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화 〉 눈이 오기 전에(1)
* * *
문득 볼에 찬 바람이 닿았을 때, 창문이 열려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눈이 내리려면 아직 조금 시간이 남은 것일까.
아직까지 회백색을 띄고 있는 하늘을 멍하니 바라보다,
하얗게 끼어있는 구름 사이에 보이는 해를 보곤 아침이란 것을 알아차린다.
“...아.”
목구멍에서 갈라진 목소리가 나왔다.
잠을 늦게 자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단지 잠을 잘못 자서 그런 건지 찌뿌둥한 몸 상태에 기분이 그닥 좋지는 않았다.
단지 오늘이 생일이라서 그런 것일 수도 있고.
그래도 다행인 건 이제 전화가 올 휴대전화가 없다는 것이겠지.
졸린 눈을 그렇게 비비다가, 살짝 열린 창문을 활짝 열어 밖을 바라보았다.
코를 타고 들어오는 바람이 찼다. 어젯밤에 있었던 일이 그저 꿈만 같이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그때도 지금도, 바람이 여전히 차가운 건 똑같은데.
지그시 눈을 감자 선명한 빛이 눈꺼풀에 스친다.
구름 사이에 가려져 있던 해가 떠 내 얼굴을 비춰 다시금 눈을 뜨자,
짙은 구름에 회백색을 띄던 하늘이 비로소 푸른빛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아침이었다. 이렇게 가만히 있을 것이 아니라, 무엇이라도 해야 겠지.
창문으로 새어 들어오는 빛을 놔둔 채 발걸음을 옮긴다.
커튼에 쌓인 먼지를 살짝 털어내고, 책상 위에 올려진 검을 허리춤에 찬 채 그대로 방 밖을 나섰다.
햇빛이 가득한 복도, 어젯밤 보았던 그 음울진 분위기는 사라진 채 어느새 활기를 가득 띄고 있었다.
흑마법사를 처리한 덕에 그런 걸까.
만약 내가 어제 그 흑마법사를 처리하지 못했더라면, 아마도 이런 모습을 다시 볼 수 없었겠지.
새삼스레 벅차오르는 감정에 옅게 한숨을 내쉬자, 옆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새벽부터 나무 위에 올라가 울어대는 참새처럼 밝고 경쾌한 소리.
고개를 돌리자 보이는 사람은 역시나 로페나였다.
“좋은 아침이에요!”
“...그래.”
가라앉아 있던 기분이 다시금 붕 뜨는 듯해서, 옅게 웃으며 작게 손을 흔들어 보였다.
이렇게 밝게 웃는 아이를 어찌 싫어할 수 있을까.
내가 흑마법사를 잡아서 로페나가 다치지 않았더라면, 그것만으로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깨 다치셨다고 들었어요. 괜찮으세요?”
“응, 이제는 피도 안 나고.”
전보다는 꽤나 심한 상처였으나, 하룻밤이 지나자 자연스레 상처가 아물었다.
이제는 피도 안나고, 일주일 정도면 흔적도 없이 사라지지 않을까 싶은데.
아직까지 피가 묻어있는 붕대를 바라본 로페나의 표정이 순식간에 침울해졌다.
다친 건 나인데, 어째 자기가 더 아파하는 것 같은 모습이 우스워 저도 모르게 피식 웃고 말았다.
“저는 심각한데 왜 그렇게 웃고 그러세요.”
“심각할 필요가 없으니까 그렇지. 네가 다친 것도 아니잖아.”
“그래도요...”
나는 진짜로 괜찮은데 말이야. 웃으며 로페나의 머리를 마구 헝클어트리자,
그제야 눈살을 찌푸린 로페나가 표정을 풀고 나를 노려보았다.
그래, 차라리 이런 표정이 낫지.
“풋.”
“아, 진짜. 웃지 말아요.”
“넌 울상 짓는 것보다 웃는 게 어울려.”
“...그래요?”
그 소리가 또 마음에 들었는지, 입술을 삐죽이던 녀석이 갑자기 방긋방긋 웃기 시작했다.
무슨 광대도 아니고. 그래도 덕분에 기분이 훨씬 나아지긴 했다.
이런 사람이 하나쯤은 있어야 뭐라도 하지 않을까. 그냥 옆에만 있어도 사람의 활력소가 되어주는 사람.
어쩌면 아이린이 아직까지 완전히 망가지지 않은 것도 로페나 덕분일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아가씨는 일어나셨나?”
“네. 진즉에 일어나셔서 지금은 책 읽고 계세요. 지금 벌써 10시가 훌쩍 넘었단 말이에요. 기사님 늦잠 잔 거 알고는 있죠?”
“확실히...해가 좀 높긴 하더라.”
어쩐지 평소와는 공기가 조금 다른 것 같더니만.
아무래도 마나를 꽤나 쓴 탓인지 영 몸 상태가 좋지 않았다.
아니면 흑마법에 노출되어서 그런 것일까.
눈살을 살짝 찌푸리며 어깨를 주무르자 로페나의 표정이 다시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아직 아프세요?”
“아, 아니. 이제는 괜찮다니까. 그러고 보니까, 혹시 주문했던 검은 안 왔어? 아마 오늘 아침에 전부 온다고 들었는데.”
“검이요?...아, 맞다!”
그제야 생각이 난 건지 손뼉을 한 차례 두들긴 로페나가 제 머리를 두드리며 소리쳤다.
아마 한두 개 온 것이 아닐 텐데, 그걸 도대체 언제 다 확인하려나.
로페나가 달려가는 방향을 따라 쫓아가자, 이내 저택의 문 앞마당에 가득 쌓인 상자들이 눈에 띄었다.
“상자를 분류하라! 2시간 안에 분류하여 아가씨께 전달하라는 공작님의 명이다!”
“알겠습니다!”
분주히 움직이는 사람들, 수십 명의 사람들이 모여 움직이고 있었건만.
그 보다도 더 많은 수의 상자들이 한 쪽에 산더미처럼 쌓여있었다.
저 상자들이 전부 그 무기 상단에 있는 것들인가.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저 것을 전부 산건지. 지금 생각해도 꽤나 아찔한 기억이었기에 한숨을 내쉬며 얼굴을 쓸어내렸다.
“가서 도와주자...”
아무래도 저 무기 상자들이 이렇게 쌓인 데에는 내 지분이 상당히 있는 것 같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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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무기 상자를 전부 정리하자, 그 중 가장 비싼 것들 몇 개가 내 앞으로 옮겨졌다.
왜 이 것들이 내 앞으로 왔을까 생각하던 도중, 로페나가 입꼬리를 씰룩이며 나를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아가씨가 선물로 주려는 것 같은데요.”
“...선물? 아.”
생각해보면, 아이린은 내 생일을 알고 있지 않던가.
그럼 무언가 필요한 것이 있냐 물은 것도, 내 선물을 주려 그리 물은 것일까.
아닐 수도 있었지만, 만약 그렇다면 감사할 따름이었다.
...그런데.
“하아.”
“왜요?”
“아니, 그냥 부끄러운 기억이 떠올라서.”
생일 선물로 웃어달라고 부탁하다니.
그 때엔 혼자 감성에 젖어 그런 말을 내뱉었지만, 자고 일어나 생각해보니 그런 부끄러운 말이 어디 있겠는가.
아마 아이린도 비웃을 터였다. 정말로, 내가 한 말을 떠올릴 때면 저절로 얼굴이 뜨거워지는 것만 같았다.
그래도 그 말이 거짓이라는 소리는 아니었다.
그녀가 한 번쯤 후련하게 웃는 날이 왔음 어떨까, 하는 생각에 하는 말이었으니까.
흑마법사도, 그리고 훗날의 비극도 모두 막아 그녀가 22번째 생일을 맞이하는 그 날이 온다면.
어쩌면 그런 모습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르지.
“그래도 난 한 자루만 쓸 건데. 몇 개는 크리스 경에게 가져다 드려야겠어.”
“아깝지 않아요? 그래도 여기 있는 것들은 전부 한 사람이 평생 모은 돈으로 사기 힘든 것들인데.”
“...그럼 두 자루만?”
그렇게 말하며 살짝 웃자, 로페나또한 따라 웃으며 상자 뚜껑을 집어 들었다.
그런데 로페나는 아이린의 전속 시녀가 아니던가. 그런 것치곤 꽤나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것 같았다.
내가 빤히 바라보는 것을 눈치 챘는지 시선을 돌린 녀석이 이내 고개를 갸웃거렸다.
“너 여기 있어도 돼? 아가씨는 어쩌고.”
“아하, 저 휴가 받았거든요. 사실 집에 가면 되는데, 전 여기가 집이니까요.”
“...그러냐.”
휴가라, 그러고 보면 크리스 경이 오늘 공작님과 만나야 할 거라 얘기하지 않았던가.
아직 부르지 않은 것 같은데. 아무래도 그 전에 아이린을 한 번 만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어쨌든 이렇게 검을 받은 것에 대해 감사하다고 말을 해두는 게 좋을 테니까.
로페나가 낑낑 거리며 상자의 뚜껑을 열자, 그 밑으로 천으로 감싸진 검 하나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한 70cm? 그 정도 즈음 될까. 고급진 무늬가 새겨진 검면은 청아한 은빛을 띄고 있었다.
마치 달을 깎아 만든 것처럼 느껴질 만큼 고아한 분위기가 절로 풍겨나는 검을 멍하니 바라보다 이내 들자 그 순간 내 입이 작게 벌어졌다.
“...그냥 아무 것도 안 든 것 같은데?”
평소에 차고 다니는 검또한 매우 가벼운 편에 속했으나, 이 검은 가볍다 못해 손이 텅 빈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단검을 들었다면 이런 기분일까. 허나 검이 가벼운 것은 장점이라 할 수 없었다.
벨 때 무게감이 있어야 힘이 제대로 실릴 텐데, 이랬다간 실수로 얕게 벨 수도 있지 않은가.
“아다만티움이라.”
이 세계에서 존재하는 가장 가볍고 단단한 금속이라 들었다.
마법으로 가공되는 공정이 반복될수록 무게가 가벼워져 갑옷으로 자주 쓰인다더니.
이런 금속으로 검을 만들면 가벼워서 좋을지는 몰라도, 내가 그리 선호하진 않았다.
“...이건.”
허나 그 다음 상자를 열었을 때, 나는 옅게 눈살을 찌푸렸다.
검날도 없이 손잡이만 덩그러니 놓인 상자.
로페나는 순 사기꾼이라며 성을 냈지만, 나는 진지한 표정으로 그 손잡이를 집어들었다.
마치 짐승이 물어뜯은 것처럼 이빨 무늬가 새겨진 손잡이.
이건 분명히, [장미 가시의 그대]에서 한 번 언급되었던 검이 아니던가.
아이린이 여주와 영지전을 벌였을 때 들고 싸웠던 검.
다른 검과는 달리 부러지지도, 마모되지도 않는 마법검이었기에 이 세상에 단 하나 뿐이라 들었는데.
혹시나 하는 마음에 마나를 불어넣자, 단순히 손잡이만 덩그러니 있던 그 빈 곳에서 갑작스레 푸른빛을 띄고 있는 검날이 솟아올랐다.
푸른 물결이 일렁이는 듯 새파란 색을 지닌 검.
내가 알고 있는 것과는 그 생김새가 달랐으나, 이런 기능을 지닌 검이라곤 이 세상에 단 하나 뿐이었다.
“...하.”
아이린이 들던 검, 그 것이 내 손에 들어올 줄이야.
운이 좋다고 밖에 설명할 길이 없었다. 마법검이 가지는 가치란 이 세상 그 어떤 금은보화로도 견줄 수 없는 것이었으니까.
부러지지 않는 검. 그 어떠한 마나를 담든, 그 어떠한 공격을 받든 결국 검을 가져다 댄다면 막아준다는 얘기가 아니던가.
“뭐, 뭐죠. 그건?”
눈을 휘둥그레 뜬 로페나를 멍하니 바라보기도 잠시, 이내 씨익 웃으며 그 손잡이를 내 품 속에 집어넣었다.
아무래도 내가 예상한 것보다 훨씬 더 수확이 좋은 것 같은데 말이야. 아이린에게 감사 인사는 제대로 해야 할 것 같았다.
“이 걸로 정했어. 나머지는 전부 크리스 경한테 보내줘.”
“방금 그거 뭐냐니까요?”
등을 돌린 내게 묻는 로페나를 지그시 바라보다가, 이내 검지를 입에 가져다 대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비밀이야.”
그런 나를 멍하니 바라보는 로페나를 보자 절로 웃음이 새어 나왔다.
이걸 어떻게 알고 있냐는 소리가 나오면, 아마도 꽤나 골치 아파질 테니까.
그렇게 복도를 걸어 내가 향한 곳은 당연하지만 아이린이 있는 곳이었다.
내가 한 말이 있어 아직 꽤 부끄럽긴 했지만, 그래도 이렇게 받았으니 고맙다는 말 한 번 정도는 해야 맞지 않겠는가.
“아.”
그렇게 걷다가, 갑작스레 떠오른 어제의 기억에 절로 한숨이 터져 나왔다.
도대체 내가 무슨 정신으로 그랬을까. 아마도 달이 문제였다.
그 달 때문에 홀로 감성에 젖어서, 그런 말도 안 되는 말을 한 내가 잘못이겠지.
아무래도 이 상태로 그녀를 보았다간 표정 관리가 불가능할 것 같았다.
그냥, 웃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애꿎은 가슴만 두드리다가, 이내 쓰게 웃으며 다시 걷기 시작했다.
그마저도 얼마 걷지 않아 도달한 곳이 아이린의 방문이었으니,
눈을 잠시 지그시 감았다가 이내 떨리는 목소리를 감추며 덤덤히 입을 열었다.
“아가씨, 에반입니다.”
허나 시간이 지나도 대답이 들려오지 않아 의아해하기도 잠시,
문을 두드려도 반응이 없어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가기 시작했다.
“아가씨.”
아까 로페나가 말하기로는 책을 읽고 있다 하였으니 자고 있는 것은 아닐 테고, 혹여 습격이라도 당한 것일까.
그렇다면 크리스 경은 도대체 무얼하고 있길래 아이린이 무얼하는지 신경쓰지 않는단 말인가.
순간 머릿속이 복잡해져, 이내 무거운 숨을 토해내었다.
지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상념이 흩어지고, 이내 곧바로 문을 열어젖히며 아이린의 모습을 눈으로 좇았다.
도대체, 지금 무얼하고 있길래
“...아.”
그리고 시선이 한 여인에게 닿았을 때,
그러니까. 그 푸른 눈이 명백하게 당황으로 일렁이는 그 모습과 마주했을 때.
나는 멍하니 입술을 벌리고 말았다.
거울을 바라본 채로, 제 입꼬리를 손가락으로 당기고 있는 아이린의 모습이란 꽤나 우스워서.
움찔거리는 입꼬리를 손으로 가린 채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아가씨?”
마치 웃는 것을 연습하는 사람 같지 않은가.
그 순간 뇌리를 스쳐가는 기억에 눈살이 작게 찌푸려졌다.
설마 내가 한 말 때문에?
“...에반.”
내 이름을 부르는 아이린의 목소리는 평소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만큼 떨리고 있었다.
그녀가 이렇게 당황한 모습을 본 것이 아마 이번이 처음이지 않을까.
평소에 보이던 그 무표정한 얼굴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이내 얼굴이 살짝 붉게 달아오른 그녀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나가요.”
도대체, 이 상황을 어떻게 무어라 생각하면 좋을까.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런 그녀를 멍하니 바라볼 뿐이었다.
진심으로 어이가 없어서.
정말로 멍하니.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