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4화 〉 약혼 파기는 신중히(4)
* * *
생각해보면, 이렇게 손을 잡은 것은 이번이 처음인 것 같았다.
여러 이유를 대며 손을 잡았지만 실상 깍지를 낀 것은 처음이 아닌가.
그 생각을 떠올리자 묘한 열기에 볼이 간지러웠다.
아이린을 놀리고 싶단 생각에 한 것인데, 내가 더 부끄러워했다간 그녀에게 두고두고 놀림 받으리라.
한편 아이린은 부끄럽다는 것을 숨길 생각이 전혀 없는 듯 보였다.
귀 끝이 딸기처럼 붉어진 것을 보면, 아마 이 상황을 꽤나 부끄럽다 생각하는 것이 아닐까.
다른 사람들에게 얼굴이 보이면 어쩌려고 그러는 건지,
하여 잡은 손을 살짝 당기자 아이린이 나를 바라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왜, 왜요.”
“그리 부끄러워하시면 어떡합니까? 남들이 오해하겠습니다.”
사실 오해하더라도 별 상관은 없었다. 누가 그 유리스를 상대로 이상한 소문을 퍼트리려 하겠는가.
만약 알더라도 조용히 저들끼리 속닥일 뿐, 그 소문이 이곳저곳으로 퍼져나갈 것까지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물론 아이린도 그 사실을 알고 있겠지만, 유난히 당황한 모습을 보이는 그녀는 머뭇거리며 이내 고개를 푹 숙였다.
꼼지락 거리던 손가락도 잠잠해져, 그 모습에 나는 피식 웃곤 아이린을 슬쩍 바라보았다.
할 말이 많은 듯, 그녀도 모르게 튀어나온 아랫입술이 반들거렸다.
예전에는 이런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는데, 어느 순간부터 확실히 허들이 낮아졌다 해야 할까.
다른 말로 하자면, 이전과는 달리 놀릴 맛이 있었다.
예전 같았으면 놀리는 건 상상도 못했을 텐데, 어쩌다 이렇게 된 건지.
허나 지금 이 무도회의 온 목적을 상기하며, 짓고 있던 미소를 지운 채 시선을 옮겼다.
물론 아이린과 무도회를 조금 더 즐길 수도 있겠지만,
그런 건 이곳에 구태여 온 목적을 달성한 뒤에 하더라도 늦지 않을 테니까.
아이린 또한 그런 생각을 떠올렸는지, 붉어진 얼굴을 조심스레 매만지며 이내 앞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이번 무도회에 온 이유,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이끈 이유.
그건 카심 백작의 흥미를 이끌기 위해서가 아니던가.
로만과 흑마법사의 연관을 밝혀내기 위해서는 그가 가진 기술력이 필요했다.
마법공학 기술이 가미된 물건, 일명 ‘아티팩트’라 불리는 것이 꽉 막힌 작금의 사태를 타개할 유일한 방책이리라.
저벅
그리고 한 사람의 발소리를 들었을 때, 나는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그 방향을 바라보았다.
평범한 인간들이 내기엔 꽤나 둔탁한 소리,
마치 기사가 갑옷을 입고 발을 구르는 것처럼 무거운 발소리란 오직 이종족만이 낼 수 있는 소리였다.
인간과는 달리 짧막한 키를 지녔지만, 훨씬 거대한 덩치와 단단한 체구를 지닌 종족.
땅의 사랑을 받으며, 그 어떤 종족보다도 뛰어난 손재주를 지닌 종족.
“어서 오십시오, 귀한 분들이 발걸음을 옮겨주시다니. 그야말로 영광이라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의 검은 눈동자가 이채를 발하고, 이내 그 반짝임 속에 섞인 것이 호의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
우리는 서로 약속이라도 한 듯 미소를 지어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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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생각한 드워프의 이미지는 조금 더 과묵하고,
무언가를 창조하는 것에 관심 있어 하는 꽤나 땀내 나는 종족에 가까웠다.
애초에 이종족과 대화하는 것은 쟌지르 이후로 처음이었으니,고정관념이 있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는가.
물론 카심 백작이 드워프라는 종족과는 달리 귀족이긴 했지만...
그래도 이건 조금 너무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 다음에는 어떻게 된 건가?”
“공중에서 그대로 트롤의 목을 베었던 것 같습니다. 목뼈까지 깔끔하게 끊어서요.”
“젠장, 흑마법사 놈들은 전부 죽어야 해. 트롤을 가지고 그런 장난을 치다니!”
늘 품위를 지키려하는, 남들 앞에서는 그 품위가 깨지는 걸 죽는 것보다 싫어하는 귀족과는 다르게.
그는 마시고 있던 맥주잔을 탁자에 내려놓으며 으르렁거렸다.
촤악, 맥주잔에 있던 맥주거품이 탁자에 튀기자 아이린의 눈매가 서늘해졌다.
이러다가 본격적으로 얘기하기도 전에 싸우는 것이 아닐지.
한 가지 확실한 건, 카심 백작이 흑마법사를 증오하는 것은 분명 사실이란 것이었다.
곳곳에 꽂혀져 있는 다트판, 그 다트판 중앙에 있는 건 흑마법사들의 상징을 그려 넣은 종이였으니까.
아무래도 심심할 때면 다트를 저기에 던지는 것이 아닐까 싶다.
그는 우리에게 매우 호의적이었다.
5대 가문과 협력할 수 있는 기회라 생각해 접근한 것일 거란 생각도 해봤지만,
정작 카심 백작이 관심을 가지는 것은 아이린이 아니라 내 쪽이었다.
가슴팍에 있는 훈장을 보고선 눈을 반짝였으니,
아마 흑마법사를 베었던 검을 만지게 해주면 기절 했을지도 모르리라.
“...그런데 백작님. 혹여 뵙자 하신 이유가 제 이야기를 듣기 위해서 입니까?”
그리 묻자, 내 이야기를 들으며 웃던 카심 백작이 아이린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아니, 그런 건 아니지, 유리스의 소가주께서 저를 만나려 했던 이유가 따로 있지 않습니까?”
“...그래요, 그대가 워낙 이야기에 푹 빠져 있어 조용히 있었지만.”
“하하, 그건 죄송하게 됐습니다.”
아이린이 대꾸하자, 껄껄 웃은 카심 백작이 고개를 꾸벅 숙여 보였다.
이윽고 고개를 든 카심 백작이 입을 열었을 때, 갑작스레 변한 분위기에 내 눈이 가늘게 뜨였다.
“흑마법사에 대한 얘기를 하려 하십니까.”
“...왜 그런 생각을 하셨습니까?”
순간 정곡을 찔렸다는 생각이 들어 내가 묻자, 입꼬리를 비튼 그가 나를 바라보며 조용히 대답했다.
“제국에서 가장 흑마법사와 연관이 깊은 그대가 나를 찾아왔다. 원래라면 쉽사리 무도회에 모습을 보이지 않는 유리스의 소가주가 여기까지 왔고. 그것이 의미하는 것을 유추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지. 내가 흑마법사를 증오하는 건 이미 제국에서 유명한 일이 아닌가?”
꿀꺽
한차례 맥주를 삼킨 그는, 이내 손가락으로 탁자를 두드리며 말을 이어갔다.
“아마도 흑마법사와 관련된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데에 도움을 구하기 위해 찾아온 거겠지. 허나 그리 이목을 끌은 것은 내가 직접 오기를 바랐던 거고, 그건 누군가에게 알려지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
“...하.”
“그 누군가라는 건, 그러니까 유리스의 소가주께서 진실을 밝혀내고 싶어 하는 건. 검의 로만이 아닌가?”
에반 프리드로 눈을 뜬 이후로 워낙 많은 것들을 봐왔기에 무언가에 놀라기란 쉽지 않았지만,
그가 보여준 통찰력에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와 만난 뒤에 나눈 얘기의 대부분이 내 무용담이 전부인데, 도대체 어떤 부분에서 그 모든 것을 깨달은 걸까.
내 표정을 보고 껄껄거리며 웃은 카심 백작은, 스산해진 아이린의 얼굴을 보곤 이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너무 경계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렇게 솔직하게 얘기한 것은, 결국엔 협력할 거란 얘기가 아니겠습니까?”
“...째려본 것은 아니에요. 마음이 상했다면 사과하죠.”
아이린이 사과하는 모습을 본 나는 그녀를 보며 옅게 웃어보였다.
예전 같았으면 사과가 아니라 오히려 무어라 했을 텐데,
이제는 아이린을 더 이상 악녀라 부를 수 없지 않을까.내가 3년동안 들인 노력이 생각나 괜스레 가슴이 뭉클했다.
아가씨, 사람을 째려보는 것보다는 때때로 사과하는 것이 더 좋을 수도 있습니다.
혼자 하시려 하는 것도 좋지만,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는 것이 어떻습니까? 늘 제가 아가씨의 곁에 있을 수는 없으니까요.
그 말에 아이린이 유독 날카롭게 반응하긴 했지만, 그래도 지금의 변화를 훌륭하다 말할 수 있었다.
카심 백작도 아이린의 사과가 의외라는 듯, 눈을 크게 뜨는 모습에 나는 흐뭇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이것 참, 제가 들은 소문과 꽤나 다른 것 같군요. 훨씬 훌륭하신 분 같습니다.”
“훌륭하신 분이죠.”
‘아름답기도 하고요.’
입모양으로 그리 덧붙이자, 그걸 본 아이린이 움찔거리며 나를 쏘아보았다.
표정이 딱딱해서 조금 풀어주고 싶은 마음에 그런 건데, 어째 반응이 내 생각보다 조금 큰 것 같았다.
붉어진 얼굴을 조심스레 쓸어내린 아이린은 이내 한숨을 내뱉으며 카심 백작을 바라보았다.
“그래서, 유리스와 협력할 생각이 있단 얘기인가요?”
“먼저 얘기를 듣고 싶습니다. 왜 제게 그런 얘기를 하려 하는 것인지, 그리고 로만을 의심하는 이유가 무엇인지부터요.”
“그런 거라면.”
이윽고 아이린이 손짓하자, 같이 따라왔던 시녀 하나가 카심 백작에게 책을 건넸다.
내가 보았던 건국설화의 초판, 그리고 보지 못했던 낡은 문헌 하나.
찬찬히 그것들을 읽던 카심 백작은 이내 고개를 들어 아이린을 바라보았다.
“삽화에 있는 로만의 눈 색이...지금과는 다르군요.”
“그때는 붉은 색이었죠. 다른 한 쪽에 있는 문헌을 보면 알겠지만, 로만은 원래 알라르와 친척이었으니까요.”
“...허, 만약 이게 사실이라면 정말......”
“만약이 아니라, 그 안에 적힌 것들은 모두 사실이에요. 유리스에 흑마법사가 나타난 그 순간부터 시작된 조사의 결과물이니까요.”
그 말에 나 또한 고개를 끄덕였다.
크리스 경이 내게 말했던 것이 사실이라면, 분명 로만에 대해 의심을 시작한 것은 3년 전이었으니까.
허나 그 시간 동안 얻은 증거들은 꽤나 빈약했고, 결국 이렇게 다른 이에게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카심 백작은 그 두꺼운 손으로 책을 매만지다가, 이내 허공을 응시하며 옅게 한숨을 내뱉었다.
그의 검은 눈동자에 비치는 것은 후회, 회한, 그리고...분노였다.
이글거렸다. 탁한 먹을 풀어놓은 것만 같은 그 심연 속에서,
텅빈 눈동자 속에서 타오르는 것은 분명 분노였다.
아마도 흑마법사에게 가족을 잃어서 일까,
차마 주체할 수 없는 분노를 숨에 담아 뱉어낸 그가 이윽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좋습니다. 흑마법사를 밝혀내는 아티팩트라면...충분히 만들어낼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시간은 조금 걸리겠지만, 아마도 한 달이 채 안 걸릴 테고요. 그 정도는 기다려주실 수 있겠습니까?”
“얼마든지, 자금은 유리스에서 전부 부담해 줄 수 있어요.”
“그렇다면야...제안을 승낙할 수밖에 없겠군요.”
그리 말한 카심 백작이 씨익 웃자, 그 모습을 바라본 아이린의 눈이 가늘어졌다.
허나 이전과는 달리 스산한 기운이 없는 게 아무래도 그녀 나름대로 안심한 것이리라.
한 달, 적은 기간이라 할 수는 없었지만 분명 예상한 것보다 훨씬 짧은 시간이었다.
이제 앞으로 남은 것은 로만의 시선이 유리스를 향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지 않을까.
그들이 유리스를 의심하지 않도록, 우리의 의도를 그들이 알아차려 몸을 숨기게 하지 않도록.
앞으로의 한 달 동안 가장 중요한 건 바로 그 부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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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도회장으로 들어설 때만 하더라도 불만이 가득했던 아이린의 표정이었지만,
카심 백작의 집무실에서 나온 그녀의 표정은 한결 편안해보였다.
그녀가 고민하던 부분이 꽤나 잘 풀린 것이 마음에 든 것이 아닐까.
그나저나 로만이 만약 정말 흑마법사와 관련되었다면,
그런 로만을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도 하나의 문제라 할 수 있었다.
300년이라는 시간 동안 흑마법사와 계속해서 접촉하던 그들이 가진 힘이 어느 정도일지,
과연 지금으로써 가늠할 수 있을까. 아델 로만 정도라면 쉽사리 꺾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가 지닌 실력은...제아무리 흑마법이 섞였다고 한들 형편없을 것이 뻔했으니까.
하지만 로만 공작이라면 얘기가 달랐다.
현 제국에서 가장 마스터에 근접했다고 불리는 이,
세간에 드러내지 않았을 뿐이지 이미 마스터에 도달했다는 말도 떠돌고 있었다.
로만 공작과 흑마법이라, 아마 쟌지르와 싸울 때와는 감히 비교도 할 수 없을 터였다.
황태자의 협력은 반드시 필요했다.
황실 기사단이 보유한 테오라드 경이라는 전력이 있는 한, 그들의 힘을 배제한 채 싸우는 것은 상상도 하기 싫었다.
물론 내가 마스터에 도달한다면...그런 것 즈음은 별 문제가 되지 않겠지만.
허나 지금은 걱정을 해야 했다. 한 달이란 시간동안 마스터에 도달할 수 있을 리가 없지 않겠는가.
당장 필요한 것은 깨달음이었다. 내 앞에 놓인 벽을 마주하고,
그것을 깨부숴야 다음 경지로 나아갈 수 있으리란 확신이 들었다.
그렇게 고민하기를 잠시, 나를 빤히 바라보는 시선에 고개를 돌리자 그곳엔 아이린이 있었다.
“무슨 생각을 그리 하나요?”
그 말을 듣자마자 아이린을 당황하게 할 여러 생각이 떠올랐지만, 그런 생각들을 지워내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카심 백작과의 얘기를 대강 마쳤으니, 이제 무얼 해야 할까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이대로 곧바로 돌아가기엔 시간이 애매했다.
이틀에 걸쳐 쉬지 않고 달려온 말들도 여물을 먹으며 쉴 시간이 필요했고,
마부가 돌아오려면 아마도 내일 낮에나 돌아오지 않을까.
카심 백작과의 얘기가 그리 길게 이어지지 않았기에 무도회는 한창 진행 중이었다.
무도회장으로 다시 돌아가야 할까, 그런 생각을 할 때 즈음 상념이 흩어진 것은 귓가에 들려온 한 목소리 때문이었다.
“무도회장으로 돌아간다거나, 그런 쓸데없는 생각을 하고 있는 건 아니겠죠.”
“...쓸데없는 생각이었습니까?”
허나 그것 말곤 딱히 떠오르는 게 없는데.
아이린을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리자, 내 얼굴을 본 아이린이 눈살을 찌푸리며 이내 한숨을 내뱉었다.
답답하다는 듯, 이마를 짚은 그녀는 나를 지그시 바라보더니 이윽고 천천히 내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무도회에 가면, 또 영애들이 그대를 보며 꺅꺅 거리겠죠.제가 없을 때 그대가 보였던 그 피아노 연주를 상상하면서...그렇게 그대와 함께 있는 모습을 머릿속으로 그릴 게 눈에 선해요.”
쿡.
이제는 버릇이 된 건지, 다가온 아이린이 내 가슴팍을 손가락으로 찔러댔다.
어쩐지 이전과는 다르게 힘이 실린 손가락,
나를 보는 그녀의 눈에는 조금 한기가 섞여 있어서. 나는 옅게 미소 지은 채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게 싫으십니까?”
“싫어요.”
의외로 단호한 그 대답에 눈이 커진다.
늘 대답을 얼버무렸던 아이린이 이토록 단호하게 대답할 것이라 생각하지는 못했는데.
허나 생각은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툭, 손가락으로 가슴을 찌르던 것이 이내 손바닥이 되고,
그런 그녀에게 가슴팍이 밀려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한 걸음, 두 걸음.
점점 가까워지는 간격에 거리를 벌리는 것은 오래 이어지지 않았다.
내 등이 벽에 닿고, 그렇게 내게 다가온 아이린의 숨결이 닿을 만큼이나 가까운 거리가 되었을 때.
고혹적인 미소를 지은 그녀가 선홍빛의 입술을 달싹였다.
“아주, 싫어요.”
“너무 가깝습니다. 그, 조금”
“에반.”
이토록 적극적인 아이린의 태도가 처음인 탓에, 도무지 흔들리는 정신을 다잡을 수가 없었다.
이 복도를 가득 메운 아찔한 장미향, 귓가를 간질이는 그 달콤한 목소리란 사람의 자제심을 흐트려 놓기에 충분했다.
허나 참았다. 이대로 그녀의 목덜미를 부여잡고 싶은 마음을 꾹 누른 채,
그렇게 그녀의 눈을 천천히 응시하기 시작했다.
“...아가씨, 사람이 지나갈 수도 있습니다.”
“그럼 대답해요.”
툭,
언젠가 그녀에게 받았던 브로치에 천천히 아이린의 손이 올라갔다.
그렇게 가슴팍을 쓸어내리는 차가운 손길에 몸을 움찔거리며,
푸른 눈동자가 일렁이는 모습을 멍하니 바라볼 따름이었다.
이윽고 그 자그마한 입술이 벌어진다.
그리고 내뱉어지는 달콤한 목소리에, 나는 헛웃음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오늘은 저랑 있겠다고. 그렇게 말해요.”
옅게 홍조가 피어오른 아이린의 얼굴이 보였다.
나름의 용기를 낸 것인지, 그 자그마한 손을 꼬옥 쥔 모습이 보였다.
그런 모습을 보고 어찌 거절 할 수 있을까.
만약 이런 말을 듣고도 거절한다면,
그건 여자가 아주 많은 사람이거나...아마도 인성에 문제가 있는 사람이리라.
당연하게도, 내가 그녀에게 보낸 대답은 승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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