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판 속 악녀의 호위기사가 되었다-38화 (38/181)

〈 38화 〉 눈이 붉게 물들 무렵(4)

* * *

자신의 마나가 남들과 다르다는 것 즈음은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황태자도, 원작의 여자 주인공도, 그리고 훗날 아이린이 마나를 발현할 때면 항상 그 표현을 다를지언정 결국 푸른색을 띄고 있었다고 표현되었으니까.

남들과는 확연히 다른 순백의 마나,

비록 사람마다 그 마나의 색이 다르다 알려져 있지만 결국 파란색에 국한될 뿐이었다.

흑마법사들이 다루는 이 어둠이란 마나와 내 마나란 무슨 관련이 있는 것일까.

허나 그런 것은 중요치 않았다.

지금 이 순간 자신이 마나에 대해 생각한다면 그것은 이 마나가 저 어둠에 효과적이라는 사실 뿐이겠지.

에반의 손에 쥐인 검이 찬란한 빛을 내뿜었다.

몸을 두른 불꽃, 그 불꽃이 트롤의 몸에 심어진 어둠을 걷어내자 이윽고 트롤이 노호성을 내뱉었다.

크오오­

트롤의 몸놀림은 그 거대한 몸집과 달리 재빨랐다.

잠시라도 시선을 놓친다면 그대로 저 주먹이나 도끼에 맞아 몸이 찢어지리라.

쥐고 있던 검을 들어올리며, 그대로 트롤의 어깻죽지를 베어낸다.

새하얀 마나는 분명히 재생을 더디게 했다. 그렇다면 지금 이런 공격은 분명 효과가 있을 터.

파고든 칼날이 이내 트롤의 어깨뼈를 끊자, 덜렁거리는 팔을 본 트롤이 다른 한 손을 아무렇게나 휘둘렀다.

우지끈, 한쪽 손에 들린 도끼가 나무를 거칠게 베어낸다.

한 번의 휘두름으로 나무를 베어내는 광경을 본 에반의 눈이 가늘어졌다.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도 훨씬 힘이 강력했다.

트롤이 지닌 힘을 판단했던 것을 수정한다. 한 대도 맞아서는 안됐다.

불가능하더라도, 그 불가능한 것을 이루지 못한다면 승산은 없었다.

숨을 들이쉰다. 폐에 산소가 가득 채워져 가슴이 부풀어 올랐을 때 즈음,

에반의 모습이 트롤의 시야에서 순식간에 사라졌다.

‘...아마도 1분. 최대한 많은 곳을 베어내야 해.’

방금 베어낸 어깻죽지에서 살이 빠르게 돋아나는 것이 보였다.

저 속도라면 곧이어 모두 재생될 터, 한 쪽 팔을 쓰는 것이 어색한 지금이 기회였다.

에반은 몸을 재빠르게 회전시켜 트롤의 뒤를 점했다.

몸의 통증이란 꽤나 거슬리는 것이라,

제아무리 트롤이라 한들 상처가 있는 지금 멀쩡할 때처럼 몸을 움직일 수 없을 터였다.

촤아악! 트롤의 발목을 베어낸다. 허나 얕음을 깨닫곤 곧바로 몸을 빼내었다.

피부가 생각보다도 두꺼웠다. 마나를 머금은 검이었건만,

정말 모든 힘을 다해 베어내는 것이 아닌 이상 뼈까지 베기란 꽤나 힘든 일이었다.

분노한 듯, 어깨를 완전히 회복한 트롤이 양손을 들어 바닥을 내리쳤다.

땅이 뒤흔들린다. 단지 용력만으로 땅을 흔들리게 만드는 힘이라니.

에반은 헛웃음을 흘린 채 검을 고쳐 잡았다. 기회를 노리기가 쉽지 않았다.

다시금 숨을 내뱉으며, 이번에는 몸 전체가 아닌 다리에 불꽃을 휘감으며 발걸음을 내딛는다.

빨랐다. 어쩌면 일반적인 기사가 감히 눈으로 포착하지 못할 만큼 빠른 속도였다.

푸른 검광이 공중에서 몇 번이나 번쩍이고, 동시에 트롤의 몸에서 피가 뿜어져 나왔다.

허나 얕았다. 트롤을 확실히 베어낼 무언가가 부족했다. 그 무언가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에반이 이를 악문 그 순간, 트롤의 눈이 반짝였다. 분노로 이글거린다.

마치 금방이라도 터질 것만 같은 불꽃처럼, 보랏빛의 진혼이 어둠 속에서 일렁이기 시작했다.

쿠웅­! 트롤이 발을 구름과 동시에 에반의 몸이 공중에 떠올랐다.

에반의 얼굴이 당황으로 물들었다.

순간의 진동으로 몸이 붕 뜨다니, 도대체 이 말도 안 되는 힘은 무엇이란 말인가.

눈살을 찌푸리며, 트롤이 내지르는 도끼의 날을 바라보았다.

피가 잔뜩 묻어 살점이 찐득거리는 그 거대한 도끼.

집중한다. 자신에게 향하는 저 도끼를, 그 것을 쥔 트롤의 손을.

손가락이 꿈틀거린다. 도끼의 손잡이를 쥔 트롤의 전완근이 팽팽하게 당겨져,

당장이라도 터질 듯이 부풀어 있는 모습을 보곤 그대로 검을 들어올렸다.

감각을 끌어올린다. 시각, 청각, 후각, 촉각.

도끼를 바라보는 시선을 놓지 않은 채로,

바람을 가르는 그 소리가 휘청이는 것을 들으며도끼에 묻은 혈향이 짙어지는 것을 느낀다.

검을 쥔 손이 미끈거렸다. 피와 땀으로 젖은 탓일까.

양손에 힘을 주어 검을 고쳐 쥔 채, 그대로 자신을 향해 날아온 도끼를 향해 검을 내질렀다.

이대로 힘을 주면 자신이 밀린다, 그렇기에 허리를 비틀며 몸을 회전시켰다.

허리를 돌린다. 발걸음을 수차례 내딛어, 도끼에 실린 힘이 반대로 향하도록 도끼의 옆면을 쳐낸다.

콰직­! 도끼가 밀쳐냄과 동시에 자신의 몸 또한 그대로 밀려나가 나무에 부딪혔다.

입안에서 비린 맛이 나 침을 뱉자 붉은 색이 눈에 띄었다.

나름 제대로 막아냈다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트롤의 힘이 너무 강력했던 것 같았다.

허리가 뻐근했다. 나무에 부딪힌 통증으로 절로 욕지거리가 새어나와,

이내 쓰게 웃으며 다시 트롤을 향해 시선을 돌린다.

아무래도 제 힘에 못 이겨 바닥에 고꾸라진 것일까,

바닥에 우스꽝스런 모습으로 쓰러진 트롤이 씩씩거리며 땅에 떨어진 도끼를 주워들었다.

“이럴 때 크리스 경이라도 있으면 좋았을 텐데 말이야.”

그러면 무언가 합격이라도 노려보지 않았을까.

어둠에 물든 트롤이란, 자신이 생각하는 것보다도 훨씬 버거운 상대였다.

차라리 시가지에서 만났던 흑마법사와 몇 번이고 다시 싸우는 것이 나을 만큼이나.

태어나 싸워본 것들 중에서 가장 힘든 상대이지 않을까.

문득 손에 들린 검이 눈에 들어왔다.

내가 이렇게나 절박하게, 그리고 목숨까지 걸어가며 싸워가는 이유가 무엇일까.

이대로 도망칠 수도 있었다. 그저 이 장소에 흑마법사와 어둠에 물든 트롤이 있다 알리면,

황실에 있는 기사단장이 알아서 잡아주지 않겠는가.

허나 그렇지 못했던 이유.

힘들 것을 알면서도, 구태여 이럴 이유가 없는 것을 알면서도 이 곳을 향했던 이유.

간단하지 않은가.

지켜야 할 사람이 있었다. 아이린이 저 아래에 있었다.

호위 기사라며, 앞으로도 당신의 호위 기사라 말했건만. 저런 위협을 두고 어찌 제 안전을 챙길 수 있을까.

한편으로는 우습기도 했다. 자신을 학대하는 부모님을 피해 도망쳤던 녀석이,

이제는 누군가를 지키고자 이렇게 목숨마저 건다는 것이.

허나 그때와 지금은 달랐다.

제 몸뚱이 하나 달랑 남아 있었던 그 때와는 달리, 지금은 지켜야할 사람이 있었다.

제게 웃어주던 그 미소를 잊지 못한다. 첫눈이 내리던 그 날,

그 어떤 눈보다도 반짝이던 그 웃음을 잊지 못했다.

그 얼굴이 다시 일그러지기를 원치 않았기에, 훗날 올 비극이 정말로 이루어지는 것을 원치 않았기에.

쩔그럭, 쇠의 마찰음과 함께 손잡이에 달려있던 검이 사라진다.

이전과는 달라진 감각, 도끼와 검이 맞닿은 순간 깨달았다.

자신이 뽑아낸 검은, 진실로 드러난 모습이 아니라는 것을.

화르륵­

깔끔한 소리와 함께 다시금 솟아난 검신의 색깔은 이전과 달랐다.

푸른빛을 띠던 전과는 달리 자신의 마나와 같이 완전한 순백색을 띄는 검신.

몸에서 불꽃이 일기 시작한다.

주변을 감싼 어둠을 찢어발겨, 이내 공간을 백색으로 물드는 불꽃이 허공에 넘실거렸다.

각오를 다진다. 신념을 굳힌다.

그런 말은 너무 거창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이내 상념을 지운 채 앞을 바라본다.

각오도, 신념도 아니었다. 자신에게 그런 단어들은 어울리지 않았다.

지키고 싶을 뿐이었다.

그녀의 호위 기사라서, 아니면 자신이란 존재를 처음으로 인정해준 사람이었기에 그럴지도 몰랐다.

이유는 중요치 않았다.

누군가를 지키겠다는 마음에 이유 따위는 필요 없었다.

그렇게 하고 싶었다. 더 이상 후회하고 싶지 않았고, 소중한 누군가를 다시 잃고 싶지 않았다.

순간의 실수로 잃어버렸던 자신의 동생처럼. 더 이상 후회하고 싶지 않았다.

하여 검을 든다.

몸이 가볍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전보다도 훨씬 가벼워, 어쩌면 공중에 몸이 떠있다는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주변이 이전보다도 밝았다. 숲을 좀먹은 어둠이 화염에 밀려나,

이내 생기를 잃었던 나무들이 서서히 빛을 되찾기 시작했다.

소매 속에 팔랑이는 손수건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더럽히지 말라면서 제게 주었던 손수건, 아직까지도 용케 피가 묻지 않은 그 모습의 피식하고 웃음이 새어나왔다.

그리 말씀 하셨으니, 더럽혔다간 무어라 하시겠지.

품속에 손수건을 집어넣으며, 에반은 다시금 자신을 향해 뛰기 시작한 트롤을 바라보았다. 검을 쥔 손에 핏줄이 돋아났다.

심장이 박동한다.

터질듯이 뛰는 심장이 온 몸으로 혈액을 내뿜어, 이윽고 차오르는 활력에 에반은 이를 악물었다.

무릎을 굽힌다. 발을 뒤로 뻗은 채, 그렇게 앞을 향해 도약할 준비를 했다.

쿠웅­

분노한 트롤이 어느덧 에반의 앞으로 다가왔다.

땅을 울리는 발걸음에 섞인 것은 명백한 분노,

솟아오른 풀을 짓밟고 축축한 흙을 짓뭉갠 그 발이 이내 에반의 머리를 향했을 때.

다시금 트롤의 시야에서 에반이 사라졌다. 허나 트롤은 반응했다.

분명 아까의 그 공격처럼, 자신의 발목을 노릴 것이라 생각하며 곧바로 뒷발을 움직였다.

촤아악­

허나 움직이지 않는다. 인지할 수 없었다.

발을 움직였다 생각한 그 순간 몸이 휘청거려, 이윽고 균형을 잃은 트롤의 몸이 앞으로 고꾸라졌다.

트롤의 두 눈에 보이는 것은 순백의 화염이었다.

힘을 가져다 준 어둠이 사라진다. 온통 어두웠던 숲에 들어오는 빛이 눈에 들어와, 그 빛이 너무도 찬란하여 눈을 질끈 감았다.

“내 발!”

“말도 할 줄 알았나? 이건 조금 놀라운데.”

발목에서 느껴진 통증이 오금까지 이어진다.

피가 흐르는 다리에 더 이상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막무가내로 휘둘러진 도끼가 나무를 여럿 베어내었지만,

그것이 전부였다. 닿지 않는다. 에반은, 그 모든 공격을 전부 보고 있었다.

‘몸이 가벼워.’

트롤이 말을 한다는 점이 조금 놀라웠지만,

그것보다 신기한 것은 이전보다 몸 상태가 조금 더 좋다는 점이었다.

아직 세상을 마나로 물들인다는 마스터의 경지엔 턱없이 모자랐으나,

익스퍼트라는 경지 내에서 또다시 성장을 한 느낌이었다.

평소에도 놀랐지만, 도대체 이 몸의 정체란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

평소에 훈련을 열심히 하긴 했는데, 그렇다 한들 이런 성장 속도가 말이나 될까.

방금까지만 하더라도 모든 감각을 동원해 포착해야 했던 트롤의 몸놀림이지금은 놀라우리만치 훤히 보였다.

오른쪽 아래, 왼쪽 위를 향하는 사선.

트롤이 행하는 모든 공격이 여러 개의 선으로 보여, 마치 붓으로 주변을 덧칠한 듯 보였다.

내딛어지는 발에 여유가 있었다.

호흡이 가벼웠고, 몸에 흐르는 불꽃은 그 어느 때보다 강렬하게 타올랐다.

절뚝거리는 트롤은 아직 전의를 잃지 않았다.

아직까지도 자신을 그저 나약한 인간으로 바라보는, 그 포식자의 눈동자는 여전히 이글거렸다.

머리의 끝을 스쳐가는 도끼를 피해 몸을 숙인다.

트롤의 몸으로 파고들어, 이내 그 널찍하게 드러난 뱃가죽을 향해 검을 꽂아 넣는다.

지이익­ 가죽이 찢어지며 이내 피가 솟구친다. 내장을 쑤셨다.

꼬불꼬불하고 길게 늘어진 내장이 튀어나와 바닥에 흐르자 트롤이 고함을 내뱉었다.

아프겠지, 그 고통은 방심을 불러낸다.

길게 찢어진 배에서 흐르는 내장을 줍는 트롤이 애처롭게 울부짖기도 잠시, 에반이 그 가슴팍에 칼을 쑤셔 박았다.

왈칵거리며 쏟아져 나온 핏물이 입 속에 들어와 이내 얼굴을 찡그리며 뱉어낸다.

입안에 감도는 역겨운 맛에 혀를 내두르며 박은 칼을 그대로 밀어 넣자, 이내 단단한 흉골의 감촉이 느껴졌다.

그 안에 있을 장기, 폐, 위, 그리고 심장.

이대로 있으면 곧 자신이 죽을 것임을 직감한 트롤이 몸부림을 치기 시작했다.

그 거대한 몸집이 움직일 때마다 검이 움직여, 이내 에반은 혀를 차며 트롤의 그 거대한 배 아래에서 벗어났다.

이대로 있으면 아마 몸에 깔아 뭉개지리라.

‘재생까지 30초.’

발목을 베어낸 곳이 천천히 자라나고 있었다.

아마 자신의 검에 베어져 조금 더딘 것이겠지만, 그런 것을 고려하더라도 눈을 의심할 만큼 빠른 속도였다.

단 한 번, 트롤의 움직임을 완전히 봉쇄할 수 있는 무언가가 있을까.

갈라진 뱃가죽을 잡은 트롤이 씩씩거린 채 도끼를 집어 들었다.

이제 두 눈에서 보이는 것은 제 앞에 있는 존재를 죽이겠다는 포악한 의지,

아마 자신이 죽더라도 나를 죽이겠다는 것이겠지. 입꼬리가 비틀린다.

어울리지 않았지만, 에반이 이 순간 느끼는 것은 희열이었다.

한계까지 다다른 숨이, 숨을 쥐어짜내 말라 비틀린 폐가, 금방이라도 터질 듯 뛰는 이 심장이.

한계를 뛰어넘는 순간 느끼는 쾌감은 그 무엇과도 비할 수 없다 했던가.

뇌를 뒤덮는 쾌감에 시야가 뿌옇게 변했다. 허나 감각은 여전했다.

눈이 보이지 않음에도, 나머지 모든 감각이 트롤이 무슨 행동을 하고 있는지 뚜렷하게 전해주고 있었다.

턱­

발을 딛는다. 이 순간 자신은 바람이었다.

검을 쥔다. 순백으로 빛나는 검이 빛나며, 이윽고 주변이 고요해지기 시작했다.

앞을 바라본다. 그 무엇보다도 맹렬한 시선으로, 몸에 타오르는 염화를 이끌어내어 어둠을 몰아낸다.

순간 시간이 멈춘 것처럼 보였다.

그토록 빠르던 트롤의 행동이 마치 멈춘 듯, 꼭 이 공간 속에서 자신의 시간만이 빠르게 흘러가는 것처럼.

에반의 발이 움직였다. 바람이 분다. 질풍처럼, 대기를 찢어발기며 나아간 검이 새하얀 궤적을 그리며 나아갔다.

땅을 딛고 나아간 몸은 이내 공중을 향해 튀어 올랐다.

트롤의 몸이 코앞까지 다가왔을 때, 에반은 몸을 순간 비틀었다.

거짓말처럼 트롤이 휘두른 도끼가 스쳐지나간다.

머리카락이 살짝 잘려나가며, 볼에 자그마한 상처가 생겨났다.

피가 튄다. 허나 에반은 웃었다.

촤아악­

검이 선을 그리며, 이 어둠 속에 한줄기 섬광을 만들어낸다.

하늘에서 떨어진 한줄기의 벼락처럼, 순식간에 트롤의 목에 파고든 검이 목뼈를 부수어 그대로 지나쳤다.

검에는 피조차 묻지 않았다. 살점도, 뼈의 부스러기도 묻지 않은 채 깔끔한 검.

허공을 바라보던 트롤의 눈에 허망함이 일렁였다.

투쟁심도, 더 이상 불태울 전의도 없었다.

거구가 휘청거리며, 이내 땅에 무너지기 시작했다. 주인을 잃은 목은 몸과 반대로 굴러 떨어졌다.

“...하아.”

굴러 떨어진 목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이제 진짜로 죽은 건가, 잠시 트롤의 목을 바라본 에반이 이윽고 한숨을 내뱉었다.

새하얗던 검신이 다시 푸른색으로 돌아오더니, 이내 손잡이 속으로 빨려 들어가 사라졌다.

촤라락­

그 검의 손잡이를 지그시 바라보다가, 문득 자신을 쳐다보는 시선을 느껴 고개를 든다.

떨어진 트롤의 목, 이제는 보랏빛이 아닌 검은색의 눈동자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음을 깨닫곤 에반이 몸을 흠칫 떨었다.

#

“고맙군.”

“목만 남은 트롤이 그런 말을 하니까 조금 이상한데.”

“그대가 아니었으면 타락하여 영혼조차 소멸하였을 테니, 차라리 이렇게나마 이지를 되찾게 된 것이 다행이 아닌가.”

그 말에 눈살을 찌푸린다. 제 목을 자른 사람에게 감사 인사를 하는 트롤이라.

척 보아도 범상치 않은 녀석이란 것을 알긴 했지만, 이렇게 유창하게 말할 줄은 몰랐다.

아까는 '내 발!'이라며 멍청하게 굴던 녀석이 아니던가.

하지만 이제는 흑마술사가 심어둔 그 어둠이란 것도 느껴지지 않고,

구태여 경계할 필요는 없어보여 그저 트롤을 빤히 바라볼 뿐이었다.

내가 자신을 경계하고 있는 것을 알아차린 걸까,

트롤이 이내 껄껄거리며 웃더니 다시금 입을 열었다.

“역시, 방금까지 싸우던 상대와 대화를 나누기란 쉽지 않겠지. 내가 말하는 것이 신기한가? 그야, 나는 평범한 트롤이 아니니까 이렇게 말을 할 수 있는 거라네.”

“평범한 트롤이 아니라면.”

“나는 붉은엄니부족의 대족장이자 트롤 로드인 쟌지르라 하네. 비록 지금은 이렇게 목만 남아 입을 놀리고 있지만, 사실 앞으로 얼마 살지도 못하지!”

트롤 로드라니. 그럼 일반적인 트롤과 격이 다른 힘은 어둠과 더불어 자신이 타고난 힘이었던 것일까.

그 말에 내가 살짝 놀라자, 쟌지르가 다시금 말을 이어갔다.

“흑마법사에게 마을이 무너지고, 나조차 그들에게 당해 이렇게 됐다. 그대가 도와준 덕에 내 영혼만큼은 해방될 수 있었지. 그대에게 대지모신의 가호가 함께하기를 빌겠네.”

“...혹시, 흑마법사의 인상착의를 기억하나?”

“인상착의라. 아쉽게도 그대에게 알려줄 수 있는 거라곤 단 한 가지뿐이네. 기억이 흐릿한 와중에도 뚜렷하게 기억나는 것이 하나있지. 바로 ‘절멸’이라는 단어네.”

“절멸.”

절멸이란 단어가 처음 나왔을 때는 그저 우연이라고 생각했으나, 역시 무언가가 있었다.

흑마법사, 그리고 절멸. 역시 몇 년 뒤에 갑작스레 나타난 조직이 아니었던 건가.

이미 물밑에서 무언가를 꾸미고 있었던 것일까. 눈이 가늘어지자, 쟌지르가 다시 킬킬대며 웃더니 입을 열었다.

“그대라면 아마도 훌륭하게 헤쳐 나갈 수 있겠지. 눈에 담긴 의지를 읽었네. 아마도 지켜야 할 사람이 있나 보지?”

“......”

“영 부끄러운가 보군. 그대에게 전해줄 말이 많아. 예를 들어 그대가 지닌 마나라던가. 그대의 혈통이라던가.”

“혈통...?”

“허나 말해줄 수가 없을 것 같네. 이제 호흡 몇 번이면 목숨이 끊어질 것 같아. 아쉽지만, 내가 그대에게 줄 수 있는 도움은 여기까지인 것 같군.”

사실 도움이랄 것도 없지 않은가.

서로 신나게 싸우다가, 목이 잘린 트롤에게 절멸이란 조직이 이번에도 끼어있음을 들은 것이 전부인데.

작게 고개를 끄덕이자, 빙그레 미소를 지은 트롤이 입술을 달싹였다.

눈이 흐릿했다. 반짝이던 검은빛의 눈동자가 서서히 흔들려, 그 빛을 잃고 있음이 단번에 보였다.

혈통이라는 말이 거슬렸다. 내가 지닌 마나에 대해 트롤은 알고 있는 것일까.

묻고 싶은 것이 많아 순간 손이 움찔거렸지만. 움찔거리는 것이 전부였다.

완전히 흐릿해진 눈동자를 잠시 바라보다, 이내 들려온 목소리에 입을 다물었다.

“그대의 피를 잊지 말게. 한 때 잃어버렸던 날개를, 부디 언젠가는 떠올릴 수 있기를 바라지.”

그리고 인형처럼, 트롤의 머리가 미동을 멈춘다.

순식간에 싸늘하게 식은 모습은 여태껏 나눈 이야기가 거짓말처럼 느껴지게 만들었다.

잃어버렸던 날개라니, 도대체 그 말이 나와 무슨 관계가 있길래 그런 말을 하는 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후우.”

하지만 지금 그것에 대해 고민할 생각은 없겠지.

고개를 저어 생각을 털어내며, 다시금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어둠이 완전히 걷어진 숲속엔 빛이 만연했다. 지금까지 드리웠던 어둠이 환상처럼만 느껴졌다.

숨을 죄여오던, 바라보기만 하더라도 어깨를 짓누르던 어둠은 이제 없었다.

맑은 공기가 폐를 가득 채워, 눈을 지그시 감자 숲속의 생기가 온 몸에 느껴지는 듯 했다.

자신은 아직 살아있었다. 트롤이 쓰러지고, 일어서 숨을 쉬는 것은 자신이었다.

이윽고 발을 내딛자 다리가 휘청거려 몸이 앞으로 고꾸라졌다.

이대로 잠시만 쉴까.

흐릿한 시야에서 보이는 건 새하얀 빛이 들어오는 겨울의 숲이라,

어쩐지 가슴이 편안해지는 듯 했다. 눈을 감는다. 의식이 천천히 허물어지며, 이윽고 잠에 빠져들었다.

그 어느 때보다도 깊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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