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0화 〉 흐르는 별 아래에서(5)
* * *
봄, 참으로 미묘한 계절이라 할 수 있었다.
때로는 꽃이 피어오름을 샘내어 겨울보다도 추운 혹한을 불러오고,
때로는 그 어느 계절보다도 기분 좋은 따스함을 전해주는 계절이지 않은가.
그 봄처럼, 지금 이곳의 분위기가 딱 그렇게 느껴졌다.
달이 떠오른 새벽, 서늘한 바람이 불어오는 이 와중에도 묘한 열기가 주변을 감싸고 있었다.
세이렌이 만들어낸 마법과도 같은 환상,
그리하여 딱 선물을 건넸을 때까지만 하더라도 내 생각대로 되고 있다 믿었는데.
툭,
아직까지도 뺨에서 느껴지는 그 감촉에 눈이 가늘게 뜨였다.
볼을 간질이는 그 바람이 아까 내게 닿았던 그 손만 같이 느껴져서, 한 차례 쓰게 웃고는 천천히 시선을 돌렸다.
달빛이 내려앉은 호수, 그 호수를 멍하니 바라보는 아이린의 목에 걸린 목걸이를 보자 입꼬리가 씰룩였다.
저 선물을 주기 위해서 얼마나 고민했던가. 선물을 준비하려 꽤 많은 시간을 소모했던 것 같았다.
로페나의 생일 선물을 산 뒤로 매달 사이는 봉급을 모으고, 크리스 경에게 조금 빌리고...
목걸이를 사면 괜찮을까 하는 생각도 있었지만,
내가 그녀를 처음 만난 날 그녀가 보던 그 악세사리 상점이 떠올랐던 것이 컸다.
거기서 보았던 사파이어 목걸이를 빤히 바라보던 그녀는,
내 머릿속에 꽤나 인상적인 기억으로 남아있었으니까.
하여 파니아가 만들었다는 목걸이를 준비했는데, 꽤나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아 다행이었다.
만약 마음에 들지 않아하거나 실망하는 기색이 있었더라면,
좀 이따 방에서 혼자 울적하게 있었을지도 몰랐을 텐데.
저렇게 옅게나마 미소 짓고 있는 모습을 보자니어쩐지 덩달아 기분이 좋아지는 것 같았다.
달빛이 반사되어 반짝이는 사파이어가 눈에 띄었지만,
오히려 아이린이 입고 있는 검은색의 수수한 드레스와 퍽 잘 어울렸다.
중요한 것은 옷걸이라고, 어쩌면 아이린이 착용했기에 잘 어울리는 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허나 이미 자정이 훌쩍 넘은 이 시간에 계속 여기에 있을 수는 없을 터,
조용히 아이린을 부르자 그 말을 들은 아이린이 나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슬슬 돌아가셔야 합니다. 공작저에 이리 오랫동안 외출할 거라 얘기하진 않았으니까요.”
“...그래야죠. 마음 같아선 더 있고 싶긴 한데.”
“안 그래도 피곤하시지 않습니까. 잠도 제대로 못 주무셨는데.”
“괜찮아요.”
그렇게 말한 아이린은이내나를 바라보며 옅게 미소 지었다.
“생일 선물을 이렇게나 많이 받아서, 잠이 달아났거든요.”
“...드린 것도 많이 없는 걸요.”
“연주 잘 하던데요. 혹시 기사가 되기 전엔 피아노 연습을 했나요?”
“뭐...그렇죠.”
틀린 말은 아니었다. 에반 프리드가 되기 전엔 피아니스트였으니까.
내가 그리 답하자, 고개를 주억거린 아이린이 내게 슬며시 다가와 입을 열었다.
“다른 사람 앞에선 연주 안 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연주가 그렇게 별로였습니까?”
아까와는 달리 조금 차가운 시선,
다른 사람 앞에서 연주를 하지 말라니.혹시 내가 한 연주가 별로 였던 것일까.
콩쿠르 때와 달리 감정이 뒤섞여 조금 조잡할 수도 있다 생각했지만,
그렇다한들 꽤나 만족스런 연주라 생각했는데.
하여 묻자, 내 말을 들은 아이린이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그런 게 아니에요. 연주는 훌륭했어요.”
“그럼 도대체”
“쉿.”
쿡.
아이린은 내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내 가슴팍을 손가락으로 찌르곤 조용히 입에 가져다 대었다.
마치 더 이상 묻지 말라는 듯, 손가락을 입에서 떼어낸 그녀는 휙 하고 등을 돌리며 대꾸했다.
“이제 돌아가죠. 내가 왜 그렇게 말했는지는, 천천히 생각해 봐요.”
천천히 생각해보라니. 아무런 대답도 주지 않고 저 홀로 걷기 시작하는 아이린을 원망스런 눈빛으로 바라봤지만,
그녀는 그 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꿋꿋이 걸을 뿐이었다.
연주는 마음에 들었는데, 다른 사람 앞에서는 연주 하지 말라는 소리는...
허나 생각은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어느새 꽤나 멀어진 아이린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는 탓에, 재빨리 그녀를 쫓아가야 했기 때문이었다.
도대체 이 새벽에 무슨 생각으로 저리 홀로 가는 것인지.
옅게 한숨을 내쉬다가, 이내 곧바로 그녀를 쫓아 달려가기 시작했다.
#
“소가주님이 돌아오셨다!”
자정이나 지난 공작저의 대문은 아직까지도 열려 있었다.
당연하지만 아이린이 이렇게 나가있던 탓일까.
횃불을 하나씩 든 채 도열해있는 기사들의 표정에는 피곤한 기색이 역력해보였다.
원래 같았으면 해가 지기 전에 돌아갔을 텐데. 그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어 살짝 웃자,
그 사이에 끼어있던 크리스 경이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조금 이따 보자.’
“...하하.”
아무래도 기분이 많이 안 좋아보이시는데, 어쩌면 괜히 눈이 마주쳤다는 생각에 눈살이 찌푸려졌다.
들어온 김에 바로 방으로 돌아가 눈을 붙일까도 생각했지만, 오늘 이런 일을 겪고도 잠이 올 리가 있겠는가.
“도대체 어디를 다녀오신 겁니까?”
“세이렌에 잠시 다녀왔어요. 산책할 겸.”
“자정을 넘길 때까지 산책하신 겁니까.”
그 대답을 들은 경비대장은 잠시 한숨을 내쉬더니,
이내 도열해 있던 기사들을 물러나게 하며 한 차례 쓰게 웃어보였다.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들긴 했지만, 어쩔 수 없지 않은가.
내게 향하는 날카로운 시선을 피해 슬쩍 고개를 돌리자, 이내 경비대장이 입을 열었다.
“자세한 경과는 아침에 에반에게 듣겠습니다. 피곤하실 테니, 일단 들어가시죠.”
그렇게 아이린을 따라 저택으로 들어가려는 찰나,
이내 귓가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내 발걸음을 붙잡았다.
묵직하고, 들으면 가슴이 덜컹거리는 것 같은 이 스산한 목소리는 분명히.
그 목소리에 삐걱거리는 고개를 돌리자,
이내 저편에서 크리스 경이 무뚝뚝한 얼굴로 나를 빤히 바라고 있음을 깨달았다.
“에반, 넌 나랑 할 말이 꽤 많지.”
“...크리스 경, 오늘 제가 꽤 피곤합니다. 아가씨와 계속 같이 다니느라 제 심신이 많이 지쳤”
“많이 지쳤다고?”
허나 내 말을 듣던 크리스 경은 한 차례 콧방귀를 뀐 뒤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과연 피곤했느냐고, 과연 네 심신이 많이 지쳤냐고 묻는 것만 같은 그 눈빛에 잠시 얼굴을 굳혔다가.
이내 씨익 웃으며 뺨을 긁적였다.
“힘들기는 무슨, 아주 입꼬리가 헤벌쭉 한 게 선물은 잘 드렸나 보지?”
“...잘 드렸습니다. 크리스 경이 아니었으면 정말 큰일 날 뻔 했어요.”
크리스 경이 세이렌에 대한 것을 얘기해주지 않았으면 지금 쯤 무엇을 하고 있을 지 상상하기가 두려웠다.
조금 울적해지긴 했지만, 내가 가지고 있던 미련을 털어내는 데에 도움이 되기도 했으니까.
진심을 담아 살짝 고개를 숙이자, 피식 웃은 크리스 경이 내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입을 열었다.
“뭐, 세이렌에 간다면 늦게 올 거라고 생각은 했으니까. 그래서, 아가씨께선 선물을 마음에 들어 하시더냐?”
“네, 맘에 들어 하셨습니다. 빌렸던 돈은...”
“됐다. 그깟 코 묻은 돈 돌려받을 생각도 없었어. 그나저나, 세이렌에서 뭘 본 게냐? 표정이 조금 밝아 보이는데 말이야.”
무엇을 봤느냐는 말에 나는 그저 미소 지을 따름이었다.
내가 거기서 보았던 것은, 아직까지 차마 헤어 나오지 못했던 나의 과거.
오직 나만이 알고 있는 과거이자, 이제는 미련을 털어낸 과거가 아니던가.
“그냥, 고민을 조금 덜어내는 데 도움을 받았습니다.”
“...그렇다면야.”
내 표정을 본 크리스 경은 더 이상 묻기가 껄끄럽다 생각했는지,
한차례 머리를 긁적이곤 한숨을 내쉬었다.
아까와는 달리 근심이 어린 얼굴에 고개를 갸웃거리자,
조금 딱딱하게 굳은 시선을 내게 보는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에반, 공작님을 만났다면 너도 어느 정도 얘기를 들었으리라 생각한다.”
“...공작님이라면.”
“내게 당부했던 말을 네게도 했겠지. 예를 들어 아가씨를 잘 부탁드린다는 말이라던가.”
가롯 유리스, 이전에 어두컴컴한 방에서 그를 만났던 기억을 떠올림과동시에 생각나는 것은 그가 내게 말했던 말들이었다.
아이린이 마음 열 수 있는 상대가 되어 달라 했던가.나는 과연 그것을 잘 해내고 있을까.
여러 의문이 떠올랐으나어쩐지 떠오르는 것은 그 의문에 대한 답이 아닌 아이린의 미소 짓는 얼굴뿐이었기에,
살짝 열이 번져 오르기 시작하는 얼굴을 쓸어내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가씨를 잘 부탁한다는 말이라면 저 또한 들었습니다. 크리스 경에 대한 얘기도 조금 들었고요.”
“...내 착각인지는 몰라도, 아가씨가 가장 마음이 편해 보이는 때는 너랑 같이 있을 때인 것 같더군. 로페나랑 나와 있을 때도 불편해 하시지는 않지만, 유독 너랑 있을 때면 자주 웃으시곤 하시니까.”
“그렇습니까.”
“그렇습니까가 아니라, 네가 제일 잘 알고 있지 않느냐. 모르는 척 하지 말고 똑똑히 들어라.”
잠시 숨을 고른 크리스 경은 다시 나를 바라보며 말을 이어가기 시작했다.
“로만이 흑마법사와 연루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로만이 말입니까? 제가 아는 그 5대 가문의 로만?”
“그래. 지금은 단지 추측뿐이라 공식적으로 발표할 수는 없지만, 공작님은 로만에게 가장 주목하고 있는 상황이지. 아마 제대로 된 증좌를 잡아내려면, 몇 년을 걸릴 거라고 생각한다.”
문득 아델의 보라색 눈이 머릿속에 스쳐지나갔다.
흑마법사들이 지니고 있던 보라색의 눈, 쟌지르가 지녔던 그 황혼과도 같은 보라색의 눈.
만약 그것이 흑마법에 의해 드러나는 하나의 형질이라면,
도대체 로만은 언제부터 흑마법과 연관되어 있다는 말인가.
여러 가지가 걱정이 됐지만, 그 와중에 먼저 떠오르는 것은 당연하게도 아이린이었다.
아델 로만이라는 약혼자를 둔 그녀, 만약 로만이 정말로 흑마법사와 연관되어 있다는 것이 밝혀진다면가장 타격을 입을 것은 로만을 제외하면 아이린일 테니까.
그제야, 크리스 경이 내게 이런 말을 꺼낸 이유를 깨달을 수 있었다.
공작과 한 얘기를 언급한 것, 그리고 로만과 관련된 얘기를 구태여 내게 꺼낸 것.
분명 흔들릴 지도 모르는 아이린을 잘 보좌해달라는 얘기이리라.
“공작님이 하신 말씀이라면,아직 잊지 않았습니다.”
그리 답하자, 그런 나를 물끄러미 바라본 크리스 경이 옅게 한숨을 내뱉었다.
“...생각해보면, 아가씨가 지금처럼 얼굴이 밝아진 게 너와 만난 뒤였던가.”
“설마요.”
“조금 시간이 더 지나봐야 확실히 알겠지만...아무튼, 앞으로도 아가씨를 잘 부탁한다. 이왕 서임식도 했으니까, 조금 더 신경 좀 써드리고.”
당연한 말을. 크리스 경이 구태여 그리 말하지 않더라도, 아이린을 신경 쓰는 것은 이제 버릇이 되지 않았던가.
내가 피식 웃자, 나를 보곤 똑같이 한 차례 웃어보인 크리스 경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이제 가봐라. 피곤할 테니까, 또 새벽에 나와서 헛짓거리 하지 말고 잠이나 자라.”
“크리스 경은 안 들어가십니까?”
“...조금 생각할 게 있어서. 먼저 가봐라.”
그 말을 끝으로 등을 돌린 크리스 경을 그렇게 잠시 바라보다가, 이내 등을 돌려 내 방으로 향했다.
하늘에는 구름 한점 없어서, 둥그런 달빛이 환하게 쏟아지는 복도는 그리 어둡게 느껴지지 않았다.
처음에 이 복도를 걸었을 때 어땠더라.
처음으로 사람을 죽였다는 것에 놀라 헛구역질을 하다가,
그렇게 어깨의 상처를 보곤 붕대를 감으려 이 복도를 걸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촛불 하나에 의지하여, 그렇게 천천히.
괜찮으신 겁니까?
놀라지 않으셨다면, 괜찮으시다면. 그걸로 다행입니다.
‘그랬던 때도 있었지.’
지금 생각하면 이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아이린의 쌀쌀맞던 태도,
그랬던 그녀가 이제는 종종 미소를 보여주고 있었으니.
어쩌면 공작이 내게 했던 말을 나름 잘 수행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과회에서, 그리고 축제에서, 수정궁에서.
처음으로 그녀에게 호위 기사로 남아달라는 말을 듣고, 그렇게 그녀가 처음으로 웃는 모습이 이토록 생생하게 기억 속에 남아있었다.
하늘에 떠있는 달빛은 언젠가 흐려지겠지만, 이 기억만큼은 영원토록 남아있으리라.
끼이익
평소에 잠을 자는 방문을 열자, 처음 이곳에서 눈을 떴던 기억이 떠올라 피식 하고 웃음이 새어나왔다.
그때만하더라도 이런 감정을 품게 되리라곤 생각치도 못했는데, 사람의 마음이란 참 신기하지 않은가.
이제 내가 이곳에 온지 꼭 1년이 되어가는 날이 다가온다.
1년 동안 내가 겪어왔던 것들을 생각하면, 여태까지 살아있는 것이 용한 것 같기도 하고.
허나 이제는 처음 왔을 때 만큼은 힘들지 않을 터였다.
물론 아이린에 대한 이 마음을...언제까지 숨길 수 있으리라 장담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모든 것이 끝나기 전까지 그녀에게 따로 부담을 주고 싶지는 않았다.
그녀는 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하는 쓸데없는 망상에 잠시 젖어 있다가.
이내 고개를 들어 한 구석에 뚫린 창문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달빛이 휘영청 걸린 하늘에는, 이따금 바람에 실린 꽃잎이 날아와 별처럼 밤하늘을 장식하고 있었다.
마치 세이렌에서 보았던 그 풍경처럼.
허나 그 풍경보다도 더 반짝였던 것은 그 광경을 바라보던 아이린이라,
그녀의 새하얀 머리카락이 휘날리는 모습을 떠올린 내 입꼬리가 부드럽게 휘었다.
“언젠가는.”
지금은 아니더라도, 모두가 아무런 근심 없이 행복하게 웃을 수 있는 그날이 온다면.
하늘에 뜨는 달을 보고 온전히 아름답다는 감상만을 품을 수 있는 그날이 온다면.
그 때는 이 마음을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소설 속 악녀의 호위 기사가 된 지 1년이 되어가는 오늘,
나는 머릿속으로 행복한 상상을 조금씩 그리기 시작했다.
더 이상 아이린이 악녀라 불리지 않는 미래를,
로페나도 크리스 경도 함께 웃으며 떠들 수 있는 그 날을,
꽃이 드리워진 정원에서. 조심스럽게 내 마음을 고백할 수 있는 그 날을.
그 모든 날들이 언젠가는 올 것이라 생각하며, 달빛을 눈에 머금은 채 지그시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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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시간이 흐른다.
꽃이 지고, 다시금 피고. 푸른 녹음이 헐벗어 새하얀 눈으로 세상이 덮이기를 반복하고.
새로운 기억을, 그 기억이 다시금 추억으로 변하여 기억 한 켠에 고이 모셔지는 것이 이어지기를 여러 번.
나는 그렇게 이 세상에서의 네 번째 봄을 맞이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