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판 속 악녀의 호위기사가 되었다-32화 (32/181)

〈 32화 〉 눈이 오기 전에(3)

* * *

그 여유를 만끽하는 것은 아주 잠깐일 뿐이었다.

아이린의 얼굴이 편안해지는 것조차 확인하지 못한 것은 아쉬웠지만,

문을 두드리며 들어온 로페나가 전해준 말은 나를 이 장소에 있을 수 없게 만들었으니까.

“기사님, 각하께서 만나자고 요청하셨습니다.”

“...아무래도 가봐야 할 것 같습니다.”

살짝 고개를 숙이며 아이린을 바라보자, 그녀는 나를 빤히 쳐다보다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공작이라, 사실 조금 떨리는 것도 사실이었다.

지금 부른 거면 붕대를 갈 시간도 없을 거란 생각이 들었지만,

어쩔 수 없으리라. 시간을 조금 지체했다간 어떤 눈초리를 받을 지 알 수 없을 테니까.

“가보세요. 로페나, 크리스 경을 부르렴.”

“네, 아가씨.”

의외로 더 이상 할 말이 없는지, 아이린은 내게 그저 고개 한 번을 까딱인 채 시선을 돌렸다.

무어라 해야 할까, 조금 섭섭하다고 느끼면 조금 과한 걸까.

허나 일단 공작을 만나는 것이 중요했으니, 방 밖으로 나오자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어쩐지 평소보다 조금 어두운 표정의 크리스 경을 보며 고개를 작게 숙이자,

크리스 경은 나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에반, 각하께서 너를 부르셨다.”

“알고 있습니다. 로페나에게 방금 들었거든요.”

“...뭐, 너무 긴장하지는 마라. 분위기가 조금 적응하긴 힘들어도 그리 나쁘신 분은 아니니까.”

“그렇습니까?”

허나 크리스 경은 무언가 맘에 들지 않는지,

한 차례 혀를 차곤 붕대가 감기지 않은 쪽의 어깨를 두드리며 입을 열었다.

“너무 쫄지는 말고. 무슨 일이 있더라도 그냥 넘기는 게 좋을 거야.”

“...알겠습니다.”

쫄지 말라니. 도대체 어떤 사람이길래 내게 이렇게 말하는 걸까.

나름 암살자와도 싸워봤고, 흑마법사와도 싸워봤는데 말이야.

허나 무슨 소리냐고 묻기엔 시간이 없는 터라 그냥 알겠다고 대답하자,

크리스 경은 걱정스런 눈빛으로 날 한 번 보더니 이내 한숨을 푹 내쉬며 나를 지나쳤다.

“그래, 힘내라.”

이 쯤 되면 공작이란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의문이 생길 정도였다.

아이린도 그렇고, 크리스 경도 그렇고 공작과 만난다니 갑자기 저리 걱정을 한단 말인가.

까악­

때마침 불길하게 울어대는 까마귀 소리에 눈살이 찌푸려졌다.

그토록 푸르던 하늘은 처음 보았을 때처럼 회색의 구름이 몰려와 다시금 회백색을 띄고 있었다.

그 아래에 그늘진 헐벗은 나무가 어째선지 꺼림직 하게 느껴지는 것은 왜 일까.

꼭 공작을 만나는 것이 내게 불길한 무언가라도 되는 것 같지 않은가.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을 그렇게 멍하니 바라보다가, 이내 시선을 돌려 복도를 걷기 시작했다.

그저, 기분 탓일 터였다.

#

공작이 있는 곳은 이 저택의 최상층이었다.

3개의 층으로 나뉜 이 저택 중에서도 가장 구석,

가장 넓은 공간을 차지하는 공작이 있는 곳이란 다른 곳과는 달리 햇빛이 잘 스며들지 않는 곳이었다.

저택 뒤쪽에 가득히 심어져 있던 나무들, 그 나무는 아마 공작이 있는 곳의 햇빛을 가리기 위함일까.

분명 아까 본 창밖의 풍경은 낮이었건만, 이 복도만큼 음산함을 숨김없이 내비치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일렁이는 촛불이 묘한 감상을 전해준다.

도대체이렇게 어둡게 있을 필요가 무엇이 있을까. 머릿속에서 여러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햇빛을 구태여 피할 이유. 유치하지만 공작이 사실은 벰파이어 비슷한 것이 아닐까, 했지만.

이 세상 속에 존재하는 생물 중 햇빛을 두려워하는 존재는 없었다.

그럼 정말 그냥 햇빛을 싫어하는 것일까. 나를 이 곳까지 안내해준 집사에게 물었지만,

집사는 그저 고개를 가로저을 뿐 무어라 다른 대답을 주진 않았다.

심지어 바닥도 이 고급 진 저택에 걸맞지 않는 초라한 목재라,

밟을 때마다 삐걱거리는 소리가 울려 여간 신경 쓰이는 것이 아니었다.

다른 곳은 하나 같이 입이 떡 벌어지는 고가의 자재를 사용했으면서,

어찌하여 공작 자신이 머무는 이 공간을 이렇게 초라하게 꾸며둔 것일까.

어울리지 않게 검소한 성격을 지닌 것일지도 몰랐다. 허나 상념은 이내 흩어졌다.

희미한 회색과 검정색이 어우러져, 그림자로 가득 찬 이 공간 속에서 문 하나가 보였기 때문이었다.

초라한 복도와는 달리 유리스의 문양이 새겨진 고풍스러운 문을 바라보자,

옆에 있던 집사가 고개를 꾸벅 숙이곤 이내 저 홀로 물러났다.

“...그.”

살짝 손을 뻗었지만, 듣지 못했는지 그대로 멀리 가버린 집사를 바라보다 이내 쓰게 웃었다.

이렇게 두고 가면 무얼 어쩌라는 건지. 허공에 들린 손이 처량하게 떨어졌다.

잠시 눈을 지그시 감았다가, 숨을 크게 들이쉬곤 문을 바라보았다.

유리스의 문양인 가시 방패가 새겨진 곳 아래에는 손잡이 하나가 달려 있었다.

제국을 수호하는 신수 중 하나인 드래곤의 아가리 속에 달린 손잡이.

철컥­

손을 살짝 가져다 댔을 뿐인데, 생각했던 것보다도 큰 소리가 나 몸을 움찔거리자 문 너머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중후하고, 듣는 이의 가슴을 철렁이게 만들 만큼이나 낮은 목소리.

꼭 이 어두운 복도와 어울리는 것 같은 목소리가 들려옴에 입을 열어 대답했다.

“에반 프리드입니다. 저를 부르셨다 들었습니다.”

“들어오도록.”

그리고 문이 열린다. 문고리를 잡고, 밀어 여는 이 순간이 이토록 길게 느껴지는 이유가 무엇일까.

그리고 문 너머에서 새어나오는 분위기에. 내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가기 시작했다.

복도도 어둡다고 생각했는데, 그 복도보다도 더욱 질척이고 암울한 심연이 이 곳에 있었다.

마치 야수의 아가리 속에 들어오면 이런 기분이라 생각하면 되지 않을까.

당장이라도 온 몸을 찌를 듯 사방에서 느껴지는 살기에 순간 검이 있는 허리춤에 손이 움직였다.

무거운 숨을 토해낸다. 당장이라도 나를 향해 움직일 것 같은 기사들의 갑주가 이 방의 벽을 빼곡히 메우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은빛의 갑주가 반짝이는 그 광경에 눈살이 찌푸려지고,

이내 그 어둠 속에서 넘실거리는 푸른 눈과 마주한다.

심해 속에서 반짝이는 아귀의 눈빛이 이런 것일지도 몰랐다.

나를 삼키려는 어둠, 그 어둠 속에서 유일하게 여유를 지닌 포식자.

자신을 강렬하게 바라보는 그 두 눈에 이성을 되찾는다.

그제야 크리스 경이 말했던 ‘쫄지 마라’라는 말의 의미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이 공작저의 주인, 유리스의 공작이자 제국의 5대 가문 중 한 축을 이끄는 수장, 제국의 방패.

가롯 유리스라는 사람이 지닌 기세란, 그 위압감이란 내가 쉬이 받아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당장이라도 목을 베어 넘길 것 같은 살기에 숨을 고르고, 이내 거칠게 내뱉으며 그 푸른 빛과 시선을 마주쳤다.

아이린이 눈에 담고 있는 것이 여름마저 얼어붙게 할 한기라면, 가롯 유리스의 눈에 담긴 것은 허무였다.

그 무엇도 담고 있지 않았다. 오로지 자신의 앞에 있는 이를 응시할 뿐,

그 눈동자에 담긴 의미란 그 어떠한 것도 찾아볼 수 없었다.

이 방에 들어온 뒤에 느낀 분위기는 그 때문이었을까. 태어나 처음으로 허무라는 것을 마주했기에,

그 이해할 수 없는 것에 두려움을 느낀 것일지도 몰랐다.

허나 버텨낸다.

이대로 저 눈빛을 받아내지 못했다간, 그저 자신은 여기까지가 한계라며 선을 긋는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만약 이 분위기가,공작이 자신을 시험하는 것이라면.

마나를 끌어올린다. 혈관을 타고 피어오르는 마나가 이내 몸을 잠식하기 시작했다.

몸 깊숙이 파고든 어둠을 몰아내고, 이내 몸에서 백색의 염화가 피어올랐다.

그리고 마침내 몸을 감싸던 위압감을 떨쳐냈을 때, 귓가에 다시금 목소리가 들려왔다.

“훌륭하군.”

그 한마디에, 이 방을 덮고 있던 어둠이 순식간에 걷어지는 듯 했다.

한치 앞도 보이지 않던 어둠이 한순간에 사라지는 것을 멍하니 바라보기도 잠시,

온전히 모습을 드러낸 공작의 얼굴을 바라보며 옅게 눈살을 찌푸렸다.

꼭 매를 의인화 시킨다면 이런 모습일까.

제국을 수호하는 방패란 별호와는 달리 날카로운 눈매가 돋보였고,

턱밑까지 깔끔하게 정돈된 수염은 그의 성격을 짐작할 수 있게 만들었다.

이 어둠과 두른 것처럼 보이는 검은 색의 제복,

그 위에 있는 옷깃을 매만진 공작은 이내 나를 바라보며 말을 이어가기 시작했다.

“반갑군. 내 딸의 호위 기사. 다쳤다고 들었는데, 몸은 괜찮은가?”

“...예. 상처는 다 아물었습니다.”

일렁이는 촛불에 내 붕대를 본 그가 지그시 나를 바라보더니, 고개를 한 차례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거기 앉아도 좋네. 오늘 그대를 불러 할 말이 꽤나 많으니까. 게다가 그대에게 하고 싶은 말도 있었고.”

하고 싶은 말이라. 내게 치하를 하겠다는 얘기로 들리기도 했지만, 어쩐지 그 것과는 다른 얘기란 생각이 들었다.

치하가 아니라, 근본적으로 완전히 다른 이야기.

허나 내 앞에 서있는 것은 공작이었으니, 나는 그저 고개를 살짝 숙여 보이며 그가 가리킨 소파에 앉을 따름이었다.

“조금 당황한 눈치더군. 내가 그대를 시험하고자 했다는 건 벌써 눈치 챘겠지.”

“네.”

그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이유로 그런 것인지는 몰라도, 그가 나의 무언가를 시험해보려 했음은 분명했으니까.

아까의 그 어둠, 지금에서야 깨달은 것이지만 그건 마나 같은 것이 아니었다.

그의 위압감또한 있었으나, 이 방 안을 채웠던 어둠은 분명 내가 어제 겪었던 흑마법사가 내뿜은 것과 비슷한 기운.

달과 별을 가렸던 그 어둠과 비슷하지 않던가.

“흑마법사가 내뿜는 기운이 아닙니까.”

“...그래. 확실히 흑마법사를 상대한 건 맞는 것 같군. 방금 내가 내뿜은 건 흑마법사에게서 추출한 마나의 일부다. 이렇게 포션 통 안에 들어있어서, 마개를 열면 그대로 내뿜을 수 있지.”

잠시 내게 검은 안개가 들어있는 플라스크를 내보인 그는 그 병을 탁자에 내려놓으며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30년 전, 흑마법사가 제국을 덮쳤을 때 그들이 사용하는 마나를 우리는 ‘어둠’이라고 불렀네. 그럼 그 어둠을 몰아내는 방법이 무엇이 있을 거라 생각하나?”

“...마나를 사용하면­”

“아니, 틀려. 이 어둠을 몰아낼 방법은 마나를 사용하는 것이 아니야. 성직자에게 도움을 받거나, 아니면 특별한 마나를 지닌 이가 마나를 사용하는 것뿐이지.”

잠시 숨을 고른 그는, 이내 나를 응시한 채 다시금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것은 가득 찬 격정이었다.

무언가를 향해 분노한다기보다는, 어떤 신비한 것을 발견한 이가 품는 희열에 가까운 격정.

그가 말하는 특별한 마나란, 혹여 내가 지닌 이 백색의 마나일까.

그 예상이 맞았는지, 그의 손가락은 나를 가리키고 있었다.

“그대가 지닌 마나는 어둠을 몰아낸다. 마치 성기사가 지니는 신성과도 같아. 어떻게 그런 마나를 지닌 것인지는 몰라도, 그대의 힘은 이 유리스에 분명히 도움이 된다. 어쩌면 훗날 이 제국을 수호하는 방패의 최선봉에 그대가 있을 지도 모르지.”

“그렇습니까.”

“나는 말을 빙빙 돌려 하는 성격이 아니다. 인재를 발견하면 언제나 유리스의 일부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단지 호위 기사로 썩힐 재능이 아님을 그대가 더 잘 알고 있지 않은가.”

가슴 속 한 줄기 불안감이 피어오른다. 그가 말하고 있는 것이 내포한 의미를 어찌하여 모를까.

호위 기사로 썩힐 재능이 아니라는 말, 그 것이 의미하고 있는 건 분명히.

“유리스의 기사단에 들어와라. 아이린의 호위 기사가 아닌, 철혈의 일부가 되어라.”

“...아가씨의 호위 기사 또한 철혈의 일부입니다.”

내가 그리 답하자, 공작은 이내 강하게 고개를 가로저으며 입을 열었다.

“아니, 아이린은 아이린일 뿐이야. 아직 그 아이는 철혈도 유리스의 주인도 아니지. 아직 어리고, 미숙하고, 무엇하나 완벽히 이루어내지 못했어. 그런 아이의 호위 기사가 되는 것 보다는­”

“각하.”

눈빛이 스산해진다. 아이린에 대한 험담을 들어서 일까.

아니면 그녀의 아버지라는 사람이 자신의 딸을 이토록 하찮게 취급하고 있는 것이 어이없어서 일까.

어쩌면 둘 다일지도 모르겠다. 잠깐이나마 호의를 품었던 이 두 눈에 한기가 일기 시작한 것은.

그는 아버지도, 유리스의 주인에도 걸 맞는 이가 아니었다.

적어도 아이린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조금이라도 관심을 가졌다면 저렇게 말하지 않았을 터였다.

이 공작저에서 그녀가 해왔던 일이 무엇임을 알았더라면 어리고 미숙하다 하지 않았을 터였다.

그저 자신 앞에 있는 기사 한 명에게 눈이 팔려,

자신의 혈육조차 깎아내리는 이에게 충성을 바칠 수 있는 이가 이 세상 어디에 있을까.

그의 모습에서 내 부모가 비치는 듯 했다.

자식을 자식이라 여기는 것이 아닌, 그저 목적을 위한 수단 중 하나로 여기는 모습.

유리스를 위하는 마음? 그 것 하나만큼은 잘 알 것 같았다. 허나 그 뿐이었다.

이미 각오한 일이었고, 이미 생각했던 말이었지만.

그에게 내뱉어지는 말은 내가 상상했던 것보다도 더욱 싸늘했다.

“거절하겠습니다.”

“...무엇을.”

“저는 아가씨의 호위 기사입니다.”

푸른 눈동자가 일렁인다. 허나 마음의 변화는 조금도 있지 않았다.

아이린의 눈이 일렁일 때면 요동치는 가슴이었건만, 그의 변화에는 아무렇지도 않음이 우스워서.

그저 자신을 응시하는 두 눈을 똑바로 마주한다.

“내 제안을 거절하는 것인가?”

“네.”

“내가 어떠한 사람인지 잘 모르는 건가. 아니면, 유리스의 기사가 되는 것보다 아이린의 호위 기사를 더욱 영광스럽게 생각하는 것인가?”

“호위 기사라는 자리를 영광스럽게 생각합니다.”

“...기사가 되면 그대가 생각치도 못하는 영예를 얻게 될 거야. 그대의 재능이라면 어쩌면 기사단장에 오를지도 모르지. 최연소, 15살에 기사단장이라니.”

한껏 과장스럽게 팔을 벌린 그가 나를 바라보았으나, 나는 그저 무표정한 얼굴로 그를 바라볼 따름이었다.

내 생각이 변할 일은 없었다. 그가 앞으로 무슨 말을 하든, 설령 내 앞에서 무릎을 꿇고 빈다 한들.

그런 내 마음을 알아차린 것일까.

나를 바라보던 그 두 눈에서 호의가 사라졌다.

허무 속에서 일던 격정이 사라져, 순간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푸른 두 눈이 싸늘하게 굳기 시작했다.

다시금 위압감이 나를 감싼다. 어깨를 억눌러, 내 몸을 땅에 붙일 것만 같은 압력에 이를 악물었다.

"생각에 여전히 변함이 없는가."

"...예."

악물린 잇새를 비집고 나온 대답또한 여전하자, 나를 바라보는 시선에 싸늘함이 더해진다.

차가웠다. 아이린이 나를 바라볼 때보다 더욱.

혹한이 살을 파고들어 뼈에 사무치는 것 같은 고통에 부릅뜬 두 눈에 실핏줄이 돋아오르는 감각이 전해졌다.

어쩌면 나를 죽이려할 지도 몰랐다.

자신의 제안을 거절한 이, 설령 아이린의 호위 기사라 할 지라도 나를 죽일 지 모른 다는 생각에 심장이 박동하기 시작했다.

마나를 끌어올려야 할까. 허나 지금 여기서 검을 든다면 나는, 아니 아이린은­

생각이 복잡해지기도 잠시, 이내 나를 옥죄이던 모든 중압감이 거짓말처럼 사라진다.

어째서?

어쩌면, 이미 나는 죽은 것일까.

초점이 돌아오고, 이내 앞을 바라보자 여전히 나를 보고 있는 공작의 얼굴이 보였다.

매처럼 날카로운 두 눈은 내게 향했지만, 더 이상 싸늘하지 않았다.

내가 그를 만난 뒤 보았던 그 어떠한 호의 보다도 더욱 커다란 호의가 담긴 눈.

매우 흡족한 듯, 옅은 미소까지 띄고 있는 공작이 이내 천천히 입을 열기 시작했다.

"합격."

내가 지금 무엇을 들은 것일까.

멍하니 그를 바라본다. 합격이라니, 설마 그럼 여태껏 그가 내게 물어본 이 모든 제안이.

"아이린이 오랜만에 좋은 호위 기사를 찾았군 그래. 차기 가주라면 이런 인재를 알아보는 눈 또한 필요하지."

"...설마."

"그래, 그대를 시험해 보았다. 그대가 정녕 아이린의 호위 기사로 어울리는 이인지. 앞으로 내가 할 말을 들을 자격이 있는 이인지. 크리스 경이 그토록 칭찬하던 기사가, 과연 진실로 그럴지."

흡족한 미소를 지은 그는, 그 푸른 눈동자를 반짝인 채 미소를 지어보였다.

"이제 진짜 얘기를 시작해도 좋을 것 같군. 에반 경. 그렇지 않은가?"

그를 바라보는 눈이 순간 크게 뜨인다.

철혈이라는 이름에 완벽히 부합하는 이, 유리스의 방패로 알려진 그의 모습과는 한참 달랐다.

퍽 익살스러워 보이는 미소를 짓는 그의 모습은, 내가 알던 것과는 너무도 다르지 않은가.

어쩌면, 크리스 경이 말했던 '무슨 일이 있어도 놀라지 말라'라는 것이 이런 걸 얘기한 것일까.

여전히 나를 바라보는 공작을 잠시 쳐다보다가, 이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숙여 보였다.

* * *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