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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판 속 악녀의 호위기사가 되었다-24화 (24/181)

〈 24화 〉 겨울(2)

* * *

쓰게 웃는다. 정말로 쓰게 웃었다.

어째서 자신이 나가야 하는지, 어찌하여 저가 따라가는 것인지 진심으로 모르는 듯 눈살을 찌푸린 그의 표정을 바라보면서.

입을 가득 메우는 씁쓸함에 무거운 숨을 토해내었다.

“...가보세요. 나가는 건 저녁 즈음이니까요.”

그를 보았을 때 이미 괜찮아졌던 기분이었지만,

자신이 왜 나가야 하는지 모르는 그 표정은 다시금 기분을 가라앉게 만들었다.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이 그대로 비쳐보이는 그 표정이 거슬렸다.

내일이 자신의 생일이라는 것을 정말 모르는 것일까. 아니면, 그저 내게 말하기 껄끄러운 것일까.

복잡해지는 생각에 가슴이 점차 답답해지기 시작했다.

그저 별 거 아닌 일일 수도 있었다. 어쩌면 너무 바쁘게 사느라 제 생일마저 잊을 수도 있지 않은가.

허나, 어째선지 그런 것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자꾸만 떠올라서.

에반이 나간 방문을 바라보는 자신의 얼굴엔 어느새 그늘이 지어져 있었다.

#

정말, 아주 우연히 들은 한 마디였다.

평소처럼 하릴 없이 책을 읽다가, 쿠키를 먹던 로페나가 무심히 던진 한 마디가 그렇게 파문을 일으킨다.

­아가씨, 그거 아세요? 내일 모레가 기사님 생일이래요.

어쩌다가 우연히 알게 되었다며, 선물을 뭘 준비하면 좋겠냐는 말에 끝내 대답하지 못했다.

분명 서류에서 그의 인적 사항을 보았을 텐데. 어째서 생일이라는 것을 여태껏 알지 못했던 것일까.

그가 직접 말해준 것이냐는 물음에 로페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저 책상을 정리하다가, 서류에서 날짜를 보았을 뿐이라고.

선물이라, 꽤나 오랜만에 떠올린 그 단어에 눈이 가늘게 떠졌다.

만약 준다면 무엇을 주어야 할까. 물어본다면 편하겠지만, 그렇다기엔 자신의 호위 기사가 꽤나 바쁘게 살고 있지 않은가.

이전 같았으면 호위 기사의 생일 따위 그저 무시하고 넘어갔을 터인데, 이렇게 챙길 생각을 하는 자신이 퍽 우습기도 했다.

허나 어쩌겠는가. 이미 마음 속 깊이 그를 인정한 탓에, 더 이상 시야에 두지 않는 것조차 힘들었는데.

서임식에 앞서 그가 훈련에 열심히 임한다는 것쯤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날, 무도회에서 허심탄회하게 털어놓은 말이 그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졌을지는 모르더라도,

그가 부정적으로 받아들였더라면 아마 지금처럼 행동하지는 않았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꽤나 기뻤다. 그가 그런 말을 듣고도 오히려 더욱 열심히 해준다는 것이.

꼭 자신을 위해 그렇게 하는 것만 같아서, 꽤나 오랜만에 가슴이 간질거리는 감각을 느끼곤 했다.

겨울이 오고, 추위가 오고, 한기가 감도는 이 공작저에서도. 그를 볼 때면 다시금 훈풍이 불어오는 듯 했다.

사람의 마음은 그토록 간사해서, 한 때는 밀어내려 노력했던 그를 이렇게나 쉽사리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라는 존재는 이미 로페나처럼 제게 각인이 된 것이 아닐까.

만약 어느 순간 사라진다면, 자신은 섭섭함을 느낄지도 모르리라.

그리고, 그런 그가 지었던 표정이 떠올라 눈을 지그시 감는다.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던 그, 다시 천천히 생각해보면 그의 녹안은 분명히 흔들리고 있었다.

자신의 호위 기사는, 아무리 봐도 내일이 자신이 생일이란 것을 모르는 것 같지 않은가.

녹안에 실린 것은 명백히 의문이었다. 해가 진 뒤에 자신의 생일이 찾아오는 것을 아는 이가 보일 반응이 아니었다.

크리스 경이 이따금 말했던 것이 귓가에 아른 거리는 듯 했다.

자신을 만나기 전엔, 그는 항상 우울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고 했었나.

금방이라도 어디론가 떠나가버릴 사람과도 같은 표정을 지은 뒤엔,

늘 방 안에 틀어박혀서 검을 휘두르곤 했다는 그 말이 유난히도 거슬렸다.

지금도 자신이 모르는 곳에서 그런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일까.

만약 그가 문을 닫고 있을 때 그런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이라면, 그럼에도 제게는 미소를 지어주고 있는 것이라면.

문득, 자신이 입술을 깨물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입 안에 부드러운 살이 씹혀 비릿한 맛이 새어나왔다. 기분이 그다지 좋지는 않았다.

자신의 생일조차 잊은 채 무언가에 집중할 정도라니, 그가 그토록 절박한 이유는 무엇일까.

“...리제.”

문 밖에 서있을 누군가를 부르자, 이윽고 문이 열리며 한 시녀가 들어왔다.

제 눈 밑에 있는 점을 이따금 만지는 버릇이 있는 시녀. 아마도 에반과 가까운 이를 꼽자면 그녀이지 않을까.

“아가씨.”

“내일은 에반의 생일이더군요. 알고 있었나요?”

“아, 그랬나요?”

정말로 몰랐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는 시녀의 모습에 실소가 새어나온다.

그녀조차 모르고 있었다. 에반과 자주 대화한다던, 심지어 로페나와도 친했을 그녀조차 그의 생일임을 모르고 있었다니.

어느새 짙푸른 눈동자는 차갑게 식어 내려갔다.

어느 순간부터 잠시 잊고 있던 생각이 떠올라서, 저도 모르게 입술을 짓씹는다.

유리스, 자신은 이 공작저를 지독히도 싫어하지 않았던가. 자신이 싫어하는 것은 이런 부분이었다.

겉으로는 그리 잘해주는 듯, 언제나 그 입은 웃고 있었지만 정작 눈은 웃고 있지 않았다.

그리 가까운 사이임에도, 생일조차 알지 못했다는 것이 말이나 되는가.

“...가보세요.”

더 이상 물어볼 것은 없었다.

그저 실망만을 더한 이 결과에 옅게 탄식하며, 제 책상 앞에 쌓인 서류들을 거칠게 흩뜨려 놓았다.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이내 얼굴을 천천히 쓸어내렸다.

달력에 작게 그려진 동그라미. 로페나의 말을 듣곤 그의 생일이 내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예전이라면 그저 알고도 넘어갔을 터였지만, 어째선지 그냥 넘어가기엔 마음이 거슬렸다.

자신이 태어난 날을 축복하지 못함이란, 도대체 어떤 기분일까.

아무것도 모르는 그의 표정이 떠올랐다. 그리고 늘 밝은 표정을 짓던 그의 얼굴도.

정말로 생일이란 것을 잊은 것인지, 아니면 그저 잊은 척을 하는 것인지 무엇 하나 알 수가 없다는 것이 답답하게만 느껴졌다.

생각해보면 그에 대해 아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자신은 그와 함께 있으면 마음이 편하다면서, 그렇게 붙잡아두었음에도.

여전히 자신은 이기적이었다. 그 무도회 이후로, 변했다고 생각한 자신은 아무 것도 변한 것이 없었다.

다과회에서 얘기를 하기 이전, 그 때와 다를 바가 과연 무엇이 있을까.

그저 그 태도가 차갑지 않을 뿐이었다. 더 이상 입에서 튀어나오는 말에 가시가 섞여있지 않을 뿐이었다.

그저 호위 기사라며 마음을 기대었을 뿐, 정작 그에 대해서 무언가를 알아보려 한 적이 없었다.

로페나가 알려주지 않았더라면, 아마도 그는 자신의 생일을 그렇게 축하도 없이 보냈으리라.

새어나오는 한숨은 무거웠다. 또 다시 답답해진 가슴에 눈살이 찌푸려진다.

그토록 이 공작저의 사람들을 혐오했으면서, 그들과 닮아가는 자신의 모습이 그저 끔찍할 뿐이었다.

닮고 싶지 않았다. 자신은, 그들과 다르게 살 거라 다짐하지 않았던가.

조금은 먼저 물어보았어도 되었을 텐데. 자신은 여전히 그와 가까워지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는 것일까.

겉으로는 괜찮은 척, 이제는 전부 털어놓은 척 하면서도 속으로는 그가 다가옴을 꺼려하고 있는 것일까.

이제는 제게 둘러진 가시를 걷어내도 될 터인데, 그 것이 참으로 쉽지 않았다.

빌어먹게도.

#

“이번에는 너 혼자 가라.”

다시 크리스 경을 찾아가 아이린과 한 얘기를 말해주자, 잠시 나를 쳐다본 그가 그리 답했다.

뭐, 이제는 곧 서임식도 있으니 아예 책임을 맡기려는 건가.

“그러죠.”

흔쾌히 대답하자 그런 나를 물끄러미 바라본 크리스 경이 볼을 긁적이며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내일이 네 생일이더군. 축하한다고 말하면 되나?”

“...저 생일이었습니까?”

“달력도 안 보고 사는 건가? 내일이 네 생일이다. 선물은 딱히 준비 못했는데.”

난생 처음 듣는 소리에 눈을 휘둥그레 뜨니, 오히려 크리스 경도 놀랐는지 눈을 가늘게 뜨곤 나를 흘겨보았다.

에반 프리드의 삶을 살게 된 지는 꽤 되었지만, 기억을 가지진 못했던 탓에 생일을 알진 못했다.

그러고 보면 달력에 내일 날짜가 동그랗게 표시 되어 있긴 했는데, 그게 생일이라는 뜻이었을까.

갑작스레 떠오른 예전 기억에 눈살이 옅게 찌푸려졌다.

생일이라면, 그리 좋은 기억들만 있는 것은 아니었으니까.

잠시 손을 들어 얼굴을 쓸어내린 뒤, 살짝 한숨을 내뱉으며 입꼬리를 비틀었다.

“딱히 축하해주실 필요는 없어요. 그리 특별한 날도 아니지 않습니까.”

정말로, 남들이면 모를까 내게는 특별한 날이 아니었다.

그저 별로 기억하고 싶지 않을 날 중 하나일 뿐.

누군가는 탄생을 축복받았을 날이 자신에겐 그저 저주 받았을 날일 뿐이었으니까.

“...너.”

잠시 그런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던 크리스 경은, 이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숙였다.

“그렇다면야...뭐, 그래도 축하한다. 선물은 못 줘도 이건 거절하지 마.”

“네, 감사합니다.”

씨익 웃으며 어깨를 으쓱이자, 크리스 경도 너털웃음을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험상궃은 얼굴에 어울리지 않게 그려진 입꼬리는 가늘게 호선을 그리고 있었다.

처음에는 조금 무섭기도 했는데, 이렇게 지내다 보니 그가 좋은 사람이라는 것쯤은 금방 알게 되었다.

계속 볼 수 있으면 좋을 텐데.

나중에 아이린이 맞이할 결말을 바꿔서, 모두가 행복하게 웃을 수 있을 때. 그 때 크리스 경이 있으면 참 좋지 않을까.

그렇게 조용히 자리를 뜨는 크리스 경을 잠시 바라보다가, 이내 눈을 지그시 감으며 크게 숨을 들이 쉬었다.

생일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부터 불편해졌던 가슴, 겨울의 차가운 공기가 폐를 가득 채우자 조금이나마 나아지는 것 같기도 했다.

“생일이라.”

어쩌면 이제는 아무 생각 없이 받아들여도 되지 않을까하는 생각도 들었다.

이제 자신은 에반 프리드였고, 에반 프리드는 자신과 꽤나 다르게 살아왔을 테니까.

어쩌면 생일마다 이런저런 선물을 받으면서, 저를 향해 웃어주는 가족과 함께 달콤한 케이크를 먹었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자신은 단지 에반 프리드라는 존재로 정의할 수 없는 존재였다.

그저 에반 프리드라는 몸에 들어와 정착해버린 자신은, 에반 프리드라고 단언할 수 없지 않은가.

그냥 조용히 넘어가는 것이 가장 좋을 터였다. 그렇게 생각하며 감겨 있던 눈을 천천히 떴다.

눈에 보이는 것은 가슴이 시릴 만큼이나 차가운 달빛이라서, 이 겨울이 주는 한기가 한층 더 깊어진 것만 같았다.

시렸다. 아까까지만 해도 그저 서늘하다 느꼈던 이 바람이 너무도 시려서, 몸이 절로 움츠려 들고 있었다.

입고 있던 옷을 뚫고 들어오는 바람이 뼈를 긁고, 이내 온 몸 구석구석을 훑어 저를 얼어붙게 만들고 있었다.

나뭇잎 하나 없는 고목나무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자신 또한 나와 같다며, 휑한 나뭇가지가 그 어느 때보다도 부각되어 보였다.

­도대체 왜 태어난 거니?

자신이 태어났던 날, 자신을 태어나게 만든 이가 했던 한 마디가 귓가에 맴돌았다.

아무리 잊으려 해도 결국엔 다시 들려오는 그 말에 이를 악문다.

“...하아.”

잇새로 내뱉어지는 숨은 차가웠다. 몸이 꼭 얼어붙어서, 이미 죽은 사람처럼 차갑게 굳어버린 것만 같았다.

생일이란 것이 축복받아야 하는 날이라는 말을 믿지 않았다. 아주 오래 전, 말이라는 것을 제대로 하기도 전인 어린 시절부터.

자신은 생일이 싫었다.

그냥 이대로, 아무도 모른 채 조용히 이 날이 지나갔으면 좋으련만.

그렇게 하늘을 바라본 시선을 거둔 채 다시 천천히 앞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낙엽이 떨어져 퍼석거리는 길은, 오늘따라 그저 질척이게만 느껴질 따름이었다.

그 한기가 녹아들어, 제 발을 붙잡고 밑으로 끌어내리려 하는 검은 늪처럼.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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