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3화 〉 서임식(3)
* * *
“...하아.”
눈을 뜬 순간 직감했다. 지금 시간이 해가 뜨기도 전, 아마 어스름히 여명이 비치고 있을 새벽이란 것을.
창밖은 여전히 캄캄했으나, 눈꺼풀은 전혀 무겁게 느껴지지 않았다.
몸도 가볍고, 떠진 눈또한 말똥말똥한 것이 아마 다시 잠에 들긴 힘들 것이 분명하리라.
조금 더 잠에 들어보려 눈을 감아봤지만, 머릿속을 휘몰아치는 상념에 눈이 부릅떠졌다.
습관이란 참으로 무서운 게, 예전엔 해가 중천에 이른 뒤에도 계속 잠을 자지 않았던가.
허나 이제는 해가 뜨기도 전에 절로 눈이 떠졌으니, 더 이상 이전처럼은 살 수 없을 거란 생각에 한숨이 새어나왔다.
뭐, 이렇게 살아온 것도 어느덧 1년이 되었으니 이제 익숙해지긴 했지만.
그래도 아무도 없는 새벽녘에 홀로 밖으로 나온다는 것은 영 쓸쓸한 일이었다.
투욱
입고 있던 옷을 벗어 던진다. 추운 겨울바람이 몸에 파고들자 비로소 밖에 나왔다는 것을 체감할 수 있었다.
구태여 옷을 벗는 이유? 어차피 상의만 벗을 뿐이었지만,
이렇게 있으면 조금 자유로운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뭐, 마나로 몸을 덮은 탓에 그리 춥지도 않았고. 옷을 입고 검을 휘두르면 금방 젖어버리니 일일히 갈아입기도 귀찮았다.
상의를 벗자 보이는 것은 몸에 가득한 흉터.
마치 칼로 그어놓기라도 한 듯 몸에 가득 새겨진 그 흉터를 볼 때면 도대체 에반이란 녀석이 어떻게 살아왔는지에 대해 의문이 들었다.
가끔 보이는 화상자국.그 것 외에도 길게 이어진 흉터가 가득했으니,
언뜻 보아도 단순히 귀족가의 자제로 살아온 것 같지는 않았으니까.
‘아프지는 않아.’
그냥 조금 보기 안 좋은 것이 전부였다. 이 이상 신경 써도 별 의미 없겠지.
아프지도 않고, 뭐 어렸을 때 혹독한 훈련을 받은 것이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다가 괜스레 거슬리는 것은, 바로 내가 속해있는 가문인 프리드 백작가에 대해서였다.
보통 자기 자식이 흑마법사와 싸웠다는 소식이 들리면,
하다못해 서임식이 열린다고 하면 어떤 연락이라도 주어야 하는 것이 아니던가.
허나 그런 연락은 커녕 에반이 된 이후 편지 하나 받지 못했다.
그 때 보았던 낡은 편지가 눈에 거슬리긴 했지만...멸문이라도 한 게 아니면 꾸준히 연락 정도는 할 수 있을 텐데.
그렇다고 내가 편지를 먼저 보내기엔 그들에 대해 아는 바가 없었으니까.
스릉
허나 이내 상념을 지우고, 가지고 있던 검을 들어 뽑았다.
마나를 불어넣자 푸른 검신이 돋아나는 검. 저번 트롤과 싸울 때는 하얀 검신이 나왔던 것 같은데,
어째서인지는 몰라도 그 이후로 몇 번을 뽑아봤지만 결국 하얀 검신을 다시 보는 일은 없었다.
그 검을 다시 보려면 어떠한 조건이라도 필요한 것일까.
심장에 요동치는 마나의 잔재를 꺼트리며, 가볍게 발을 내딛어 검을 휘둘렀다.
마나가 몸에서 사라지자 검이 무겁게 느껴졌지만, 오히려 이 묵직한 감각이 고양감을 불러 일으켰다.
이래야 훈련이라 할만하지 않겠는가. 본래 그다지 부지런한 성격은 아니었지만,
그렇다한들 노력으로 인한 산물이 사람에게 어떠한 쾌락을 가져다 주는 지 정도는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이 몸.
‘상상 이상이야.’
내가 의지를 지닌다면, 그 의지가 바라는 이상의 것을 해낸다.
검을 휘두른다. 검을 휘두르는 정도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제 앞에 있는 모든 것을 찢어발기는 힘을 낼 수 있었다.
마나를 끌어 올린다. 다른 익스퍼트처럼 단순히 몸을 강화하는 것을 뛰어 넘어 인간이 지닌 한계 이상의 힘을 끌어 올릴 수 있었다.
마나가 불처럼 타오른다니, 크리스 경이 내가 마나를 다루는 모습을 보며 놀랐던 것을 아직 잊지 않았다.
도대체 마나를 어떻게 다루면 그렇게 할 수 있는 거냐 물었던가.
아무튼 그런 것을 보았을 때 확실한 건. 에반 프리드의 육체는 굉장히 특별했다.
아니, 평범한인간과는 달리 이질적이기 까지 했다.
예를 들어 그대가 지닌 마나라던가. 그대의 혈통이라던가.
쟌지르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내가 지닌 혈통, 도대체 그게 무슨 소리란 말인가?
프리드 백작가에 대해서 조사를 안 해본 것은 아니었다.
허나 알 수 있는 것은 고작해야 변방에 있는, 한 때는 고명했던 백작가라는 것이 전부.
직접 가면 무언가 알 수 있겠지만 지금 직접 갈 수 있는 상황이 아니지 않은가.
허나 자신이 가장 불만스럽게 생각하는 건, 이 모든 것을 지금은 그저 추측만 할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무엇하나 직접 알아낼 수가 없었다.
서임식이 끝나고, 어쩌면 절멸을 완벽히 처리한 뒤에나 여유가 겨우 생길지도 모르는 지금 상황에 무얼 조사하겠는가.
하여 다시 검을 들었다. 조금 묵직했지만, 미리 챙겨두었던 모래주머니를 꺼내자 그제야 입가에 만족스런 미소가 지어졌다.
아마도 해가 뜰 때까진 검을 휘두르지 않을까.
이런 훈련이 남들이 보기엔 몸을 혹사 시키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었다.
제 아무리 마나를 다룬다 한들 지금 내 몸에 차고 있는 모래주머니는 꽤나 무거웠으니까.
아마 한 개에 약 20kg, 그걸 발목과 팔목에 각각 5개씩은 매달고 있었으니,
마나를 끌어올리지 않은 지금 이 상태에선 검 한 번을 휘두르는데에 내 모든 집중을 다 해야 했다.
허나 그것이 좋았다.
적어도 훈련을 하는 이 순간 만큼은 모든 잡념이 사라져, 오롯이 검만을 바라볼 수 있다는 것이 좋았다.
한 번 걸을 때마다 탕이 움푹파이고,
잔뜩 쌓인 눈이 몸에서 피어오르는 열기에 녹아 이내 내가 서있던 주변엔 둥그렇게 눈 녹은 자국이 훤히 드러났다.
그렇게 아무도 없는 정원에서 홀로 검을 휘두르기 시작하자,
이내 시간이 훌쩍 흘러 저 멀리서 떠오르는 태양이 보이기 시작했다.
원래라면 훈련을 더 해도 되겠지만 이제 슬슬 그만 해야 겠지.
왜냐면 오늘은내 서임식이 있는 날이 아니던가.
모래주머니가 바닥에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떨어지고.
시종을 불러 대충 자리를 정리하라 이른 나는 다시금 저택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서임식, 그래도 평생에 한 번 있는 행사이니 잘 준비하는 것이 좋을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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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엑, 또 훈련하고 오신 거예요?”
“매일 하는 건데 뭘 그리 놀라.”
“오늘은 서임식이잖아요. 조금 몸가짐을 단정하게 해도 모자를 판에 또 땀을 흘리면 어떡해요!”
저택에 들어서며 단추를 여미자, 로페나가 다가와 나를 바라보곤 눈살을 찌푸렸다.
한쪽 손에 들린 것은 아마도 내가 오늘 입을 제복이겠지.
그 은색의 제복을 바라보기도 잠시, 내가 어깨를 한차례 으쓱이자 로페나가 한숨을 내쉬며 입술을 삐죽였다.
“빨리 씻고 오세요. 아니면 그 마나로...아무튼 그걸 하시던가요. 몇 시간 뒤에 서임식인데 조금 멋있게 있을 생각은 없으세요?”
“글쎄. 굳이 그럴 필요가 있을까.”
조금 우습긴 했지만, 너무 눈에 띄어도 좋을 필요가 없었다.
저번 트롤을 처치한 뒤로 내게 오는 편지가 늘다 못해 매일 쌓이는 정도였건만,
오늘 이후로 얼마나 늘어날지 생각하면 자연스레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걸 로페나 또한 모르는 건 아닌지, 쓰게 웃은 로페나가 가지고 있던 제복을 내게 내밀며 입을 열었다.
“아무튼, 좀 있으면 시녀들이 올 거예요. 입고 나오셔서 저한테 오시면 바로 치장해드릴 테니까 그렇게 알아 두세요. 그리고 서임식 하기 전에 아가씨한테 들리는 거 잊지 말구요.”
“아가씨한테? 나 부르셨어?”
“...음, 그런 건 눈치껏 알아차리시는 게 좋을 텐데요. 이번에 제복, 아가씨가 저번에 준비하셨던 거잖아요. 저번 사냥제 때.”
“아.”
그제야 저번의 기억이 떠오른 나는 작게 입술을 벌렸다.
그러고 보니 그 깃발들 사이에 제복이 있지 않았던가. 어쩐지 익숙하더라니.
검은색을 기본 바탕으로 둔 제복은 은색의 자수들로 우아하게 꾸며져 있었다.
가슴팍에 달려있는 유리스의 문장과 하나의 별.내가 기사임을 상징하며,
동시에 유리스의 소속임을 인증하는 표식을 바라보자 괜스레 내가 유리스의 기사라는 사실이 새삼스럽게 느껴졌다.
그리고 로페나가 준 다른 한 가지 옷더미. 꽤나 거친 털이 매만져지는 흑암색의 망토였다.
이걸 제복에 두르는 것인가. 생각해보면 여기가 북부였지.
머릿속에 박혀있는 북부 기사의 이미지와 꽤나 닮은 망토를 바라보자 어쩐지 웃음이 새어나왔다.
제복을 걸치고, 망토까지 걸치면 꽤 잘 어울리지 않을까.
훈련을 마친 뒤에는 응당 씻어야 겠지만,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깨닫곤 마나로 몸을 부드럽게 감쌌다.
종종 씻기 귀찮을 때 사용하는 방법이었는데, 이렇게 하면 오히려 씻는 것보다 몸을 더 깨끗이 할 수 있었다.
땀이 완전히 걷혀 뽀송뽀송해진 피부를 바라보기도 잠시,
이내 방으로 들어가자 리제가 나를 바라보곤 손을 살짝 흔들었다.
“이제 왔네. 빨리 와, 슬슬 준비 해야지. 오늘은 너를 위한 날이잖아.”
“...그냥 혼자 입어도 되는데요.”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너 저번에 무도회 갈 때 혼자 입게 내버려뒀더니 얼마나 걸렸는지 기억해? 서임식을 엉망으로 만들 생각이니?”
“그건 아닌데...알았어요.”
별 수 없나. 저번에 옷 하나 입겠다고 끙끙거리던 것을 생각하면 이해하지 못할 반응은 아니었다.
허나 여자들이 가득한 이 곳에서 옷을 벗자니 영 껄끄러워서,
살짝 리제의 눈치를 살핀 채 옷을 벗자 주변의 시녀들이 작은 탄성을 흘렸다.
“어머.”
쓰게 웃는다. 하나같이 눈이 반짝이는 시녀들의 시선이란, 그리 달갑지 만은 않았으니까.
물론 그녀들이 내게 이상한 감정을 품고 그런 것이 아니었으니 그저 한 번 쓰게 웃는 것이 전부였다.
이내 로페나에게 받았던 제복을 차려 입자, 리제가 씨익 웃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잘 어울린다. 역시 인물이 장난 아니야. 도대체 누굴 닮아서 그렇게 잘생겼니? 내가 프리드 백작님을 한 번 뵌 적은 있지만, 솔직히 말해서 그렇게 인물이 타고나신 분은 아니었거든.”
“글쎄요. 어머니를 닮았나 보죠.”
사실 에반의 어머니가 누군지도 몰랐지만,
내가 그리 대답하자 리제가 고개를 끄덕이며 내게 망토를 건넸다.
까슬까슬한 털이 만져지는 흑암색의 망토, 늑대의 털로 만들어졌다 했던가.
그 망토를 받아들자 의외로 가벼운 탓에 작게 탄성을 흘렸다.
이 정도라면 평소에 걸치고 다녀도 별 문제가 없을 테지.
망토를 걸치자 의외로 잘 어울리는 듯 했다.
금색의 머리, 녹색의 눈과 잘 어울리지 않을까 하고 생각도 했는데.
막상 입으니 역시 얼굴 탓인지 그럭저럭 잘 어울리는 것 같았다.
리제를 힐끔 바라보자, 이내 입을 작게 벌린 채 나를 바라보는 리제의 모습이 보여 헛웃음을 지어보였다.
"리제 씨."
꼭 무언가에 홀린 것 같은 표정이 아닌가.
그런 리제의 이름을 부르니 잠시 뒤 몸을 움찔거린 그녀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잘 컸네. 응, 잘 컸어.”
“이제 슬슬 편지를 처리하기도 힘들 것 같은데요. 어떡하죠?”
“솔직히 말하면 약혼을 치룰 나이를 한참 벗어나긴 했는데...”
주변 시녀들이 중얼거리는 것이 선명하게 들려와서, 나는 한 차례 어깨를 으쓱인 뒤 거울을 바라보았다.
처음 봤을 때는 마냥 선해 보이기만 했던 인상이었는데, 이제 시간이 조금 흘러 눈매가 날카로워진 것 같기도 했다.
물론 그런 탓에 어깨에 두른 망토가 나름 잘 어울리는 것이 아닐까.
“전 이제 슬슬 가볼게요.”
옷을 다 입었으니 로페나의 말대로 아이린에게 들러야 하지 않겠는가.
내가 그리 말하자 이내 시녀들과 속닥거리던 리제가 나를 바라보았다.
“아가씨에게 가려고?”
“그래야죠. 아무래도 이 옷은 아가씨가 준비해주신 거니까요.”
“...흠. 그래, 잘 다녀오고. 이번에 정식으로 기사 된 거 축하해?”
“고마워요.”
내가 옅게 웃자, 리제 또한 피식 웃으며 내게 작게 손을 흔들어 보였다.
비록 로페나나 아이린 만큼은 아니더라도, 리제 역시 나를 잘 대해주지 않았던가.
만약 처음 아이린의 호위가 되었을 때 리제가 아니었더라면 아마 다른 시녀들과 두루 친해지긴 힘들었을 터였다.
그녀 역시, 나중에 무사히 남아있기를 바랄 따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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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윽고 방에서 나서자 복도를 거닐던 시녀들의 시선이 내게 향했다.
이따금 얼굴을 붉히는 이들도 있었고, 나를 뚫어져라 바라보는 시녀들도 있었으니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었다.
조금은 내게 신경을 거두어도 좋으련만.
부우우
난데없이 들려온 나팔 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어느새 내 서임식 준비를 위해 밖에 도열해 있는 기사들의 모습이 눈에 띄었다.
저 멀리 크리스 경도 오랜만에 갑옷을 입은 채 서있었고,
바람에 이리저리 나부끼는 깃발 속에서 익숙한 문양을 찾기도 했다.
‘...황실.’
제국의 수도이자 단 하나 있는 성역 에반젤리움을 상징하는 용의 문양.
오로지 황실만이 사용할 수 있었고, 황실의 허락을 받아야만 걸어 놓을 수 있는 것이 그 문양이었기에 가장 눈에 띄는 것이 바로 그 깃발이었다.
황태자가 온다고 했던가. 어쩌면 벌써 황태자가 와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자연스레 눈살이 찌푸려졌다.
원작의 여자 주인공이 나타나기 전에 좋은 관계를 맺자는 마음은 있었지만,
아무래도 부정적인 마음이 쉽사리 사라지지 않는 탓이리라.
소설을 볼 때만 해도 그냥 재수 없는 놈이라 생각했건만,
아이린의 호위 기사가 된 탓인지 지금은 그 얼굴만 떠올려도 입에서 욕지거리가 튀어 나올 것만 같았다.
물론 직접 얼굴을 대면한다면 당장 무릎을 꿇어야겠지만...
나랏님이 없는 곳에서 무슨 말을 하던 상관없지 않겠는가.
서임식 준비로 한창 바쁜지 복도는 한산했다.
창문 사이로 햇빛이 스며들어와 창문의 형태를 고스란히 복도에 새기곤 했지만,
그 빛을 가리는 사람의 그림자는 조금도 보이지 않아 고요한 복도에 내 걸음 소리가 온전히 울려 퍼졌다.
또각 또각
아까까지만 하더라도 복도를 지나다니던 시녀도 없었고, 종종 마주치던 경비병들도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아이린이 있을 집무실로 향하기를 한참,
복도를 거닐던 도중 문득 밖이 소란스럽다는 생각이 들어 다시 창밖을 바라보자 저 너머에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음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특히나 많은 기사들이 도열되어 있는 곳, 그리고 하늘을 찌를 듯이 꽂힌 깃발들이 휘날리는 바람을 맞고 강렬하게 나부끼는 곳.
휘황찬란한 갑주를 입은 기사들이 창을 든 채 오로지 한 사람을 위하여 발걸음을 맞추고 있었다.
“...황태자.”
이윽고 그 도열된 기사들 사이에서 홀로 걸어오는 한 사람.
찬란한 태양이었건만, 그 속에서도 돋보이는 흑색의 머리카락을 어찌 알아보지 못할까.
그 붉은 빛의 눈동자가 반짝였다.
오만하고,또한 광오한 발걸음이었으나 그 마저도 어울리는 이 제국의 유이한 존재.
황제, 그리고 저기에 서있는 저 황태자.
카이셀 프레이아 디 에반젤리움.
이윽고 황태자가 기사들의 도열의 끝에 섰을 때,
나는 그가 품고 있는 마나의 양에 적잖이 놀랄 수밖에 없었다.
나만큼, 아니 어쩌면 나보다도 더욱 정순하고 풍만한 마나의 양은 그가 훗날 마스터에 도달한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나 다름없었으니까.
만약 내가 아는대로 미래가 흘러간다면, 언젠가는 저 황태자와 검을 맞댈 날이 오겠지.
이길 수 있을까. 그것에 대해 잠시 생각하다가,
이내 내게 전해져 오는 마나를 느끼곤 움찔 거리며 앞을 바라보았다.
저 멀리, 서로의 존재를 눈치채기 힘들 만큼 먼 거리였음에도 확연하게 느낄 수 있는 것은 나를 바라보고 있는 하나의 시선이었다.
피로 물들인 것처럼 새빨간 눈동자. 그리고 그 눈동자가 나를 향해 있음을 깨달았을 때,
나는 무심코 웃음을 흘리며 그 시선을 마주했다.
어쩌면 아이린이나 공작을 만나러 왔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확실해졌다.
황태자는, 나를 만나러 왔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