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2화 〉 서임식(2)
* * *
황태자.
그 이름을 듣자 순간 눈살이 찌푸려졌지만,
어쩌면 이 기회를 잘 살릴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 여주가 등장하지 않은 이 시점, 황태자를 잘 구슬려 아이린에게 우호적으로 만든다면.
미래에 여주가 아무리 황태자를 구슬린다 한들 아이린에게 오는 피해를 막을 수 있지 않을까.
물론 그가 훗날 아이린을 적대하고,
결국 목마저 벤다는 것 때문에 호의적으로 대하기가 조금 꺼려지긴 했지만 별 수 있나.
이용할 수 있는 것은 최대한 이용해보고, 해볼 수 있는 것들은 시도라도 해봐야 했다.
어찌 되었든 유리스에서조차 어찌할 수 없는 것이 황실이란 존재가 아니던가.
적대할 수도 없었다. 그렇다면, 차라리 이쪽을 우호적으로 대하도록 만드는 것이 좋을 터.
허나 아이린의 표정은 그리 좋지 않았다. 무언가 껄끄러운 것인지,
살짝 눈살을 찌푸린 채 나를 빤히 바라보는 표정에 섞인 것은 분명히 불만이었다.
황태자와 이미 사이가 틀어진 것인가.
그게 아니라면, 황태자라는 사람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일까.
여러 생각이 오갔지만, 이내 아이린이 입을 열었을 때 비로소 무엇을 걱정하는 지 알 수 있었다.
“...황태자가 그대에게 관심을 보이고 있어요. 그대는 흑마법과 관련된 사건을 2개나 홀로 처리했으니까요. 직접 잡은 흑마법사는 이미 황실로 이송되었고, 이번 트롤 또한 궁정마법사들이 흑마법의 기운이 개입되었단 것을 파악했죠. "
잠시 나를 지그시 바라본 아이린은 다시 말을 이어가기 시작했다.
"어찌 보면 황실의 입장에서는 그대가 영웅으로 보일 수도 있겠네요. 단신으로 흑마법사를 토벌할 수 있는 기사란, 이 세상에 그리 흔치 않으니까요.”
“과찬입니다.”
영웅이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애초에 세상을 구하겠다는 그런 거창한 목적보다는 그저...아이린을 지키고 싶었을 뿐이었으니까.
허나 당사자에게 그리 말하기가 부끄러워 그저 어깨를 한 번 으쓱이자,
아이린은 이내 고개를 저으며 다시금 입을 열었다.
“과찬이 아니에요. 흑마법사는 제국의 공적(??), 이번에 그대의 서임식이 이토록 크게 열리는 것은 그대의 업적 때문이니까요. 수많은 사람들이 그대를 지켜보고 있어요. 어쩌면...5대 가문의 균형이 무너지리라 예상하는 사람도 있죠.”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5대 가문이란 이름이 그토록 가벼운 것이 아닌데요.”
“...로만 가문이 흑마법사와 관련이 있다면. 그럴 수도 있겠죠.”
흑마법사, 그 말을 꺼낸 아이린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로만이 흑마법사와 관련이 있다, 라. 솔직히 지금 당장은 그저 가능성에 불과하지 않을까.
허나 가능성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로만에게는 큰 타격이었다.
물론 정말 그들이 흑마법사와 관련이 있었다면...아마 이번 일 같은 것은 피하지 않을까 싶긴 한데.
지금으로써는 섣불리 판단할 수 없는 건 사실이었다.
아델이 아직 눈을 뜨지 못한 지금, 로만에 대한 전면적인 조사는 사실 그가 일어난 뒤에나 가능할 테니까.
하지만 여전히 로만에 대한 의심을 거두지 못한 듯,
로만이란 이름을 중얼거리는 그녀의 얼굴에서는 미묘한 혐오감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로만을 의심하십니까?”
“정확히는, 유리스 외의 모든 5대 가문을 의심하고 있어요.”
아무래도 이런 부분은 제 아버지를 닮는 것 같았다.
허나 궁금한 점이란, 어째서 공작과 그녀가 다른 모든 5대 가문을 의심하고 있는 부분이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지금 이 상황에서 로만을 제외한 다른 가문에선 이렇다 할 움직임이 없지 않은가.
순간, 뇌리를 스쳐지나가는 한 생각에 헛웃음을 흘렸다.
움직이지 않는다. 어쩌면 그 부분이 맹점이지 않을까.
“설마, 아무런 움직임을 보이지 않아서 입니까?”
“...맞아요. 이상하죠. 분명 제국의 공적인 흑마법사가 5대 가문이 주최한 행사에 이렇게 버젓이 나타났는데. 심지어 유리스의 영지 내에서 흑마법사가 나타났는데도. 킬로그나 메디브, 그리고 로만과 하탄 그 어떤 곳에서도 이렇다 할 움직임을 보여 주지 않았어요.”
“확실히, 황실에서 기사단을 파견한 것 외에는 여태 꽤나 조용했으니까요.”
눈이 가늘어진다.
복잡해진 머릿속에서 여러 생각들이 떠다니다가, 이내 5대 가문이라는 단어에 생각이 머무르기 시작했다.
하탄이 움직이는 것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 수 없었다.
제국의 그림자. 정보수집과 첩보활동에 관해서는 제국의 정점에 다다른 그 가문이 무엇을 하는지는 하탄의 가주를 제외하곤 그 누구도 정확히 알 수 없을 테니까.
허나 로만, 메디브, 킬로그는 다르지 않은가. 특히나 킬로그는 진즉에 움직였어야 했다.
제국의 눈, 제국을 향해 다가오는 모든 위협을 가장 먼저 감지하고 움직여야 하는 것이 킬로그 인데.
어찌하여 여태껏 움직이지 않고 있는 걸까.
내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걸 눈치 챘는지,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아이린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킬로그가 곧 움직일 거란 얘기는 들었지만, 그런 걸 감안하더라도 이번 사태는 무언가가 이상해요.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 제일 조심해야 하는 건 바로.”
그 가녀린 손가락이 나를 향했을 때, 나는 그녀를 바라보며 옅게 웃었다.
“저겠죠.”
“...그래요, 그대가 지금 이 상황에서 제일 조심해야겠죠. 만약 5대 가문이 흑마법사와 관련되어 있다면, 아마 가장 눈엣가시일 그대를 직접 처리하려 들 수도 있을 테니까요.”
“......”
눈엣가시라. 어쩌면 그렇게 보일 수도 있겠지.
만약 내가 흑마법사였다면? 솔직히 말해 나라는 존재를 그리 좋게 보진 않을 터였다.
허나 당장 나를 노리진 않을 것이 분명했다. 아마도 나를 노리기보다는...아마도 회유를 택하겠지.
아마도 저번처럼 싸우기 위해 만나는 것 외에 한 번 즈음 만날 날이 오리라 생각하고 있었다.
만약 그 때가 온다면. 내 입장이 확실하게 정해지지 않을까.
아이린을 바라본다. 그 하얀 색의 머리카락이 길게 늘어져,
나른한 표정의 얼굴에서 반짝이는 푸른 눈이 돋보이는 얼굴.
처음 봤을 때는 그저 가면을 쓴 것처럼 보였는데,
이제는 새하얀 얼굴에서 감정들이 하나하나 살아 숨 쉬고 있었다.
그녀도 웃고, 때론 울고, 때론 화도 냈다. 나와 만나 변한 것인지는 아직 잘 모르겠지만.
그런 모습을 조금 더 지켜보고 싶은 것은 사실이리라.
지금은 그저 사심에 불과했지만.
과연 나중에도 이게 사심으로 그칠까. 저도 모르게 커져가는 마음을 억누르는 것도 한계가 있을 터였다.
친애, 연민, 그런 감정이 애정으로 변한다면. 쓰게 웃는다.
지금은 그저 숨길 따름이었다. 씰룩이는 입꼬리를 매만져 늘 짓는 부드러운 미소를 만든다.
“저는 괜찮습니다.”
나 자신을 걱정해주는 사람이 있는 것만으로도 족했다.
이미 무덤덤해져서, 더 이상 나 자신의 대한 염려는 스스로 지운지 오래였다.
다쳐도 좋다. 스러져도 좋다. 더 이상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만큼 망가져,
입에서 소리조차 내뱉지 못하고 기어 다니는 몸이 된다 한들.
내가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이 멀쩡하길 바랄 뿐이었다.
하여 걱정을 품는다. 녹안에 비치는 것은 오직 아이린 뿐이었다.
흑마법사들이 나를 중요히 여긴다는 것은, 결국 아이린에게까지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었다.
내가 그들의 회유를 거절한다면, 그리 하여 아이린을 노리게 된다면.
차가운 바람이 불어와 주변을 휘감았다.
젖은 바람 속에 섞인 것은 어김없이 눈이라, 그 고독한 계절이 만들어내는 바람 속에서 눈살을 찌푸렸다.
그런 나의 걱정을 눈치 챘는지, 아이린이 나를 바라보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저도 괜찮아요.”
“...제가 괜찮지 않습니다.”
흑마법사라는 존재는 마스터였던 황태자조차 쉽사리 대적할 수 없었던 존재였다.
같은 마스터였던 황실 기사단장조차 죽지 않았던가. 고작해야 익스퍼트였다.
익스퍼트라는 경지에 고작이란 단어가 붙는 것이 우스웠으나, 현실이 그랬다.
잠시 눈을 지그시 감았다가, 이내 뜨며 무거운 숨을 토해내었다.
후회. 언제나 그 단어는 자신을 괴롭혔다. 문득 손이 따끔거렸다.
누군가를 잃었을 때 자학했던 그 손. 지금은 멀쩡했지만, 그때 입었던 화상 흉터가 눈에 아른 거렸다.
괜찮을 거야. 이번엔 다를 거야.
속으로 애써 중얼거리며 마음을 진정시켰지만,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눈앞이 흐려졌다. 흐릿한 시야 속에서 보이는 건 푸른 빛 하나였다.
늘, 저도 모르게 눈으로 쫓고 있는 그 빛. 귓가에 목소리가 흘러들어와, 이내 멍한 시선을 보내며 앞을 바라보았다.
“에반.”
네, 아가씨. 속으로 대답한다. 작게 벌려진 입술에서 어쩐지 목소리가 새어나오지 않았다.
턱밑까지 차오른 숨에 입을 꾹 다물며, 아까보다 조금 맑아진 시야 속에서 아이린을 찾았다.
늘 그렇듯이 나를 바라보는 그 눈엔 따스함이 감돌았다.
“믿고 있어요.”
“......”
“그대는 나의 기사니까요.”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웃는다.
저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나와서, 고개를 숙인 채 땅을 바라보며 웃었다.
사람의 마음은 무어라 단정 지을 수 없다는 말이 떠올랐다.
방금까지만 하더라도 그리 답답했는데, 고작 말 한마디에 이렇게 풀리는 것이 우스웠다.
믿는다.
그 말이 이토록 사람을 간질이게 만들었다.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아이린은 나를 바라보고 있지 않았다.
고개를 돌린 채 창문 밖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다만, 그녀의 귀 끝이 살짝 붉게 물들어 있어서. 또 한 번 피식 웃는다.
“수줍음이 많으신 것 같습니다.”
“...뭐가요.”
“아니요, 그냥 해본 말입니다.”
이제는 숨쉬기가 버겁지도, 눈앞이 흐리지도 않았다.
이 바람이 더 이상 차갑지도, 하늘에서 내리는 눈이 탁해보이지도 않았다.
맑았다. 구름 한 점 없이 맑게 갠 하늘에서 하얀 빛이 내려와 이내 눈에 부딪혀 반짝였다.
그 모습을 잠시 바라보다가, 이내 입을 열었다.
“아마 이제 곧 있으면 봄이겠죠.”
“...그렇죠.”
“그리고 다시 여름, 가을, 겨울. 또 눈이 오고. 다시 봄이 오겠죠.”
창밖을 바라보던 아이린이 내게 시선을 돌렸다.
허나 나는 여전히 창밖을 바라본 채, 그렇게 말을 이어갔다.
“지켜드리겠습니다. 시간이 흘러, 아가씨가 저를 맘에 들지 않아 내치는 그 순간까지. 다시 계절이 돌아 이 눈을 계속해서 아가씨가 볼 수 있도록.”
생각해보면 늘 처음 겪는 순간엔 아이린이 있었다.
생일을 축하받는 것도, 나를 걱정해주는 것도.
그리고 나를 믿어주는 사람도, 웃어주는 사람도.
첫눈이란 것을 그 어느 때보다 색다르게 바라보았던 그 순간도. 지금 이 순간도.
믿어주는 사람에겐 그 보답을 해야 한다 했던가. 언젠가는 돌아갈 세상이었다.
내가 원래 살던 세상으로 돌아가 그녀를 언젠간 잊게 될지도 몰랐지만. 적어도 지금 만큼은.
“저는 당신의 기사니까요.”
아이린의 호위 기사였으니까.
그 말에 아이린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놀란 건지, 아니면 갑작스레 내뱉은 내 말이 의외였던 건지.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듯 입술이 달싹거렸다가, 이내 꾹 다물리곤 푸른 눈이 나를 향했다.
더 이상 흔들리지 않는다. 더 이상 고민하지 않는다.
설령 검을 쥔 두 손이 떨릴지언정, 마음 만큼은 흔들리지 않을 터였다.
미소 짓는 얼굴에 더 이상 불안은 없었다. 하면 되지 않겠는가.
아직까지 흑마법사는 나를 만나러 오지 않았고,
절멸이 제대로 나타나기엔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았다.
마음이 한결 후련해진 듯 했다. 이제는 조금, 어쩌면 앞으로는 더 이상 망설이지 않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여 웃었다. 옅게, 자세히 보지 않으면 눈치 채지 못할 만큼.
살짝 올라간 입꼬리가 이젠 떨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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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로 아이린과 나눈 얘기의 대부분은 서임식에 관련된 것이었다.
사실 가장 중요한 부분은 황태자가 온다는 사실이었으니, 기본적인 제식이라던지.
어떤 절차로 이루어지며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 지에 대한 얘기를 듣자,
어느새 시간이 훌쩍 흘러 창밖에 보이는 풍경이 점차 빨갛게 물들고 있었다.
“이 정도면, 서임식에 관한 얘기는 충분히 들려준 것 같네요. 설마 실수하지는 않겠죠.”
“그럴 리가요.”
몇 번이고, 귀가 닳도록 듣지 않았던가. 실수하면 내가 바보였다.
그래도 한 번 즈음은 연습해보는 게 좋으려나.
그래도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실수하면 나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누를 끼치는 것이 될 테니까.
그렇게 서임식에 대한 생각을 지우자, 떠오르는 다른 생각은 역시 아델 로만이었다.
“근데, 로만 경은 괜찮습니까?”
아델을 언급하자 다시금 표정이 어두워진 그녀였지만, 이내 혀를 한 번 차며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곧 있으면 일어나겠죠. 아마 그대의 서임식이 모두 끝날 때면 일어날 것 같아요. 그 뒤엔 로만 가에 대한 조사가 이뤄질 예정이니, 아마 꽤 바빠질 거예요.”
바빠질 거란 말을 내뱉으며 한숨을 내쉰 아이린은, 이내 쓰게 웃으며 차를 들이켰다.
아마 지금 이 상황이 그저 껄끄럽기만 하겠지.
5대 가문 중 하나인 로만 가를 건드려야 하는 것도 모자라 흑마법사와 연관되어 있으니,
조금이라도 실수가 있다면 그대로 큰 문제가 될 수도 있었다.
또 밤을 새려나. 아이린의 눈 밑에 조금 씩 생겨나는 그림자를 바라보다가, 이내 입을 열었다.
“그럼 오늘은 일찍 쉬시는 편이 좋겠군요. 아무래도 곧 바빠지실 테니까요. 또 저번처럼 쓰러지시는 걸 그리 바라지는 않거든요.”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이렇게 여유가 있을 때 미리 쉬어두는 게 좋겠죠. 그대도 이만 일찍 들어가도록 하세요. 아까 보니까 표정이 별로 안 좋던데, 괜히 또 새벽에 나와서 훈련하지 말고요.”
그 말에 속이 찔려서, 나는 어깨를 한 차례 으쓱이곤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아무래도 생각을 많이 한 탓인지, 평소보다 조금 지친 것도 같았다.
아마도 오늘은 조금 잘 수 있지 않을까.
나름 고민도 어느 정도 덜어냈으니 침대가 푹신하게 느껴질 거란 생각에 몸이 나른해지기도 잠시,
이내 아이린을 향해 고개를 살짝 숙이자 그녀가 날 바라보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잘 자요.”
그 말에 잠시 멈췄다가, 이내 옅게 웃으며 대답했다.
“...아가씨도, 좋은 꿈꾸세요.”
그리고 문이 닫힌다. 이어지는 적막에 잠시 문을 기대었다가,
이내 발걸음을 옮기며 한숨을 내쉬었다.
서임식이 끝난 뒤엔, 아마도 꽤나 바빠지지 않을까. 오늘은 조금 쉬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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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이 드리운다. 로만, 검으로 시작하여 가문의 모든 사람이 검을 든 채 죽는다 알려진 가문.
칼날처럼 솟아오른 넝쿨 속에서 그림자가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보라색, 죽음을 연상시키는 그 어둠이 창문을 두드리자 이내 마법처럼 창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오셨습니까.”
칠흑같은 어둠 속에서 목소리가 들려오자, 이내 창문을 타고 들어온 어둠이 점차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다.
날카로운 손톱, 시체처럼 창백한 새하얀 피부.
뭉개진 코와 텅빈 눈에서는 보랏빛 불꽃이 이글거렸다.
언뜻 보면 사람처럼 생겼으나, 사실은 사람과 가장 먼 존재.
이윽고 그 입이 열리자, 주변에 깔린 그림자가 천천히 진동하기 시작했다.
“기칼리사 두 아이니호 레후 아베옴.”
“절멸이 드리움에 어둠이 우리를 보우하니.”
“두베사 니 아이니호 데프 칼벤타.”
“종말의 시작에 어둠이 그들을 징벌할 지어다.”
시체처럼 서있는 이가 입을 엶과 동시에 앞에 서있던 청년이 대꾸하자,
비로소 만족한 듯 창백한 이가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진동하던 그림자가 고요해진다.
밤그림자가 어둠에 닿았지만이내 더 짙은 어둠에 잡아먹혀 달빛이 천천히 사그라들기 시작했다.
보랏빛이 반짝였다.
창백한 이가 내뿜는 불꽃이 아닌,
어둠 속에서 꼿꼿이 서있는 청년의 눈이 보라색이었다.
그 이름, 로만의 적자이자 검의 후계자.
온 몸이 바스러져 움직일 수 없을 거라 생각했던 아델 로만은 그 어느 때보다 가볍게 움직이고 있었다.
텅 빈 눈에 비치는 것은 그 어느 것보다도 짙은 보라색. 일렁이는 보라색의 눈이 이윽고 아래를 향했다.
무릎을 굽힌다. 검의 끝이 땅에 닿아,
아델 로만이 취한 자세는 마치 기사가 서임하는 자세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가 고개를 숙였을 때.
화르륵
허공에서 타오르는 보랏빛의 염화가 창백한 이의 손에서 흘러나와 이내 아델의 머리를 향해 파고 들기 시작했다.
갈라지는 몸, 마치 타들어가는 나무처럼 금이 간 그의 몸에서 보라색의 빛이 흘러나왔으니.
이윽고 텅 빈 눈에서 희열이 차올랐다.
어둠 속에서 피어오르는 보라색의 눈이 홀로 일렁였다. 힘의 대한 만족감,
이제 더 이상 그가 충성하는 것은 황제가 아니었다.
그가 바칠 영광은 에반젤리움으로 향하지 않을 터였다.
오직, 주변에 도사리는 어둠만이 그를 편하게 만들어주고 있었기에.
아델 로만은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심장에 차오르는 힘이 몸을 절로 들썩이게 만들었다.
허나 참는다. 지금은 참아야 했다. 적어도 달이 붉게 물들 때까지는, 이 고개를 웅크리고 있어야 했다.
트롤을 잡아내던 한 기사의 모습이 머릿속을 스쳐지나갔을 때,
아델은 입꼬리를 비틀었다. 아마도 가장 위험이 될 사람이 있다면 그가 아닐까.
곧, 자신의 칼날이 그를 향할 터였다.
아니.
어쩌면 로만의 모든 칼날이 그를 향할지도 모르겠지.
침대로 기어들어간 아델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 지금은, 그저 병약한 환자를 연기해야 할 때였다.
절멸이란 이름이 세상에 퍼질 때까지는 얼마 남지 않았으니, 구태여 먼저 움직일 필요는 없을 터.
이내 텅 빈 방에 아델만이 홀로 남게 되었을 때, 어둠에 가려졌던 달이 주변을 환히 비추기 시작했다.
허나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의 그림자가 이토록 불길하게 보이는 것은 어째서 일까.
차디찬 겨울, 더 이상 눈이 내리지 않아 마른 바람은. 그 어느 때보다도 불길하게 휘몰아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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