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6화 〉 눈이 붉게 물들 무렵(2)
* * *
부우우
나팔 소리가 들려오면, 왠지 모르게 가슴이 떨리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든다.
구름 한점 없는 하늘에 떠있는 해를 바라보다가,
이내 고개를 떨구자 보이는 건 이 주변을 빼곡히 메운 수백 개의 깃발들이었다.
저마다 가문의 문장이 새겨진 깃발을 든 채 도열한 기사들,
가문을 대표하여 나온 그들답게 화려한 갑주를 입은 모습에 웃음이 새어나왔다.
“저렇게 입으면 불편할 텐데.”
“기사님이 이상한 거라구요. 보통 이럴 때는 다들 멋있게 입고 싶어서 난리인데, 왜 항상 입던 걸 입으려 고집하시는 건지.”
“불편하잖아. 난 갑옷 같은 건 못 입겠더라.”
평소 입던 제복을 입은 것이 불만이었는지 입술을 삐죽이는 로페나에게 그리 말하자,
돌연 키득거리며 웃은 로페나가 내게 슬쩍 다가와 귓가에 대고 무어라 속삭이기 시작했다.
“근데, 어째 다들 기사님만 보고 있는 것 같지 않아요?”
“...대충 알고는 있어. 근데 티내지는 마. 이젠 이런 것도 슬슬 적응되는 참이거든.”
“인기 많아서 좋겠네요. 요즘 편지 뜸 했는데, 더 늘겠어요.”
어쩌면 좋을지도 모르겠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부담스러울 뿐이었다.
내가 그들하고 사귈 생각이 있는 것도 아니고,
이따금 쌓인 편지를 아이린이 발견할 때면 표정이 어쩐지 안 좋아지곤 했으니까.
이런 편지에 정신 팔리지 말고 호위에 집중하라는데,
편지 내용조차 잘 확인하지 않는 나로썬 억울할 따름이었다.
사냥제라 해서 기사들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기사들과 함께 따라온 가문의 여식들, 아이린도 여기에 있었으니 5대 가문의 대부분이 여기에 있을 터였다.
눈에 띄는 깃발이 있다면 당연하게도 그 5대 가문의 깃발이었으니,
이따금 보이는 사람들의 시선은 대부분 그 깃발 또는 내게 향해있었다.
물론 내게 향하는 시선 모두가 질척거리고 뜨거운 연심이 담긴 그런 것은 아니었다.
유리스의 대표로 나온 기사가 16살이란 어린 나이였기에 품는 호기심,
한편으로는 천재라 불리던 에반 프리드라는 기사가 처음 이렇게 사냥제에 모습을 드러냈으니 그 실력이 궁금하기도 할 터였다.
물론 기껏해야 동물을 잡는 곳에서 실력을 발휘할 일이 얼마나 되겠냐마는.
품속에 있는 검의 손잡이를 확인한 뒤, 로페나의 머리를 툭툭 두드리곤 슬쩍 웃어보였다.
이제 곧 봉화가 오르면 사냥제의 시작이었으니까, 슬슬 로페나도 돌아가야 하지 않겠는가.
“...머리 좀 두드리지 마세요. 저도 애가 아니라구요.”
“애지, 15살이면. 아가씨는 잘 계시지?"
"저 쪽 따로 준비된 건물 안에 계세요. 근데, 15살이 왜 애에요?"
"난 16살이니까."
그렇게 말하며 씨익 웃자, 로페나는 눈살을 한껏 찌푸리더니 이내 입술을 삐죽이며 투덜거리기 시작했다.
고작 한 살 차이 나는 거면서 텃새가 너무 심하다느니,
자기도 생일 지나면 16살인데 왜 그러는 건지 모르겠다느니.
다른 기사들한테는 이러지 않으면서 나한테 이러는 건 아마도 내가 편해서 그런 거겠지.
그런 로페나를 잠시 지켜보다가, 이내 들려온 나팔 소리에 로페나의 등을 떠밀었다.
이제 5분 뒤면 나팔이 한 번 더 울릴 테고, 그럼 봉화의 불이 붙여짐과 동시에 사냥제의 시작이었다.
“힘내요. 또 다쳐서 오지 말구요.”
“누가 보면 항상 다쳐서 오는 줄 알겠다.”
“다쳐서 왔잖아요. 업보라고 생각해요.”
“...그래, 고맙다.”
생각해보니 내가 검을 들었을 때마다 다쳤던 것 같긴 했다.
허나 암살자를 만났을 때는 내가 검을 처음 들었을 때니 그랬던 거고,
흑마법사는 예상치 못한 공격에 당했던 게 아니던가.
솔직히 말해 이번에도 다치면 내 실력에 대해 진지하게 의심해봐야 할지도 몰랐다.
재능이니 뭐니, 그런 게 있다한들 결국 다루는 사람의 몫이 아니던가.
로페나가 그렇게 자리에 뜨자, 얼마 지나지 않아 세 번째 나팔 소리가 들려왔다.
각자 들고 있던 깃발을 내리고, 준비해두었던 검을 들기 시작하자 이윽고 저 멀리서 우렁찬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반갑습니다 여러분, 올해 겨울에 열리는 사냥제를 이렇게 로만에서 맡게 되어 정말 기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단상에 올라선 한 청년,
얼핏 보면 나와 아마 한두 살 정도 차이나지 않을까 생각되는 미청년이 나타나자 사람들의 박수 세례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로만의 상징인 짙은 청록색의 머리카락, 그리고 보랏빛의 눈.
한때 검으로 모든 것을 평정했다는 세런 로만을 시조로 삼는 제국의 5대 가문 중의 하나인 검의 로만.
눈살이 찌푸려진다.
그도 그럴 것이 저 단상에 서있는 저 청년의 이름이 바로, 아이린의 약혼자인 아델 로만이었기 때문이었다.
아무렇지 않은 듯 시원스레 웃는 그였으나,
나중에 아이린에게 등을 돌려 그녀가 몰락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된 인물이 아니던가.
“제국의 안녕을 무너트리는 몬스터와 맹수들을 처리하고, 다시금 평화를 그리기 위해 열리는 이 사냥제를 다시금 축복하며. 지금부터 성화를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화르륵
이윽고 봉화에 불이 타오르기 시작하자 검을 쥔 기사들이 일제히 하늘을 향해 검을 들어올리기 시작했다.
제국의 상징인 태양, 그 태양을 향해 평화를 바치겠다는 일종의 의식이었기에 나 또한 검을 들어 올리자 이윽고 아델 로만이 베르뎅 산을 향해 검을 겨누었다.
하얀 검신이 영롱하게 빛나는 검, 그 검이 눈 덮인 산과 겹쳐져 모습을 감추었을 때.
아델 로만이 크게 소리치며 입을 열었다.
“에반젤리움에 광영을!”
쿵
기사들의 발걸음이 한 순간에 내딛어지자, 순간 땅이 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국을 대표하는 5대 가문과 더불어 수십 개의 유명 귀족 가문에서 온 기사들.
각자 별을 닮은 휘황찬란한 갑옷을 두른 채 베르뎅 산을 향해 뛰어가는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이내 나또한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손수건 더럽히지 말라 하셨으니까.”
손목에 걸린 손수건을 소매 속으로 조심스레 집어 넣으며.
#
뽀드득
발을 내딛을 때마다 들려오는 소리는 분명 귀를 즐겁게 했어야 할 터였다.
오직 겨울에만 들리는 이 청량한 소리, 이따금 무릎까지 오는 눈이 거슬리긴 했지만.
그렇다한들 기분 자체가 나쁘지 않은 건 사실이었다.
어렸을 때의 기억도 나고, 로페나와 눈싸움을 하던 것이 떠올라 입꼬리가 씰룩였으니까.
그래, 분명 혼자였으면 그랬을 게 분명했다.
내 옆에 어느새 다가와 시끄럽게 조잘거리는 이 한 명의 기사만 아니었더라면.
“에반 경, 이름은 익히 들어왔습니다. 이번에 흑마법사를 퇴치하셨더군요. 정말 제국과 이 로만이 큰 은혜를 입었다 할 수 있겠군요.”
“그렇습니까.”
“역시. 강한 기사는 과묵한 법이라더니. 행동거지 하나하나에 절도가 묻어나는 것 같습니다. 혹시 평소 어떻게 훈련하는 지 여쭤도 괜찮겠습니까?”
아까 단상 위의 엄숙함은 어디로 사라졌는지,
옆으로 다가와 떠드는 이 빌어먹을 기사를 잠깐 흘겨보다 이내 한숨을 내뱉으며 발걸음을 멈추었다.
어지간하면 마주치고 싶지 않았는데, 어떻게 나를 찾은 걸까.
“로만 경.”
“아델 경이라 불러도 됩니다.”
“...이제 그만 가주시면 안 됩니까?”
입에서 나오는 음성은 꽤나 차가웠다. 이렇게 같이 다니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당장 이렇게 다니다간 사냥감이 겹치지 않겠는가.
일부러 이 주위를 빙빙 도는 이유는 그와 떨어지기 위해서였는데,
장장 20분 동안 나를 따라다니는 바람에 짐승들이 점점 흩어져 점점 눈이 가늘어졌다.
어서 빨리 이 사람을 보내지 않는다면 괜스레 망신만 당하지 않겠는가.
솔직히 말해 그의 얼굴을 볼 때마다 살짝 짜증이 치미는 터라, 그리 오래 보고 싶지도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소설에서 아이린을 버리고 떠난 것이 아델 로만이 아니던가.
그런 사람을 그다지 신뢰하고 싶지도 않고, 이렇게 같이 다니며 시간을 버리고 싶지도 않았다.
가시가 잔뜩 돋은 태도로 대했음에도 아델의 표정에서 변화란 딱히 없었다.
그저 처음 만났을 때처럼 아무렇지 않게 미소 지을 뿐.
사냥제를 위해 나온 건지,아니면 다른 목적이 있는 건지.
여전히 바보처럼 웃고 있는 그의 속내를 도무지 알 수가 없어 작게 눈살을 찌푸릴 따름이었다.
아이린이 약혼자에 대해 불편하다 얘기한 것은 이런 점 때문일까.
하기야, 5대 가문의 적자인 그가 평범하리라 생각하진 않았는데.
마음 같아선 검이라도 휘둘러 쫓아내고 싶었으나,
그가 내게 적대적인 태도를 보낸 것도 아니었으니 무어라 할 수도 없었다.
자신을 향한 태도가 그리 좋지만은 않음을 깨달았는지, 쓰게 웃은 아델 로만이 이내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에반 경이라면 저와 잠시 대화를 나누더라도 충분히 우승할 수 있으리라 생각해서 온 건데, 아무래도 방해가 된 것 같군요. 어떻게 사과하면 되겠습니까? 여차하면 저희 가문에서 무언가 선물이라도 드릴 수 있는데 말이죠.”
“선물은 필요 없으니, 저 앞에 있을 갈림길에서 헤어지도록 하죠.”
“그걸 원하신다면...응당 그래야죠.”
이윽고 이어지는 대화는 없었다.
그저 눈이 밟혀 들리는 소리와, 간혹 몸에 부딪힌 나뭇가지가 부러지는 소리만 들려왔을 뿐.
그의 청록색 머리카락이 이따금 바람에 휘날릴 때면 괜스레 기분이 나빠져 눈살이 찌푸려진다.
간혹 그런 사람이 있지 않은가.
초면에, 대화조차 한 번 나눠본 적 없지만 그닥 좋은 인상을 받기 힘든 사람.
비록 아델 로만이라는 사람을 태어나 처음 본 건 아니었으나 지금 내 심정이 딱 그랬다.
제아무리 그 나름대로 날 살갑게 대하고 있다한들 어쩐지 연기를 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으니까.
이따금 반짝이는 보랏빛 눈에 담긴 것은 황혼이었다.
저물어가는 빛, 이토록 밝은 볕에서 그가 바라보고 있는 것은 도대체 무엇일까.
아이린이 감정을 숨기는 것이 어설프게 보일 만큼이나, 아델 로만의 생각을 읽어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아마도 5대 가문 중 하나가 흑마법사와 결탁했을 가능성이 크다.그게 아니라면, 유리스를 제외한 전부가 결탁했을 수도 있고.
공작이 말했던 것이 떠올라 귓가에 윙윙 거렸다.
사냥제를 조심하라는 공작의 말, 그리고 5대 가문과 흑마법사의 연관.
만약 로만이 흑마법사와 관련이 있는 것이라면.
지이잉
이윽고 내 앞에 서있던 아델의 검이 푸른빛을 발하기 시작했을 때,
저도 모르게 허리춤에 들린 검을 향해 손을 뻗었다.
이 앞에 느껴지는 짐승의 기척보다도 그의 움직임에 집중했던 탓일까,
급작스럽게 경계한 내 모습을 본 아델 로만이 이내 피식 웃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무얼 그리 놀라십니까?”
“...아무래도 늑대인 것 같군요. 제가 베겠습니다.”
“이왕 뽑은 검이니, 제가 베게 해주십시오. 저는 실력이 미욱한 터라 아직 짐승 말고는 상대하기 버겁거든요.”
여전히 미소 짓는 그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다 이내 고개를 끄덕이니,
아델이 이내 검을 휘둘러 코앞에 다가온 늑대를 베어내었다.
깔끔한 공격에 한 번에 허리가 끊긴 늑대가 이내 눈밭에 나뒹굴자,
천으로 검에 묻은 피를 닦아낸 아델이 가슴을 펴며 자랑스레 늑대를 가리켜보였다.
“어떻습니까. 그래도 봐줄 만 하지 않습니까?”
“로만가의 자제답군요.”
내가 자신을 경계했음을 눈치 채지 못한 것일까.
늑대의 목을 베어내어 자루에 넣은 그는 조금도 달라지지 않은 태도로 나를 대하고 있었다.
내가 늑대의 기척이 아닌 그가 검을 뽑은 것에 놀랐음을 못 본 거라면...
뭐, 차라리 다행이지 않은가. 지금 그와 사이가 나빠져 좋을 이유는 없을 테니까.
마음 같아서는 아이린과 그의 약혼 관계를 무르는 것이 좋을 거라 생각하고 있었지만.
마땅한 이유가 없는 이상 그런 일이 실현될 가능성은 극히 적었다.
그가 흑마법과 연관되어 있다면 이야기가 조금 다르겠으나 지금은 아무런 증거도 없지 않은가.
내가 칭찬한 것이 그리도 기뻤는지,
희희낙락한 기색을 띈 아델이 검을 검집에 집어 넣으며 엄지손가락을 작게 치켜세워 보였다.
“제가 에반 경만큼은 아니더라도, 나름 로만의 사람이니까요. 이 정도는 기본이죠.”
“...그렇습니까.”
참으로 속 편한 사람이구나. 하는 생각과 함께 한참을 걷자 보이는 것은 세갈래로 나뉘는 이 산의 유일한 갈림길이었다.
아델과 헤어지기로 한 곳이 저기였으니, 그또한 이제 헤어질 때가 되었음을 알았는지 아쉽다는 듯 옅게 미소지었다.
“아쉽네요. 더 나누고 싶은 이야기가 많았는데 말이죠.”
“......”
“그럼, 다음에 뵙도록 하죠. 아이린에게 들릴 때면 저와 검을 한 번 나눠줄 수 있겠습니까?”
“그러죠.”
내가 짧게 대답하자, 고개를 끄덕인 아델이 뒤돌아 한쪽 길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그렇게 그를 떠나보내고, 나 또한 사냥제를 위해 미리 파악해둔 짐승들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려 한 그 순간.
콰앙
산의 정상, 이 곳과 얼마 되지 않는 거리의 그 장소에서 난데없이 굉음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나무가 꺾이고 부서지는 소리, 바위가 쪼개지고 으깨지는 소리.
그리고 내 얼굴이 일그러진 것은, 그 소리 사이에 섞여 들려온 사람의 비명 소리 때문이었다.
“에반 경, 들으셨습니까!”
다른 길로 향했던 아델이 뛰어옴에도 내 시선은 여전히 산의 정상을 향해 있었다.
여전히 쌓여있는 눈, 하늘과 맞닿아 아직 그 순백의 빛을 잃지 않은 채 고요해 보이는 산의 정상이었건만.
어찌하여 흑마법의 기운이 느껴지는 것일까.
허리춤에 걸린 검을 쥔다. 마나가 심장을 타고 흐르며,
내 의지에 따라 몸 구석구석에 퍼져 흐르기 시작했다.
타오르는 백색의 불꽃, 이내 주변의 눈을 녹이는 불꽃이 피어오름과 동시에 땅을 박차고 내 몸이 쏜살같이 앞을 향했다.
공작이 조심하라 했던 것이 이 어둠일까.
아무래도, 확인해야 할 필요가 있어보였다.
#
“오는군.”
거칠고, 투박하고, 짙은 어둠속을 거니는 것처럼 낮은 목소리가 울려 퍼진다.
그 목소리가 울려퍼지는 공간, 사람의 두개골이 가득하고 동물들의 뼈와 채 마르지 않은 피가 흘러 바닥에 고였다.
흐리게 깔린 숲의 그림자가 빛을 좀먹는다.
더 이상 빛은 보이지 않았다. 나무에 가려져, 어둠에 가려져, 그림자에 가려져 보이는 것은 오로지 희미한 진혼이었다.
쿠웅
투레질하는 코에 걸린 고리가 잘게 떨렸다.
코를 타고 들어온 숨이 이내 빠져나가며 하얀 안개를 내뱉으며,
어둠 속에 흩어져 주변을 한기로 감싸기 시작했다.
하얀 숨결은 이내 어둠에 닿아 파랗게 빛나기 시작했다.
인광처럼, 어둠 속에서도 빛나는 숨결은 이내 주변에 맴돌며 한 일렁이는 빛에 닿았다.
촛불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 보랏빛의 불꽃은.
장막으로 덮은 듯 어둠을 띄는 이 그림자의 향연 속에서 저 홀로 빛나는 자색의 불꽃이 천천히 그 크기를 키워나가기 시작한다.
연기처럼, 불꽃처럼, 이 주변을 모두 덮는 화염처럼.
어둠 속에서 작게 일렁이던 불길은 이내 그림자를 집어삼켜 겁화가 되었다.
그오오
노란 지옥불처럼 타오르는 엄니가 하늘을 향했다.
벌려진 입에서 뱉어지는 고함은 노호였으며, 하늘을 찌르는 창천의 울부짖음이었다.
사람의 머리를 단숨에 으깰 정도의 힘을 지닌 손아귀에 집힌 도끼가 땅을 긁으며 기이한 소리를 내고,
그 소리에 주변에 있던 짐승들이 놀라 아래를 향해 도망치기 시작했다.
작은 발걸음이 모여 진동을 내고, 그 진동이 모여 산을 덮은 눈을 떨게 만든다.
자그마한 눈덩이가 굴러 산사태가 되니,
나비의 작은 날갯짓이 때로는 태풍을 부르는 것처럼 그 미약한 움직임들이 하나같이 커져 주변을 휩쓸었다.
어둠이 휘몰아친다.
북풍보다도 차갑고, 밤그늘보다도 어두운 어둠이 주변을 휘감아 빛을 집어 삼킨다.
보랏빛 죽음이 넘실거린다. 그 것이 의미하는 것은 생명의 종말이자, 희망의 절멸이니.
곧, 해가 달에 가려져 푸른 하늘이 어둠에 뒤덮이기 시작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