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화 〉 눈이 오기 전에(2)
* * *
귓불이 뜨거워진다.
방금 잡아당겼던 입꼬리가 당기는 것만 같아서, 파르르 떨리는 입꼬리를 손으로 매만지며 애써 시선을 돌렸다.
도대체, 하필이면 그 때에 문을 열고 들어온단 말인가.
허나 그를 탓할 수는 없었다. 그저 자신이 충동적으로 한 행동이 들켰을 뿐이니까.
이 공간 속에서 흐르는 것은 오직 어색한 기류뿐이었다.
자신을 힐끔 바라보는 에반을 노려보다가, 이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떨구었다.
자신을 무어라 생각할까. 거울을 바라보며 웃는 걸 연습하는 경박한 이라 생각하지는 않을지.
허나 이게 전부 에반의 탓이 아니던가.
선물로 웃어줬으면 한다는 말에 그저 한 번 고려해봤던 건데,
혹시 자신이 평소에 너무 차가운 표정일 짓고 있는 것이 아닐까해서 거울을 본 것 뿐인데.
“...하아.”
허나 무어라 할 수는 없어서, 그저 자신을 멀뚱히 바라보는 에반을 지그시 쳐다볼 뿐이었다.
바싹 마른입 안으로 들어오는 차의 향은 썼다. 가시로 만들어진 방석 위에 앉아있다면 이런 기분일까.
허나 자신의 호위 기사인 그를 나가라 할 수도 없는 터라, 고개를 돌려 시선을 창밖으로 두었다.
짹짹
창문 밖에서 지저귀는 새마저 자신을 비웃는 것 같다는 생각에 눈살이 찌푸려진다.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제 호위 기사가 원망스러울 따름이었다.
차라리 다른 이야기라도 하면 좋으련만, 그저 자신을 바라보는 저 녹안이 이렇게 싫은 것이 얼마만인지.
“차라리 그냥 웃지 그래요.”
“...하하.”
눈을 가늘게 뜬 채 쳐다보자, 에반은 시선을 피해 고개를 돌리곤 멋쩍게 웃어 보였다.
그냥 웃기라도 하면 부끄럽고 말지, 저를 볼 때면 씰룩이는 입꼬리가 거슬려 저도 모르게 입에서 퉁명스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냥, 웃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바라는 소원이 있다는 그 말에 귀를 기울였다.
자신을, 그리고 유리스를 위해 상처까지 입어 가며 흑마법사와 싸운 그에게 주지 못할 것은 아무것도 없을 터였기에.
분명히 어떠한 것이라도 들어주려 했는데.
그런 에반이 자신에게 바란 것은 그저 웃길 바란다는 김빠지는 소리가 아니던가.
앞으로는 그 얼굴에 그늘이 지지 않았으면 합니다. 언제나 어깨에 있는 그 책임을 내려놓고, 한 번이라도 좋으니 활짝 웃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 말은, 자신을 돌아보게끔 만들었다.
다른 이 앞에서 어떤 표정을 짓고 있었길래 에반이 그런 말을 한 것일까.
늘 감정을 숨기며 살아왔기에 표정을 숨기는 것에는 자신이 있었다.
슬프더라도, 기쁘더라도 늘 무감한 표정으로. 잘 세공된 인형처럼 있는 것에 재주가 있지 않았던가.
물론 에반을 만난 뒤로는 표정이 많이 풀어졌음을 느끼긴 했다.
가끔 거울을 볼 때면 차갑게만 느껴졌던 시선 속에는 온기가 감돌았고,
로페나또한 저를 바라보며 요즘 기분이 좋아 보인다고 말했으니까.
하여 자신이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 신경 쓰고 있진 않았는데.
그가 내뱉은 말이 계속해서 가슴을 두드리는 것만 같았다.
적어도 그에게는 나름 감정을 숨기고 있지 않다고 생각했건만, 자신은 여전히 그를 차갑게 대하고 있던 것일까.
만약 그리 생각하여 자신에게 그런 선물을 바란 것이라면,
적어도 한 번 즈음은 웃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 나쁘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어깨에 있는 책임을 내려놓고, 얼굴에 드리운 그늘이 사라진다, 라.
그 말을 떠올릴 때면 어쩐지 가슴이 간질 거렸다.
자신에게 그런 말을 하는 이는 이 공작저에서 오직 에반 하나 뿐이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그런 말을 하는 녹안이 눈에 거슬려서일까.
늘 예쁘게도 반짝이는 그 눈이 아직도 눈앞에 아른거리고 있었다.
이 삭막한 겨울에서도 봄을 비추는 그의 눈이란, 자신을 끊임없이 심란하게 만들었다.
“그런데...정말 제가 한 말 때문에 그리 하신 겁니까?”
“......”
눈치도 없지.
평소에는 자신의 마음을 그리 잘도 알아차리는 그가 이렇게나 비수로 제 가슴을 쿡쿡 찔러옴에 헛웃음이 새어나왔다.
그토록 아름답게 보이던 그의 용모가 얄밉게만 느껴졌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달려들어 그 입을 틀어막고 싶었지만, 그리 할 수 없기에 그저 눈을 가늘게 뜰 뿐이었다.
그의 말 때문에 했냐 묻는다면, 긍정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소원이랍시고 한 말이 자신을 이렇게 신경쓰이게 만드는데, 어찌하여 그 말을 무시할 수 있을까.
거울을 보았다. 나름대로 웃는 연습을 해보았을 뿐이었다.
생일의 선물이라며 그 것을 원하는데, 한 번 웃어주지도 못할 만큼 자신은 박정한 사람이 아니었다.
물론 의식하며 웃는 것은 처음이라 어색하긴 했지만, 시간을 들이자 어느 정도 나아지는 듯 했다.
조금 더 연습했으면 자연스럽게 웃을 수 있었을지도 모르리라.
허나 모든 것이 산산조각 났다. 거울을 보며 입꼬리를 잡아당기는 그 모습을 들킨 그 순간에.
이미 자신의 수치심이 한계까지 치솟아 올랐다.
“나가줄 수 있나요?”
“아쉽게도 그건 힘들 것 같습니다.”
“오늘은 쉬도록 하세요. 크리스 경이 대신 있도록 할 테니까요.”
“하고 싶은 말도 있어서 말이죠.”
“...에반.”
어째서 저렇게 능글맞아 진 건지, 처음 만났을 때부터 이상하다 여기긴 했지만.
그는 자신을 상대하는 법을 퍽 잘 알고 있었다. 저렇게 생글생글 웃는 이에게 화를 낼 수도 없지 않은가.
얄미웠지만, 그리 싫게 느껴지지 않아 작게 한숨을 내뱉는다.
“하고 싶은 말이 뭐죠?”
“아까 무기 상단에서 받은 검을 받았습니다. 그 것에 대해 감사 인사를 전하고 싶어서 말입니다.”
“...감사 인사를 전할 필요는 없어요. 검이 필요하다 해서 사준 것뿐이니까요.”
생일 선물이라 생각하며 사주긴 했지만, 이렇게 한 번에 많은 것들을 샀으니 선물이라 하기엔 조금 민망한 부분도 있었다.
그에게만 주는 것도 아니고, 다른 기사들에게도 주게 되는 꼴이 아닌가.
선물, 그 단어에 생각이 닿자 떠오른 것은 그가 언급했던 그 민망한 소원이었다.
얼굴에 피어오르는 열기를 숨기고자 작게 고개를 숙인다.
마른 얼굴을 쓸어내리기도 잠시, 귓가에 일렁이는 에반의 목소리에 입술을 짓씹었다.
차라리 혼자 있었으면 무어라도 할 텐데, 이렇게 같이 있으면 무엇 하나 할 수 없지 않은가.
마음 같아선 당장 이불이라도 발로 걷어차고 싶었다.
가슴 깊숙이 치솟아 오르는 이 수치심, 호위 기사의 얼굴을 볼 때마다 괜스레 더워지는 것 같아 하릴 없이 부채질만 할 따름이었다.
“괜찮으십니까?”
“...내가 괜찮아 보이나요, 지금?”
“아니요.”
여전히 웃는 에반의 얼굴을 노려보다가, 이내 옅게 한숨을 내뱉는다.
오늘따라 제 호위 기사의 장난기가 많지 않은가. 어제도 미묘하게 태도가 조금 달라지는 것 같더니만,
저를 바라보는 녹안이 호선을 그릴 때면 절로 눈살이 찌푸려졌다.
싫다기보다는, 어쩐지 가슴이 답답해지는 것만 같아서.
그런 그를 바라보다가, 이내 어깨에 둘러진 붕대에 시선이 닿는다.
빨갛게 물든 붕대, 아직 갈지 않은 것일까. 저렇게 놔두나간 상처가 감염될지도 모를 텐데.
그 붕대를 볼 때면 자연스레 마음이 불편해진다.
달마저 보이지 않던 어둠 속에서, 저 홀로 흑마법사와 싸웠을 그를 생각할 때면.
싱숭생숭해지는 마음에 눈살이 찌푸려졌다.
흑마법이라는 것을 본 적은 없었으나, 일반 적인 마법과는 달리 차원이 다른 고통을 준다 알려져 있었다.
제아무리 그가 약한 흑마법사라 한들 아프지 않을 리는 없을 터.
그 고통을 참아내며 제게 고개를 숙이던 그 모습이 자꾸만 그에게 투영되는 것 같아 저도 모르게 시선을 돌렸다.
“...붕대 좀 갈아요.”
“아, 조금 있다가 갈려 했습니다. 공작님을 뵈어야 하니까요.”
그 말에 눈이 가늘게 뜨인다. 공작을 뵌다니, 자신의 아버지를 만난다는 얘기가 아니던가.
순간 불안한 마음이 스쳐갔으나 이내 고개를 저으며 털어내었다.
아마도 흑마법사와 관련된 얘기를 하려는 것이겠지. 허나 너무 이르지 않은가.
그의 몸이 회복되는 것을 기다렸다가 만나도 될 터인데, 어째서 그리 급하게 만나려 하는 건지.
...아니. 냉정하게 생각하면, 제 아버지의 판단이 옳을 터였다.
흑마법사는 제국을 위협하던 존재, 아무리 그 수준이 낮았다한들 흑마법사와 관련된 것을 빨리 알아내는 것이 옳겠지.
이번 습격으로 끝날 일이 아니라는 것즈음 누구도 예상할 수 있었다. 앞으로, 흑마법사와의 접점은 계속해서 많아지겠지.
그런 부분에서 이번 에반의 활약은 그 어떤 것보다도 중요한 것이었다.
단지 흑마법사를 퇴치한 것뿐만 아니라 흑마법사가 만들어낸 질병에 대해 백신을 개발할 수 있었으니까.
어쩌면 그에 대한 치하만이 아니라, 그의 직위에도 변화가 있을지 몰랐다.
만약, 이번 일로 그가 자신의 호위 기사가 아니게 된다면.
가슴이 순간 쿵, 하고 내려앉는 것만 같았다.
입 안에 있는 부드러운 살을 씹으며, 그 비린 맛을 느낌에 눈살을 찌푸렸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자신은 앞으로 어떡해야 하지? 비로소 마음을 놓을 수 있는 이를 찾았다.
자신의 그늘을 알아보곤, 그 것을 걷어내려 자신을 위해 웃어주는 이가 이렇게 자신을 찾아왔는데.
그런 사람을 어떻게 그리 쉬이 떠나 보낼 수 있을까.
“...에반.”
덤덤히 입을 열었으나, 목소리는 살짝 떨리고 있었다.
자신은 초조해하고 있었다. 에반이 만나는 대상이 자신의 아버지였기에,
유리스의 가주가 머릿속에 품고 있을 생각을 그 누구도 감히 예상할 수 없었기에.
혹여 자신이 생각하는 최악의 상황에 다다르지는 않을까.
“무엇을 그리 걱정하십니까.”
“...걱정하지 않아요.”
그리도 티가 났는지, 에반이 자신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 시선 속에 섞인 것은 따스한 걱정이었다.
만약 그가 아닌 다른 이였다면, 그 시선 속에서 섞인 것은 어리숙한 소가주를 바라보는 혐오에 가까웠겠지.
열려있는 창문에서 차가운 바람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아니, 어쩌면 이제야 그 한기를 느꼈을 지도 모른다.
자신 옆에 있는 존재가 주는 온기에 익숙해져, 이 겨울이 이토록 추운 계절이란 것을 늦게 알아차린 것일까
.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제 호위 기사란 어느새 자신의 한기를 걷어내는 존재가 되었다.
...욕심일지도 몰랐다. 자신이 품은 이 마음이, 언젠가는 변질되어 욕망이 될 지도 몰랐지만.
적어도 지금은, 그가 자신의 옆에 있었으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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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아버지가 그대를 부르는 이유는 흑마법사를 처리한 것에 대해 치하하기 위함일 거예요. 흑마법사가 워낙 이 제국에서 중히 다뤄지는 문제기도 하고, 이번에 그대가 피해없이 처리한 것도 맞으니까요.”
“크리스 경도 그리 말했습니다. 아마 치하하기 위해 저를 부르실 거라고요.”
“...곧 그대를 부르시겠죠. 아침에 있는 업무가 끝나면 점심에는 늘 손님을 만나시곤 했으니까요.”
아직 나를 부르지 않은 이유가 그것일까.
허나 공작이 나를 부르는 것에 대한 생각은 이내 흩어졌다.
어쩐지 아까부터 보이는 그녀의 얼굴이, 처음보다 무척이나 어두워 보이는 것은 과연 내 착각일까.
무엇을 걱정하는 것일까.
아까 공작에 대한 얘기를 꺼낼 때부터 급격히 어두워진 표정을 보면, 아마도 제 아버지와 관련된 일일 것 같은데.
어쩌면, 내가 공작과 만난다는 사실이 그닥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일까.
가롯 유리스, 그에 대한 이야기는 그다지 많이 나오지는 않았으나.
그가 이 유리스의 정신인 철혈과 굉장히 가까운 사람이란 것은 확실히 알고 있었다.
제 혈육보다 가문을, 가문보다는 충성을 바친 황제를 위하여 사는 이.
처음 그녀의 호위 기사가 되었을 때 어쩌면 그녀가 뒤틀린 것이 공작 때문인 것이 아닐까 생각하기도 했으니,
아마도 내게 호의적인 태도를 보낼 가능성은 적을 터였다.
하지만 그렇다한들 내게 적대적으로 대할 리도 없을 텐데,
그녀가 무엇을 걱정하는 것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어 옅게 한숨을 내뱉었다.
나름 그녀와 오랜 시간 있었지만, 그녀의 머릿속에 무엇이 있는 지는 나조차도 알 수 없었다.
다만 그 얼굴에 서린 것이 걱정이란 것만 겨우 알아차릴 뿐.
공작이 내게 할 행동이란 치하말고는 딱히 없지 않겠는가.
기껏해야 금은보화나 검을 내려주고, 앞으로도 흑마법사와 관련된 일에 협력을 요청하는 정도겠지.
그러다가 문득, 뇌리를 스쳐가는 생각에 눈이 가늘어졌다.
만약 이번 일을 계기로 자신의 지위가 달라진다면.
그녀의 호위 기사가 아닌, 이 유리스의 기사단에 편입된다면.
그렇게 둘 수는 없었다. 자신은 그녀가 겪을 비극을 아는 유일한 이가 아니던가.
만약 그녀의 곁에 있을 수 없다면,
그녀가 이대로 비틀리는 것을 막지 못해 훗날 악녀가 되는 것을 보게 된다면
지금까지 해온 모든 것들이 물거품이 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지금, 그녀가 마음을 열고 편히 대할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로페나, 크리스 경. 그리고 아마도 자신까지 이 셋이 전부이지 않을까.
그녀의 곁을 떠날 수는 없었다.
적어도 그녀의 비극을 전부 걷어내어 내 스스로 떠나는 것이 아니라면,
자신은 언제까지고 그녀의 곁에 있어야 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아가씨."
그녀의 얼굴에 걸린 그늘이 그런 걱정 때문이라면,
나는 그런 그늘을 지워주는 이가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내가 빌었던 소원처럼.
그녀의 얼굴에 걸린 그늘이 사라지고, 어깨에 있는 책임이 사라지는 그 때가 오길 바랐다.
새벽에 했던 다짐을 어찌 있겠는가.
그녀가 행복하길 바랐다. 내가 보았던 그 소설의 내용을 한낱 꿈이라 여길 수 있는 그 때가 온다면.
아마 자신은 그녀의 곁을 후련한 마음으로 떠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니 지금은, 그런 그녀를 향해 미소지을 따름이었다.
그녀의 얼굴에서 어둠이 사라지도록. 그녀의 마음 속에 담긴 그 불안함이 사라지도록.
"저는 당신의 호위 기사입니다."
내가 지은 미소가 과연 그녀의 불안함을 지워낼 수 있을까.
솔직히 의문이 생기긴 했지만, 그럼에도 웃어보였다.
그녀가 내게 이리 웃어주면 좋겠다는 생각이 잠깐 들긴 했지만, 이내 안개처럼 흩어져 사라졌다.
이건 그저 욕심일 뿐이었다.
내 사심이 조금 담긴, 그런 욕심.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