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화 〉 겨울(4)
* * *
저번에는 그리도 사람이 북적이던 거리였건만, 오늘따라 유난히 한산한 거리를 바라보며 천천히 시선을 옮겼다.
그 때는 로페나도, 크리스 경도 같이 있어서 조금 나았는데.
이렇게 아이린과 단 둘이 있을 때면 왜 이리 공기가 어색해지는지 알 수가 없었다.
처음 만났을 때는 잘도 주절거리지 않았던가.
도대체 그 때의 용기는 어디 갔는지, 지금은 그저 수줍게 입술을 달싹이다가 다시 입을 다무는 것이 전부였다.
무어라도 대화를 나누면 이 분위기가 누그러질 텐데,
아이린또한 가만히 있는 것은 마찬가지라 불편한 고요가 주변을 감싸는 듯 했다.
저벅, 저벅.
그 목적지가 어디인지도 모른 채 걷는 발걸음 소리가 귓가에 들려올 때면,
이 숨이 막힐 정도의 침묵에 쓰게 웃을 따름이었다.
자신이 생각한 외출과는 조금 상황이 다르지 않은가.
그래도 어느 정도의 대화는 오갈 거라 생각했는데 말이다.
한참이 지나도 그저 침묵만 오갈 뿐이라, 그저 아이린을 지그시 바라볼 뿐이었다.
이렇게 걸었음에도 아직 무언가를 사지 않은 걸 보면, 그녀가 찾는 물건은 일상에서 쓰는 것은 아니리라.
책도, 논문도, 필기구도. 그렇다고 악세서리나 보석도 아니라면 무얼 사려는 것일까.
문득 시선을 돌렸을 때, 나는 저 앞에 보이는 커다란 간판을 보곤 헛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베르데 무기 상단]
“...아가씨?”
그녀가 그 무기 상단 앞에서 발걸음을 세우자, 나는 의아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여기서 멈춘 이유라 하면, 설마 아까 내가 말한 그 것 때문이란 말인가.
아이린은 그런 나를 힐끔 바라보더니, 이내 무감한 표정으로 답했다.
“검이 필요 하다면서요. 사러 가죠.”
“정말 사주시는 거였습니까?”
“...그럼 내가 농담이라도 한 줄 알았나요.”
기분이 나빠졌는지, 잠시 눈을 가늘게 뜬 아이린은 이내 고개를 휙 돌리며 무기 상단을 향해 걸어 들어갔다.
도대체무슨 생각인 건지.
평소에 이렇게 돈을 쓴 적이 없으면서 오늘따라 왜 그러는 건지도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그저, 그런 그녀를 황망히 바라볼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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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일 선물을 고르는 것이 이토록 힘든 것일 줄은 차마 알지 못하였다.
그저 비싼 것을 사주면 되겠거니, 하는 마음이 있었건만.
막상 이리 밖으로 나오자 과연 그런 걸로 그가 만족할 수 있을지 의문이 생겨났다.
자신도 단지 비싼 것을 선물로 받는다 한들 항상 맘에 드는 것은 아니었으니,
에반또한 마음에 드는 것이 아니면 진심으로 기뻐하지 않으리라.
그럼 자신은 무얼 사야 하는 것일까.
애초에 선물이란 것을 남에게 주는 것은 처음인 터라, 그저 눈앞이 캄캄할 따름이었다.
로페나가 준비한다고 난리를 칠 때 물어보았어야 했나, 하고 잠시 생각도 했지만 이내 고개를 저으며 생각을 털어 내었다.
차라리, 애둘러 물어보는 것은 어떨까.
저도 모르게 그가 기뻐하는 모습을 보고 싶어 한다는 것이 퍽 우습긴 했지만,
생일날 선물을 준 이가 기뻐하길 바라는 것은 당연한 마음이 아니던가.
그렇게 고민에 빠진 채 길을 걷다가, 이내 고개를 돌려 자신의 호위 기사를 바라본다.
달빛이 스며든 금발이 반짝여 눈을 끔뻑이기도 잠시,
저를 바라보는 그 녹안에 무심코 시선을 돌리자 귓가를 타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흘러들어왔다.
“그런데, 무얼 사려고 나오신 겁니까?”
당신의 생일 선물이요.
마음 같아선 이리 말하고 싶었지만, 그래서는 아무 말 없이 나온 보람이 없지 않은가.
하여 자신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이란, 그에게 무엇을 가지고 싶냐는 말을 애둘러 표현한 것이나 다름 없었다.
“...그냥, 살 게 있어서요. 에반은 무언가 살 건 없나요?”
“글쎄요.”
가장 원하지 않은 대답이 튀어 나옴에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조금은 솔직히 말해 주었으면 좋으련만,
언제나 가지고 싶은 것을 말하지 않는 호위 기사의 생일을 챙기는 것은 이토록 까다로운 일이란 걸 다시금 깨닫는다.
눈빛이 스산해져, 저도 모르게 그에게 따져들려 하는 그 때에 에반이 입을 열었다.
“검 몇 자루가 필요하긴 합니다.”
검이라. 그 말에 눈빛에 이채가 감돌았다.
하기야, 최근 들어 이런저런 훈련을 계속하고 있었으니 아마 검이 필요하긴 할 터였다.
공작이 내려준 검은 제식용 이었으니 평소에 쓰긴 꺼려질 테고, 그러니 자신에게 이런 말을 한 것이 아닐까.
답답했던 가슴이 조금이나마 풀리는 것 같아 옅게 숨을 내뱉었다.
자신이 내려준 검. 호위 기사에게 검을 주는 것이 이번이 처음이니 무엇을 주어야 할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자신이 처음으로 무언가를 주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닐까.
이렇게 단 둘이 걸었던 적이 얼마나 있었지? 그 생각에 이윽고 떠오른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는 생각이었다.
처음, 이것도, 저것도 처음이라 이 순간이 그저 새롭게 느껴질 따름이었다.
그를 만난 것이 여름, 그리고 지금이 겨울이니 이 계절 또한 처음이었다.
그 단어가 주는 느낌이란 왜 이리 따스한지, 저도 모르게 가슴에 피어오르는 열기가 어색하게만 느껴졌다.
겨울인데, 어찌 열기가 느껴지는 것일까.
시가지에 들어선 뒤 자신의 눈이 찾는 것은 무기 상단이었다.
자신의 기사가 검을 원하노라 말했으니 자신은 최고의 검을 찾아 사는 것이 그 보답으로 적절한 것이겠지.
비록 자신이 그 만큼 검에 대해 잘 아는 것은 아니었으나, 적어도 이 공작령에 있는 무기 상단이 유명한 것은 알고 있었다.
제국의 북부를 수호하는 유리스, 방패라는 칭호를 얻기 위해 필요한 것은 강력한 군사력과 그에 상응하는 무기였으니까.
아마 이 유리스에서 찾을 수 없는 무기라면, 이 세상에 없다고 보아도 좋으리라.
그렇게 한참을 걸어 한 무기 상단에 다다르자, 제 호위 기사가 자신을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고작 이런 무기 상단에 와서 실망한 것일까.
허나 그 입에서 들려오는 말은 제 생각과 너무도 달라서. 괜스레 불쾌한 감정까지 떠오를 정도였다.
“정말로 사주시는 겁니까?”
저도 모르게 눈살이 찌푸려진다. 마치 자신이 호위 기사에게 검 하나 사주지 못할 만큼 옹졸한 사람처럼 보였다는 말이 아니던가.
에반이 한 말은 제게 그렇게 들렸다. 설령 그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한들, 이미 자존심은 뭉텅이로 깎인 뒤였다.
“...제가 무슨 농담이라도 한 줄 알았나요.”
그저 한 자루면 족하겠거니 싶었는데. 아무래도 에반은 자신의 호위 대상이 어떠한 사람인지 잠시 잊은 듯 했다.
유리스의 공녀, 차기 방패, 그 모든 호칭이 그리 달갑지는 않았으나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 호칭에 어울리는 모습을 보여주리라.
성큼성큼 발걸음을 옮겨 상단 내로 들어가자, 검은 콧수염을 길게 늘어트린탐욕스런 인상을 지닌 이가 다가왔다.
툭 튀어나온 배를 매만지는 모습이 맘에 들지 않았지만,
지금은 그런 것을 신경 쓸 때가 아니었기에 그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여기에서 제일 좋은 검이 무엇이지?”
“...제일 좋은 검이라 하면 최근 들어온 검이 하나 있습니다만, 가격이 만만치 않습니다. 한 번 보시겠습니까?”
검이 좋으니, 가격이 어떠하니 그 모든 것이 중요치 않았다.
이 무기 상단에 들어선 그 순간부터 자신의 선택은 이미 결정된 것이나 다름없었으니까.
이윽고 들어 올린 자신의 손은, 입구서부터 방의 끄트머리까지 그 모든 검들을 가리켰다.
“전부 공작저로 보내라.”
모두 사는 것이 가장 빠르지 않겠는가.
구태여 하나씩 들어보고 고를 필요도 없이, 전부 산다면 나중에 언젠가는 쓸 날이 올 터였다.
안 쓰는 것들은 기사단에 주면 될 것이고. 돈? 태어나서 그런 것을 걱정해본 적이 없었다.
어차피 여기 있는 모든 것들을 전부 산다한들 그저 보석함 하나가 비워질 뿐이었으니까.
그 탐욕스러운 얼굴에 놀란 기색이 스쳐지나가더니,
아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허리를 숙인 상인이 주저리주저리 입을 열기 시작했다.
“고, 공작저라 함은.”
“이 곳의 공작저가 하나 말고 더 있던가?”
“아, 아닙니다!”
그 상인을 싸늘하게 바라보자, 이내 그는 몸을 움찔거리며 고장난 기계마냥 고개를 연신 숙이기 시작했다.
그 모습이 퍽 애처로워 보였지만 그 것은 그리 중요치 않았다. 자신의 호위 기사는 무슨 표정을 짓고 있을까.
시선을 돌려 뒤를 바라보자, 에반은 그저 황망한 표정으로 눈을 크게 뜬 채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가씨? 이건 도대체...”
“검을 사준다 하지 않았나요. 샀을 뿐이에요. 공작저로 전부 보낼 생각이니까, 나중에 원하는 걸 고르도록 해요.”
어째선지 웃음이 새어나왔다. 자신은 에반의 이런 표정을 기대하고 있던 것일까.
그런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자, 에반은 그저 어처구니가 없다는 얼굴로 무기들을 포장하기 시작하는 상인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가죠.”
볼일은 끝났다. 제 호위 기사에게 자신의 위엄이란 것을 각인 시켜주는 것은 이 걸로 충분하지 않겠는가.
멍하니 서있는 에반을 지나치는 발걸음이란, 그 어느 때보다도 가볍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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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돈을 쓰셔도 괜찮으신 겁니까? 굳이 저 때문에”
“그대 때문에 그런 게 아니에요. 그저 검을 산 김에 산 것 뿐이니까요.”
“...그렇다기엔 너무 많이 쓰신 게 아닙니까.”
이내 한숨을 내뱉은 에반은, 이제 자기도 모르겠다며 그저 쓰게 웃어보였다.
돈은 쓴 건 자신인데 어찌하여 그가 이토록 유난을 떠는 건지.
그런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시선을 돌렸을 때 눈에 띈 것은, 꽤 익숙한 한 서점이었다.
그와 처음 만난 날 들렸던 서점이었던가.
자신이 그 서점을 멍하니 바라보는 것을 눈치 챈 것일까, 에반이 다가와 입을 열었다.
“꽤 오랜만이군요. 그 때 이후로 서점에 몇 번 안 가셨으니까요.”
“바쁘게 지내왔으니까요.”
다과회부터 건립일 축제, 게다가 황태자가 연 무도회까지 있었으니 책을 사거나 읽을 여유는 그다지 많지 않았다.
사실 이렇게 시간을 내서 나온 것도 꽤나 오랜만이지 않던가.
그렇게 서점을 바라보자, 문득 에반과 함께 있다는 사실이 새삼스레 신기하게만 느껴질 따름이었다.
그 때 자신은 에반을 어떻게 생각했는지를 떠올리면 당연한 생각이었다.
그저 다른 호위 기사들처럼, 며칠 안 가서 금세 사라질 줄 알았건만.
벌써 몇 개월 째 자신의 옆에 있는 그의 서임식이 이제 코앞으로 다가온 시점이었다.
앞으로도 그는 자신의 호위 기사일 터였다. 누군가에 의해 죽지 않는 이상.
“그 때는 이렇게 될 줄 몰랐는데 말이죠. 사실 금방 잘릴 줄 알았습니다.”
“...미안했어요. 그 때는.”
“사과하실 필요는 없는데, 이미 다 지난 일이 아닙니까.”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옅게 미소지 으며 어깨를 으쓱이는 그를 바라본다.
호칭에 유념해주시길.
그 때 에반에게 했던 말이 떠올라 절로 눈살이 찌푸려진다.
그깟 호칭이 무엇이라고, 그리 차갑게 타박할 이유는 없지 않던가.
자신이 싫어하는 호칭이었음에도, 그저 자신에게 다가오지 않게 하겠다는 이유만으로 그를 밀어냈던 과거의 자신을지금은 후회할 따름이었다.
“소가주님.”
이윽고 들려온 목소리에 몸이 차갑게 굳는다.
여전히 미소를 지은 채 저를 바라보는 그였건만, 그 녹안에 일렁이는 것은 분명히 따스함 이었건만.
예전과는 달리 그 한 마디에 이토록 예민하게 반응하는 자신을 이해할 수 없었다.
문득 손이 파르르 떨려서, 다른 손으로 그 팔을 붙잡은 채 힘겹게 숨을 토해냈다.
답답해지는 가슴 속에서 피어오르는 것은 불안감이었다.
호칭 하나가 달라졌을 뿐인데, 어째선지 그가 영원히 멀어지는 것만 같아서. 달싹이는 입술 새로 떨리는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에반.”
“예전에는 이렇게 부르곤 했었죠. 지금은 아니지만.”
“에반.”
그제야 자신의 목소리가 전과 다름을 눈치 챘는지, 에반이 걱정스러운 기색으로 자신을 바라보았다.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은 여전히 따스했다.
그 것만으로도 가슴의 쌓인 불안감이 흩어져서, 그의 소매를 붙잡은 채 다시금 입을 열었다.
“나를...그 호칭으로 부르지 마세요.”
“...네?”
자신은 그 호칭이 싫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그가 자신을 그렇게 부른다는 것이 싫었다.
자신과 꼭 선을 긋는 것만 같아서, 기껏 다가온 그가 자신을 버린 채 어디론가 떠나가 버릴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턱밑까지 차오른 숨을 겨우 뱉어내며 그를 바라보았다.
이윽고 입에서 흘러나온 목소리란, 주변의 공기가 순간 떨릴 만큼이나 애절하게 느껴졌다.
“그대만큼은, 나를 그렇게 부르지 말아줘요.”
그런 자신을 에반은 그저 아무 말 없이 멍하니 바라보았다.
우습지 않은가, 그를 그토록이나 밀어내려 했으면서이제는 떨어지는 것을 허락조차 하지 않았으니까.
허나 이제는 돌이킬 수 없었다.
자신을 이해해주는 이를,언제나 저를 향해 부드럽게 미소 짓는 이를 그토록이나 그려왔던 자신에게 찾아온 그가 아니던가.
이윽고, 제 어깨에 따스한 무언가가 닿음을 깨닫는다.
고개를 들자 보이는 건 시가지를 밝힌 불빛보다도 찬란한 녹안이라, 저도 모르게 그 시선을 피하고 말았다.
얼굴에서 열기가 피어오르는 것만 같았다. 이렇게나 추운데도, 뜨거워지는 얼굴이 그저 신기할 따름이었다.
어깨에 닿는 체온이 따듯했다. 클로크를 덮었음에도 그 속을 파고드는 한기였건만,
그마저도 녹이는 그 체온에 가슴 속에 피어오른 불안감이 한 순간에 흩어졌다.
고개를 들어, 그렇게 에반의 얼굴을 바라본다.
언제나 크게 다르지 않을 얼굴이었을 텐데,
꼭 달빛이 서린 듯 그의 얼굴은 이 짙은 어둠 속에서도 확연히 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이윽고, 무언가를 말하려는 듯 입술을 달싹 거리던 에반의 얼굴이 이내 딱딱하게 굳기 시작했다.
따스했던 녹안에 한기가 감돌고, 제 어깨를 붙잡았던 손이 경직되었다.
그는 긴장하고 있었다. 도대체 무엇을 느꼈기에?
“...아가씨, 몸을 피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에반...?”
잠시 그런 그를 의아하게 바라보기도 잠시, 이내 몸을 감싸는 짙은 어둠을 느낀다.
고개를 들어 바라본 하늘에 더 이상 달이 보이지 않았다. 보이는 것은 오직 소름끼칠 만큼이나 칠흑에 가까운 어둠 뿐.
언젠가, 이런 어둠이 있다고 들었던 기억이 떠오름에 제 몸 또한 딱딱하게 굳어가기 시작했다.
자신의 기억이 맞다면, 아마 이 세상에서 사라졌던 이들이 아니던가.
칠흑을 닮은 어둠, 닿기만 해도 온 몸이 거부 반응을 내비치는 어둠은 분명히 자신이 알고 있는 이들의 것이었다.
제국의 가장 찬란하던 시절, 그 빛을 처참히 무너트리고 멸망을 노래했던 이들.
이 어둠은, 흑마법사들의 것이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