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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판 속 악녀의 호위기사가 되었다-25화 (25/181)

〈 25화 〉 겨울(3)

* * *

그렇게 길을 걷다가, 정원의 한 구석에서 서있는 한 여인과 마주한다.

달빛의 창백한 빛을 그대로 담고 있는 하얀 머리카락이 허리까지 늘어져,

아무것도 없는 나무를 텅 빈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는 이.

캄캄한 어둠 속에서 저 홀로 빛나던 푸른 눈동자가 이내 나를 향해 일렁였다.

“에반.”

잔잔한 목소리가 울려 퍼진다. 종이 울리듯, 여운이 남는 목소리가 닿을 때면 어째선지 가슴이 떨려온다.

어째서일까, 이토록 예민하게 반응하는 것은. 허나 이내 상념을 털어내며 입을 열었다.

“기다리고 계셨습니까.”

그녀가 걸치고 있는 클로크가 눈에 띄었다. 날이 쌀쌀한데, 저렇게 입으면 괜찮은 것일까.

그 옷을 바라보며 눈살을 옅게 찌푸리자, 아이린이 내 쪽으로 다가오며 입을 열었다.

“나온 지 얼마 안됐어요. 그런 눈으로 바라보지 않아도 괜찮아요.”

내 표정이 어땠길래.

손으로 얼굴을 매만지자, 아이린은 이내 내게 시선을 떼곤 발걸음을 옮겼다.

저 멀리, 시가지에 떠오른 밝은 불빛을 바라보며. 나 또한 그녀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

아직 눈이 오지 않은 이 공작령의 겨울이란, 그 무엇보다도 삭막하고 싸늘한 빛깔을 띄었다.

추위에 차마 밖으로 나오지 못하는 청소부들,

회색과 벽돌색이 가득한 거리에 나뒹구는 쓰레기들이 거리를 검은 빛으로 물들인다.

사람들은 하나같이 제 얼굴색을 가리는 두터운 옷을 입었고,

그 전에 겪었던 계절과는 달리 색채를 잃은 이들이 거리를 시체처럼 배회하고 있었다.

입을 열면 들어오는 것은 폐를 찌르는 추위,

눈을 깜빡일 때면 점막이 얼어붙는 감각에 감히 밖으로 발을 내딛을 수가 없었다.

눈이 온다면 조금 나았겠지만 아직 그 새하얀 꽃잎들이 내리지 않은 이 거리에 보이는 것이란, 오로지 죽은 나뭇잎 들 뿐이었다.

차갑다.

아이린의 곁에서 걸으면서 떠올린 생각이었다.

여름이면, 그리고 가을이면 언제 시선을 다른 곳에 두어 그 풍광을 눈에 담곤 했는데.

이 겨울이 만들어내는 풍광이란 참혹할 만큼이나 싸늘한 것 들 뿐이었다.

제국의 겨울은 유난히도 추웠고, 그건 이 유리스 공작령이라 한들 다르지 않았다.

특히나 제국의 북부를 수호하는 이 유리스라면 더더욱.

분명 이제 겨울에 막 들어섰을 터인데, 간혹 달려있는 고드름을 볼 때면 헛웃음이 터져 나오곤 했다.

도대체, 시간이 흐르면 얼마나 추워지려는 걸까.

새빨개진 코를 매만지며, 아이린이 있을 방향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아이린은 이 추위가 꽤나 익숙한 듯 클로크를 부여잡은 채 그저 묵묵히 앞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아무래도 여기서 계속 살아왔던 탓일까. 얼굴은 붉어진 기색 하나 없이 여전히 창백한 색을 띄고 있었다.

“그런데, 무얼 사려고 나온 겁니까?”

그녀가 이리 나온 이유가 궁금하긴 했다.

오늘 날씨는 평소보다 쌀쌀해서, 구태여 나올 이유가 없었으니까.

혹여 무슨 급히 살 것이라도 있는 걸까. 그리 묻자, 나를 잠시 바라본 아이린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냥, 살 게 있어서요. 에반은 무언가 살 건 없나요?”

“글쎄요.”

요즘 들어 솔직히 풍족하게 살고 있는 편이었다.

이전의 삶은 도대체 어떻게 살아왔는지 이해가 안 될 만큼이나, 아이린의 호위 기사 자리는 꽤나 매력적인 위치였다.

물론 그녀와 이리 가까워졌으니 이런 것도 가능한 거겠지만.

사실 인터넷이나 스마트폰 없는 것을 제외하면 이전과는 비교도 안될 만큼 호화스러운 삶이라 바라는 것이 딱히 없긴 했다.

그래도 굳이 따지자면.

“검 몇 자루가 필요하긴 합니다.”

“검이요?”

요즘 들어 훈련의 강도가 높아지는 만큼, 검이 망가지는 일이 잦았다.

애초에 공작이 주었던 검은 제식용 이었으니 그 것을 주로 사용할 수도 없는 일이고.

공작저에 있는 목검을 여럿 사용하긴 했지만 그렇다한들 자신의 검이 없는 것은 꽤나 곤란한 일이었다.

내 말을 들은 아이린은, 그런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이내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검이라, 알겠어요.”

정말 검이라도 사주려는 것일까.

그녀가 무언가 사준 적이 없었으니아무래도 진짜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래도 이렇게 같이 나온 적이 꽤나 오랜만인 터라, 발걸음이 그저 가볍게만 느껴졌다.

저번에 나왔을 때는 여름이었지만 분위기는 겨울만큼이나 스산했던 것 같은데.

그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공기가 부드러워졌다는 생각이 들자 무심코 웃음이 새어나왔다.

아까는 그토록 싸늘해보였던 풍광이, 어째선지 썩 포근해 보이지 않은가.

이번 외출에는 과연 무슨 일이 있을련지.

어느새 멀어진 아이린을 바라보다가, 이내 그녀를 따라 다시금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

“누굴 그리 찾는 게냐?”

“...아, 크리스 씨!”

자신을 크리스 씨라 부르는 로페나의 목소리에절로 웃음이 새어나왔다.

에반 녀석은 기사님이라며 꼬박꼬박 부르면서 도대체 왜 자신은 이름으로 부르는 건지.

뭐, 조금 더 친근하게 느껴지는 탓에 그렇게 부른다면 자신이야 좋았지만.

가까이 다가온 로페나의 머리를 쓰다듬기도 잠시, 그녀가 주변을 둘러보며 무언가를 찾고 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누구를 찾는 걸까, 아마도자신은 아닐 테고.

고개를 갸웃거리자, 그 뜻을 알아챘는지 로페나가 그 자그마한 입을 조잘거리기 시작했다.

“기사님을 찾고 있었거든요. 드리고 싶은 게 있어서 찾은 건데.”

“생일 선물이라도 주려고?”

그러자 로페나는 그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이내 헉 하는 소리와 함께 입을 두 손으로 가렸다.

하여간, 이렇게 얼굴에 감정이 드러나서야 쓸까.

제 주인과는 전혀 닮지 않은 모습이 퍽 귀여워보여서, 껄껄대며 웃자 로페나가 그 자그마한 손으로 가슴팍을 두드리며 허둥지둥 입을 열었다.

“어, 어떻게 아셨어요. 이거 비밀이었는데?”

“어쩌다보니 알게 됐지. 설마 내가 가르치는 놈 생일 하나 알지 못하겠느냐?”

물론 생일인 당사자는 생일에 대해서 영 좋게 생각하지는 않는 것 같았지만.

하지만 그래도 로페나가 주는 선물을 거절하지는 않으리라.

그 녀석도, 나름 로페나를 아끼는 듯 보였으니까.

“그 녀석은 지금 아가씨와 나갔으니까, 아마 돌아와도 밤이 훌쩍 넘어서 돌아올 게다. 미리 자두는 게 좋을 걸.”

“원래 생일 선물은 12시에 종 땡 치면 드려야 하는 걸요. 크리스 씨가 알려준 거잖아요.”

“내가 그런 것도 알려줬었나?”

아무것도 모르는 척, 턱을 긁적이며 눈살을 찌푸리자 로페나가 갑작스레 성을 내었다.

하여간 누굴 닮아서 이렇게 성격이 나쁜 건지.

“아악­!”

“기억하고 있어. 기억하는 게 당연하지. 네 생일 때 내가 알려준 거 잖아.”

“...그런 건 조금 빨리 떠올리란 말이에요.”

“흐흐. 뭐, 그럴 수도 있지.”

“아, 근데 제가 준비한 선물이 과연 맘에 들지 모르겠네요. 나름 준비는 했는데, 평소에 자기가 뭘 좋아한다고 도통 말씀해주시질 않으니까요.”

확실히, 에반은 자신에 대해서 쉽사리 말해주는 녀석이 아니었으니까.

어느새 옆에 앉은 로페나를 그렇게 바라보다가, 이내 에반에 대한 생각으로 천천히 눈이 가늘어지기 시작했다.

에반 프리드, 검술의 재능이 특출나다며 기사로 키워달라는 갑작스런 요청과 함께 느닷없이 공작저를 찾아온 아이.

프리드 백작가의 사람과 함께 오지도 않고,

그저 검 한 자루와 편지 한 통을 든 것이 전부였던 그 어린 아이를 보았을 때는 얼마나 당황했던가.

텅 빈 녹안에 비치는 것은 오직 공허 뿐,

잘 웃지도 않던 그 아이가 지닌 재능이란 가히 세상을 놀라게 할 만한 것이었다.

1년.

보통 사람이 평생 깨닫는 것조차 힘들다던 마나를 에반이 깨닫는 데에 걸린 시간.

나름 수재라 불렸던 자신조차도 5년이 걸렸건만,

어느 순간부터 백색의 마나를 온 몸으로 뿜어내는 것을 보곤 그저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다시 3년, 검을 잡은 그 아이가 모든 검술에 타통하는 데에 걸린 시간이었고.

15살이 되었을 때, 공작저에 홀로 찾아왔던 그 아이는 익스퍼트의 경지에 도달했다.

천년의 재능이라 불리던 황태자조차 17살에 익스퍼트에 도달했는데,

심지어 아주 어렸을 때부터 검을 잡았던 그조차 그리 오랜 시간이 걸렸는데.

단 7년이란 시간 만에 익스퍼트에 도달한 그를 도대체 무어라 불러야 한단 말인가.

다만 걱정인 점이라 하면, 언제나 표정의 변화가 없다는 점이었다.

웃는 모습을 보았던 게 얼마나 되었지?

아마도 어린 시절부터,단 한번도 제 앞에서 웃거나 운 적이 없었으니,

가끔은 사람이 아니라 꼭 어디서 만들어진 인형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하곤 했다.

늘 음울진 표정으로 검을 휘두르다가, 이따금 창백한 얼굴에 그림자가 물들 때면 혹여 죽지는 않을까 늘 걱정하곤 했는데.

이제는 그런 표정은 전혀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는 사실이 그저 신기하기만 할 따름이었다.

그런 녀석이 변하게 된 것이 아마 아가씨의 호위 기사가 되었던 날이었을까.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그저 멍하니 앉아있던 녀석에게 호통을 쳤던 기억이 생생했다.

호위 기사가 되었던 그날, 평소와는 달리 유난히 말이 달랐던 녀석이 그리 신기하기만 했는데.

이제는 되려 그런 밝은 모습이 익숙할 따름이었으니까.

아가씨도, 그리고 에반도. 좋은 방향으로 변하게 된 것은 기뻤지만, 과연 앞으로도 그런 변화가 이어질 수 있을까.

언젠가는 이런 변화가 그저 꿈이었다는 듯, 원래의 그 스산하고 음울진 사람으로 되돌아오는 것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떠오를 때면, 자신이 조금이라도 더 오래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

그 두 사람을 옆에서 지탱해주는 것은 자신이 해야 할 역할일 테니까.

그렇게 상념이 흩어지고, 숙였던 고개를 들자 옆에서 품에 든 상자를 보며 실실 웃는 로페나의 모습이 보였다.

15살이면 아가씨나 에반과도 같은 나이일텐데. 도대체 이 녀석은 왜 이렇게 어린애 같은 건지.

“그래서, 선물은 뭘 준비 했는데.”

“그걸 제가 왜 말해줘야 하는데요.”

“이 녀석이.”

그 녀석이 과연 선물을 받고 좋아할까. 그저 축하한다는 말 한마디로도 그리 씁쓸해하던 녀석이었는데.

이전에도 그랬었나 생각했지만,

작년까지만 하더라도 녀석을 전담하던 것은 자신이 아닌 다른 기사였으니 자신이 알 길이 없었다.

도대체 생일날 무슨 일을 겪었길래 그리 어두운 표정을 지었던 것일까.

허나 당장 알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어서, 품 안에 든 상자를 꼬옥 껴안고 있는 로페나를 그저 웃으며 바라볼 뿐이었다.

“나도 뭔가 준비를 해야 하나?”

“아니, 알면서 준비도 안 했어요?”

“...뭐, 그럴 수도 있지.”

그렇게 말하며 창문을 바라보았다. 여느 때처럼 창백하게 빛나며 주변을 비치는 달.

그 밑에 깔린 어둠보다도 아래에, 아마도 아가씨와 에반이 있으리라.

과연 아가씨께서 선물을 잘 고르실 수 있을까?

제 호위 기사를 챙긴다는 그 마음이 기꺼워 응원은 하고 있었지만,

아무래도 그 성격상 실패할 확률이 크지 않을까 싶었다.

도대체 에반 녀석이 아가씨를 어떻게 구워 삶았는지는 몰라도 이번에 서임식까지 앞당겨 치르게 되었으니, 이번에 조금 더 가까워졌으면 했는데.

“...음?”

그러다가 문득, 창 밖에 보이는 어둠이 유난히도 거슬려 보인다는 생각이 들었다.

분명 여느 때와 다르지 않을 밤, 별도 달도 예전과 다를 바가 없었는데.

왜 이리 저 어둠을 볼 때면 가슴이 답답해지는 것일까. 분명, 예전에도 이런 감각을 느낀 적이 있었다.

마치 늪 속에 기어들어간 것처럼 숨이 차오르고, 눈앞이 어둠에 휩싸이는 것만 같은 착각마저 불러일으키는 어둠.

뇌리에 스쳐가는 단어를 알아 차린 순간, 소파를 쥐고 있던 손이 파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이 순간 피어오르는 감정은당황이자 진노였다.

도대체, 어떻게 이 유리스에 그 녀석들이 다시 온 것이란 말인가.

크게 벌려진 입에서 노호와도 같은 고성이 터져나왔다.

“기사단을 소집하라­!”

30년 만에 느끼는 감각에 온 몸에 긴장이 감돌았다.

갑작스레 노호성을 뱉은 자신을 로페나가 의아한 듯 바라보았으나, 지금 그런 것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크리스 씨? 도대체 갑자기 왜­”

“...흑마법사가 나타났다.”

흑마법사라는 단어를 들은 로페나의 얼굴빛이 창백하게 물들기 시작했다.

그도 그럴 것이, 흑마법사란 단어는 농담삼아 쉬이 입에 담을 만한 것이 아니지 않은가.

흑마법사가 다시 나타났다는 그 말이 의미하는 것이란.

30년 전의 대전쟁, 역병을 창궐시키고, 시체를 되살려 제국의 황금기를 부쉈던 그 들이 이 땅에 다시 나타났다는 소리였다.

창 밖으로 보이는 어둠은 방금까지 보던 것과는 달랐다. 이제는 달빛마저 흐리게 보일만큼이나 짙은 어둠.

그 아래에 있을, 아마 이 공작저에서 가장 중요한 두 사람을 떠올리는 자신의 얼굴은 그 어느 때보다도 가라앉아 있을 터였다.

그 어느 때보다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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