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7화 〉 흐르는 별 아래에서(2)
* * *
시간이란 참으로 오묘한 것이었다.어쩔 때는 한없이 느리게 흐리다가도 막상 급할 때는 유수처럼 흐르는 것이 시간이지 않은가.
눈 깜짝하니 며칠이 흘렀고, 다시 눈을 끔뻑였을 때 어느덧 일주일이란 시간이 훌쩍 지나가 있었다.
“내일이면!”
“...아가씨 생일이지.”
폴짝거리며 뛴 로페나를 바라보기도 잠시, 이내 옅게 한숨을 내쉬며 쓰게 웃었다.
그래, 내일이면 아이린의 생일이지. 아침부터 그런 말을 들으니 괜히 몸이 움츠려드는 것 같았다.
선물, 나름 준비하기는 했는데. 도대체 이걸 어떻게 전해드려야 할지 고민이 많았다.
아가씨, 생일 축하드립니다. 솔직히 말해 너무 평탄한 말이었다.
조금 더 분위기 있게 건네주고 싶었는데...아무래도 마땅한 생각이 떠오르지 않아 한동안 고민이 꽤 많았다.
아마도 오늘 밤, 종이 치면 선물을 전해 주고 싶은데. 과연 그녀에게 여유가 있을지도 잘 모르겠고.
그나저나 로페나가 퍽 신나보였다. 요 근래에 아이린과 조금 사이가 어색해 보인다고 느꼈는데,
그저 내 착각이었을까. 조심스레 묻자, 눈을 데구르르 굴린 로페나가 뻐끔거리며 입을 열었다.
“생일을 기회로 아가씨랑 화해해야 하니까요. 울상을 짓고 있을 순 없죠.”
“화해? 아가씨랑 싸우기라도...그럴 리는 없는데.”
아이린 성격에 로페나랑 싸울 리가 없지.
아마도 싸우기 보다는, 로페나쪽에서 일방적으로 핀잔을 먹은 것이 아닐까.
과연 그 생각이 맞아 떨어졌는지, 순식간에 울상이 된 로페나가 입술을 삐죽이며 입을 열었다.
“저도 아가씨 기분이 왜 나빠진 지는 잘 모르겠어요. 그냥 기사님이 선물해주신 목걸이를 보여드렸는데, 갑자기 분위기가 막 싸해지는 거 있죠.”
“그랬어?”
“아니, 전 진짜 잘못 한 게 없어요. 그냥 생일 선물 자랑한 건데, 아무래도 아가씨 기분이 그 때 많이 안 좋으셨나 봐요.”
“그랬나보다.”
로페나의 머리를 조심스레 쓰다듬자, 로페나가 한숨을 내쉬며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혹시 머리 쓰다듬는 게 영 별로였나. 허나 머리를 살짝 치켜든 로페나는 이내 내 예상과는 살짝 다른 말을 내뱉었다.
“이렇게 있으면 뭔가 안심이 되네요. 처음에는 조금 싫었는데, 이것도 버릇이 되려나 봐요.”
“네가 워낙 작으니까.”
“아니, 안 작아요. 저 이래 뵈도 올해 들어서 키 조금 컸단 말이에요.”
키가 자랐다니, 내 눈에는 여전히 작아 보이는데 말이야.
그 말에 피식 웃기도 잠시, 째깍거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어느덧 오후를 가리키고 있는 시계가 눈에 띄었다.
이제 교대 시간이었던가. 정식으로 서임하기 전에도 이렇게 교대하곤 했지만,
아무래도 서임한 뒤로는 시간을 조금 빡빡하게 맞출 필요가 있었다.
그렇지 않았다간 크리스 경에게 한소리를 듣을 뿐더러, 아이린의 눈초리 또한 날카로워졌으니까.
“이제 난 가봐야겠다. 너도 딴 짓하지 말고 얌전히 있어. 아니면 리제 씨가 하는 일이라도 가서 돕던가.”
“안 그래도 그러려고 했어요. 좀 이따 봐요!”
언제나 저렇게 밝을 수 있는 것도 재주이리라.
로페나의 뒷모습에서 느껴지는 익숙한 향취에 잠시 쓰게 웃다가, 이내 등을 돌려 아이린이 있는 곳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
집무실로 들어갔을 때 보인 풍경이란 내가 생각하는 것과는 꽤나 거리가 멀었다.
분명히 책상 가득히 쌓인 서류더미를 볼 거라고 생각했건만,
의외로 깔끔한 책상에는 아이린이 퀭한 표정을 지은 채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짙은 커피 향.
늘 다즐링만 고집하던 아이린이 커피를 마실 정도로 일에 집중했던 걸까.
그녀의 옆에 놓인 찻잔에 찰랑거리는 검은 색의 물결을 바라보기도 잠시, 이내 아이린을 바라보곤 한차례 옅게 웃어보였다.
“너무 무리하신 게 아닙니까.”
“...무리해야 했어요. 그렇지 않으면, 하루도 쉬지 못하고 일만 하고 살아야 했을 테니까요.”
눈이 침침한지, 한차례 눈을 지그시 누른 아이린은 이런저런 것이 적혀 있는 서류를 들어 올리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내일 모레면 또 서류더미가 쌓이겠죠. 하루라도 쉬려면...조금 무리하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었으니까요.”
“조금 주무시는 게 어떠십니까?”
분명 또 밤을 샜을 것이 분명했다. 눈 밑에 짙게 깔린 음영,
저번처럼 쓰러지면 어쩌려고 저리 무리를 하는 것일까.
작게 눈살을 찌푸리자, 그런 나를 보곤 아이린이 힘없이 대꾸했다.
“별로 자고 싶지는 않네요. 이걸 마시니, 어째 잠이 잘 오질 않아서.”
“커피를 많이 드시는 건 몸에 그다지 좋지 않습니다. 안 그래도 주무시는 시간이 적지 않으십니까.”
질리도록 마셔본 탓에 잘 알고 있었다.
물론 이 시대의 커피가 현대의 커피와는 꽤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렇다한들 카페인은 똑같이 들어있지 않은가. 걱정스런 표정으로 그리 말하자,
피식 웃은 아이린이 찻잔을 내려놓으며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럼 그대가 대신 서류 좀 봐줄래요? 그럼 나도 좀 잘 수 있을 텐데 말이죠.”
“서류 보는 재주는 없는 터라, 그건 좀 힘들 것 같은데요.”
시도를 안 해본 것은 아니었다.
다만, 아이린이 서류를 매만지는 내 모습을 보곤 꽤나 화가 많이 났을 뿐.
그 뒤로는 서류에 얼씬도 하지 말라하지 않았던가. 솔직히 마음이 상하긴 했지만,
내가 생각하더라도 그녀의 일을 직접 돕는 것은 무리일 성 싶었다.
애초에 그런 서류보다는 악보를 볼 일이 훨씬 많지 않았던가.
그 말을 들은 내가 어깨를 한 차례 으쓱이자, 아이린이 얼굴을 조용히 쓸어내리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이제 해가 하늘 꼭대기에 걸린 지금, 햇살이 부서져 반짝이는 정원은 썩 괜찮은 광경처럼 보였다.
어느덧 땅에서 조금씩 피어나기 시작한 꽃들,
이따금 팔랑거리며 날아온 곤충들이 저마다 하나씩 꽃에 붙어있는 걸 보기를 잠시.
정원을 멍하니 바라보던 아이린이 이내 조용히 중얼거렸다.
“...날씨가 좋네요.”
오늘은 바람이 차갑지 않았으니, 따사로운 햇살이 바람에 섞여 이따금 훈풍이 볼에 닿아 흩어졌다.
비록 겨울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아 꽃은 적었어도, 봄이라는 계절에 딱 맞는 날씨라 하면 아마도 오늘이 아닐까.
그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자, 시선을 돌린 아이린이 나를 바라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갈래요?”
“...네?”
갑작스런 말에 눈을 크게 뜨자, 눈을 가늘게 좁힌 아이린이 다시금 나지막한 목소리로 내뱉었다.
“밖에 나가자는 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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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페나도, 크리스 경도 없었다. 그저 정말 아이린과 나 단 둘이 있을 뿐,
산책을 핑계 삼아 나온 곳이란 이전에도 한 번 들렸던 시가지였다.
그나마 다른 점을 꼽자면 아이린이 평소에 입던 드레스 대신에 조금 더 수수한 것을 입었다는 점일까.
남들의 시선에 띄고 싶지 않다.
그저 여유를 만끽하고 싶다는 이유로 시작된 갑작스런 외출에,
내가 정신을 완전히 되찾는 것에는 꽤나 긴 시간이 걸렸다.
높다랗게 솟아오른 시계탑, 그 위에 달려있는 종을 바라보기도 잠시.
이내 내 옆에 아이린이 있음을 깨닫곤 옅게 한숨을 내뱉었다. 그녀에게 주어진 얼마 남지 않은 휴식.
마음 같아선 조금이나마 눈을 붙이라고 말하고 싶었건만,
어쩐 일인지 평소와 달리 고집을 부리는 모습에 이렇게 밖으로 나올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나온다 한들 무얼 하겠는가.
축제도, 그렇다고 무슨 기념일이 있는 것도 아닌 터라 광장은 한산하기 그지없었다.
정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일하기 바쁜 시간이었으니
보통 여가 생활을 즐기기 위해 나오는 광장에 사람이 없는 것이 당연하지 않을까.
허나 그런 것은 별 상관이 없었는지, 무표정한 아이린의 표정에서 그녀가 꽤나 들떠있음을 알 수 있었다.
바람이 불었다. 그 바람에 섞인 꽃잎이 흔들려 땅에 내려앉자,
차가운 회색을 띄던 돌바닥이 수채화 빛으로 물드는 것도 같았다.
‘...나쁘지는 않아.’
그녀가 처음 말했던 것처럼, 평소에 자주 볼 수 없는 따스한 날씨긴 했다.
이런 날이 앞으로 얼마나 있을지도 몰랐으니, 한 번 즈음 이렇게 나오는 게 그리 나쁘지는 않겠지.
허나 이렇게 계속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돌아다닐 수는 없는 터라, 나는 아이린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혹시 찾으시는 거라도 있으십니까?”
“아뇨, 그냥 나온 거니까요. 조금 이렇게 걷다가 들어갈 생각이에요.”
애매했다. 이렇게 멍하니, 그저 한산한 거리를 걸으며 시간을 보낼 생각은 전혀 없지 않은가.
기껏 이렇게 나왔으니, 적어도 그녀에게 이런저런 것들을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 컸다.
공작저에선 무언가를 즐기기가 어려웠다. 공작령에 아무리 많은 것들이 있다곤 하더라도,
결국 공작저 밖으로 잘 나오지 않는 그녀가 직접 본 것이라곤 저번에 축제에서 본 것들이 전부였다.
“식사하실 생각이 있다면, 식당이라도 가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거리만 돌아다니기엔 워낙 볼 것이 없으니까요.”
점심 식사도 하지 않고 나왔다. 혹여 배고프지는 않을까 싶어 묻자, 이내 조심스레 고개를 끄덕인 아이린이 되물었다.
“그러고 보니 식사를 거르긴 했죠. 추천할 만한 곳이라도 있나요?”
“당연하죠.”
정식으로 서임하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시가지에 나올 일이 잦았다.
스스로 사용할 장비를 구매하거나, 그냥 머리를 식힐 겸 나오기도 했으니까.
그런 시간을 보내며 내가 찾은 것이란, 이 시가지에서 숨겨진 명소들이었다.
애초에 고급 진 식당이라 할 것도 없었다. 물론 찾아보자면 고급 진 곳을 찾을 수도 있겠지만,
사실 정말 제대로 된 곳을 찾자면 수도에서 찾는 편이 이로웠다.
여기는 북부, 신선한 재료를 조달하기엔 여러모로 애로사항이 가득한 곳이었으니까.
하지만 고급진 음식들과 달리 서민들이 자주 즐기는 음식은 꽤나 발달한 편이었다.
아무래도 이종족과 몬스터들이 당장 저 베르뎅 산 너머에 있었으니,
그들을 사냥하는 사냥꾼들이 많아져 자연스레 그런 음식이 발달한 것이었다.
고민도 많았다. 과연 아이린을 그런 곳으로 데려가도 될지,
그래도 나름 내가 모시는 분인데 허름한 곳에 데려가는 것은 조금 모양새가 빠지지 않겠는가.
하여 식당들이 모여 있는 곳을 바라보며 고민하고 있을 때 즈음, 아이린이 다가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난 허름한 곳도 괜찮아요. 어차피 고급 진 곳에 가면 괜히 시선만 끌릴 테니까요.”
그리곤 한 곳을 손가락을 가리켰는데, 그 식당이 마침 내가 생각하고 있던 곳이라 저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나왔다.
도대체 내 시선을 언제 눈치 챈 것일까. 하여 그쪽으로 다가가자, 식당의 내부를 확인한 아이린이 작게 숨을 토해내었다.
“아까 그리 말해놓곤 우습긴 하지만...여기 괜찮을까요?”
조금 허름하긴 했다. 애초에 그리 유명한 곳도 아니었고, 알 사람만 아는 곳이었으니까.
하지만 나름 맛에 대해선 자신이 있었다.
크리스 경이 말하기로는 이 공작령에서 이 곳을 따라잡을 만한 식당은 거의 없다하지 않았던가.
그 말을 듣고 몇 번 들렸을 때는, 크리스 경의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꽤 괜찮은 곳입니다. 공작저에서 먹는 것보다는 아닐지라도, 아는 사람들은 매 끼니를 이곳에서 해결할 정도니까요.”
허나 아이린의 표정에 실린 의문은 쉬이 풀리지 않았다.
하기야, 평생을 그 공작저에서 살아온 그녀가 이런 곳에서 식사하기에는 조금 꺼려지겠지.
잠시 식당을 바라보며 고민하던 아이린은 이내 고개를 주억거리며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끼익
밟을 때마다 삐걱거리는 소리가 나는 판자, 언뜻 보아도 우중충한 색을 띄고 있는 나무 탁자까지.
그리고 수염이 가득한 식당 주인이 다가왔을 때,
아이린의 얼굴을 딱딱하게 굳다 못해 아예 새하얀 고목이 된 것처럼 보였다.
“무얼 주문하겠소?”
“고기 스튜랑, 뒷다리를 조금 썰어서 주면 좋겠군.”
주문을 받은 식당 주인이 물러나자, 얼굴빛이 창백해진 아이린이 나를 바라보곤 조심스레 속삭이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잘못 온 것이 아니냐며, 차라리 자신이 조금 무리하더라도 더 나은 곳으로 가는 것이 어떠냐는 그 물음에 피식하고 웃음이 새어나왔다.
“아가씨,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만약 맛없으면 저에게 무어라 하시면 되는 일 아닙니까.”
“...그대에게 무어라 할 생각은 없어요.”
그렇게 말하며 눈을 가늘게 뜬 아이린은, 이내 식당의 문을 바라보며 나지막히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당장 밖으로 나가고 싶겠지. 허나 곧 음식이 나오면 태도가 바뀔 아이린을 생각하자 입꼬리가 절로 씰룩이는 듯 했다.
이런 반응을 기대하는 것도 아이린과 함께 있을 때에만 느낄 수 있는 하나의 재미이지 않을까.
이윽고 음식이 나오자, 생각보다 괜찮은 음식의 겉모습에 아이린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마늘향이 풍기는 소스,
먹음직스러운 갈색의 소스로 잔뜩 적셔진 스테이크를 조심스럽게 썰어내자 이윽고 선홍빛의 속살이 드러났다.
까맣게 탄 겉면, 하지만 그와는 달리 푹 누르면 육즙이 새어나오는 선홍빛의 살에 아아린의 눈이 살짝 크게 뜨였다.
하지만 아직 감탄하기는 일렀다.
이 스테이크의 진정한 묘미는, 같이 구워진 아스파라거스와 함께할 때 진정으로 나타나는 것이었으니까.
마저 스테이크를 썰기 위해 칼을 가져다대자 버터 특유의 고소한 향과 기름진 고기향이 코로 새어 들어왔다.
“어떠십니까? 식당과는 달리...이 요리 만큼은 유리스에서 최고라 불릴 만 하니까요.”
잘게 썰린 고기 한 점을 집어 들었다. 겉에 코팅된 버터가 촛불 빛에 닿아 반짝였다.
그 밑으로 흐르는 투명한 육즙. 그것을 감상하기도 잠시, 이내 조심스레 입으로 넣자 자연스레 탄성이 터져 나왔다.
고기를 썰면서도 느꼈지만, 역시 이 식당의 스테이크는 가히 일품이라 할만 했다.
혀에 닿는 순간 입안을 부드럽게 감싸는 고기의 감촉이 선명히 느껴졌다.
이빨과 맞닿을 때마다 느껴지는 고소한 육즙이,
그리고 동시에 혀를 때리는 마늘의 알싸한 향이 고기 특유의 누린내를 완벽히 잡아주고 있었다.
그리고 뒤이어 느껴지는 버터와 아스파라거스의 향,
버터만 느껴졌더라면 조금 느끼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었겠지만,
잘 구워진 아스파라거스가 뱉어내는 잔잔한 풀향이 이내 그런 느끼함을 느낄 새조차 없이 전해져 왔다.
도대체 이런 음식을 파는 식당이 어째서 이리 허름한 것일까.
순간 의문이 일었지만, 그런 것보다도 먼저 들어온 것은 나를 빤히 바라보는 아이린의 표정이었다.
“...맛있나요?”
“솔직히 말하자면, 공작저에서 먹었던 스테이크보다도 맛있습니다.”
“그런 허풍은 믿지 않아요.”
그녀에게 주어졌던 스테이크를 먹었으니, 이내 이상이 없다는 것을 깨달은 아이린이 조심스레 썰린 고기를 입에 집어넣었다.
우물거리는 입을 바라보기도 잠시, 이내 천천히 변하는 그녀의 표정에 저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나왔다.
처음에는 의문, 그 다음에는 부정, 그리고 서서히 감탄으로 바뀌어가는 표정이란.
이내 눈동자를 반짝이며 나를 물끄러미 쳐다본 아이린이 조심스레 입술을 달싹였다.
“맛있네요?”
“그렇다니까요. 저 못 믿으신 겁니까?”
“아, 아뇨. 그런 게 아니라, 의외라서요. 이런 곳에 이 수준의 음식이 있을 거라곤...정말 상상도 못했어요.”
정말 그렇게 생각했는지, 신기하다는 듯 스테이크를 바라보는 아이린의 푸른 눈이 연신 일렁이고 있었다.
이런 모습을 보는 것은 아마 처음인 것 같은데.
반짝이는 눈으로 스테이크를 먹어치우는 아이린의 모습을 보자 괜스레 가슴이 간질거렸다.
마음 같아선 직접 하나를 먹이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그런 생각은 어디까지나 망상에 그칠 따름이었다.
“괜찮죠?”
“그대를 의심한 게 미안할 만큼요.”
그 말에 손을 들어 입을 가렸다.
참으려 했는데도 자꾸만 미소가 지어져서, 아이린을 바라볼 때면 자꾸 흐뭇한 미소가 지어졌다.
그 자그마한 손으로 고기를 써는 것이, 작게 벌려진 입으로 고기가 들어가는 게, 그리고 그 반짝이는 시선이 내게 향할 때면.
저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지는 것을 주체하기가 힘들었다.
마냥 좋기만 했다. 어쩌면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이 순간이.
그 어떤 사람도 쉽사리 느낄 수 있는 지극히 평범한 지금의 이 순간이. 나는 어째서 이렇게 특별하게 느껴지는 것일까.
평범했다.
그래서 좋았다.
여전히 스테이크를 입에 넣고 우물거리는 아이린을 바라보다가, 그렇게 또 웃고 말았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