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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판 속 악녀의 호위기사가 되었다-37화 (37/181)

〈 37화 〉 눈이 붉게 물들 무렵(3)

* * *

“이제 다들 갔네요. 뭔가 허전하기도 하구요.”

“아마 해가 질 때 즈음 돌아오겠지. 얌전히 있으렴.”

“...기사님 잘 하시겠죠? 이상하게 뭔가 불안하네요.”

눈살을 찌푸리며 창문 너머를 바라보는 로페나의 표정을 잠시 쳐다보다,

이내 시선을 돌려 창문 너머를 바라본다.

하늘 높이 떠있는 해가 서서히 내려가고, 그 아래에 있는 눈이 반짝이며 마치 보석처럼 빛나기 시작한다.

높게 솟은 구상나무 위에 켜켜히 쌓인 눈,

꼭 그림을 그리면 나오는 풍경을 그대로 박아 넣은 듯 아름답게만 보이는 풍경이었건만.

그 조용한 산을 바라보는 눈에 담긴 것은 미약한 불안이었다.

이유 없이 가슴이 떨린다. 손에 들린 찻잔 위의 차가 조용히 파문을 일으켜,

이내 그것을 바라보는 자신의 입에서 새어나오는 것은 차가운 한숨이었다.

“잘하겠지.”

누구에게 말하는 것이 아닌, 그저 스스로를 안심시키기 위한 중얼거림.

로페나의 시선이 이내 닿았다 사라진다. 사냥제일 뿐이었다.

짐승이나 약한 몬스터 따위를 잡는 행사가 아니던가.

여태 사냥제가 이루어지며 무언가 사건사고가 있던 적도 없었으니, 지금 이 감정은 그저 기우에 불과할 것이었다.

문득 느껴지는 허전함에 드레스를 매만지자, 이내 항상 지니고 있던 손수건이 없던 것을 깨달았다.

자신이 에반에게 주지 않았던가.

사냥제에 부담을 가져 어쩐지 불안해하는 그를 달래기 위해 걸어주었던 손수건을 생각하다가, 이내 그가 말했던 말이 떠올라 눈이 가늘어졌다.

­이게 무슨 의미인지 알고 주신 겁니까?

그저 기사의 안녕을 빌어주는 것이라 생각했다.

새하얀 손수건이 피에 젖어 붉은색이 되지 않도록, 일부러 늘 가지고 다니던 흰색 손수건을 주지 않았던가.

그가 그렇게 말한 것은 무언가 다른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닐까.

문득 떠오른 의문이 쉽사리 사라지지 않아, 창문 밖을 멍하니 바라보던 로페나를 향해 입을 열었다.

“로페나, 혹시 손수건을 손목에 걸어주는 게 무슨 의미인지 알고 있니?”

“...손수건이요? 혹시 누구 주시려구요?”

“아니, 그냥 궁금해서.”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입을 손으로 가린 채 키득거린 로페나가 이윽고 입을 열었다.

“사랑하는 사람한테 주는 거죠. 자기를 앞으로도 영원히 기억해달라면서요.”

“...뭐?”

눈이 크게 뜨인다. 눈동자에 일렁이는 감정은 놀람, 그리고 당황.

자신이 태어나 이렇게 놀라본 적이 있었나 싶을 만큼 놀란 나머지 찻잔을 들고 있던 손이 파르르 떨릴 정도였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하는 행동이었다니, 분명 크리스 경은 그런 자신에게 그런 말을 하지 않았는데.

“크리스 경.”

“뭐, 그런 말이 있던 것 같기도 하군요.”

싸늘한 시선을 보냈음에도 그는 능청스레 웃으며 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눈살이 한껏 찌푸려진다.

이대로 그에게 화냈다간 자신이 에반에게 손수건을 걸어주었다는 것을 들킬 거란 생각에 숨을 들이쉬었다가, 이내 힘겹게 토해내었다.

괜스레 뜨거워진 얼굴을 손으로 가렸다.

한껏 달아오른 얼굴을 두 손으로 쓸어내리자,

로페나가 자신을 의아한 얼굴로 바라봄을 느껴 천천히 입술을 달싹였다.

“...그런 의미가 있는 줄은 몰랐구나.”

“혹시 손수건을 누구한테 주신 거예요? 왠지 반응이...”

“그런 적은 없단다.”

차갑게 대꾸하자 이내 대화가 끊긴다.

그런 의미인 줄 알았더라면 조금 신중히 건네주지 않았겠는가.

그가 자신에게 그 의미를 알고 있냐며 되물은 것은 분명 그 원래의 의미를 알았기에 했던 말이겠지.

지끈거리며 아파오기 시작하는 관자놀이를 꾹 누르자, 아릿한 통증과 함께 눈이 지그시 감겼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건네는 것이라니. 자신과 가장 어울리지 않는 그 단어에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만약 그가 그때 자신에게 원래의 의미를 알려주었더라면, 꽤나 곤란했을 거란 생각이 떠올랐다.

구태여 얘기하지 않은 것은 그 나름대로의 배려였겠지.

늘 자신을 배려하는 사람이란, 과연 자신에 곁에 계속 두어야 할지에 대해 끊임없는 의문을 던져준다.

자신과 그가 과연 같이 있어도 되는 것일까. 호위 기사와 공녀라는 별 것 없는 관계로 맺어진 인연,

에반 프리드라는 사람이 제게 미친 영향은 꽤나 지대하지 않은가.

다른 이를 보고 별다른 생각을 하지 않았던,

심지어 제 약혼자조차도 혐오한 자신이 어떤 사람을 이토록 편히 대할 수 있다니.

어느새 로페나만큼이나 편한 존재가 된 자신의 호위 기사를 떠오를 때면,

이따금 가슴이 간질거려 저도 모르게 눈살이 찌푸려지곤 했다.

사랑이라.

아직 자신과는 꽤나 거리가 있는 단어였다.

누군가에게 제 모든 마음을 주어 품에 안을 만큼, 그런 마음의 준비가 아직 되지 않았음을 알고 있었으니까.

언젠가는 그런 날이 올지도 모르겠지. 허나 그것이 지금은 아니었다.

만약 자신이 사랑을 하게 된다면 그 대상은 누구일까.

갑작스레 떠오른 것은 그 짙은 녹안이라, 다시금 한숨을 내쉬며 시선을 창문을 향해 돌렸다.

하얀 눈이 쌓인 베르뎅 산, 여전히 고요한 그 산을 바라보면 얻는 것은 마음의 평온이어야 할 텐데.

어찌하여 볼수록 불안감만 커지는 것일까. 그저 쓸데없는 걱정일 뿐일 터였다.

흑마법사도 베었던 것이 그가 아니던가. 언제나 보던 모습으로 돌아와,

아무도 모르게 손수건을 돌려줄 그 모습을 잠시 상상하다 이내 시선을 떼었다.

찻잔에 따라진 홍차가 오늘따라 피처럼 붉어보여서,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

타닥­

산을 타고 오르는 행동에는 거침이 없었다.

방금 들었던 굉음, 그리고 그 사이에 들려온 비명소리.

여기까지만 하더라도 그저 짐승에게 당했다고 생각할 수 있었지만,

자신의 감각에 느껴지는 이 마나는 분명 흑마법사가 다루는 어둠이었다.

허나 흑마법사가 있다고 판단하기에는 아직 섣불렀다.

저번에 느꼈던 어둠보다도 훨씬 짙은 마나,

가까이 다가갈수록 폐 속에 스며들어 좀먹는 것 같은 이 기운은 그때와는 차원이 다른 어둠이라 할 수 있었다.

혹시 흑마법사가 한 사람이 아닌 것일까. 여러 생각이 들었지만,

계속해서 꼬리를 물고 따라오는 의문에 머릿속이 어지럽게 뒤엉키는 듯 했다.

특히나 뒤에 들려오는 이 목소리 때문에 더욱.

“방금 보셨습니까? 몬스터라도 나타난 걸까요?”

“...아직 정확히 판단할 수 없습니다. 무언가를 판단하기엔 아직 거리가 있으니까요.”

솔직히 말하자면 그가 따라오지 않았음 했다.

어차피 아델이 도움이 될 거란 생각은 하지도 않았으니,

차라리 무언가 있다며 밑으로 내려가 지원을 요청하는 편이 빠르지 않겠는가.

허나 이렇게 따라온 그를 그냥 보낼 수도 없어 그저 입을 꾹 다문 채 앞을 향해 나아갈 뿐이었다.

“하아...근데, 꽤 속도 차이가 나는 군요. 나름 진심으로 뛰고 있는데!”

그럼 차라리 따라오지를 말던가. 옅게 한숨을 내쉬며 다시금 고개를 돌렸다.

저런 대화에 어울려주다간 무엇하나 제대로 알아내지 못할 수도 있지 않겠는가.

마음 같아서는 기절이라도 시켜 어딘가에 두고 싶었으나 지금은 그럴 시간이 없었다.

얼굴을 가리는 나뭇가지를 부러트리며, 발을 미끄러트리는 눈을 마나로 녹이며 뛰기를 한참.

이윽고 산의 정상과 가까워지자 굉음의 정체가 서서히 보이는 듯 했다.

붉게 물든 눈, 누가보아도 짐승의 피로 보이는 그 광경에 아델이 신음을 내뱉었다.

“사슴이군요. 배가...어떻게 저렇게 찢어진 걸까요.”

몸이 두갈래로 찢어져 내장이 그대로 쏟아져나온 사슴의 몸을 잠시 바라보다가,

이내 찢겨진 형태를 보곤 이 소행이 결코 흑마법사가 한 것이 아님을 깨닫는다.

마치 힘으로 찢어낸 듯 규칙없이 우악스럽게 찢어진 몸,

양쪽에 무언가에 눌린 듯 자국이 남아있는 것은 아마도 사슴을 이렇게 만든 존재의 흔적이 아닐까.

문득 지난번에 보았던 그 검은색의 거인이 떠올랐지만,

고작 그정도의 힘으로 사슴을 찢는 것은 모자랄 터였다.

흑마법사가 만들어낸 피조물일까, 아니면 흑마법사의 어둠에 물든 무언가일까.

잠시 그 흔적을 바라보던 아델이 무언가 깨달았는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이 손자국은 트롤이 아닙니까?”

“트롤 말씀이십니까.”

“손가락이 3개...엄지까지 해서 4개니 트롤 같군요. 그럼 사람이 아니라 몬스터의 소행이었나, 허나 그렇다기엔 소리가 너무 크지 않습니까?”

트롤을 직접 본 적이 없었으니 그 소리가 트롤이라 확단할 수 없었으나,

아델이 말한 것이 영 믿지 못할 이야기인 건 아니었다.

트롤, 분명 베르뎅 산에 트롤이 나타난다는 얘기는 종종 들려왔으니까.

손에 쥔 검의 손잡이를 매만진다. 트롤이 지닌 특성은 타고난 재생력이었다.

검으로 제아무리 베어낸들 심장을 베지 않는 한 언젠가는 재생할 터였다.

만약 어둠에 물든 것이 트롤이라면 과연 자신을 벨 수 있을까.

이내 고개를 젓는다. 지금부터 고민할 필요는 없었다.

상대를 보고, 그 강함을 가늠한 뒤에 판단한 뒤에도 늦지 않았다.

지금 필요한 건 점점 숨조차 쉬기 어렵게 만드는 이 어둠, 그 어둠을 뿌린 존재가 누구인지 알아내는 것뿐.

이윽고 다시금 정상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자, 아델이 뒤따라 쫓아오기 시작했다.

#

눈 덮인 산이라는 것을 잠시 망각할 만큼, 산의 정상으로 향하자 보인 것은 주변을 가득 메운 울창한 숲이었다.

구상나무가 솟아오른 숲, 아직까지 제 녹색을 잃지 않은 이 숲의 바닥은 이따금 빛이 새어올 때면 초록색으로 반짝였다.

무너져 썩은 통나무의 텅 빈 속에서 보이는 것은 짐승의 사체였다.

무언가가 게걸스럽게 물어뜯은 듯 형체를 완전히 잃어버린 그 것에서 나는 향에 조용히 코를 손으로 가렸다.

썩은 향이 나지 않는다. 그렇다는 말은, 저걸 먹어 치운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 소리겠지.

바스락거리는 낙엽소리가 거슬렸다. 혹여 이 소리를 듣고 상대가 반응하지는 않을까.

적막한 숲, 이 고요 속에서는 숨을 내쉬는 자그마한 소리조차 메아리가 되어 돌아왔기에 행동거지를 조금 조심할 필요가 있었다.

“쉿.”

검지손가락을 들어 신호를 보낸다.

짙은 마나가 숨을 죄여오는 이 상황 속에서도 안색이 괜찮은 아델의 모습이 조금 의아하긴 했지만,

그의 수준이 낮아 그런 것일지도 모르니 기척을 숨기는 것이 먼저였다.

우지끈­

다시금 한발자국을 내딛었을 때, 저 멀리서 이 숲과 어울리지 않는 거대한 소리가 들려왔다.

마치 나무가 부서지는 소리, 이 거대한 나무를 부러뜨릴 존재란 내가 알기로 이 산에서 단 하나만이 존재했기에.

숨을 들이마시며 소리가 들려온 쪽을 주시했다.

마나가 느껴진다. 나무가 부러진 방향에서 느껴진 마나는 분명히 그 어떠한 마나보다도 어두웠다.

숲의 생기를 빨아들이고, 새어들어오는 빛을 그림자로 물들인다.

이 곳에 있어서는 안될 존재. 생명이 그 어떤 곳보다도 가득한 이 곳에서, 축출해내야 하는 존재였다.

허나 섣불리 다가가서는 안됐다. 힘이 어떤지, 속도가 어떠한지 정확히 판단한 뒤에 움직여야 했다.

이전에 흑마법사에게 곧바로 향했던 것은 그 마나로 수준을 미리 파악했기 때문이 아니던가.

지금은 그 때와 비교조차 할 수 없었다. 숨이 차올라 턱 끝까지 다다른다.

검을 쥔 손이 잘게 떨려, 이내 땅에 박아 넣은 채 앞을 바라보았다.

“로만 경, 잘 들으십시오. 절대 섣불리 움직여서는 안 됩니다. 통상적으로 생각하는 트롤이 아닙니다. 아마도 흑마법사가 만들어낸 피조물일 가능성이 클 거예요. 절대로, 절대 섣불리 움직여서는 안 됩니다.”

“...알겠습니다. 그런데 흑마법사라면?”

“질문은 나중에, 옵니다.”

거대한 나무 뒤에서 짙은 그림자가 보이기 시작했다.

대충 보아도 전혀 나무와 어울리지 않은 그림자,

마치 황혼이 스스로 걷듯이 주변을 어둠으로 물들이는 그 존재에 등골이 오싹해지는 것만 같은 감각이 느껴졌다.

쿠웅­

대지가 뒤흔들린다.

나무에 쌓인 눈이 걷어져, 이내 초록빛을 드러낸 나무가 순식간에 말라비틀어지기 시작했다.

주변의 생명이 사라져 이윽고 드러나는 것은 황폐였다.

눈이 녹아내리고, 땅의 생기가 사라져 갈라지기 시작한다.

쿠웅­

빛이 사라진 어둠 속에서 보이는 것은 그 보랏빛의 눈동자였다.

마치 불처럼, 저 홀로 이글거리는 그 눈은 심연을 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손에 들린 것은 피가 잔뜩 묻은 도끼, 피 속에 뒤섞인 인육의 편린을 바라보자 절로 눈살이 찌푸려졌다.

도대체 얼마나 많은 이들을 죽였을까.

그 입에서 길쭉하게 튀어나온 엄니는 그 존재가 한 때 트롤이었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허나 굽어 있어야할 등은 곧게 펴져 있었고,

초록빛을 띄어야 할 피부는 짙은 갈색을 띄어 어둠 속에서 쉽사리 분간하기가 힘들었다.

“...저건.”

아델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처음 보는 존재로부터 뿜어져 나오는 압도적인 기세,

나조차 검을 쥔 손이 이리 떨릴 정도였으니, 그가 느끼는 감각이란 그야말로 공포에 가까우리라.

보랏빛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 속에 비치는 것은 명백한 두려움이었으니,

나는 그의 어깨를 붙잡은 채 조용히 입을 열었다.

“제가 먼저 갑니다. 처음부터 공격하려 하지 마십시오. 먼저 상대가 어떤 지부터 파악해야 합니다.”

“아, 아닙니다. 저도 할 수 있습니다.”

“로만 경. 이건 장난이 아닙니다.”

싸늘한 시선이 내리꽂힌다.

이 상황을 단순히 검을 들었다고 해서 해결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는 그의 태도가 맘에 들지 않았다.

실전이었다. 저 도끼에 스치면 즉시 몸이 갈라져 죽을지도 몰랐다.

그런 상황에서 이렇게 긴장한 상태로 나선다니,

그가 죽는다면 과연 누가 책임을 질 것이란 말인가.

그와 같이 있었던 내가? 그런 것은 사절이었다.

허나, 이내 쓰게 웃어보였다. 이렇게 말했음에도 그의 눈에 보이는 것은 미약한 호승심이었다.

자기도 할 수 있다며, 무언가를 보여주려 하는 마음이 뻔히 비치는 그 눈에 옅게 한숨을 내쉬었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금 트롤을 바라보았다.

“...알아서 하십시오. 다만 힘들 것 같으면 뒤로 물러나셔야 합니다.”

“그 정도는 알고 있습니다. 이래봬도, 저도 익스퍼트니까요.”

이윽고 그의 검에서 푸른빛이 일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지니는 통상적인 마나의 색깔,

나와는 완전히 다른, 다른 이들이 내뿜는 마나의 색을 볼 때면 의문이 일곤 했다.

화르륵­

그러나 그런 생각은 지금 아무짝에도 쓸모없겠지.

상념을 지운다. 집중은 오로지 손에 쥔 검끝에 담는다.

이윽고 백색의 염열이 검에 타오르며, 어둠에 물들은 숲의 일부를 환히 비추기 시작했다.

쿠웅­

시선이 닿는다.

이글거리는 보랏빛의 눈동자가 내게 닿았을 때,

순간 창으로 심장이 꿰뚫리는 것만 같다는 느낌이 들어 숨을 토해내었다.

그 존재에서 뿜어져 나오는 압박감,

지금까지 만났던 그 어떠한 상대보다도 어려울 거란 생각에 근육이 수축하기 시작했다.

무릎을 굽힌다.

폐로 들어오는 공기를 근육이 빨아들여, 이내 낼 수 있는 최대한의 힘을 끌어낸다.

박동하는 심장은 그 힘을 받아들이고, 다시금 온 몸으로 그 힘을 보낸다.

한 호흡, 두 호흡. 찰나의 시간동안 이어진 그 호흡에 다리의 근육이 팽팽해졌을 때 쯤,

으적­

땅에 놓인 바위마저 바스라트리는 힘과 함께 몸이 앞으로 튀어나간다.

트롤을 바라보는 두 눈에 하얀 빛을 내며 검로가 그려지기 시작했다.

오른쪽 대각선, 다리 쪽의 근육을 노려야 할까?

이윽고 생각이 정해졌을 때, 나는 아델의 이름을 외치며 그 거대한 몸집을 지닌 트롤의 팔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로만 경!”

트롤이 채 반응하기도 전에 베어낸 탓일까, 당황한 트롤이 움찔거리며 몸을 뒤로 빼내었다.

벌려진 입에서 새어나오는 검은 연기를 바라보기도 잠시,

시선을 돌리자 저 멀리서 아델이 몸을 움직이는 모습이 보였다.

조금 더 빨리 움직여줄 수는 없을까, 내가 움직인 것과는 꽤나 다른 속도에 이를 악물었다.

저런 속도라면 방해만 될 뿐이었다. 차라리 그를 두고 왔으면 마음이라도 편했을 텐데.

저런 속도라면 트롤이 반응할 것이 뻔했다.

그 생각대로, 트롤이 아델의 공격을 포착했다. 어깨 근육이 꿈틀거린다.

팔꿈치가 뒤로 젖혀지고, 이윽고 뻗어나가는 팔을 나는 그저 지켜볼 따름이었다.

어차피 검으로 벤다한들 막을 수 있는 행동이 아니었다.

두꺼운 가죽은 그저 지금의 검으로는 옅은 상처만을 낼 뿐이었으니까.

“크악!”

퍼억­

이윽고 들려온 파공음에 한숨을 내뱉었다.

뼈가 부러지는 소리, 피가 튀기는 소리. 무언가가 날아가 나무에 부딪혀 그대로 바닥에 쓰러지는 소리.

눈을 질끈 감는다. 그리 신중히 움직이라 말했건만,

허나 다행인 점은 주먹에 맞아 아마 죽지는 않았으리란 것일까.

크르르­

트롤과 눈이 마주친다.

이지를 잃어 오직 피와 살점만을 탐하는 그 눈에 비치는 나 자신의 모습을 바라본다.

검을 들고 있는 그 모습이 퍽 기사 같아 보여서, 어쩐지 피식하고 웃음이 새어나왔다.

들고 있던 검을 땅바닥에 집어 던진다.

쉽게 벨 수 있는 피부가 아니었다. 공격이라도 먹혔으면 모를까,

이런 검으로 상대하다 부러지면 나만 곤란할 터였다. 품속에서 꺼낸 것은 손잡이만 덩그러니 놓인 검,

이윽고 다시금 염화가 솟구친다. 그림자 속에서 오로지 찬란히 빛나는 것은 빛이었으니,

이내 푸른 검신이 드러나 불꽃이 옮겨 붙기 시작했다.

주먹이 보인다. 근육의 꿈틀거림을 포착하며 발을 내딛는다.

이제부터 조금이라도 집중이 흐트러지면 다치는 것은 자신이겠지.

팔꿈치, 어깨, 손가락. 그리고 그 시선이, 허리의 움직임이, 골반의 놀림이 공격의 흐름을 보여준다.

백색의 염화가 불타오를수록 그 움직임이 선명하게 보여,

어느새 자신은 그 공격들을 똑바로 마주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입꼬리가 비틀린다.

손에 들린 검을 양손으로 쥔다. 박동하는 심장과 함께 거친 숨결을 내뱉는다.

도끼를 휘두름과 함께 붉은 궤적이 눈에 보였다.

허리를 숙여 피한 뒤, 이윽고 검을 휘둘렀다. 불꽃이 타오른다.

그 어느 때보다 화려하게 타올라 몸 전체를 뒤덮은 불길에 주변의 눈이 서서히 녹기 시작했다.

촤악­

트롤의 몸이 검에 닿아 피를 뿜어내었다.

금세 재생하리라 생각했건만, 의외로 더딘 재생에 눈이 가늘어진다.

아마도 내 마나가 그런 효과를 만든 것일까. 발걸음을 내딛는다.

낙엽을 밟으며, 나뭇가지를 부러트리며.

그렇게 다시금 내딛은 발에 눈이 뽀드득거리며 밟혔다. 그리고 다시 휘둘러지는 검.

새하얀 눈, 그 눈이 피에 붉게 물들 무렵.

검이 새하얀 선을 그려내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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