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판 속 악녀의 호위기사가 되었다-29화 (29/181)

〈 29화 〉 겨울(7)

* * *

­생일 축하해요.

그 말이 귓가에 아른 거려서, 차마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이제는 그저 몇 분 전의 일이었건만, 이토록 가슴이 울렁거리는 이유가 무엇일까.

“소독을 먼저 해야겠군. 이거야 원, 제대로 구멍이 뚫려서 어깨를 들기도 쉽지 않을 것 같은데.”

“이 악물고 들었습니다. 사실, 싸울 때는 별로 안 아프더라구요.”

지금은 꽤나 아프긴 한데, 막상 싸울 때는 움직일 만 했다. 어깨만 유독 다치는 이유가 무엇일까.

내가 옅게 웃으며 그리 말하자 크리스 경은 인상을 찌푸리며 쓰게 웃었다.

뭐, 그래도 결국 다 좋게 끝났으니 다행이지 않을까.

물론 한 번 흑마법사가 이렇게 나타난 이상 앞으로도 쭉 아무 문제없을 거란 얘기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당분간은 괜찮을 터였다.

흑마법사들이 본격적으로 단체를 꾸려 나타나는 것이 앞으로 5년 뒤,

지금 걱정한다 한들 당장 무언가를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까.

붕대를 감은 어깨에선 아직까지 피가 베어 나오고 있었다.

확실히 흑마법이라 그런 것일까. 칼로 베인 것보다 느린 속도로 아무는 상처에 크리스 경이 눈살을 찌푸렸다.

“이런 거 하나 못 피하고 그러면 안 되지.”

“그럼 공중에 떠오른 도중에 어떻게 다 피합니까? 그냥 한 대 맞는다 생각하고 싸워야죠.”

“...쯧. 아무튼, 내일 공작님을 한 번 뵈어야할 게다.”

“공작님 말입니까.”

예상했던 일이긴 했지만, 막상 이리 만나게 된다니 무어라 해야 할까.

조금 떨리는 것이 사실이었다. 유리스의 가주이자, 아이린의 아버지 되는 사람 아니던가.

소설에서는 그저 몇 문장 등장한 것이 전부였으니, 그에 대해 아는 것이 현저히 적기도 했다.

그나마 아는 것은, 그가 몇 년 뒤에 죽는 것 정도?

이번 일을 겪어보니 아마 흑마법사와 연관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은 있었지만 아직 섣부른 판단은 조금 이른 것 같았다.

그가 죽기까지는 아직 꽤나 남지 않았던가. 아마도 내가 성인식을 치를 때 즈음일까.

흑마법사가 본격적으로 활동하기까지 조금 전이기도 했고, 무언가를 판단하기엔 증거가 한참 모자랐다.

“뭐, 너무 긴장하지는 마라. 아마도 네 칭찬이나 하려고 부르는 것일 테니까. 뭐, 내 생각엔 서임식이 조금 미뤄지지 않을까 싶은데.”

“서임식이요?”

“네가 이렇게 다친 것도 있고, 흑마법사가 나타난 것도 있고. 아마 대대로 조사가 필요할 테니 당장 어떤 행사를 하기엔 무리가 있을 테지. 사냥제 이전엔 모든 행사가 취소될 거다.”

하기야, 흑마법사의 등장은 단순히 유리스 뿐 만 아니라 제국에서도 눈 여겨 보는 사건일 테니까.

내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자, 붕대를 마저 감았는지 크리스 경이 등짝을 두들기며 씨익 웃어 보였다.

“자, 이제 붕대는 다 감았고. 아가씨가 할 말이 많아 보이던데.”

“...뭐, 그렇죠.”

아이린의 얼굴을 떠올리자 어쩐지 입에 쓴 맛이 도는 것 같았다.

그녀가 저를 바라보던 표정이 자꾸만 눈앞에 아른거려서, 눈살을 찌푸리며 옅게 한숨을 내뱉었다.

자신이 다쳤을 때 그녀는 언뜻 화난 것처럼도 보였다.

내가 다친 것에 화가 난 것일까. 그 마음이 고맙기도 했지만, 사실 미안하기도 했다.

자신은 그저 빙의자, 이 세상 속에서 언젠가 사라져 버릴지도 모르는데.

만약 자신이 이대로 사라져 버린다면 그녀는 어떻게 될 것인가.

그녀가 이 공작저에서 조금이나마 평안을 얻길 바라는 마음도 사실이었지만,

그렇다한들 너무 가까워지는 것을 바라지는 않았다.

그저 이렇게 지내다가, 그녀의 미래가 바뀐 것을 보면 떠나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미 자신은 너무도 깊게 파고든 것이 아닐까.

“방에 가야할 것 같습니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흑마법사와 싸운 것도 있었고, 머릿속을 어지럽히는 생각을 조금이라도 정리하고 싶기도 했다.

피로한 몸 탓에 온 몸이 물먹은 솜처럼 무겁게만 느껴졌다.

눈을 가늘게 뜨며 옅게 웃자, 내 피로를 이해한 크리스 경이 몸을 일으키며 입을 열었다.

“그래, 일단 얘기는 나중에 하고. 방에 들어가서 쉬어라. 아마 제일 피곤한 건 너 일 테니까.”

“...배려 감사합니다.”

한 차례 고개를 숙이고, 그렇게 방을 빠져나온다. 문을 열자 보이는 건 어두운 복도였다.

평소와는 다르지 않은, 언제나 촛불 빛만이 일렁거려 희미하게 빛을 내는 복도.

대리석으로 만들어져 미끄러운 바닥을 밟기도 잠시, 이내 앞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고개를 든다.

“에반.”

그 목소리가 닿았을 때, 나는 무심코 탄식을 내뱉었다.

가장 보고 싶지 않았던 얼굴, 그럼에도 가장 보고 싶었던 얼굴.

“...아가씨.”

이 촛불보다도 찬란히 반짝이는 그 파란 눈동자를 마주했을 때, 나는 그저 쓰게 웃을 따름이었다.

그녀가 뱉은 한 마디가 이 복도를 메워, 내 몸을 감싸는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

그녀가 말한 그 축하한다는 말 한 마디에 이토록 마음이 흔들리는 이유가 무엇일까.

공교롭게도 에반의 생일이 원래의 내 생일과 같다는 이유일까, 아니면 단지 축하한다는 그 말이 어색해서 일까.

어쩌면 저를 바라보는 아이린의 존재가 그 이유일지도 몰랐다.

탁­

연꽃무늬가 새겨진 찻잔 속엔 다즐링이 가득 따라져 있었다.

곱게 내려진 선홍빛의 차, 그 것을 멍하니 바라보다 이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는 괜찮습니다.”

아이린의 시선은 처음부터 내 어깨에 둘러진 붕대에 향해 있었다.

아직까지 상처가 아물지 않아 피가 배어나오는 붕대, 그 것이 이유일까.

그녀의 눈이 저렇게나 일렁이는 것은. 내가 괜찮다고 구태여 말했음에도 아이린은 쉽사리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저 멍하니, 점점 번져나가는 붉은 자욱을 바라볼 뿐이었다.

“아가씨.”

“...듣고 있어요.”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금방 나을 테니까요. 저번에도, 하루이틀 만에 낫는 걸 보지 않으셨습니까.”

그제야 시선을 뗀 그녀는 나름 잠시 지그시 바라보았다.

잘게 떨리는 눈꼬리가 잠시 가늘어졌다가, 이내 감기며 그 입술에서 얕은 숨이 새어나왔다.

“상처가 금방 낫는다고 해서, 아프지 않은 건 아니잖아요. 그대가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게 아니라면요. 맞지 않나요?”

“......”

“그대가 다치지 않았어도 될 일이었어요. 제가 조금 더, 조금 더 신경을 기울였다면­”

“아가씨.”

아이린의 말을 끊은 나는 다시 그녀를 바라보았다.

일렁이는 눈동자는 제 갈 길을 잃은 채 방황하고 있었다. 이번 일은 그녀의 잘못이 아니었다.

그저, 그 흑마법사가 이 유리스를 노렸을 뿐이었다.

어찌하여 다른 이를 탓하겠는가, 만약 이 일이 비극으로 번졌다한들 흑마법사의 탓일 뿐 그녀를 무어라 할 수는 없었다.

“왜 자신을 탓 하십니까.”

그녀의 손이 옅게 떨리는 것을 바라본 내 눈살이 찌푸려졌다.

스스로를 탓할 필요가 없었는데, 혹여 내가 다쳤다는 이유로 그녀가 이런 마음을 품은 것일까.

괜스레 몰려오는 죄책감에 얼굴을 손으로 쓸어내린 채 입을 열었다.

“아가씨의 탓이 아닙니다. 세상은 천재지변을 누구의 탓으로 돌리지 않습니다.이번 흑마법사도, 단지 아무도 예측하지 못했을 뿐입니다.결국엔 모두 좋게 끝나지 않았습니까. 흑마법사는 생포했고, 앞으로의 일도 대비할 수 있을 겁니다.”

“...그대가 다쳤죠."

아이린의 대답에 나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내가 다친 것이 도대체 무슨 의미길래, 내게 그러한 표정을 짓는 것일까.

일그러진 눈동자에 숨이 턱 막히는 것만 같았다.

진심으로 나를 걱정해주는 이를 마주한다는 것은 이토록 어색한 일이었다.

살면서, 단 한 번도 마주하지 못했던 그 시선에 나는 멍하니 아이린을 바라보았다.

“다른 이들은 생일날이면 그저 저택에 누워 한가로이 시간을 보내곤 해요. 자신에게 온 선물을 뜯어보고, 다음에 열 상자엔 무엇이 들어있을까 그렇게 상상하면서 시간을 보내죠. 그런데, 그대에게 내가 준 것이라곤 이 상처밖에 없네요.”

“...축하받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축하를 받아본 적도, 애초에 기대조차 한 적 없었으니까요.”

에반과 이 일은 상관이 없었다. 그저 에반이 되기 전 ‘나’와 관련된 이야기.

허나 그녀의 말을 듣자 어째선지 그런 말이 저 스스로 튀어 나왔다.

그녀가 미안해할 필요 없다는 생각에서 그런 것이었을까.

저도 모르게 튀어나온 말에 당황하기도 잠시,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아이린을 보곤 이내 옅게 웃어보였다.

생일,

오지 않는 것이 차라리 나으리라 생각했다.

생일날이라고 무엇 하나 특별할 것도 없을뿐더러 언제나 오는 전화라곤 아직도 살아있느냐 묻는 부모의 차가운 전화 한 통 뿐이었으니까.

제 배로 낳았음에도 애정 한 톨 하나 묻어나지 않는 그 전화를 들을 때면, 이따금 이 목숨을 끊어버리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허나 놓지 않았다. 언젠가는, 그렇게 살다보면 언젠가는 바뀌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살았음에도 결국 변하지 않았다.

­생일 축하해요.

허나 그 생일을 축하해주는 이를 이런 곳에서 만났다.

자신조차 잊고 있었던 생일을, 말하지 않았음에도 떠올려 축하한다 말해주는 이가 이 세상 속에 있었다.

언젠가는 떠날 곳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이런 말을 들을 때면 미련을 놓지 못했다.

아이린, 그 이름을 속으로 곱씹다가, 이내 저를 바라보는 푸른 눈동자와 다시 마주한다.

이따금 하늘을 볼 때면 저 홀로 반짝이던 달과 닮아있었다.

푸른 밤의 빛을 그대로 담아서, 외로이 방에 앉아있던 나를 바라보던 그 달과 닮아있었다.

이번에는 다를까. 언제까지고 기약없는 희망을 기다리던 그때와 지금은, 과연 다를까.

허나 그 의심은 이내 흩어진다. 제 귓가에 흘러들어오는 그 잔잔한 목소리와 함께.

늘 제 가슴을 두드리는 그 목소리에 다시금 숨을 토해내었다.

“그런 말 하지 말아요.”

“......”

“그대는 충분히, 축하 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이잖아요.”

축하 받을 자격이라.

문득 웃음이 새어나왔다.

그토록 바라던 말이었는데, 그 것을 처음 말해주는 이가 제 부모가 아닌 자신이 호위하는 공녀라서.

그녀의 처지를 동정하던 자신이 그런 말을 듣는 것이 우스워서. 비틀린 입꼬리가 옅게 떨렸다.

더 이상 미련을 두지 않으려 했는데.

이 이상, 그녀와 더욱 가까워지는 것을 원치 않았는데.

저를 향해 일렁이는 그 두 눈이 이토록 확고하게 가슴에 자리 잡기 시작하는 것만 같았다.

처음에는 그저 어쩌면, 이라는 생각 뿐이었다. 소설 속에 들어왔으니까,

어쩌면 그녀의 운명을 바꿀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었다.

정말로 가볍게, 실패하면 어쩔 수 없다는 그런 생각뿐이었는데.

허나 그 마음이 점점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그녀의 표정이 점점 변할 때면,

그녀의 얼굴에 덧 씌워진 가면이 부서져 그 속에 일렁이는 감정이 비칠 때면.

저도 모르게 그녀에게 다가가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녀는 제게 앞으로도 남아 있어달라고 말하였다.

그 별이 반짝이는 발코니 위에서 들은 말을 내가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에 더 이상 차가움은 없었다.

겨울을 순간 잊게 만들만큼이나 따스한 온기가 몸을 감싸이내 얼굴이 뜨겁게 달아오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자신은 아이린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그저 호위 기사와 공녀?

지금은 단지 그 수준에 그칠 뿐이라 하더라도,

이 마음이 점점 커진다면 어떻게 번져나갈지 예상조차 할 수 없었다.

잠시 눈을 지그시 감았다가, 이내 뜨며 아이린을 바라보았다.

꾹 다물린 붉은 입술은 늘 수평을 그리고 있었다. 이제는, 처음 품었던 마음과는 그 각오부터가 달랐다.

진심으로 그녀의 비극을 막고 싶었다.

제게 이렇게 웃어주며,자신에게 축하받을 자격이 있다고 말해주는 이 여인이.

그 비극 속에서 스러지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았다.

허리춤에 들린 검이 그 어느 때보다도 무겁게 느껴졌다.

다짐을 다시 한 탓일까, 호위 기사라는 위치를 다시금 자각한 자신의 검은 그토록 무거울 따름이었다.

허나 입꼬리는 호선을 그린다.

더 이상 허탈한 탓에, 가슴이 답답한 탓에 헛웃음을 짓는 것이 아니었다.

정해진 마음에 그 답답함이 사라져서, 저를 바라보는 공녀를 향해 그 어느 때보다 환히 웃어보였다.

자신을 인정해주는 존재란 이토록 기꺼운 것이었다.

그런 그녀가 다시는 슬픔 속에 잠기지 않도록, 그런 바람을 담아 천천히 입을 열었다.

"바라는 선물이 하나 있습니다."

"...선물?"

어렸을 때 자신의 형은 늘 생일이면 선물을 받았다.

물론 나는 받지 못했지만, 이번 만큼은 그녀에게 선물 하나를 받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록 그 선물이 소원에 가깝긴 했지만.

"그냥, 웃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

"앞으로는 그 얼굴에 그늘이 지지 않았으면 합니다. 언제나 어깨에 지고 있는 그 책임을 잠시 내려 놓고, 한 번이라도 좋으니 활짝 웃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 눈에 담긴 어두움이 모두 걷혀져서, 언젠가는 환히 웃어주었으면 했다.

철혈이란 이름에, 유리스란 이름에 벗어나 오직 아이린 유리스라는 여인이 후련하게 웃는 그 날이 과연 올 수 있을까.

어쩌면 그 웃는 모습을 보지 못할 지도 몰랐다.

허나 내가 뱉은 이 한 마디가 그녀를 조금이라도 변하게 할 수 있더라면 그 것만으로도 족했다.

아이린의 두 눈이 나를 향했다.

당황, 그리고 놀람으로 뒤덮인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며 다시금 옅게 웃었다.

창 밖으로 새어나와 이 어둠을 밝히는 달빛이, 평소보다 훨씬 밝게 느껴지는 것 같았다.

생일일 때면 늘 홀로 이불을 감싼 채 창 밖을 바라보곤 했는데.

지금도 그 것은 다르지 않았다.

여전히 생일날이면 날씨는 추웠고, 제 볼을 감싸는 추위는 그 때와 다르지 않았다.

허나 단 한 사람의 존재가 모든 것을 바꿨다는 이 사실에 헛웃음을 흘린다.

그 때도, 그리고 지금도.

겨울이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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