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3화 〉 눈이 오기 전에(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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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린 하늘을 바라보는 눈동자가 흔들린다.
가슴 속 깊이 스며들은 불안감이, 흐린 하늘이 이토록 불길하게 보이도록 하는 것일까.
가득 낀 먹구름에 해가 사라진지 오래였다.
아까 보았던 것과는 완전히 다른 흐린 날씨,
멀리서 울어대는 새 소리가 어쩐지 시끄럽게만 느껴져 무심코 창문을 닫는다.
찬바람이 더 이상 볼에 닿지 않자, 이내 방을 감돌던 따스한 기운이 몸을 감싸기 시작했다.
문득 입술이 달싹거리다 이내 다물린다.
걱정. 자신은 지금 걱정을 하고 있는 것일까.
혹여 에반이 돌아왔을 때 그가 더 이상 자신의 호위 기사가 아니라면.
어쩌면 자신은 그를 속박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의 재능이란 자신이 본 그 어떠한 기사보다도 뛰어났다.
제국의 기재라 불리는 황태자 또한 직접 보았으나, 에반과 비교하자면 극명한 차이가 있을 터였다.
아마 자신이 평생을 노력한다한들 그의 발치에 조차 닿을 수 없겠지.
제국에 마스터가 생긴다면 그건 에반의 자리일 것이 분명했다.
그가 가진 재능은, 그런 허황된 소리를 실현하게 할 수 있는 그런 것이었으니까.
그런 그가 단지 자신의 호위 기사로 남는 것을 과연 좋게 생각해도 옳은지에 대해 떠올리자, 괜스레 가슴이 답답해졌다.
흑마법사를 잡았다는 것은 단순히 넘길 일이 아니었다.
그가 일반 기사였다면 당장 기사단장의 직위를 얻는다 하더라도 이상하지 않을 일이었겠지.
허나 그는 호위 기사, 만약 그가 자신의 호위 기사로 쭉 남기를 택한다면.
에반은 스스로의 가능성을 저버리는 선택을 하게 되는 것일지도 몰랐다.
저는 당신의 호위 기사입니다.
에반이 자신에게 말했던 그 말의 뜻을 모르는 것이 아니었다.
제 얼굴에 드리워진 그늘을 보곤 마음을 알아차려, 걱정하지 말라고 그리 말한 것이겠지.
그래서 마음에 걸린다. 그가 원하지 않음에도 단순히 자신을 위해 호위 기사로 있는 것이라면, 자신은 과연 무어라 해야 하는 것일까.
“눈이 올 것 같네요.”
귓가에 들어온 목소리에 생각이 흐트러진다.
언제나 밝고 경쾌한 목소리에저도 모르게 고개를 들자 보이는 건 자신의 시녀였다.
“로페나.”
“창문 밖에 보고 계신 거 아니었어요? 제가 아까 들었는데, 오늘 첫눈이 올 거라 하더라구요.”
...눈.
오늘 날씨가 이렇게 흐렸던 것은 단지 눈이 내리기 때문이었던 건가.
다시 바라본 밖의 풍경은 아까처럼 삭막하지 않았다.
겨울에도 피는 꽃이 있었고, 아직 세상의 색은 전부 사라지지 않았다.
하얀색, 회색 또한 색이 아니던가.
단지, 그 것을 부정적으로 생각하기에 그토록 삭막하게 느꼈던 것일 뿐.
로페나가 창문을 열자, 겨울과는 어울리지 않는 물기 섞인 공기가 전해져 왔다.
정말로 눈이 오려는 것인지, 수분을 잔뜩 머금은 구름은 어느 때보다도 무거워 보였다.
“올해는 첫눈이 빨리 내리네요. 작년에는 사냥제 이후에나 열렸던 것 같은데.”
“...그러게.”
자신이 너무 심각하게 생각했던 걸지도 모른다.
눈이 오기 전이면 날이 흐려지는 게 당연한데도, 그것을 삭막하고 불길하게 생각하지 않았던가.
눈을 마음을 비추는 창이라는 말이 있었다.
자신이 이리 심란하기에, 눈에 보이는 것들을 그토록 부정적으로 바라보았던 것이 아닐까.
눈이 오고 나면 거짓말처럼 하늘은 갤 것이었다.
지금은 이렇게 햇빛 하나 보내주지 않는 먹구름이 가득했으나,
눈이 내린 뒤면 다시 푸른빛을 띨 것이 저 하늘이지 않은가.
에반의 생각을 지레짐작하는 것 또한 너무 이른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조금은 천천히, 마음에 여유를 두자.
눈이 오기 전에 하늘이 흐리듯, 지금 이토록 심란한 것도 그런 것일 터였다.
눈이 오면, 전부 사라질 그런 걱정.
마치 어린 아이처럼 창밖을 보며 눈을 반짝이는 로페나를 쳐다보다가, 이내 시선을 돌렸다.
저택 뒤쪽에 수북히 자라난 자작나무, 그리고 그 쪽에 있을 아버지와 에반을 떠올리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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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금 이성이 온전히 돌아오는 것엔 꽤나 시간이 걸렸다.
이 상황을 이해하는 것이 첫째, 내가 알던 것과는 판이하게 다른 공작의 태도를 이해하는 것이 두 번째 이유였다.
“이제 조금 이야기할 생각이 드는가? 꽤나 놀랐던 것 같군.”
“...꽤가 아니라, 정말 많이 놀랐습니다.”
무심코 가슴을 쓸어내리자, 공작은 피식 웃으며 내게 찻잔 하나를 건네주었다.
아이린이 평소에 즐겨마시던 다즐링과는 다른 검은색.
익숙한 향이 코를 찌르자 나도 모르게 흠칫하며 그 찻잔을 받아들었다.
“이건...”
“커피라 하더군. 최근에 제국에 들어온 차지. 알고 있나?”
어떻게 커피를 모르겠는가. 아마 이 소설 속 세상에서 이 차에 대해 가장 잘 알고 있을 사람이 나일 텐데.
익숙한 향을 맡자 저절로 마음이 편안해지는 듯 했다.
이 낯선 세계에서 느끼는 원래 세계의 편린.
잠시 커피를 마시며 마음을 진정시키자, 공작이 나를 바라보며 다시금 입을 열었다.
“...아이린은 잘 지내나.”
“지금은 잘 지내고 계신 것 같습니다.”
“지금은, 이라는 말은 그 전까지는 안 그랬다는 얘기군.”
이렇게 아이린의 안부를 묻는 것이 과연 마음에서 우러러 나온 말일까.
원래 알고 있던 정보들과 겹쳐 혼란이 일었지만, 분명한 건 그가 꽤나 씁쓸해 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자식에게 정을 주지 않는 아비, 오로지 철혈만을 강요하여 완벽한 가주로 아이린을 키워내려 했다는 소설 속의 이야기는.
그리고 내가 보았던 아이린의 그 음울진 모습들은.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일까.
한 차례 쓰게 웃은 공작은, 이내 눈을 지그시 감았다가 뜨며 나를 바라보았다.
아이린의 푸른 눈을 빼닮은 그의 눈이 내 눈과 마주쳤을 때, 그는 고개를 선선히 끄덕이며 말을 이어갔다.
“그대를 시험한 이유는 내가 할 말을 들을 자격이 있는지 알기 위해 한 것도 있지만, 과연 아이린의 호위 기사로써 적합한 이인지 알기 위해서였다.”
“...예.”
“아이린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 알고 있다. 내가 내 딸에게 무엇을 요구했는지, 그게 아이린에게 어떻게 다가왔는지. 이 저택의 사용인들이 아이린에게 무엇을 기대하는지. 전부 알고 있어.”
하고 싶은 말이 턱 밑까지 차올랐다.
그 것을 알고 있음에도 행동을 바꾸지 않았던 이유가 무엇인지,
당신의 그 행동이 훗날 어떤 사람을 만들어냈는지 과연 알고나 있냐며. 그렇게 말하고 싶었건만.
그 것을 알고도 그리 행동한 이유가 궁금해서, 나는 그저 입을 다물었다. 납득할 만한 이유를 듣고 싶었다. 그리고 공작 또한 내가 가만히 있는 이유를 알고 있는지, 이어 말을 내뱉었다.
“의문이 가득해 보이는군. 내가 어찌하여 그렇게 행동했는지 이유가 궁금한 건가?”
“그렇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하면 납득할 수 있겠는가. 아이린이 이 유리스의 유일한 장녀이기에, 앞으로 제국의 방패가 되어야 할 사람이기에. 이리 무거운 짐을 두고도 모른 척할 수밖에 없었다고 하면 납득하겠는가.”
그럴 수밖에 없었다니. 그 말에 눈살을 옅게 찌푸리자, 공작은 이해한다며 너털웃음을 지어보였다.
“5대 가문의 공작이라 하면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게 있지. 황제 바로 아래의 귀족, 언제나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며 자기 하고 싶은 대로 마음껏 살 수 있다 생각하지. 하지만, 그것과는 정반대야. 높은 자리에 있으면 그에 따르는 책임이 있는 법이지.”
“책임...말입니까.”
“그래, 책임. 늘 시선이 따라와. 이 자리에 있으면 자그마한 실수도 큰 책임처럼 보이기 마련이지. 하여 언제나 우리는 완벽해야 하네. 남들이 간혹 하는 실수조차 여기는 용납할 수 없어. 이 방패라는 자리가 그렇네. 내가 실수를 저지르면, 제국의 심장이 꿰뚫려.”
우중충한 색을 띄는 방 안에 푸른 눈이 일렁였다.
이 어이없는 상황에 대한 한탄,
이리 행동하는 자신에 대한 후회, 회한, 슬픔, 분노로 일그러진 그 두 눈은 어둠 속에서 맹렬히 떨리고 있었다.
“하여 아이린은 완벽해야 해. 이 자리에 올라설 수 있는 자격을 지닌 유일한 이니까. 설령 지금 힘들다 하더라도, 마음이란 것을 잃어버려 허무를 바라보는 사람이 될지라도. 하여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이제 납득을 하겠는가? 내가 자신의 딸에게 그리 대했던 이유를.”
“......”
그의 눈에서 허무를 읽을 수 있던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이미 아이린과 같은 삶을 한 번 살아왔기 때문에, 그녀와 같은 삶을 살아 이미 제 감정을 버렸기에 허무를 담고 있었던 것이었다.
자신의 책임을 지키려는 귀족은 흔치 않았다.
책임은 내팽개치고, 오로지 자신만의 이익을 위해 지위를 휘두르는 이도 많았으니까.
어쩌면 가롯 유리스의 모습에 대해 적혔던 소설 속의 그 구절은,
그에 대한 겉모습만이 적혀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눈에 담긴 것은, 분명히 자신의 행동에 대한 자책이었으니까.
만약 그에게 기댈 곳이 있었다면, 하다못해 자신을 이해해주고 옆에서 바라봐주는 이가 있었더라면.
아마 그의 인생이 지금과는 꽤나 다르지 않았을까.
철혈이라는 이름 속에 숨겨진 그의 모습은 그 누구보다도 뜨거운 격정을 품고 있는 이였다.
완벽해야 하는 자리. 그 어떤 사소한 실수조차 용납할 수 없는 자리였기에,
그는 아이린에게 자신과 같은 절차를 밟으라며 말할 수밖에 없었다.
설령 속마음은 그렇지 않더라도, 자신의 속마음은 영원한 비밀로 둔 채 그리 강요했음을.
이제야 깨달을 수 있었다.
“...다만, 한편으론 아이린이 나처럼 되지 않기를 바랐다.”
그리 말한 공작은 눈을 감았다. 무언가를 생각하듯, 조용히 숨을 내쉰 그가 다시금 입을 열었다.
“아이린이 한 여자 아이를 데려왔을 때, 나는 그 아이를 전속 시녀로 두는 것을 허락했지. 원래라면 같은 귀족이어야 가능했을 전속 시녀에 그 아이를 둔다면, 아이린이 조금이나마 마음을 기댈 수 있었을 테니까.
로페나의 이야기였다.
“은퇴하려던 노기사를 붙잡아 아이린의 호위 기사로 두었다. 마음이 따듯하여 늘 자신이 죽인 이들을 위해 성당에 가 기도하던 노기사라면, 아이린이 조금이나마 편히 대할 수 있었을 테니까.”
크리스 경의 이야기였다.
“허나 그가 고령인 만큼 호위 기사가 하나 더 필요했지. 하여 찾았다. 허나 아이린이 그 호위 기사들을 내치더군. 어쩌면 꽤나 오래 걸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어. 아이린은 크리스 경에게도, 로페나에게도 마음을 쉽사리 열지 않았으니까. 그 아이 또한 나처럼 될지도 모른다고 내심 각오했지.”
잠시 숨을 고른 그는, 이내 나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리고 그대가 왔지.”
“......”
“하루 이틀이면 얘기를 들을 수 없던 호위 기사였건만, 며칠이 지나도록 바뀌었다는 얘기를 들을 수가 없었지. 그렇게 계절이 바뀌고, 다시금 겨울이 왔네. 이제는 그대의 서임식이 코앞이란 것을 그대도 알고 있겠지?”
“...예.”
“아이린이 그대를 무도회에 파트너에 데려갔다는 말을 들었을 때, 나는 내심 웃었네. 드디어 찾은 것 같아서. 드디어 그 굳게 닫혀있던 마음을 조금이나마 열리는 것 같아서. 어쩌면 그 아이는 나와 같은 전철을 밟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만 해도 가슴이 벅차더군. 나와 같은 전철을 밟지 않아도 된다는 희망은, 사람의 마음을 이토록 간질이게 만든다는 걸 이제야 알았어.”
그는, 철혈이 아니었다.
어쩌면 이 세상 속에 존재하는 모든 이들이 그를 잘못 보고 있던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의 속에 든 것이 철혈이라면 철이란 것은 그 어떤 것보다도 부드러운 것이어야 했다.
그는 아버지였다. 그 누구보다도 그 이름에 잘 어울리는, 나는 가지지 못했던 아버지.
소름이 끼칠 만큼이나 반짝이는 푸른 눈을 마주하며, 나는 무거운 숨을 토해내었다.
로페나도, 그리고 크리스 경도. 아이린의 곁에서 있던 모든 이들은 결국 그가 맺어준 인연이었다.
허나 그럼에도 아이린은 비극을 맞이하지 않던가. 철혈의 주인이라 불리며, 그 차디찬 단두대에서 목을 잃지 않았던가.
“...이렇게 그대에게 말했지만, 앞으로도 내가 아이린을 대하는 태도는 변하지 않을 거야.”
공작은 쓰게 웃었다. 보는 이의 입안마저 쓰게 만들 만큼이나, 정말로 씁쓸히.
“나는 철혈이야. 누군가에게 유한 모습을 보일 수는 없어. 설령 그것이 자식일지라도, 나는 제국의 방패로써 오로지 제국만을 위하여야 한다. 하여 내 태도는 변하지 않을 거야. 아이린이 나를 원망하더라도, 설령 죽을 때까지 내게 앙심을 품고 저주하더라도. 나는 가롯 유리스여야만 해.”
“...각하.”
“사실 아까 그대에게 기사단장이 될 것이냐 물어본 것은, 자네가 아니라 대답해주길 바랐기 때문이야. 그대의 재능이 황태자보다도 나은 것을 어찌 모르겠는가. 나 또한 기사인데 말이야. 그대의 재능을 썩히고 싶지는 않지만, 당장 이 사람의 부탁이 한 없이 이기적으로 들릴 수도 있겠지만. 부탁할 사람이 그대밖에 없군.”
이 방이 어두운 이유, 어쩌면 그는 스스로를 어둠 속에 가두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스로 빛을 흉내 내지 않기 위해서.
창문을 없애고 그나마 남은 창문은 빼곡히 세워진 나무로 가린 채 해를 가린 이 모습이 꼭 가롯 유리스라는 사람을 표현한 것만 같았다.
철혈이라는, 제국의 방패라는 이름 아래에 자신의 감정을 숨긴다.
자식에게도 편히 대할 수 없는 자리,
아이린이 썼던 가면보다도 더욱 두터운 철가면을 쓴 것 같은 모습에 나는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 입이 열리고, 이내 잔잔한 음성이 들려올 때까지.
“아이린이 나처럼 되지 않도록 부탁하네."
자신처럼 되지 않도록 해달라며 부탁하는 그의 입꼬리가 부드럽게 휘었다.
허나 눈은 웃고 있지 않았다. 착잡한 심정이 그대로 묻어나는 그의 눈은 어찌 보면 울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듯 했다.
"...알겠습니다."
고개를 숙인다.
이미 각오했던 일, 그녀를 위하여 검을 든 그 순간부터 변하지 않을 결정이었다.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나는 그녀의 호위 기사일 테니까.
그런 나를 바라보는 공작의 표정은, 꽤나 편안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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