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화 〉 겨울(6)
* * *
때론 모든 것이 거짓이라 믿고 싶을 때가 있었다.
제 눈앞에 보이는 이 절망적인 상황이 차라리 꿈이라서,
눈을 감았다가 뜨면 다시금 원래대로 돌아와 있을 거란 상상을 하곤 한다.
허나.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칼리파는 웃었다. 자신이 만든 피조물은 단순히 마나를 둘렀다하더라도 쉽사리 베어지는 존재가 아니었다.
설령 마스터라 할지라도 애를 먹을 것이 자신의 피조물이었다.
말이나 되는가, 어둠을 베는 검이 있다니. 물을 벨 수 없듯이, 어둠또한 그런 개념이었다.
그러나 자신의 눈앞에 펼쳐진 이 광경은 무엇이란 말인가.
마치 그런 어둠이 형체를 지니기라도 한 듯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단 한 번의 참격에 베어져, 이내 그 거대한 몸뚱이가 바닥에 스러지고 있었다.
“...이 무슨.”
작게 벌려진 입에선 말조차 제대로 뱉어지지 않았다. 베는 것을 볼 수조차 없었다.
휘둘렀다, 단지 그렇게 인식한 순간 이미 모든 것이 끝나 있었기에.
그저 자신의 앞에 서있는 기사를 멍하니 바라볼 뿐이었다.
남들과는 명백히 다른 저 순백의 마나, 도대체 저 마나는 무어란 말인가.
에반은 그런 칼리파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자신이 벤 저 검은 형체는 아마도 흑마법사가 만들어 낸 것일 터였다.
베는 순간 느껴진 짙은 마나, 분명 이 주변을 감싼 어둠 또한 저 거인의 것이겠지.
이윽고, 눈에 한기가 감돌았다.
방금 광소하던 흑마법사의 얼굴을 기억한다.
이 모든 일을 계획했음이 분명함에도, 아무렇지 않게 절망을 심으려던 그 얼굴을,
자신은 두 눈 똑똑히 담아두고 있었다.
비극, 만약 그가 만들어낸 저 검은 거인의 짓이라면 분명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을 터였다.
베는 순간 깨달았다. 저 거인이 지닌 위험성이란 분명 상상을 벗어나는 것임을.
아마 조금이라도 늦었더라면, 분명히 이 공작령을 덮칠 어둠이었다.
눈이 가늘어진다. 격양된 감정이 치솟아, 이내 격한 숨을 토해내었다.
“흑마법사.”
에반의 입에서 흘러나온 음성을 들은 칼리파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 음성에 담긴 짙은 한기가 자신의 뼈에 스며드는 것만 같았다.
이 곳에서 죽는 것이 저 기사가 아닌 자신이라 했던 그의 말이 귀에 맴돌아, 이내 땅에 붙어있던 발이 움찔거리기 시작했다.
도망쳐야 했다. 당장이라도 이 자리에 벗어나 구차하게라도 목숨을 부지해야 했다.
저 검을 휘감은 백색의 마나가, 곧이어 자신을 벨 것이란 것을 어찌 모르겠는가!
화르륵, 이윽고 칼리파의 손끝에서 암청색의 불꽃이 피어올랐다.
이 짙은 어둠 속에서도 더욱이 어둡게 타오르는 그 불은,
이내 자신에게 검을 든 채 다가오는 기사를 향했다.
작은 불씨가 이내 커져 길을 뒤덮기 시작했다.
암청색의 파도, 에반은 그 불꽃을 바라보며 검을 들었다.
암살자들을 상대할 때처럼 단순히 검을 휘두르는 것만으로는 벨 수 없음을 알았다.
쿠궁, 심장을 타고 샘솟기 시작한 마나를 느낀다.
뜨겁게, 마치 불처럼 타오르는 마나가 이내 온 몸을 휘감기 시작했다.
어째서인지는 몰라도, 자신의 마나는 흑마법과 상극이었다.
질병도, 부패도, 그리고 저 어둠도. 자신의 마나 앞에서는 그 몸을 움츠렸다.
이윽고 에반의 몸이 앞으로 기울었다.
땅을 박차고, 검을 쥔 두 손이 불꽃을 향해 나아갔다.
검에 담긴 백색의 염화가 어둠과 뒤섞여, 이내 어둠을 밀어내기 시작했다.
어둠은 빛을 두려워했다. 태초로부터 담겨져 있던 특성,
암청색의 불꽃이 사라지고, 이내 탁한 어둠을 가르며 사라지는 흑마법사의 신형이 보였다.
무너진 거인은 여전히 그대로였다. 저 것이 과연 더 이상 움직이지 않을까.
잠시 그 거인을 바라본 에반은 이내 흑마법사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흑마법사를 처리하면 사라질 것이 분명했다. 모든 것이 흑마법사가 만들어낸 것이 분명해 보였다.
유리스에 찾아온 비극도, 아이린의 빛을 알아낸 것도.
아마 자신이 에반 프리드의 몸에 빙의한 것이 아니라면 분명히 에반 또한 당했을 터였다.
그 어둠은 사람의 몸을 갉아먹는다. 처음에는 티가 나지 않을지 몰라도,
오랜 시간 그 어둠에 노출되어 있었더라면 분명 제아무리 강한 이더라도 스러질 어둠이었다.
크리스경도, 로페나도. 분명 이 어둠에 당했겠지.
그래서였을까, 아이린이 그토록 변했던 것은. 어느새 이를 악물고 있음을 깨닫는다.
자신이 이토록 분노하는 이유,
이 심장이 이렇게나 세차게 뛰어, 눈에서 피어오르는 증오가 저 흑마법사를 향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아마도, 아이린이 저처럼 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일 터였다.
자신처럼 마음이 비틀리기 전에, 그 어둠에 갇혀 빛을 잃었던 자신처럼 되지 않기를.
악녀였던 그녀의 죽음에 슬퍼했던 것은 어쩌면 그런 이유일지도 몰랐다.
자신과 같은 처지인 그녀가 그렇게 스러짐을 어찌 슬퍼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검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흑마법사, 불꽃을 거둬내는 그 틈을 타 사라지긴 했으나 그리 쉽게 도망갈 수는 없을 터였다.
거리가 좁혀진다. 금방이라도 그 숨결이 닿을 듯, 순식간에 좁혀진 거리에 칼리파의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젠장!’
자신이 바란 상황은 이런 것이 아니었다.
분명히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피조물을 움직여 어둠을 심을 생각이 아니었던가.
절멸이란 위대한 이름에 자신, 칼리파라는 첫 걸음을 생기는 기념비적인 날이나 다름없었다.
시이익, 칼리파의 손에서 다시 한 번 어두운 색의 안개가 뻗어져 나왔다.
부패, 모든 것을 잠식시켜 썩어문드러지게 만드는 힘,
그 안개가 이내 형태를 이루어 화살처럼 날카로워졌을 때.
칼리파는 그 것을 자신에게 다가오는 기사를 향해 날렸다.
조금이라도 좋았다. 이 좁혀지는 거리를 조금이라도 벌릴 수만 있다면!
화살이 날아온다. 에반은 그 화살을 전부 피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미 공중에 뜬 몸, 그렇다면 최대한 피하는 방향으로.
에반의 검이 화살을 쳐냄과 동시에 공중에서 몸이 한 바퀴 회전했다.
어깨에 박힌 한 발은 어쩔 수 없었다. 그렇다면.
어깨에서 전해져오는 통증을 애써 무시한 채, 다시금 검을 들어올렸다.
칼리파의 눈이 커졌다. 막을 수 없다, 이건 막을 수 없었다.
서걱, 순식간에 베어진 칼리파의 어깨에서 피가 뿜어져 나왔다.
마치 분수처럼 뿜어져 나온 피가 에반의 얼굴을 적셔 시야를 가리기도 잠시,
고통에 몸부림치던 칼리파의 몸이 지붕 아래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검을 휘감던 마나를 다리로 돌린다. 이윽고 발끝에서 하얀 색의 염화가 일자,
에반은 그대로 떨어지는 흑마법사를 따라 지붕 밑으로 몸을 던졌다.
“오지...마!”
칼리파의 얼굴이 기괴하게 일그러졌다. 저 녀석은 도대체 무어란 말인가!
이해 할 수가 없었다. 갑작스레 이런 수준의 기사가 나타난 것도,
애초에 자신이란 존재를 이 어둠 속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도 이해 할 수가 없었다.
이 어둠은 자신의 영역이었다. 누군가가 감히 침입할 수 없는, 오로지 자신만을 위한!
허나 저 빛은 어찌하여 이 어둠을 가를 수 있는 것인가. 이제 더 이상 움직임이 보이지 않았다.
제 아무리 흑마법을 운용한다 하더라도, 그 마법을 가른 검이 제게 그 칼날을 들이 밀고 있었다.
쿠웅, 바닥에 떨어지자 척추가 저릿했다. 더 이상 움직일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이 이상 몸부림 쳐보았자, 죽는 것은 자신이었다. 그러나, 마지막 발악만은 할 수 있을 터.
저 멀리, 무너져 내린 자신의 피조물을 바라본다. 아직 한 번은 움직일 수 있을 것이 분명했다.
그 중심에서 움직이는 질병의 근원만큼은 아직 건재했다.
녀석이 내보일 한 번의 틈, 칼리파는 일부러 눈을 질끈 감은 채 몸을 꿈틀거렸다.
의식이 사라지는 것처럼, 그리하여 기사가 완전히 긴장을 놓을 때를 기다렸다.
척, 에반이 땅으로 내려오자 칼리파는 숨을 삼켰다. 자신은 입을 열지 않을 것이었다.
기사가 보일 빈틈, 오직 그 것만이 이 상황을 타개할 유일한 수이리라.
“...살아 있는 것 같은데.”
에반은 눈살을 찌푸렸다. 몸을 꿈틀거리던 흑마법사의 움직임이 멈추었다.
자신이 한 것이라곤 기껏해야 어깨를 벤 게 전부인데. 어찌하여 움직임이 멈춘 것일까.
귀를 기울이자, 여전히 흑마법사가 숨을 쉬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하.”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죽은 척이라도 하고 있는 것일까.
자신의 빈틈을 노리려고 했으면, 차라리 신경을 다른 곳에 두게 하는 것이 옳을 터였다.
피어오른 마나가 감각을 예민하게 만들기 시작했다.
고요한 이 적막 속에서, 조용히 움직이는 무언가의 움직임이 귀를 타고 전해져 왔다.
기긱, 미세한 움직임에 땅이 긁힌다.
땅이 일으킨 먼지가 다시금 바람을 만들어내고, 피부에 닿은 바람이 그 움직임의 방향을 전해 준다.
‘아마도, 내 뒤 쪽.’
시선을 돌릴 필요도 없었다. 바람이 방향을 전해주고 있었다.
그저, 검을 들어 막으면 될 뿐이었다.
화르륵, 다시 한 번 염화가 검을 타고 흐르기 시작하며 어둠을 베어낸다.
이미 훈련 때 몇 번이고 해왔던 것이었다.
제 목을, 심장을, 급소를 노리는 그 모든 공격을 막아내는 것.
눈을 가린 채도 해왔던 훈련이기에 익숙했다.
몇 개월의 훈련으로 불가능할 일일지라도, 이 재능은 그 것을 가능케 한다.
콰직!
이윽고 뻗어나간 검이 등 뒤에 있는 무언가와 맞부딪혀 이내 파고들기 시작했다.
아마도 그 거대한 형체의 주먹이 아닐까.
파고들은 검이 거인의 몸을 부수기 시작했다.
어둠 속에 파고들은 빛이, 서서히 그 광채를 끌어올리고 있었다.
“소용없어. 이런 건.”
파앙!
이윽고 부서진 거인의 몸이 사방으로 비산하기 시작했다.
바닥에 떨어진 그 검은빛을 띄는 조각을 바라보는 칼리파의 눈은, 이미 텅 빈 지 오래였다.
더 이상 희망은 없었다. 자신이, 이 기사에게서 살아나갈 일은 없을 터였다.
텅 빈 칼리파의 눈을 바라본 에반이 검을 그 목에 겨누었다.
죽일 생각까지는 없었지만, 그렇다한들 물어볼 것이 산더미처럼 많았다.
일단 첫 번째로, 그가 속한 조직.
“절멸이라는 것을 알고 있나?”
“...저, 절멸이라면.”
“네가 속한 조직 말이다.”
“그, 그런 건 모른다! 정말이야!”
칼리파는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어보였다.
절멸이라니, 그건 그저 자신이 만든 계획의 이름이지 않은가!
“정말로 모르나?”
“그, 그냥 내가 세운 계획 이름일 뿐이야. 여기에 질병을 퍼트려서, 어. 그런 계획 일 뿐이라고!”
‘...역시.’
칼리파를 바라보는 에반의 눈이 스산해졌다.
아마도 유리스에 닥친 비극이란 것은, 아마도 이 흑마법사가 만들어낸 게 분명해보였다.
질병을 퍼트린다, 아마도 저 거인이 바로 그 질병이 아닐까.
검으로 베긴 했지만, 분명히 이질감이 있었다.
아마 자신이 아니었더라면 베어낼 수 없을 터였다.
이 마나가 무엇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허나 어째선지 확신이 들었다. 이제는 그 질병이란 것이 일어날 일이 없을 거란 확신이.
이 흑마법사에게선 알아내야 할 것이 많았다. 저 거인을 연구한다면,
앞으로 비슷한 일이 일어나더라도 극복할 수 있을 터였다.
분명 소설에서도 그런 방법으로 질병의 백신을 만들어냈으니까.
“히익!”
에반의 시선이 칼리파에게 닿자, 칼리파는 이내 비명을 지르며 목에 닿은 칼날의 차가움을 느꼈다.
살갗에 파고 들어 피가 흐른다.
그 붉은 색을 바라본 칼리파의 눈이 하얗게 뒤집어지자, 에반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물어볼 게 참 많아.”
왜 이런 짓을 했는지, 하필이면 유리스였는지, 왜, 도대체 왜 그런 것인지.
허나 이건 자신이 물어봤자 해결될 일이 아니었다.
무언가를 캐내는 데에 가장 적합한 것은, 그에 맞는 방식이 있지 않겠는가.
허탈했지만,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여기까지라는 것을 이제 받아들여야 했다.
“허나 내가 물어봤자 아무 소용없겠지.”
고문.
“아, 안 돼!”
그 단어가 머릿속에 스쳐지나간 칼리파가 괴성을 질렀다.
그 것 만큼은, 그 것 만큼은 반드시 피해야했다.
살점이 저며지고, 손톱이 뽑혀나가는 고통을 다시 겪고 싶지는 않았다!
녹색!
칼리파는 자신을 바라보는 그 녹안에 몸부림쳤다. 살고 싶었다, 자신은 살고 싶었
“잘 가라.”
에반은 그런 칼리파를 조용히 바라보다가, 이윽고 검집으로 머리를 후려쳤다.
몸부림치던 흑마법사가 단말마와 함께 스러지자 그제야 무거운 숨을 토해내었다.
이제 어둠은 없었다. 이 주변을 가리던 그 숨 막힐 정도의 어둠도 사라져서.
하늘은 다시금 그 찬란한 달을 보여주고 있었다.
“...하아.”
어깨에서 느껴지는 고통에 눈살을 찌푸린다.
아까의 그 화살이 관통한 탓에 아직까지도 피가 흐르고 있었다.
아이린이 다치지 말라고 했는데, 이렇게 다친 걸 보면 무어라 할지.
문득 웃음이 새어나왔다. 이렇게 한바탕 싸운 뒤에 처음 떠오르는 것이 아이린이라는 것이 우스웠다.
도대체 언제 자신의 머릿속을 이토록 잠식한 걸까. 허나 나쁜 일은 아닐 터였다.
이렇게 사이가 조금이나마 가까워진 것도, 이제는 그녀또한 자신을 걱정하고 있다는 것도.
고개를 들자 보인 달은 유독 파랗게 보여서, 잠시 눈을 지그시 감은 채 숨을 들이쉬었다.
검을 쥔 손이 유난히도 무겁게만 느껴졌다.
마나를 꽤나 많이 끌어올린 탓일까, 몸에 쌓인 피로에 어깨가 파르르 떨렸다.
쉬고 싶었다.
진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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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달이 보입니다!"
어둠이 걷어진다. 그 모습을 바라본 기사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에반 프리드가 해냈다. 설령 그 이름을 아직까지 잘 모르던 기사들마저 두 손을 든 채 소리를 내질렀다.
"...에반."
가늘어진 눈 사이, 그제야 푸른 눈이 제 빛을 되찾기 시작했다.
불안함에 터질 것만 같았던 가슴이 정상적으로 되돌아 와서, 힘겹게 숨을 토해낸 채 고개를 들었다.
"에반이 잘 해낸 것 같군요."
"다행이에요."
정말로, 다행이었다.
크리스 경은 그저 에반이 대견스러운 지, 미소를 지은 채 에반이 향했던 방향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어디 다치지는 않았을까. 다치지 말라 당부했지만,
흑마법사와의 싸움에서 다치지 않기란 꽤나 힘든 것이란 것을 자신또한 알고 있지 않은가.
"괜찮을 겁니다. 에반은 제가 아는 것보다도 훨씬 더 강한 녀석이니까요."
"......"
자신의 시선은 여전히 저 어둠 너머를 향해 있었다.
크리스 경이 걱정하지 말라며 무어라 말하긴 했으나, 신경이 쓰이는 것은 어찌 할 수 없었다.
만약에 치명상이라도 입은 것이라면. 혹여 싸우다가 동귀어진이라도 한 것이라면.
갑갑한 마음에 자신이 직접 움직여야 할까 고민하는 찰나, 한 기사의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에반이 돌아왔습니다! 흑마법사를 생포했습니다!"
"무사한 모양입니다. 다행이지 않습니까?"
허나 불안한 마음은 사라지지 않았다. 저 어둠 너머에서 희미하게 보이는 인영을 바라봄에도,
마음 한 구석에서 피어오르는 불안감은 사라지지 않았다.
"에반, 사람 걱정하게 만들...너."
에반의 모습이 보이는지, 크게 웃던 크리스 경의 얼굴이 점차 딱딱하게 굳기 시작했다.
불안감이 커진다. 눈살이 옅게 찌푸려져 마침내 어둠 속에서 에반의 모습이 보이는 것만 같았다.
붉은 색.
에반의 어깻죽지에서 흐르고 있는 피를 보자 눈이 절로 크게 뜨였다.
숨이 가빠져 왔다. 차오르는 숨이 턱 밑까지 닿아, 이내 무거운 숨을 토해낸 채 조용히 중얼거렸다.
"에반."
다치지 말라고 했는데, 저 어깨에서 이토록 흘러나오는 피란 무엇이란 말인가.
어느새 자신은 제 호위 기사에게 다가가고 있었다. 다칠 일 없다며, 예전과 다를 거라 그리 당당하게 말해 놓고선.
"...아가씨."
누가 보더라도 피로해보이는 안색의 그는, 이내 자신을 바라보며 옅게 미소지어보였다.
미소 짓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었다.
자신이 원한 것은, 그가 제게 미소를 짓는 것이 아니라. 그저 다치지 않았음을 바랐을 뿐이었는데.
"내가 분명, 말하지 않았나요."
목소리는 꽤나 싸늘했다. 그리 하고 싶지 않았음에도, 분노가 섞인 목소리에 스스로조차 놀랄 정도였다.
에반은 여전히 미소 짓고 있었다. 그 웃음에 자신의 가슴이 아려오는 것만 같았다.
"다치지 말라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어깨는 뭔가요."
구멍이 뚫려, 검은 흔적이 그 옆으로 보이는 그 것은 척 보아도 작은 상처가 아니었다.
흑마법에 당한 것일까, 잠시 눈을 지그시 감았다가 이내 뜨며 에반을 바라보았다.
"싸우다보니 다쳤습니다."
"그리 당연하다는 듯이 말하지 마세요. 내가, 분명히 다치지 말라고 했잖아요."
"죄송합니다."
자신을 향해 호위 기사가 고개를 숙여 보였다. 자신이 원한 것이 이런 것이었던가?
아니, 그저 무사하기만을 바랐을 뿐이었다.
이렇게 살아돌아온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할 터였는데.
이를 악문다. 잇새로 무거운 숨을 토해내며, 조용히 고개를 들었다.
댕
그리고 종이 울린다. 자정이면 이 시가지에 울리는 종,
이제 다음 날이 되었음을 알리는 그 종에 한 생각이 뇌리를 스쳐지나간다.
생일.
오늘은, 자신의 호위 기사가 태어난 날이 아니던가.
울컥거리며 치솟아오르는 감정에 얼굴을 쓸어내렸다.
자신이 태어난 날에, 그는 제 검에 피를 묻혔다.
다친 몸을 이끌고 이렇게 자신에게 돌아옴에 감사해도 모자를 판에그에게 날카롭게 말한 것이 후회스러웠다.
애초에 화 따위는 나지 않았다.
그가 이렇게 돌아온 것만으로도 안심해버려서, 그에게 투정을 부린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벌을 내리신다면, 달게"
"...내가 그대에게 왜 벌을 내리나요."
저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나왔다. 이젠 자신의 마음조차 제대로 알 수가 없었다.
도대체 이 기묘한 마음이란 무엇일까.
그가 다친 것에 화를 내면서도, 기이하게도 그의 얼굴을 볼 때면 그 화가 눈 녹듯이 사라져 내렸다.
마치 마법에라도 당한 것만 같은 이 혼란스런 맘을 도대체 무어라 정할지 알 수가 없어서.
자신을 바라보는 에반을 향해 조용히 읊조릴 뿐이었다.
"...생일 축하해요."
하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어쩐지 입 밖으로 튀어나오는 말은 이 것 하나가 전부였다.
자신은 화나지 않았다.
아니, 이제는 자신의 호위 기사를 보고선 절대로 화를 낼 수 없을 것이 분명했다.
그 이유는 누구도 모르겠지. 언젠가 이 마음의 이름을 무어라 칭하는 그 날이 오기 전까지는.
아무도, 심지어 자신조차도 모를 터였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