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9화 〉 흐르는 별 아래에서(4)
* * *
들릴 수 없는 소리였다. 적어도 이 호숫가에서, 아무런 건물조차 없는 이곳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소리였다.
마법. 크리스 경이 말했던 이 호숫가에 얽힌 이야기가 머릿속에 뒤엉켜 끈적였다.
이번에 아가씨와 나갈 일이 생긴다면, 세이렌이라는 곳에 가보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 같은데.‘
세이렌 말입니까? 호수라고는 들어본 것 같은데요.
혹시 모르지, 용이 잠든 곳이라니까. 마법 같은 일이 생길지 어떻게 알아?
마법, 사람이 감히 상상조차 하기 힘든 기적을 실현시키는 것이라 들었다.
단지 소문이라고, 그래서 단지 경치를 구경하는 것이 전부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따란 딴
귓가에 아른거리는 이 소리는, 분명 피아노 소리가 아니던가.
홀린 듯이 걸었다. 호수 가장자리를 두르고 있는 흙바닥을 걸어,
분명히 이전까지는 발견하지 못했던 숲을 걸어, 그렇게 숲의 한가운데.
달빛이 쬐어 저 홀로 밝게 빛나는 그 장소에서.
덩그러니 놓인 피아노를 보았다.
마치 방금의 연주가 제 존재를 알리기 위해서였다는 듯 텅 빈 피아노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이내 조심스레 다가가 훤히 드러난 건반을 살짝 눌러보았다.
“피아노가 왜 여기 있는 거죠?”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띵
분명히 방금까지 연주 소리가 들렸던 것 같은데,
아무도 없이 뚜껑만 열린 피아노의 백건은 확실하게 반응하고 있었다.
해머가 현을 때려 공명한다.
숲에서 들려오는 바람소리보다도 청아한 울림이 주변에 퍼지자, 절로 헛웃음이 새어나왔다.
말도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대체 이 호숫가에 피아노가 웬 말이란 말인가.
분명말도 안 되는,크리스 경이 말했던 것처럼 마법과도 같은 일인데도.
어느새 나는 홀린 듯이 의자에 앉아 부드럽게 백건을 쓸어내렸다.
참으로 오랜만이지 않은가. 손이 망가진 뒤로는 한 번도 보지 못했던 것이 피아노였는데,
소설 속 세상에 들어온 뒤에 이렇게 피아노를 보게 될 줄이야.
바람에 한참 동안 닿아있었는지, 피아노의 겉면은 차갑고 축축했다.
피아노에 습기는 그다지 좋지 않은데. 허나 그럼에도 소리는 맑아서,
자신의 상태가 최고라며 자랑하는 듯 숲 전체에 울려 퍼지는 소리에 조용히 고개를 들었다.
노을은 더 이상 없었다.
숲까지 걸어오느라 지체한 시간은 가뜩이나 빨리 사라지는 해를 완전히 어둠 속으로 몰아내는 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어느덧 둥그런 달이 떠올라 그 주변을 별들이 맴도는 밤의 장막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이내 아이린을 쳐다보며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전설이 하나 있었다. 용이 들어가 잠든 호수는 때때로 환상을 불러일으킨다고.
그 사람이 염원하던 것을, 그 사람이 바라는 것을, 그 사람이 미련을 품은 것을 불러일으킨다고.
믿지 않았다. 마법이란 것이 존재하는 세상이었지만, 그저 소문에 불과할 거라 생각했다.
허나 이렇게 마법처럼 생겨난 것들을 보고도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을까.
환상 같지 않았다. 느껴졌다. 나무로 만들어진 피아노의 감촉이, 매끈하게 빛이 달아오른 백건이.
손가락이 닿을 때면 청명하게 소리를 내는 이것을 어찌 환상이라 할 수 있을까.
“피아노, 칠 줄 알아요?”
아이린이 아무렇지 않게 물어봤지만, 나는 그 질문에 저도 모르게 쿡 하고 웃어 보였다.
칠 줄 안다니. 한 때는 밤을 새어가며 치던 것이 피아노였다.
재능이 있었고, 운도 따라주었다. 나름 천재라는 소리도 들어보았건만, 칠 줄 아냐는 질문에 무심코 웃음이 새어나와 한참을 그렇게 웃었다.
“...왜 그렇게 웃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방금 보니까 조금 할 줄 아는 것 같아서 물어본 거예요. 저도 피아노는 몇 번 쳐본 적이 있으니까요.”
“조금.”
잠시 숨을 끊었다가, 이내 힘겹게 내뱉으며 말을 이어갔다.
“조금 칠 줄 압니다.”
도대체 이 호숫가는 내게 무엇을 보여주려 하는 것일까.
내게 남은 가장 큰 미련을 이렇게 보여주어선, 내게 어떠한 대답을 요구하는 것일까.
머릿속이 복잡했지만 이내 천천히 자세를 잡았다. 언제나 그랬다.
머릿속이 복잡할 때면, 연주를 하며 그 답을 찾곤 하지 않았던가.
건반 위에 올라간 내 손은 하얬다. 화상 흉터도, 부러져 툭 튀어나온 뼈도 없었다.
그저 말끔해서, 꼭 예전의 손을 보는 듯 했다.
과거, 미련.
아니면 단지 아이린과 함께 있으니 제대로 생일을 축하해주라며 이런 것을 만들어 낸 것일까.
어쩌면 그럴지도 몰랐다. 사실 아이린에게 어떻게 선물을 건네주어야 할지 꽤나 고민하고 있었으니까.
띵
시간이 흘렀다. 피아니스트였던 자신이 에반 프리드가 되고,
정식으로 기사 서임을 하는 동안 몇 년이란 시간이 흘렀다.
허나 이 선율만큼은 변하지 않았다.
작곡된 지 수백 년이 흘러 수많은 인간이 연주를 했음에도 변하지 않는 이 선율은.
언제나 나 스스로가 존재하고 있음을 깨닫게 만들어주었다.
달이 비치는 밤, 별이 흘러 이 숲의 그림자를 걷어내는 이 찬란한 월광 속에서 가장 어울리는 곡은 기교가 필요한 것이 아니었다.
베토벤, 소나타 14번의 제1악장.
‘...월광.’
저며 든다. 이 고요한 정적을 찬미하는 음률이 나무의 음영을 타고 서서히 번져나가기 시작했다.
달빛이란 태양처럼 밝지 않아서, 언제나 그 빛은 천천히 스며들었다.
눈치 채지 못할 만큼, 허나 눈치 챘을 때는 이미 그 빛에 물들여져 환한 빛 아래에 있다는 것을 깨달을 만큼.
손가락이 현란하게 움직이는 곡이 아니었다. 이따금 잠이 오지 않을 때면, 몰래 나와 이 곡을 연주하곤 했다.
과거.
미련 속에 잠겨 있다는 사실을 쉬이 부정할 수는 없었다.
아이린을 볼 때면 떠오르는 과거의 기억들. 지켜내지 못했던 영광을, 행복을.
나는 이번엔 지켜낼 수 있을까. 어쩌면 이 호수가 내게 보여주고 싶었던 것은 그런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는 에반 프리드라는 삶을 받아들이라는.
과거의 삶을 완전히 잊어서, 더 이상 아이린과 로페나에게 과거를 빗대어 보지 말라는 말일 수도 있었다.
하여 웃는다. 파르르 떨리는 손가락은 와중에도 연주를 이어나가고 있었다.
아다지오 소스테누토, 음 하나하나를 충분히 눌러 빈 공간 없이 채워지는 소리의 향연은 이따금 숨을 막히게 만들었다.
허나 그런 것이 좋았다. 숨이 막혀서, 당장이라도 질식할 것만 같은 이 느낌은 너무도 익숙한 감각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이제는 잊을까. 과거를 잊어도 좋을까. 더 이상 자책하지 않고, 이제는 후회하지 않을 수 있노라 당당하게 말해도 되는 것일까.
찌르르
피아노의 울림과 더불어 풀벌레 소리가 자연스레 섞여 들어왔다.
울린다. 숲이 담고 있는 적막 속에서 울려 퍼지는 소리에 자연스럽게 고개를 치켜들었다.
음악이란 처음에 자연의 소리를 담아내는 것에서 시작했다.
불이 타오르는 소리, 구름이 흔들리는 소리, 바람이 휘몰아치는 소리...하여 연주를 진심으로 할 때면.
그 음악이 극에 달한다면. 소리는 더 이상 자연과 구분되지 않는다.
‘자연스럽다’라는 말이 어울릴 만큼이나 그 주변과 동화된다는 소리였다.
월광, 그 차가운 빛은 소리를 내지 않았다. 그렇기에 표현할 따름이었다.
백건과 흑건, 그리고 일곱 개로 나뉜 기본 음계를 토대로 소리로 표현하는 것.
내가 이렇게 연주할 때면, 관객석을 바라보며 한 차례 피식 웃곤 했다.
음악도 잘 모르는 동생이 엄지를 치켜드는 모습이 귀여워서.
언제까지고 그 모습을 눈에 담고 싶어 힐끔거리며 관객석을 쳐다보았다.
이제는 그 자리에 아이린이 있었다.
한 쪽에 선 채로 그저 멍하니 나를 응시하는, 꽤나 의외라는 얼굴을 한 채 바라보는 그 눈 속에 담긴 것은 감탄이었다.
손이 가벼워진다. 흐릿해지는 과거의 기억이 천천히 스러져 빛 속에 파묻히고,
이내 온전히 시야에 담기는 것은 흐르는 별과 아이린 뿐이었다.
그리고 조용히, 그 푸른 눈을 바라보며 속으로 중얼거린다.
...이번엔, 잃지 않는다.
피아노로 아무리 이름을 세계에 알리든, 그 어떤 누구보다도 많은 부를 얻든.
결국 소중히 여겼던 동생이 죽는 것을 막지 못했다.
돈도, 내가 가진 명성도. 동생이 가진 병을 치료하는 데에는 그 어떠한 도움도 되지 못했다.
동생이 죽은 그 날. 홀로 장례식장을 뛰쳐나와 집에 놓인 피아노를 부쉈다.
악보를 찢었다. 처음으로 콩쿠르에 우승해서 받았던 트로피를 부수고,
그렇게 손이 뭉개져 부러질 때까지 바닥을 내리쳤다.
망가진 손으로 더 이상 피아노를 칠 수 없다는 의사에게 들었을 때, 홀로 집을 떠나 반지하방을 얻어 살았다.
더 이상의 영광도, 위명도, 빛도 없이 살던 내가 변한 것은.
에반 프리드가 된 그 순간부터였다.
아이린 유리스라는 사람을 만나 호위 기사가 되었다. 검을 들고 싸워, 그렇게 피를 흘렸다.
처음에는 그저 호위 기사라는 사명에 움직였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스스로 지키고 싶다고 생각했던 것 같았다.
그녀가 나처럼 무너지지 않기를. 그 차가운 가면을 벗어 던지고 밝게 웃어주기를.
그리고 그녀가 밝게 웃었을 때, 어느덧 마음속에 그녀란 존재가 스며들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더 이상 도망칠 수도 없었다. 협박이라도 하듯, 떠날까 하는 생각을 할 때면 어김없이 그녀의 얼굴이 눈앞에 아른거렸으니까.
그런 생각과 상관없이 연주는 이어진다.
1악장, 다시 2악장. 그리고 3악장까지 이어지는 연주가 극으로 치달아 마침내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 즈음.
문득 동생의 얼굴이 떠올라 눈앞을 어지럽혔다. 허나 더 이상 흔들리지 않았다.
‘...이제는 괜찮아.’
여전히 가슴이 아려오는 얼굴이었다.
눈앞이 흐려져 새하얗게 변하고, 또다시 그 때의 기억에 눈살을 찌푸릴 만큼이나 여전히 내겐 가시 같은 기억이었다.
허나 이제는 견딜 만 했다. 이제는 다시 소중한 사람이 생겼으니까, 이제는 지킬 수 있는 힘이 있었으니까.
달빛이 흩어져, 피아노와 나를 비추던 빛이 서서히 저물기 시작했다.
완벽한 어둠, 허나 손은 건반을 기억했다. 오선지에 나란히 놓인 음표를 기억하며 움직인다.
조금씩, 스타카토로 끊어진 경쾌한 음을 쉴 새 없이 두드리기를 한참.
딴!
다시금 정적이 찾아온다.
불어오는 바람 소리가 귀에 흘러들어와, 이내 연주가 끝났음을 깨닫는다.
머릿속 오선지에 적힌 음표는 더 이상 그려지지 않았다.
월광은 끝났다. 허나 빛은 다시 드리우기 시작해서,
피아노를 바라보던 고개를 들어 내게 비추는 달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분명 연주를 시작할 때만 하더라도 숨이 턱 막힐 만큼 가슴이 답답했건만,
이제는 조금의 답답함도 없이 그저 후련하기만 할 따름이었다.
눈앞에 아른거리던 동생의 얼굴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어쩌면 저 달빛에 함께 흩어져 사라진 것일까. 젖은 눈에 손등을 가져다 대어 닦기를 잠시, 귓가에 들려온 목소리에 상념이 깨진다.
“에반.”
천천히 시선을 옮기자 그 곳엔 아이린이 있었다.
금방이라도 울음이 터질 것 같은 얼굴로 바라보는 그 얼굴에 피식 웃는다.
너무 감정을 담아 연주한 탓일까. 일렁이는 푸른 눈을 바라보자 괜스레 입 안에 쓴맛이 감돌았다.
“제가 너무 우울한 곡을 연주한 것 같습니다.”
“...그런 게 아니라, 도대체”
의문이 많아 보이는 얼굴이었다. 허나 듣고 싶지 않았다.
이제 곧 있으면 아이린의 생일, 그녀가 우는 모습을 보기엔 너무도 좋은 날이지 않은가.
그러니까 조금은 후련해진 마음으로, 조금은 더 밝은 곡을 연주해도 되지 않을까.
손가락을 들어 입가에 가져다 대자,
이내 입술을 달싹거리던 아이린이 나를 바라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월광을 연주하며 과거를 그렇게 저 달빛에 흘려보냈다.
그럼에도 아직 피아노가 남아있다는 소리는, 내가 이루고 싶은 염원이 있다는 소리겠지.
품속에 있는 상자를 조심스레 매만지다가, 다시 건반을 향해 손을 옮겼다.
여러 곡들이 떠올랐지만 역시 이 밤과, 그리고 내 마음을 담아 연주할 수 있는 곡은 이것 하나뿐이지 않을까.
“...아이네 클라이네 나흐트 무지크.”
밤의세레나데.
#
‘...도대체.’
어떤 삶을 살아온 것이냐고, 그렇게 묻고 싶었다. 처음에는 감탄이었다.
조금 피아노를 칠 줄 안다면서,
에반이 건반을 누른 순간 들려온 선율이란 일류라 불리는 음악가들조차 쉬이 보여줄 수 없는 연주였다.
그럼에도 여유 있는 그의 표정이란그것보다도 더 잘 연주 할 수 있다는 소리이리라.
허나 시간이 흐를수록, 숲 속을 울리는 그 음색이 점점 짙어질수록.
그가 연주하는 의도가 무엇인지에 대해 점점 의문이 일기 시작했다.
어찌하여 이렇게 슬픈 것일까. 그저 하나의 연주일 뿐인데도, 이토록 가슴이 울렁이는 것은 어째서일까.
나무를 뚫고 새어나온 달빛이 에반을 비추었을 때,
그의 얼굴에 드리운 것이 무엇으로도 표현할 수 없는 슬픔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놀라웠다. 단 한 번도 자신 앞에서 저런 표정을 지어보인 적 없던 그가 저리 음울한 표정을 짓고 있다는 것이.
항상 제게 웃어주던 호위 기사에 내면 속에 깃든 것이,
자신조차 쉬이 짐작할 수 없을 만큼의 슬픔이라는 사실에 입 안이 썼다.
저도 모르게 뻗어진 손이 허공을 갈랐다.
젖지 않는 물결이 손에 닿아 허망하게 흩어지고,
이내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움켜쥐었을 때. 문득 자신이 입술을 짓씹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무런 도움을 줄 수 없었다.
연주하는 이에게 다가가 무어라 할 수도, 이토록 슬픈 표정을 짓고 있는 이에게 어떠한 도움을 줄 수 없다는 사실에 가슴이 아려왔다.
쉴 새 없이 두드려지는 건반 속에서 전해져오는 선율은 그 무엇보다도 아름답게 느껴졌다.
귓가에 들어와 가슴을 적시는, 일렁이는 마음속에 연이어 파문을 일으키는 소리에 가슴을 움켜쥐었다.
연주가 이어질수록 저 달빛이 더욱 찬란해진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을까.
구름 한점 없이 말끔한 하늘에서는, 별이 흘러 그를 비추고 있었다.
문득 눈이 따끔거렸을 때, 어느덧 자신의 눈에서 눈물이 흐르고 있음을 깨달았다.
들려오는 잔잔한 선율 속에서 느껴지는 것은 에반이 담고 있던 슬픔이라, 그 마음에 동하여 눈물이 흘렀다.
그리고 그 연주가 멈추었을 때 즈음, 잠시 흐려졌던 달빛이 그를 비추었다.
처음과는 달리 완전히 후련해 보이는 얼굴을 한 그는 자신을 바라보며 옅게 웃어보였다.
이제는 괜찮다며, 조용히 눈을 가리킨 그를 바라보며 입술을 달싹였다.
“에반.”
떨리는 목소리가 그에게 닿았음에도, 에반은 쉽사리 입을 열지 않았다.
그저 분위기가 우울해진 것이 자신의 탓이라며, 조용히 입가에 손가락을 가져다 대었을 뿐이었다.
자신에게는 말해줄 수 없는 것일까.
그것이 섭섭해 눈살을 찌푸리자, 이내 다시금 그의 손가락이 건반 위에서 춤추기 시작했다.
따란
방금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만큼 경쾌한 음색에 눈이 크게 뜨인다.
한결 후련해 보이는 에반의 얼굴에는 시원한 미소가 깃들었다.
어쩌면 수줍어하는 것일까, 작게 드리운 홍조를 바라보기도 잠시.
이내 이어지는 음색이 자신의 가슴을 간질이기 시작했다.
우아하면서도 경쾌한, 서로 상반된 선율이 가로질러 주변을 휘감았다.
수줍게 속삭이는 연인이 가슴팍을 두드리는 것처럼 부드러운 음색,
순간 달아오른 볼을 쓰다듬다가 이내 지그시 눈을 감았다.
사람의 감정을 뒤흔든다는 것이 이토록 쉬운 일이었던가. 아니, 분명 그렇지는 않을 터였다.
방금까지만 하더라도 눈을 적실만큼이나 아려오는 가슴이었건만,
고작해야 바뀐 선율에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은 무엇이란 말인가.
...에반은 웃고 있었다. 방금까지 보여주었던 슬픈 표정은 모두 거짓이었던 것처럼.
그렇게 환하게 웃는 모습에 얼굴에 열이 달아올랐다.
누구를 생각하며 저런 연주를 하고 있는 것일까. 어떤 이를 생각하며 저리 밝게 웃는 것일까.
의미 없는, 구태여 생각할 필요 없는 상상이었으나 그것이 마음에 걸려 쓰게 웃었다.
점괘를 듣고 에반이 지었던 복잡한 표정이 마음에 걸렸다.
그런 그가 마음에 품고 있는 대상이 과연 누구일까. 만약 그것이 자신이라면.
‘...그럴 리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처음 만났을 때 그토록 쌀쌀맞게 대했는데,
어찌하여 자신에게 그런 마음을 품겠는가. 매일 같이 수십 장의 편지가 그에게 전해졌다.
자신이 모르는 사이, 그 편지를 보낸 한 영애와 마음이 맞았을 지도 모르리라...
따란
들떴던 마음이 가라앉아, 이내 밝게만 보였던 달빛이 서서히 그 색을 잃는 듯 했다.
어두운 숲에는 더 이상 별이 흐르지 않았다.
단조로운 선율이 흘러, 천천히 얼굴에 돌던 화색이 옅어지기 시작했다.
기분이 이렇게 이상한 이유는 무엇일까. 로페나가 제 목걸이를 자랑했을 때,
에반이 선물해주었다는 말에 기분이 그토록 상했던 이유가 무엇일까.
‘어쩌면.’
아니, 그저 착각에 불과하리라. 자각하고 싶지 않았다.
이미 알고 있을지는 몰라도, 구태여 의식하고 싶지 않았다.
그 사람의 마음속에 담긴 것이 자신이 아니라면. 얼마나 상실감을 얻게 될 지 알 수 없었으니까.
선율이 옅어진다. 그토록 경쾌하던 소리가 점차 줄어들어, 이내 흐르던 음악의 끝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건.”
이윽고 고개를 들었을 때, 점차 흐릿해지는 숲의 광경에 눈이 크게 뜨였다.
애초에 처음부터 보지 못했던 숲이라 이상하게 생각하고는 있었지만, 숲이 흐릿해진다니.
허나 계속해서 펼쳐지는 광경은 그보다도 더욱 놀랍고 찬란한 것이었기에,
이내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딴
음악의 끝을 알리는 건반이 두드려지는 순간,
계속해서 선율이 흐르던 피아노가 잘게 흩어지기 시작했다.
마치 반딧불이가 퍼지듯, 주변에 찬란한 빛무리를 뿌리며 흩어지는 모습에 에반 또한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숲이 흩어진다. 모래가 바람에 흩날리는 것처럼 밝은 빛 알갱이가 주변을 날아들었다.
별.
...별이 흐르고 있었다.
바람에 실려 날아드는 빛 알갱이가 하늘에 퍼져, 이윽고 그 캄캄한 밤하늘에 묻어 금처럼 반짝이기 시작했다.
바람에 흘러 하늘을 장식하는 그 빛들이 별처럼 보였다.
빠르게 움직이면 꼭 별이 흐르는 것처럼 보이듯이, 상상 속에서나 볼법한 모습에 작게 입이 벌렸다.
복잡했던 머릿속이 확 트이는 것만 같았다.
답답했던 가슴이 단숨에 후련해지는 그 아름다운 광경이 이내 눈동자에 스며들었다.
찬란하게 빛나는 그 빛을 조금이나마 더 보고 싶어 손을 뻗었지만,
손가락 끝에 겨우 닿은 빛 알갱이는 허망하게 흩어질 따름이었다.
“...아.”
흐릿해지는 빛들이 다시 밤 그늘에 스며드는 것을 멍하니 바라보기도 잠시,
천천히 주변에 가라앉는 적막함에 시선을 돌렸다.
더 이상 숲은 없었다.
오로지, 처음 보았던 그 호수만 있을 뿐.
에반이 앉아 있는 곳은 그저 바위였고, 방금까지의 광경은 그저 환상처럼 순식간에 사라진 것이 전부였다.
자신이 들은 연주가 이토록 생생한데, 그것들은 전부 무엇이란 말인가?
“세이렌이란 호수에는, 전설이 하나 전해져 오고 있습니다.”
“...전설?”
“사람이 품은 과거를 버리게 해주고, 바라는 염원을 이루게 해주는 것이죠.”
조용히 중얼거린 에반이 천천히 바위에서 일어서 자신에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품속을 뒤적거리던 그가 이윽고 꺼내든 것은, 아주 자그마한 상자.
그것을 움켜쥔 에반은, 이내 자신을 바라보며 한차례 피식 웃어보였다.
“처음에 연주한 건 제 과거였습니다. 이제는 아무도 모르는...그런 과거죠.”
댕 댕
종이 울리는 소리가 들렸다. 정각이면 들려오는 소리,
허나 자정이면 두 번 울리는 그 종소리에 어느덧 자정이 지났음을 깨닫는다.
“그리고 두 번째로 연주했던 건, 제가 바라던 것이었습니다. 처음에 연주한 게 너무 울적했으니까, 조금 그런 곡을 연주해보고 싶었거든요.”
스륵
상자 속에서 꺼내진 것은 달빛에 비추어 반짝이는 금색의 목걸이였다.
꽤나 익숙한 형태에 눈을 가늘게 뜨기를 잠시,
어느새 자신의 앞까지 다가온 에반이 옅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고민 많이 했습니다. 선물을 무엇을 해드려야 할지, 무엇을 선물 해드려야 할지 아가씨가 조금 기뻐할 지 고민 많이 했는데...아무래도 이것 말곤 딱히 생각이 안 나더군요.”
“이건...?”
“처음에 외출했을 때 기억하십니까? 아가씨가 시선을 두고 계셨던, 그 영애들이 떠들고 있던 목걸이를 보고 계셨지 않습니까.”
어머, 이건 분명히!
수도에서 온 디자이너 르브가 만든 브로치죠, 정말 보기만 해도 고급스럽네요.
이건 파니아가 만든 사파이어 목걸이에요. 이럴 수가!
입술이 작게 벌렸다. 아주 잠깐그 목걸이에 시선을 둔 적이 있었지만, 그것을 기억하고 있다는 것은.
“파니아가 만든 사파이어 목걸이입니다. 최근 거를 구하는 데에는 돈이 조금 아슬아슬해서, 어쩔 수 없이 조금 전에 것을 샀는데...맘에 드실지 모르겠네요.”
도대체.
작게 벌려진 입술이었건만, 그 사이에서 어떠한 목소리도 새어나오지 않았다.
쉴 새 없이 두근거리는 심장이,
이내 타오르듯 번져 오르는 열기가 얼굴에 퍼져 저도 모르게 손으로 두 얼굴을 감싸 쥐었다.
“왜, 왜...”
나한테 이렇게까지 해주는 것인지. 그리 묻고 싶었지만 제대로 된 말이 튀어나오지 않았다.
일렁이는 푸른 눈 사이에 온갖 감정이 스쳐 지나갔다.
의문, 희망, 다시 자조, 그리고 다시금 설레는 가슴에 손 틈 사이로 시야를 열었을 때.
이 어둠 속에서도 찬란히 빛나는 녹안이 부드럽게 휘었다.
“...아가씨니까요.”
그냥, 조금 더 신경 쓰였습니다. 그리 덧붙인 에반은 이내 부끄러운 듯 시선을 돌렸다.
손에 들린 사파이어 목걸이가 찰랑거리며, 달이 보내는 빛이 부서져 찬란히 반짝였다.
머뭇거리던 그 손이 잠시 허공에 움찔거리다가. 이윽고 천천히 다가와 제 목에 닿았다.
시선이 마주친다. 그렇게 잠시, 아무 말 없이 서로를 응시했을 때, 에반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걸어드려도...괜찮겠습니까?”
“...풋.”
“아, 아니. 그냥 제가 직접 산거니까. 아가씨 생일이기도 해서 제가 한 번 즈음 그냥 걸어”
“허락 할게요.”
방금까지 연주할 때 보여주던 그 진중한 모습은 어디 갔는지,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손사래를 치는 에반의 모습에 저절로 웃음이 새어나왔다.
천천히, 그렇게 에반을 향해 목을 들자 이내 차가운 숨결이 닿는 듯 했다.
그만큼 가까운 거리였다. 지그시 눈을 감자 보이는 것은 오로지 새까만 정적,
긴장한 듯 살짝 떨리는 손이 목에 닿자 어째선지 그 부분이 간지럽게만 느껴졌다.
자신을 배려하는 듯, 아주 조심스러운 그 손길에 입꼬리가 옅게 휘었다.
달칵
목걸이가 목에 걸리고, 조심스레 몸을 떼어낸 에반의 귓가는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뺨을 살짝 긁은 에반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로페나에게 걸어주었을 때도 이랬을까.
순간 그런 생각이 들어 눈살이 찌푸려졌지만, 이내 그럴 리가 없다는 생각에 다시금 웃어 보였다.
이런 에반의 모습을 아는 것이 이 세상에 얼마나 될까. 아마 자신이 유일할 지도 몰랐다.
그것이 마음에 들어서, 조심스레 들어 올린 손이 에반의 뺨에 닿았다.
“고마워요.”
저번에 그가 자신에게 그랬던 것처럼,
이번에는 자신이 그리 하자 이내 그의 뺨에서 뜨거운 기운이 물씬 전해져 왔다.
그 때의 자신이 이런 기분이었음을 그가 깨달았을까.
목걸이, 그에게 받았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의미있는 선물이었다.
분명 태어나 그 어떤 귀족에게 받았던 것보다도 더욱 소중한, 그런 선물이리라.
그런 마음에 옅게 미소 짓자, 머뭇거리며 뒤로 물러난 에반이 힘겹게 입술을 떼어내었다.
“...어, 그.”
“할 말이라도 있어요?”
뺨에 닿았던 손을 떼어내자, 제 얼굴을 쓸어내린 에반이 힘겹게 숨을 토해내었다.
눈이 마주치기를 잠시, 한 차례 피식 웃은 에반이 떨리는 목소리로 조용히 중얼거렸다.
“생일...축하드립니다.”
이윽고 황급히 떨어지는 시선에 또 다시 쿡 하고 웃음이 새어나왔다.
이토록 웃을 일이 많지 않았는데, 어찌하여 자꾸만 웃음이 새어나오는 것일까.
허나 그런 모습이 마음에 들었다.
고작해야 생일 선물 하나에 부끄러워하는 것이,
자신이 시선을 두었던 그런 사소한 것을 아직까지도 그가 기억해주고 있다는 것이.
그리고 그 녹안에 비치는 것이, 오로지 자신 하나라는 것이.
그 어떤 선물보다도, 그것이 마음에 들었다.
흐르는 별 아래, 둥근 달이 태양보다도 환히 빛나 주변을 빛으로 감싸는 그 밤 아래에서.
그 어느 때보다도 환히 웃어보였다.
아마도 평생토록 이 날을 잊지 못할 거라 생각하며.
그렇게 그 녹안을 가슴 속에 품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