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판 속 악녀의 호위기사가 되었다-51화 (51/181)

〈 51화 〉 약혼 파기는 신중히(1)

* * *

눈을 감으면, 새로운 감각이 열림과 함께 모든 것에 예민해지기 시작한다.

시각이 차단되어 개방되는 청각과 후각, 그리고 촉각.

싸우는 것에 미각은 필요 없으니 오로지 그 4개의 감각에 집중할 따름이었다.

촤아악, 발을 딛고 땅이 울리는 소리를 듣는다. 검을 연마하며 발라진 기름의 향을 맡는다.

이윽고 검이 휘둘러지며, 그를 통해 불어오는 날카로운 바람을 느낀다.

그를 통해 깨닫는 것, 시각이 없음에도 검의 경로를 알아낼 수 있었다.

구태여 많은 움직임을 보여줄 필요는 없었다.

오른쪽 어깨에서 느껴지는 바람은 내 얼굴을 향해 검이 날아오고 있음을 알려주었다.

살짝 고개를 틀자 이내 근처에서 검이 스쳐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발목을 비튼다, 단 한 걸음. 내게 검을 휘두르는 이에게 다가가기 위한 간격.

그대로 손목을 들자, 이내 검을 휘두르는 이의 팔과 맞닿아 검이 허공에 붕 뜨는 소리가 들려왔다.

잡았다.그 생각에 씨익 웃자,이내 앞에서 허탈하게 웃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빌어먹을. 내가 졌네. 이제는 눈을 감게 해도 못 이기겠어.”

“...하마터면 목이 날아갈 뻔 했습니다. 얼굴을 노리시면 어떡합니까?”

“그대라면 피할 거라 생각했으니까. 내가 천재라고 생각했는데, 그대 앞에 있으면 절로 겸손해지게 되는군.”

황태자에게 이런 소리를 들게 될 줄이야.

조심스레 눈을 가리고 있던 천을 떼어내자, 살짝 허탈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황태자의 얼굴이 보였다.

처음 검을 맞댔을 때만 하더라도 나름 비등했는데, 이제는 확연히 차이가 나는 게 보여 꽤나 뿌듯했다.

3년.

비록 마스터라는 경지에는 닿지 못했지만, 이제는 그 경지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확연히 체감하고 있었다.

아마도 몇 달이면 도달하지 않을까. 기사단장인 테오라드 경도 내 실력을 보고 감탄했으니,

이대로 1년만 더 지난다면 예상치 못한 상황에 충분히 대비할 수 있을 것이 분명했다.

‘...1년 남았어.’

원작 여주가 등장하는 시점까지 앞으로 1년이란 시간이 남았다.

많은 것들이 바뀌었고, 또한 그녀가 나타난다 한들 대비할 수 있을 만큼 아이린의 세력을 키우는 것에 집중했지만.

그렇다 한들 안심할 수 없지 않은가. 하여 3년 이란 시간동안 황태자와 함께 검을 다루는 것에 시간을 쏟았는데,

어느덧 황태자라는 실력자도 쉬이 꺾을 수 있을 만큼 실력이 진보했다는 사실에 입꼬리가 씰룩였다.

허나 상념은 이내 흩어졌다.

머릿속에서 아이린의 목소리가 아른거려, 이내 그녀가 내게 당부했던 말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오늘은 조금 일찍 들어도록 해요. 또 해가 지도록 황궁에 있지 말고.

그 생각에 황태자를 바라보며 입을 열자, 이내 그가 피식 웃으며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나저나, 이제 슬슬 돌아봐야 할 것 같습니다.”

“...하긴. 공녀가 하도 보챈다 하지 않았던가? 내게도 자꾸 무어라 하는 탓에, 여간 귀찮은 게 아니야.”

“아가씨께서 저를 꽤 아껴주시지 않습니까."

그러자 내 말을 들은 황태자가 눈살을 찌푸리며 대꾸했다.

“아껴도 너무 아끼니까 문제지. 내게 부탁한 건 그대인데, 왜 불편함은 내가 느껴야 한단 말인가?”

“...그 부분은, 제가 대신 사과드리겠습니다."

“됐네. 덕분에 실력이 진일보 한 것은 나 또한 마찬가지니까 말이야. 물론 그대 앞에 서면 조금 주눅 들긴 하지만, 언젠가는 내가 이겨 보이고 말겠어.”

황태자는...내가 생각하는 것만큼 그리 나쁜 사람은 아니었다.

호승심이 짙고, 의외로 욕심이 많은 편이긴 했지만 그럼에도 심성 자체가 나쁘다고 할 수는 없었다.

나름 냉철한 판단도 할 줄 알았고, 훗날 황제가 될 사람임을 입증하듯 국가 정세에 대해도 잘 파악하고 있었으니까.

그런 그가 내게 이토록 우호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이, 3년 동안 내가 해온 것들 때문이란 것을 부정할 수는 없겠지만.

가슴팍에 달린 금빛의 훈장을 매만지자, 그 모습을 본 황태자가 피식 웃어 보였다.

처치한 흑마법사 하나당 한 개의 꽃잎이 붙는 훈장,

처음엔 3개의 꽃잎이 붙어있던 훈장은 어느새 10개가 넘는 꽃잎이 달려 있었다.

“어느새 꽃이 만개했군.”

“흑마법사의 수가 점점 늘고 있으니까요. 처음 나타났을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습니다. 공작령에 나타나는 경우는 적었지만...그래도 5대 가문의 영지에 버젓이 나타나는 경우도 있지 않습니까.”

“그들의 단체명을 절멸이라 하던가. 그들을 처리하느라 골치가 꽤 아프네. 이제는 아예 자기들네 이름까지 퍼트리고 제대로 활동하고 있으니까. 황실 기사단이 나서곤 있지만, 그렇다한들 전부 처리하기란 꽤 힘든 일이지.”

그 말에 나는 한 차례 쓰게 웃어보였다.

원작 시점과 가까워질수록, 흑마법사의 수가 불어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절멸이 제대로 활동하기 시작하는 것이 바로 올해 겨울부터가 아니던가.

그런 그들을 전부 처리하려면 그 전에 싹이 트기 시작하는 무리를 찾아야 하겠지만,

5대 가문의 조사가 은밀히 시작된 지 3년이 흐른 지금도 아직 이렇다 할 증거를 찾지 못했다.

간혹 모습을 드러내는 이들을 처리하고는 있지만,

바퀴벌레처럼 불어나는 흑마법사란 제국의 입장에서 꽤나 골치 아픈 문제라 할 수 있었다.

흑마법사를 처리하기 위해 제국의 대마법사인 아제스트 머윈까지 은둔하지 않았던가.

“...일단은, 조금 지켜봐야겠죠. 당장 무언가를 할 수 없지 않습니까.”

“나도 알고 있네. 그냥 답답해서 이렇게 말하는 것뿐이지.”

그렇게 말한 황태자는 검을 한 구석에 던진 뒤 조용히 한숨을 내뱉었다.

최근 들어 황위 승계 때문에 걱정이 많다던가.

유일한 적자로 태어난 그에게 그런 문제로 고민할 문제가 많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내가 모르는 부분에서 여러 문제가 생기는 모양이었다.

이윽고 그의 붉은 눈동자가 내게 닿았을 때, 그가 할 말을 예측한 나는 재빨리 입을 열었다.

“안됩니다.”

“...내가 무얼 말할 줄 알고 그리 답하나?”

“황실 기사단에 들어와 달라 할 생각이셨잖습니까.”

“빌어먹을. 한 번 와주면 안 되나? 마스터에 도달할 인재가 둘이면 내 입지가 얼마나 단단해지겠나? 황제가 되면 어련히 유리스로 보내줄 생각인데, 그냥 한 번 와도 되지 않나.”

“크리스 경이 곧 은퇴할 때라서요. 아가씨가 저 싫다고 할 때까지는...아마 곁에 있을 것 같습니다.”

이제 크리스 경이 슬슬 은퇴를 준비한다고 했던가.

아마 크리스 경 이후에 새로운 호위를 구하지 않는 이상, 아이린의 곁에 쭉 있을 기사란 나 하나 뿐이었다.

애초에 황실 기사단에 그리 구미가 동하는 것도 아니었으니,

내가 멋쩍게 웃자 황태자는 아쉬운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며 이내 손을 뻗었다,

그 손에 들린 건 이제는 질릴 만큼이나 보았던 한 장의 종이.

부적처럼 길쭉하게 생긴 그 종이에는 제국의 징표와 황태자의 직인이 찍혀 있었다.

공작령에 있는 게이트에 순간이동 할 수 있는 증표를 받아들자,

황태자가 어이없다는 듯 한차례 웃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이제는 그냥 넙죽 받는 군. 처음에는 놀라서 어쩔 줄 몰라 하더니.”

“3년이지 않습니까. 이제는 익숙해질 때가 됐죠.”

“...다음부터는 마차타고 오게.”

그렇게 말한 황태자의 표정이 퍽 진지해서, 나는 그를 빤히 바라보다 이내 헛웃음을 흘렸다.

#

“기사님!”

게이트에서 나오자마자 보이는 것은 놀랍게도 로페나였다.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 생각치도 못했는데,

내가 살짝 놀라 눈을 크게 뜨자 그 모습을 본 녀석이 헤실헤실 웃으며 내 쪽으로 다가왔다.

“오늘은 조금 일찍 오셨네요? 원래 같았으면 어둑해질 때나 오셨잖아요.”

“아가씨가 조금 일찍 오라 하셨으니까. 근데, 왜 여기 있는 거야?”

“안 그래도 아가씨가 기사님 데려오라 하셨거든요. 하실 말씀이 있다고요.”

그렇게 급한 일이었나.

허나 직접 오지 않은 것을 보면, 그냥 내가 황태자와 있는 것이 맘에 들지 않은 걸 수도 있었다.

어째선지는 몰라도아이린은 내가 밖에 오래 있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으니까.

순간 버릇처럼 로페나의 머리를 쓰다듬다가, 이내 깜짝 놀라 손을 떼어내자 녀석이 눈살을 찌푸리며 내 옆구리를 툭 하고 쳤다.

“제가 애도 아니고 언제까지 그러실 거예요. 이제 저 18살이라구요.”

“그런 것치곤...아니다. 아, 아파.”

“사람 키 작다고 그렇게 놀리면 못 쓴다고 했잖아요!”

3년이란 시간이 흘렀지만, 로페나는 그다지 변한 것이 없었다.

키는 여전히 작았고, 뒤로 머리를 묶었던 이전과는 달리 머리를 길게 풀었다는 점이 그나마 달라졌을까.

그런 로페나를 바라보며 피식 웃자, 고개를 휙 돌린 녀석이 입술을 삐죽이기 시작했다.

기껏 나왔더니 놀리기만 하는 것이 섭섭한 걸까.

그런 주제에 내가 선물한 목걸이는 잘 차고 있는 게 우스웠다.

어찌나 잘 보관했는지, 아직까지 흠집 하나 없는 목걸이의 줄을 툭 건드리자 화들짝 놀란 로페나가 나를 보곤 눈살을 찌푸렸다.

“왜 자꾸 그래요.”

“그냥.”

과거에 대한 마음을 깨끗하게 비워두긴 했지만, 로페나를 볼 때면 동생이 떠오르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하는 짓이 꼭 닮았는데, 어떻게 안 떠올릴 수가 있을까.

유독 로페나를 보면 장난을 치고 싶어지는 건 그런 기억 때문일지도 몰랐다.

어쩌면, 그냥 괴롭히고 싶은 걸지도 모르고.

“아가씨는 뭐하고 계셔?”

그리 묻자, 이내 피식 웃은 로페나가 눈을 가늘게 뜨곤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마치 비웃는 것처럼, 기분 나쁘게 웃는 녀석의 이마를 손가락으로 꾹 누르자 로페나가 다급히 입을 열었다.

“왜 그런 표정을 지어?”

“그렇다고 이마를 그렇게 누르면 어떡해요. 그 뭐냐, 늘 하고 계신 거 하고 계시죠. 이 시간이면 항상 ‘그걸’ 할 시간이잖아요.”

“...이번에도 많이 쌓였어?”

“상상도 못할 만큼요. 도대체 밖에서 뭘 하고 다니는 거예요? 막 몰래 영애들이랑 그렇고 그런­”

딱­

말도 안 되는 소리를. 가볍게 딱밤을 때리자, 잠시 나를 흘겨본 로페나가 이내 머리를 매만지며 입을 꾹 다물었다.

저 멀리서 피어오르는 회색 연기, 공작저 내에서 피어오르는 것이 분명한 연기를 보니 절로 눈살이 찌푸려졌다.

최근 들어 나름 행실을 조심히 했다고 생각했는데, 그런데도 불구하고 늘어났다니 도대체 나보고 어쩌란 말인가.

어쩌면 아이린이 내게 빨리 돌아오라고 할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그렇게 공작저로 들어서자, 이내 나를 발견한 경비대장이 한차례 쓰게 웃으며 시선을 돌렸다.

측은하다는 듯, 나를 안쓰럽게 여기는 그의 표정에서 아이린의 기분이 대강 어떤지 깨달을 수 있었다.

속으로 욕지거리를 중얼거리기도 잠시,

타는 냄새가 진동을 하는 정원으로 다가가자 불꽃 앞에 서있는 한 여인의 모습이 눈에 띄었다.

“...아가씨, 저 왔습니다.”

“참 빨리도 오네요.”

싸늘한 목소리에 주춤거리자, 이내 고개를 돌린 그녀의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다.

3년 전과는 달리 완전히 성숙해진 얼굴.

이전이 채 피어오르는 꽃과 같았다면, 지금의 그녀는 완전히 피어올라 아름다움이 만연했다 할 수 있었다.

시리도록 차가운 푸른 눈이 나를 응시할 때,

그녀는 하얀 머리카락을 뒤로 슬쩍 넘기며 나를 향해 천천히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녀는 여전히 겨울을 닮은 듯 했다.

비록 내가 소설 속에서 기억하는 그녀처럼 누구에게나 쌀쌀 맞고,

악녀라 불릴 만큼은 아니었으나 그녀를 감도는 분위기는 여전히 차갑기 그지없었으니까.

봄이 전해오는 따스한 바람이 그녀에게 닿자 이내 차갑게 변해 흩어진다.

정원에 만개했던 꽃이 그녀가 다가옴에 움츠려 들고,

솟아오른 잔디가 점차 시들어가는 것 같다고 느낄 때 즈음.

어느새 내 앞으로 다가온 그녀가 손가락을 들어 가슴팍을 찔렀다.

쿡.

내 가슴팍을 찌른 손가락에 움찔거리자, 가까이 다가온 아이린이 천천히 입술을 달싹였다.

“저게 뭔지 알죠?”

“...예.”

아이린이 최근 들어 이런 행동을 하는 데에는, 나와 깊은 연관이 있었다.

바로 매일 같이 내게 오는...영애들의 편지가 워낙 늘어난 탓이 아니던가.

처음에는 그저 모아두었다가 버렸지만,

이제 와 그 수가 점점 늘어나기 시작하자 아이린이 직접 불에 태우기 시작했다.

다시는 이런 것을 보내지 못하게 하는 일종의 경고라면서.

“근데 전 억울합니다. 제가 받고 싶어서 받는 게 아니라 그쪽에서 보내는 게 아닙니까.”

“저번에 무도회에서 피아노 연주를 안했으면, 슬슬 편지가 줄어들어 이제는 오는 것도 없었겠죠. 실제로도 점점 줄어들고 있었고요. 그런데도, 제가 직접 안 하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는데도 연주를 한 건 누구였죠?”

“...접니다.”

허나 황태자가 해 달라 부탁한 것을 내가 어떻게 거절하겠는가.

황태자가 한 부탁을 면전에서 거절할 사람이 도대체 얼마나 있다고.

하여 억울한 표정을 짓자, 피식 웃은 아이린이 내 가슴팍을 쿡쿡 찌르며 다시금 입을 열었다.

“누가 보면 황실 기사단인줄 알겠어요. 에반, 도대체 에반은 누구의 기사죠?”

“...아가씨의 호위 기사입니다.”

쿡쿡.

점점 찌르는 강도가 세져, 이내 작게 눈살을 찌푸리자 아이린이 한숨을 내뱉었다.

맘에 들지 않는 듯 눈을 가늘게 뜬 그녀가 나를 흘겨보기도 잠시,

내 앞에서 떨어진 아이린이 조용히 말을 이어갔다.

“조금 자신의 본분에 집중해줬으면 좋겠어요. 황태자와 검을 연마하는 거야 그렇다 쳐도, 그대가 무도회에서 피아노를 칠 이유 따위는 어디에도 없지 않나요?”

“...자중하겠습니다.”

내가 그리 말하며 고개를 숙이자, 나를 힐끔 바라 본 아이린이 한 차례 쓰게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허나 억울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그러고 싶어서 그런 것도 아니지 않은가.

차갑게 부는 바람처럼 싸늘해지는 분위기 속에서,

갑작스레 뺨에서 느껴진 감촉에 고개를 들자 아이린의 얼굴이 코앞에서 보였다.

아­

그리고 호흡이 멎는다. 콧속으로 확 하고 불어오는 장미향에 시야가 흩어진다.

그 어떤 사파이어보다도 푸른 눈, 언젠가 그녀에게 선물해주었던 목걸이가 찰랑거리는 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변하지 않는 것은 이 세상에 수없이도 많았으나, 그 중에 하나를 추가한다면 그녀의 미모이리라.

조금도 변하지 않은, 이 세계 그 어떤 곳에서도 볼 수 없는 찬란한 얼굴을 마주했을 때.

나는 그저 멍하니 입술을 벌린 채 그 얼굴을 바라볼 따름이었다.

붉은 꽃잎처럼 퍼진 입술이 자그맣게 열린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듣기만 해도 몸이 나른해지는 부드러운 목소리가 새어나오기 시작했다.

"...기분 상한 건 아니죠?"

숨결이 닿을 만큼이나 가까운 거리, 뺨에 닿은 감촉은 분명히 아이린의 손이었기에.

나는 이 상황을 이해하는 것을 내심 포기하고 말았다. 머릿속이 새하얗게 되어 이내 생각이 흩어져서,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귓가에 들려온 목소리에 집중하는 것뿐이었다.

"......"

내가 아무 말도 내뱉지 않자, 그런 나를 본 아이린의 눈동자가 일렁였다.

파문이 이는 호수처럼, 내가 그날 보았던 달이 비추던 호숫가처럼.

그토록 반짝이는 눈동자가 이내 눈꺼풀 아래로 사라지며, 아이린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미안해요. 기분 상하게 하려 한 건 아니었어요. 그냥, 조금 감정이 격해져서."

정말로 미안하다는 듯, 내게 그렇게 말하는 아이린의 눈가가 잘게 떨렸다.

그 표정을 보고는, 그저 쓰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이런 얼굴을 하는 아이린에게 어떻게 무어라 할 수 있겠는가.

전에는 그렇지 않았는데, 이제 간혹 이런 표정을 짓는 그녀를 볼 때면 그저 웃어넘길 수밖에 없었다.

뺨에 닿은 손을 떼어내며 옅게 미소 짓자,

아이린은 여전히 미안하다는 듯 축 눈썹을 늘어트린 채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괜찮습니다. 아가씨가 그리 말했는데도 제가 그랬으니, 어느 정도 제 잘못이라 할 수 있겠죠.”

“그대가 그럴 때면, 내 기분이 어떨지 조금 생각해줬으면 좋겠어요.”

“기분...말입니까?”

화가 난다는 것을 얘기하는 것일까,

내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리자 혀를 한 차례 찬 아이린이 나를 흘겨보았다.

"쯧."

요즘 들어 왜 이리 기분이 휙휙 바뀌는 건지,

그녀와 있는 것이 나쁘진 않았지만. 이런 것을 하나하나 맞춰주느라 진이 빠지는 것 같기도 했다.

나를 째려보기도 잠시, 이내 표정이 풀린 그녀가 조용히 입을 열기 시작했다.

“...아무튼, 할 얘기가 있으니까 따라와요.”

“할 얘기라면, 설마­”

“로만과 관련된 이야기에요.”

로만, 꽤나 오랜만에 듣는 그 단어에 내 눈이 가늘게 뜨였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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