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4화 〉 서임식(4)
* * *
“잘 어울리는군. 뭐라 해야 할까...정말 내가 생각하는 유리스의 기사 모습을 그대로 빚어낸 것처럼 보이네.”
“감사합니다.”
“...너무 딱딱하게 쳐다보지는 말게. 내가 여기에 왔다는 것만으로도 그대가 부담스러울 것이란 걸 잘 알지만, 그래도 한 번 즈음 만나보고는 싶었으니까. 전해줄 말도 있었고.”
내가 부담스러워할 것을 알고 있었다면 안 오는 것이 가장 좋았을 텐데.
속으로 비아냥 거렸지만, 겉으로는 그런 티를 낼 수 없어 그저 멋쩍게 웃을 따름이었다.
황태자, 그 존재를 이렇게 앞에서 대면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말이야.
허나 막상 만난 황태자는 내가 아는 모습과는 사뭇달랐다.
오만하고, 모든 것을 자기 멋대로 행하려는.
허나 자신이 사랑하는 원작 여주에게 만큼은 따듯한...그런 남자라고 생각했는데.
내 앞에서 차를 홀짝이는 모습엔 분명 품위가 있었다.
황태자가 가지는 위엄이 있었고, 아직 서임식조차 치루지 못한 나를 대하는 태도에 존중과 배려또한 섞여 있었다.
허나, 분명한 건 내가 알던 원작의 황태자와는 다르다는 점이었다.
‘어쩌면 내 생각보다 훨씬 일이 잘 풀릴지도 몰라.’
4년 뒤, 원작이 시작되는 시점에서의 황태자와는 차원이 달랐다.
그때의 황태자였다면 아마 지금 즈음 내 목에 칼이 들어와 있어도 이상하지 않았겠지.
황태자가 보이는 태도는 꽤나 유순했다. 얘기가 잘 통할 거란 생각에 들뜨기도 잠시,
나를 지그시 바라보던 황태자가 입을 열었다.
“먼저 정식으로 기사가 되는 걸 축하하네. 아마 이 대륙의 최연소. 자주 들었겠지만, 나 또한 그대에게 거는 기대가 매우 크지.”
“과찬이십니다.”
“과찬이 아니야. 단신으로 트롤 로드를, 그것도 어둠에 물든 녀석을 베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지. 음유시인들이 자네에 대한 노래를 하고 있는 걸 알고 있나? 오, 위대한 에반이여. 검을 들어라”
“...처음 들어봅니다.”
음유시인들이 내 노래를 하고 있다니,
공작저에만 있던 나로서는 그에 대해 알 길이 없어 그저 얼굴을 붉히는 것이 전부였다.
애초에 그런 노래를 당사자 앞에서 태평하게 부르는 것이 맘에 들지 않았다.
어쩌면 내게 망신을 주는 게 아닐까.
허나 황태자는 노래를 부르다 멈추곤 씨익 웃을 뿐, 그 이상 무어라 말하지는 않았다.
“사실 꽤나 놀랐습니다. 그저 일개 기사의 서임식일 뿐인데, 이렇게 직접 행차하실 줄이라곤 상상도 못했으니까요.”
내가 그리 말하자, 황태자는 과장스럽게 어깨를 으쓱이며 나를 바라보았다.
“그대가 일개 기사라면, 우리 제국의 전력은 대폭 축소되겠군. 기사가 10명도 안 되는 나라라니, 농담으로도 못할 소리지. 과한 겸손은 필요 없네. 나는 그대를 좋게 봤고, 축하하기 위해 여기에 왔으니까.”
그 말에 나는 한차례 쓰게 웃었다. 아무리 봐도 그저 축하하기 위해서 온 건 아닌 것 같은데.
아까 그가 직접 언급한 할 이야기라는 것도 있지 않은가.
하여 황태자를 빤히 바라보자, 내 시선을 느낀 그는 이내 머리를 긁적이며 입을 열었다.
“좋아. 아무래도 그냥 축하하러 왔다고만 하면 믿지 않을 거라 생각하긴 했으니까. 바로 본론을 꺼낼 생각인데...괜찮겠나?”
“괜찮습니다. 전하의 뜻대로 하십시오.”
내가 그리 말하자, 잠시 머뭇거리던 황태자가 품속에 손을 집어넣더니 이내 하나의 문장을 꺼내들었다.
금색으로 찬란히 빛나는 문장, 황실을 상징하는 용의 아가리 밑에 달린 두 자루의 검을 보았을 때.
나는 무심코 눈살을 찌푸린 채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황실 기사단의 증표가 아닙니까?”
“자네는 아직 서임식을 치루지 않았으니, 정식으로 유리스의 기사라고 할 수 없지. 혹시 이걸 가슴팍에 달을 생각은 없나?”
“...어지럽군요. 황실 기사단이라.”
저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나왔다. 그 황태자가 직접 내게 와서 황실 기사단 소속이 되라고 말하다니.
황실 기사단 소속이 된다는 것은 단순한 일이 아니었다.
그저 소속되는 것만으로도 평생, 어쩌면 가문 대대로 경사로 치부할 수 있는 그런 일이 아니던가.
소속된 기사는 평생의 영예를 약속 받는다. 그의 자식은 평생토록 황실 기사단의 기사를 아비로 둔 사실만으로도 다시 평생의 영예를 얻는다.
제국에서 황실 기사단이란 약속된 성공의 상징이나 다름없었다.
물론 5대 가문 만큼은 아니더라도, 단순히 조상 중의 한 사람이 황실 기사단이란 사실 만으로 백작위를 유지하는 가문도 있었다.
황실 기사단. 그런 자리를 내게 제안 한다는 것은 꽤나 엄청난 일이었다.
16살, 아직 서임식도 치루지 않은 견습 기사에게 황실 기사단 자리를 제안하다니.
최연소가 30살이었나. 아마 들어가는 순간 나는 역사를 써내려가는 것일 터였다.
“허나 죄송하다고 말씀 드릴 수밖에 없겠군요.”
황태자의 얼굴이 당황으로 물들었다. 내가 거절할 거라 생각하지 못한 건가?
허나, 황태자와 눈이 마주친 그 순간부터 예상하고 있던 일이었다.
그가 어떤 제안을 하던, 나는 황실에 소속될 생각이 없었다.
내가 계속 검을 드는 이유, 그리고 기사라는 자리를 고집하는 이유는 단 하나였다.
아이린.
지키겠다고 다짐하였으니, 그저 그 다짐을 지키기 위해 기사란 자리를 고집하는 것뿐이었다.
황실 기사단...뭐, 그런 곳에 들어간다면 내 취급 자체는 훨씬 좋아지겠지만.
예나 지금이나 나는 명예에 대해서는 별 생각이 없었다.
피아노를 쳤던 것도, 그리고 지금 이렇게 아이린의 호위 기사를 하는 것도 내가 좋아서 했던 거니까.
오히려 이렇게 말하니 속이 후련했다.
황태자와 좋은 관계를 맺는 것과는 별개로 황실 기사단에 소속 되는 것은 그리 원치 않았다.
만약 좋은 관계를 만들어나간다면...어디까지나 유리스와 황실간의 관계여야 했다.
나와 황태자가 아니라.
내가 탁자에 놓은 문장을 조심스레 황태자 쪽으로 밀자,
그 모습을 본 황태자가 한차례 쓰게 웃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명백한 거절, 다시 제안해봤자 받아들이지 않을 것임을 깨달은 건지 한숨을 내쉰 그가 이내 입을 열었다.
“...내심 기대했는데. 아무래도 충성심이 내 생각보다도 더 강한 것 같군. 후회하지 않을 자신 있나?”
“후회하지 않습니다. 제가 원해서 선택한 거니까요. 혹여 기분이 나쁘셨다면 사죄하겠”
“아니아니. 기분이 나쁠 리가. 그저 조금 놀랐을 뿐이야. 황실 기사단 자리를 거절한 건 아마 제국 역사상 그대가 처음이겠군. 사관에게 말해 꼭 기록해두어야겠어.”
손사래를 내저으며 피식 웃은 황태자는 이내 나를 바라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이번 흑마법사 사태에 그대가 없었다면, 대처가 아마 꽤나 늦었겠지.”
“테오라드 경이 있지 않습니까.”
황실 기사단장. 현 제국 유일의 마스터이자 제국 최후의 보루.
그가 나섰다면 아마 트롤 정도는 단숨에 벨 수 있을 터였다.
세상을 마나로 물들이는 경지, 단순히 몸에 불꽃을 일으키는 내 경지와는 차원이 다른 것이 마스터였으니까.
허나...아마도 유리스의 비극을 막지는 못했을 것이었다.
만약 그때 흑마법사를 찾아 베지 못했더라면, 유리스의 파멸은 거의 기정사실이었을 테지.
황태자는 그런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한차례 고개를 저어보였다.
“물론 테오라드 경이면 막을 수 있었겠지만. 적어도 내가 겪은 이 현실 속에서 흑마법사를 퇴치한 것은 에반 경이야. 말하지 않았나, 과한 겸손은 조금 그렇다고. 자부심을 가져도 좋네. 제국의 3억하고도 7832만, 8726명의 신민들을 그대가 지켰으니까.”
“...그걸 전부 기억하고 계신 겁니까?”
“나는 황태자니까.”
그렇게 말한 황태자는 아쉬운 듯 황실 기사단의 문장을 바라보다 이내 옅게 웃어보였다.
정말로 괜찮다는 듯, 후련하게 웃는 그 표정을 보자 어쩐지 마음이 편해지는 것도 같았다.
왕재(王?). 저번 축제때 아이린에게 보았던 모습이 위엄이라면, 황태자에게 보이는 모습은 포용이었다.
내가 아는 황태자의 모습과 포용이 그닥 어울리지 않기는 했지만, 적어도 지금은 그랬다.
도대체 이런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뒤틀린 걸까.
어쩌면 내가 아는 미래와 다르게 흘러갈 수도 있었다. 만약, 지금 황태자가 보이는 모습이 가식이 아니라면.
“...전하.”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해도 좋네. 솔직히 말해 여태 나 홀로 얘기하고 있었지 않나.”
“이제 저는 유리스의 기사고, 아마 제가 죽을 때까지 그 사실이 변하지는 않을 겁니다. 어쩌면 흑마법사와 계속해서 싸우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음...구태여 확인시켜줄 필요는 없었는데. 이미 뼈저리게 체감했으니까. 황실 기사단 자리를 거절한 사람은, 누누히 말하지만 그대가 제국 역사상 처음이야.”
“허나 그건 ‘에반 경’의 이야기입니다.”
황태자의 눈을 보았다. 눈은 생각보다 많은 것을 전해준다.
사람이 품고 있는 생각, 감정. 그 사람의 본래 심성까지.
그런 것을 보았을 때 황태자는 아델과 달랐다. 아델이 품고 있는 보라색의 눈.
꼭 진혼을 연상케 하는 그 눈에서 보이는 것은 공허였다.
공허, 공작이 품고 있는 공허와는 달리 그 끝이 보이지 않았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어떠한 의도를 품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하여 경계했다. 트롤이 그를 묵사발 냈을 때 살짝 안심도 했다.
적어도 트롤과 싸우는 동안에는 그가 개입하지 않을 테니까.
그 불길함은 아직 사라지지 않았고, 하여 아델을. 아델을 품고 있는 로만 전체를 경계할 수밖에 없었다.
허나, 황태자의 눈은 적어도 그 감정을 비춘다. 나에 대한 경의, 데려오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
허나 그걸 극복하고 털어낸 뒤 얻어낸 후련함.
비록 내색은 못하고 있는 짜증도 꽤 다분하게 섞여있었지만...적어도 그는 아직 순수했다.
비록 내가 해낸 위업 탓에 자신의 심성을 숨기고 있는 걸지도 몰랐다.
허나, 지금의 그와는 완만한 관계를 쌓을 필요가 있었다.
조금씩. 처음부터 많은 것을 기대하지는 않았다.
지금 이 선택이 나중에 유리스를 향해 들린 칼날을 조금이나마 망설이게 할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했다.
“트롤을 벤 에반 프리드는, 계속해서 흑마법사와 싸우겠습니다. 물론 아가씨가 허락하셔야 되겠지만요.”
“...하하하!”
어디까지나 아이린이 허락해야 한다는 그 말에 황태자는 웃었다.
시원하게, 한참을 큭큭대며 웃던 그는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네. 황궁의 쓰레기들만으로는 흑마법사를 상대하기 힘들 테니까.”
황궁의 쓰레기. 그 말을 내뱉는 황태자의 눈에서 순간 분노가 엿보였다.
저건 분명히, 그의 원래 심성이리라. 쓰레기라 판단한 것들을 업신여긴다.
허나 그의 기준은 아무나에게 적용되는 것이 아니었다.
분명 황궁에 있을 신하들, 그중에서도 제 맘에 들지 않는 사람들을 일컫는 말이겠지.
흑마법사를 떠올릴 때와 비슷했다.
흑마법사를 얘기할 때, 분명 그의 눈에 비친 것은 그와 비슷한 분노이지 않았던가.
그런 황태자를 바라보며 나는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한 번 내린 선택, 후회 하지 않는다.
그저 이 선택이 나중에 아이린에게 도움이 되길 바랄 뿐이었다.
적어도 황태자만큼은 유리스에게 칼을 들이밀지 않기를.
원작 여주가 그의 마음을 뒤흔들 때, 그가 잠시나마 이성을 되찾을 수 있기를 바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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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태자가 떠난 뒤, 에반은 복도 뒤쪽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아까부터 계속해서 느껴졌던 기척. 처음에는 그저 지나가는 시녀라고 생각했는데,
너무도 익숙한 그 기척을 느끼곤 표정을 조절하기가 꽤나 힘들었다.
이야기를 엿듣는 취미는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숨소리마저 숨긴 채 이야기를 듣는 것이 꽤 우습지 않은가.
“아가씨.”
“......”
“거기 계신 거 다 압니다.”
그 말과 함께 복도 끝에서 툭 튀어나온 머리카락을 본 에반은 웃을 수밖에 없었다.
아무렇지 않게, 평소에 늘 보이고 있는 무감한 표정을 지은 아이린은 에반에게 다가갔다.
“표정이 별로 안 좋으신 것 같습니다.”
“글쎄요.”
“혹시 제가 황태자 전하와 대화한 것이 맘에 들지 않으신 겁니까?”
아이린의 눈이 가늘어졌다. 맘에 들지 않았냐, 라고 묻는다면 그건 아니었다.
황태자가 에반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 즈음이야 진즉에 눈치 채고 있지 않았던가.
물론 카이셀이 황실 기사단의 문장을 꺼냈을 때는 꽤나 당황했지만,
그가 거절할 것이란 걸 알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믿고 있었다.
어느 순간부터. 신뢰란 단어는 오직 에반에게 향했다.
자신이 누군가를 믿는다면...그건 에반이었다.
우습게도, 로페나나 크리스 경보다는 에반 쪽이 더 믿음직스럽게 느껴졌다.
단지 그가 자신의 기사이기 때문이 아니라, 어느 순간부터 그를 믿고 있음을 깨달았다.
이런 신뢰를 해본 적이 살면서 있었던가.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다시 에반의 눈을 바라보았을 때, 아이린은 어쩐지 가슴이 간질거린다는 느낌을 받았다.
분명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모습 인데도, 어찌하여 이렇게 다르게 느껴지는 것일까.
그리고 그의 옷차림을 보았을 때, 그제야 에반이 자신이 마련했던 옷을 입고 있음을 깨달았다.
“잘 어울리네요.”
단단하게 자리 잡은 몸, 처음 보았을 때보다 한층 탄탄해져 굴곡진 선이 눈에 띄었다.
은색의 제복, 그와 잘 어울릴까 고민했는데. 흑암색의 망토가 둘러진 그의 모습은 이제 어엿한 한 명의 기사였다.
처음 그를 만났을 때만 하더라도 그토록 거슬렸는데, 이제는 그의 모습을 보자 자연스레 미소가 지어졌다.
어색한 미소였지만, 한때 연습했던 만큼 그리 어색해보이지 않는 미소였다.
“...아, 옷 말씀이십니까?”
에반은 자신의 제복을 바라보며 멋쩍게 웃어보였다.
그러고보니 감사 인사를 전했어야 했는데, 막상 이렇게 마주치니 어쩐지 고맙다는 말이 잘 나오질 않았다.
괜스레 부끄러워져야 한다고 할까. 그렇게 아이린을 바라보다가, 이내 아이린의 차림새를 보곤 작게 입을 벌렸다.
평소와 다름없는 검은색의 드레스였건만, 쇄골이 훤히 드러난 그 드레스는 가히 파격적이라 할만했다.
누가 보더라도 그 쪽으로 시선이 향하지 않겠는가.
순간 저도 모르게 입술을 짓씹었지만, 이내 옅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아가씨도 잘 어울리십니다.”
“......”
아이린의 시선이 따갑게 다가왔다.
잘 어울린다고 말했는데, 어찌하여 자신을 저런 눈으로 쳐다보는 것일까.
‘...설마.’
순간 머릿속에 이상한 생각이 스쳐지나갔지만, 애써 생각을 지워냈다.
설마 그러겠는가. 잘 어울린다는 한 마디가 부족하여 그럴 리는 없을 터였다.
그렇게 서로의 눈을 바라보기도 잠시, 침묵을 깨고 먼저 입을 연 것은 아이린이었다.
“흑마법사와 계속 싸울 거란 말을 들었어요.”
“그렇습니다.”
“그대가 흑마법사와 싸운 적이 여태 2번 있었죠. 그리고 2번 다 다쳐서 돌아왔어요. 2번의 싸움에서 사선을 넘지 않았다고 자신할 수 있나요?”
“...그건.”
솔직히 말하자면, 첫 번째 싸움은 수월했다.
모든 힘을 끌어 쓰지도 않았고, 그저 피하지 못한 공격 하나를 맞고 온 것이 전부였으니까.
하지만 트롤과 싸울 때는 모든 것을 걸었다. 마법검, 자신이 가진 특별한 마나, 감각의 각성.
그 중 하나라도 빠졌더라면 아마 지금쯤 부서진 머리가 산 어딘가에 흩어져 있을지도 몰랐다.
아이린이 걱정하는 것이 어떤 부분인지 이해하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이 다치는 것을 원치 않았으니까.
그녀는 내게 ‘누군가’를 비춰 보고 있었다. 에반은 아이린의 과거를 몰랐다.
아는 것이라곤 이 공작저에서 크리스 경과 로페나에게 드문드문 들은 옛이야기와, 소설 속에서 아주 짧막하게 나왔던 이야기들.
‘아마도...아이린의 어머니.’
한 번도 공작부인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었다.
마치 그 이야기를 꺼내는 것이 금지된 것처럼,
이 곳에서 아이린의 어머니에 대한 얘기를 들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마도 그녀의 어머니는 어떤 이유로 인해 죽었고.
그것은 아이린에게 일종의 트라우마를 불러 일으켰다.
허나 그렇다한들 싸움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이대로 흑마법사와의 싸움을 멈춘다면, 애초에 이제와 멈춘다 한들 흑마법사와 엮일 것이 분명하지 않은가.
그들과의 싸움을 멈춰봤자, 결국 자신을 기다리는 것은 예정된 비극일 터였다.
흑마법사, 유리스, 그리고 아이린. 에반은 이 세개가 얽혀있을 거라 확신했다.
예전엔 그저 추측이었지만, 시간이 흐른 지금 그것은 확실해보였다.
“황실과 그대의 관계가 어떻게 되든 그건 제가 상관할 바가 아니지만, 그대가 흑마법사와 계속해서 싸우는 걸 그냥 허락해줄 수는 없어요.”
“다치지 않겠습니다.”
“장담할 수 있는 일이 아니잖아요.”
푸른 눈이 일렁인다. 그 속에 비치는 것은 분명 두려움이었다. 예상할 수 없는 미래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아이린은 내심 인정하고 있었다. 자신이 에반을 볼 때면, 옛 기억을 떠올리며 저도 모르게 불안해하고 있음을.
그는 강했고, 흑마법사와 싸운다한들 이겨서 돌아올 수 있을 실력을 지니고 있었다.
허나. 그렇다고 다치는 것을 그저 지켜보겠다는 얘기는 아니었다.
가능하면 다치지 않았으면 했다.
그것을 실현하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역시 그가 흑마법사와 싸우지 않는 것이었지만.
그의 눈을 볼 때면 그것이 그저 자신의 생각에서 그칠 것이란 걸 뼈저리게 느끼곤 했다.
붉게 물들었던 눈을 기억한다. 산의 정상에 드리웠던, 눈앞을 가리고 사람을 현혹시키던 그 어둠을 기억한다.
그리고 그 눈밭에 쓰러져 있었던 에반을. 자신은 아직 기억하고 있었다.
아직도 그 때의 기억을 떠올리면 이토록 숨이 죄여오건만, 어찌 그를 계속 싸우라 허락할 수 있을까.
그가 또다시 그런 모습으로 돌아온다면, 자신은 멀쩡한 모습으로 있을 수 없을 것이 분명했다.
아이린은 그렇게 생각했다.
“아가씨.”
고요한 복도에서 잔잔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언제나 사람의 마음을 안심시키게 만드는 목소리였다.
에반을 끌어안았을 때도, 그 목소리에 자신이 안심했다는 사실을 아이린은 부정하지 못했다.
“믿어주신다 하지 않았습니까.”
“...그것과는 달라요. 그냥, 내 호위에만 집중해줄 수 있잖아요.”
“흑마법사를 처리하는 것 또한 아가씨의 안위를 위해서입니다.”
“황실이 있어요. 테오라드 경이 황실에 있잖아요.”
억지라는 걸 알고 있었다.
황실의 기사단장이 제아무리 5대 가문이라 한들 그 영지에서 벌어진 일에 개입할 수 없다는 것 즈음은, 에반 또한 알고 있었다.
그녀가 불안해하는 것을 알았지만, 그것을 어떻게 걷어내야 할지는 당장 알 수 없었다.
하여 걸었다.
꽤나 멀었던 거리, 에반은 조금씩 발걸음을 옮겨 아이린의 앞을 향해 걸어갔다.
많은 생각이 들었다. 흑마법사와 싸우지 않는다는 선택지는 존재하지 않았다.
아이린에게는 있을지 몰라도, 적어도 자신에게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그녀를 안심시킬 수 있는 방법.
“다치지 않겠습니다.”
숨결이 닿았다. 그렇게 느낄 만큼이나 가까운 거리에서 에반은 손을 들어올렸다.
이윽고 그 손이 아이린의 뺨에 닿았을 때. 에반은 미소 지으며 입을 열었다.
아이린의 두 눈이 크게 뜨였다.
도대체 언제? 잠시 정신이 팔린 사이 제 앞에 다가온 에반의 존재에 뒷걸음질 치려 했지만, 그 뒤는 벽이었다.
얼굴에 닿은 손의 감촉이 간지러웠다. 쿵쿵, 뛰는 심장 소리가 귓가에 들려와 이내 얼굴에 열이 번져 오르기 시작했다.
“제가 그렇게 싸우려는 이유는, 전부 아가씨를 위해서입니다. 포기할 수 없고, 포기하라 한들 몰래라도 싸울 겁니다.”
“......”
화를 내고 싶었다. 무어라 소리치며, 자신은 그런 것을 원치 않다고 하고 싶었는데.
그렇기엔 너무 거리가 가까웠다. 열이 피어오른 머릿속은 이내 새하얗게 번져 무언가를 생각하기가 힘들었다.
반칙.
아이린은 그렇게 생각하며 자신을 바라보는 호위 기사를 바라보았다.
아마 자신이 무어라 말하더라도 그는 포기하지 않겠지.
쓰게 웃으며, 아이린은 에반의 가슴팍을 손으로 가볍게 두드렸다.
툭, 아프지도 않을 그런 주먹에 에반은 아이린의 뺨을 매만졌던 손을 떼었다.
솔직히 말해 이런 방법 말고는 떠오르지 않았다.
동생에게 이렇게 해줄 때면 그렇게 화를 내던 녀석이 얌전해지곤 했으니, 혹시나 하는 생각에 해본 건데.
전보다 훨씬 누그러진 눈매에 피식 웃어보였다.
“죄송합니다. 이런 방법 말고는 생각이 나질 않아서.”
“...약속, 지켜요. 다치지 말고, 손수건도 항상...챙기고 있어요.”
“알겠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거리를 벌렸지만, 그 뒤에 남은 것은 어색한 침묵이었다.
손에 남은, 그리고 뺨에 남은 체온의 감각에 심장이 두근거렸다.
어쩌면 서로에게 들리지 않을까. 그런 생각에 거리를 벌리기도 잠시, 에반이 머리를 긁적이며 다시금 손을 뻗었다.
“...에스코트 해드리겠습니다. 단상에 올라가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무도회, 그리고 축제 때 뻗었던 손을 기억하지만. 아무래도 지금처럼 낯 뜨거운 상황은 아니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때와 지금, 품고 있는 감정이 달랐다. 적어도 자신은 그러하리라.
그리 생각하며 뻗은 손이었건만. 어쩐지 머뭇거리는 아이린을 보며 에반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가씨...”
턱.
그 목소리에 아이린은 에반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올렸다.
축제 때, 그리고 무도회 때와 다를 것이 없는 에스코트였지만 그 어느 때보다도 적나라하게 전해져 오는 체온에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 같았다.
단순히 에스코트라기엔 꽤나 많은 면적이 맞닿은 손.
손가락을 꼼지락 거리던 아이린은 에반을 바라보던 시선을 돌리며 입을 열었다.
“...빨리 가죠.”
빨리 가고 싶지는 않았다. 축제에서 먼저 놓았던 손을 자신은 가끔 아쉽다고 생각하지 않았던가.
어째서? 그런 이유는 아직 알지 못했다. 허나 지금 이 순간, 이렇게 손을 잡고 있는 이 시간이.
조금이나마 길었으면 좋겠다고.
아이린은 그렇게 생각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