, 그 비밀 가득한 호숫가에서 보았던 숲이 흩어지는 광경과 비슷하게 보이기도 했다.
쏟아지는 별들, 그리고 그 별을 나무에 걸어둔 것만 같은 모습에 절로 탄성이 새어나왔다.
“카심 백작령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을 꼽자면, 아마 여기일 거예요.”
“마법이라도 되는 겁니까? 반짝이는 열매라니...”
그 말대로, 내가 감탄한 것은 나무에 주렁주렁 걸린 저 반짝이는 열매들 탓이었다.
달이 뜨지 않는 그믐날인 오늘, 그 탓인지 새하얀 빛을 빛내는 열매들의 모습은 그야말로 시선을 빼앗기에 충분했으니까.
내가 이전에 살던 현대에서는 결코 볼 수 없던 장면.
내가 그런 모습을 보고 신기해하자, 이내 나를 바라본 아이린이 살짝 웃으며 입을 열었다.
“오직 카심 백작령에서만 자라나는 열매죠. 빛의 정령들이 내뿜는 기운을 받아들여 피어나는 꽃에서 열려서, 아마 이맘 때에만 볼 수 있을 거예요.”
“...정령.”
정령이라는 것이 있다는 건 알았지만, 막상 그 잔재를 마주하니 어째 신성한 기분이 들 정도였다.
하얀 빛만 아닌, 푸르스름한 기운을 은은히 내뿜는 것은 정령이라는 존재 탓일까.
마치 별을 나무에 걸어둔 것 같았다. 어릴 때 그런 상상을 하곤 하지 않는가, 하늘에 있는 별을 만지고 싶다는 그런 생각.
이곳을 정원이라 칭한다면, 아마 별의 정원이라는 말이 어울릴 터였다.
하얗고, 푸르스름한 빛을 내는 저 열매들은 분명 별이란 이름이 부족하지 않을 만큼 아름다웠으니까.
하여 조심스레 그 빛을 향해 손을 뻗자,
문득 심장에서 따끔거리는 통증이 일어 가슴을 움켜쥐었다.
“에반, 왜 그래요?”
“괜찮습니다. 그냥, 갑자기 이상한 느낌이 들어서요.”
“...놀랐잖아요. 조심 좀 해요.”
아이린이 다급하게 물었지만, 나는 손을 살짝 내밀며 괜찮다고 덧붙이며 그 열매를 조심스레 바라보았다.
느낌이 이상했다. 마치...내 마나와 공명한다 해야 할까.
심장에서 통증이 느껴졌지만, 정확히는 심장이 아닌 그 속에 담긴 마나가 반응하지 않았던가.
허나 아이린이 걱정스레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져서, 이내 열매에 대한 생각을 거둔 채 멋쩍게 웃어보였다.
“정말 괜찮습니다. 그냥 잠깐 위화감이 든 것뿐이니까요.”
“그래도...하아, 됐어요. 그냥 걷죠. 괜히 열매 만져보려 하지 말고요.”
그리 말하는데 어찌 거절할 수 있을까.
눈동자에 보이는 것은 만연한 걱정이라,
나는 어쩔 수 없이 열매에 대한 관심을 끈 채 나무 사이를 걷기 시작했다.
아직 여름이 오기엔 이른 계절이었다.
선선한 바람이 불어와 뺨을 간질여서, 이따금 바람을 타고 날아오는 나뭇잎이 얼굴에 닿기도 했다.
툭,
툭.
걸을 때마다 손끝이 스쳤다.
아이린의 손이 이따금 손등을 스칠 때마다 괜스레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 같았다.
잡을까, 아니면 참아야 할까. 여러 생각이 머릿속을 휘몰아쳤다.
허나 참았다. 아직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지금 이것은 그저 우연일 뿐이라며,
걷다보니 손끝이 스치는 것일 뿐이라며 치밀어 오르는 충동을 억눌렀다.
그럼에도 아이린의 손은 계속 내 손등을 스쳐지나갔다.
점점 그 주기가 짧아지고, 이제는 노골적으로. 아이린의 손가락이 꼼지락 거리며 내 손등을 간질였다.
도대체, 나보고 어떻게 참으라는 말인가.
여전히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앞을 바라보는 아이린의 모습에 입꼬리가 비틀렸다.
붉게 물든 귀 끝, 손등을 스쳐지나가는 아이린의 손가락.
나는 바보가 아니었고, 이내 내 손이 그녀의 손을 천천히 덮기 시작했다.
...따듯했다.
에스코트를 할 때 잡았던 것처럼 장갑이 있는 것이 아닌, 맨살이 온전히 드러난 아이린의 손은 부드러웠다.
늘 품고 있는 차가운 분위기와는 달리 한없이 따스한 그 체온을 느꼈다.
두근거리는 심장, 동시에 몸에서 달아오르는 열기는 서늘한 바람을 순식간에 흩어지게 만들었다.
손을 움켜쥠에도 아이린은 여전히 침묵을 지켰다. 붉었던 귀 끝이 더욱 빨갛게 달아오르고,
그 뺨에 옅은 홍조가 생겨난 것이 눈에 띄었다.
무어라 말을 내뱉고 싶었지만, 달싹이는 입술 사이로는 그저 달뜬 숨만 새어나올 따름이었다.
허나 이 침묵이 좋았다. 그저 이렇게 손이 맞닿아 이어져있는 이 순간이 너무도 좋아서. 그렇게 멍하니 앞을 바라보았다.
아이린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나처럼 이 순간에 설레어 심장이 두근거리고 있을까.
이 순간이 조금이나마 길게 이어지기를, 이렇게나마 닿은 체온을 쭉 기억할 수 있기를 바라고 있을까.
허나, 지금은 이런 생각을 품는 것 정도가 한계이리라.
서로의 마음을 표현하기엔 너무 이른 시기였다.
그저 이렇게 맞잡은 손의 체온을 느끼며, 이 시간이 오래토록 이어지기를 바라는 것이 전부일 뿐.
나도, 그리고 아이린도 그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아무런 말을 하지 않은 채, 그저 이 자리에 멈춰선 채 앞을 바라보고 있는 게 아닐까.
나무에 달린 열매가 반짝여, 이내 그 빛이 우리의 주변을 천천히 감싸는 듯 했다.
밤 그늘이 옅어지고 찬란한 빛무리가 주변을 서서히 애워쌀 때.
아무도 없는 그 별의 정원에서, 나는 이 순간의 영원을 바랐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