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화 〉 겨울(1)
* * *
새하얀 하늘이었다.
여전히 푸른색이었으나, 산산히 부서진 구름 조각들이 떨어져 세상을 하얗게 물들였다.
섧게 지는 꽃마저도 이제는 하얀색을 띄어, 남는 것은 그 색을 잃어 쓸쓸해 보이는 나무와 땅.
언제나 온 몸을 감싸던 훈풍이 사라지고 그 자리엔 한기가 남아서,
기껏 피어올랐던 생명들이 다시 태동할 때를 위하여 땅속으로 숨어드는 그 계절을.
사람들은 겨울이라 불렀다.
저마다 형형색색으로 물들었던 나무는 이제 없었다.
이제는 제 헐벗은 몸을 쌓인 눈으로 겨우 가리며, 그렇게 겨울을 버텨낼 뿐이었다.
회색과 하얀색, 그 차가운 색으로 물들여진 계절 속에서 나는 그 무엇보다도 바쁘게 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손에 쥔 검이 잘게 떨린다.
검자루를 잡은 손에서 흐르는 땀이 자꾸만 검을 미끌거리게 만들어서, 동작 하나하나에 모든 신경이 쏠렸다.
앞으로 찌르는 것도, 단지 휘두르는 동작만으로도 많은 체력이 소모되는 감각이란 이전과는 다른 쾌감을 온 몸에 전해주는 듯 했다.
“꽤나 열심히 하는군. 태도가 아주 확 바뀌었어.”
그런 내 모습을 바라보는 크리스 경은 이내 흡족한 듯 한 차례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태도가 바뀌었다니, 확실히 그럴지도 몰랐다.
저번 무도회 이후로 나는 평소보다 더욱 훈련에 열심히 임했으니까.
이전까지는 그저 일과일 뿐이라 여겼던 훈련이었으나,
이제는 그 훈련에 조금은 진심을 담아도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앞으로 내가 싸워야 할 이들은 지금 수준에서 결코 상대할 수 없을 테니까.
황태자, 그를 떠올린 내 얼굴에 서서히 음영이 지기 시작했다.
아마도 여주가 등장한 시점에서 마스터란 경지에 도달했던가.
익스퍼트, 자신의 경지가 그리 낮은 것은 아니었다. 허나 미처 예상치 못한 적을 상대할 수 있는가?
아마 불가능 하겠지.
마스터란 경지가 얼마나 힘든 것인지 알고 있었다.
애초에 에반 프리드가 도달한 경지 자체가 어떤 사람이 평생을 갈고 닦아도 다다를 수 없는 경지란 것도 알고 있었다.
하여 그 재능을, 이리 쉽게 버릴 수는 없었다.
그녀가 호위 기사로써 나를 인정했다는 사실은 가슴을 후련하게 했지만, 한편으론 어깨에 무게를 더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내게 주어진 책임, 그 어떠한 위험에서도 그녀를 지켜야 한다는 것.
그저 빙의자인 내가 지킬 필요가 없는 책임이기도 하였지만, 이젠 쉽사리 손을 놓을 수도 없었다.
이미 그녀에게 깊이 얽혀버리지 않았던가.
온 몸이 땀에 젖어 무거웠다. 물을 먹은 솜처럼, 한껏 무거워진 몸이 새하얀 증기를 내뿜고 있었다.
한 발자국, 또 다시 한 발자국. 폐를 잡고 찢는 것만 같은 통증이 느껴져 숨이 턱밑까지 차올랐을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검을 쥔 손의 힘을 풀었다.
차갑게 얼어있던 땅이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열기에 녹아드는 모습을 보자, 절로 헛웃음이 지어졌다.
도대체 무언가에 이렇게 열중해본 것이 얼마만인지. 아마도 어렸을 때가 마지막이지 않았을까.
내가 다른 이에게 순수하게 칭찬을 들었던, 그 마지막 시기가.
잠시 옛날 기억을 떠올리자 입맛이 썼다. 구태여 기억하지 않아도 될 기억이었다.
이제는 아무런 상관없는 기억이지 않은가. 아니, 적어도 지금은 떠올리지 않아도 되는 기억이었다.
언제까지고 옛 기억이 자신을 옭아매게 할 생각은 없었으니까.
잠시 눈을 지그시 감았다가, 폐를 가득 채우는 차가운 공기에 다시 눈을 뜬다.
눈을 뜨자 보이는 건 전과는 달리 삭막한 광경이었지만, 그 삭막함이 주는 고요가 오히려 맘에 들었다.
이 조용함, 자연에서 오로지 겨울에만 느낄 수 있는 이 차가운 정적이 뜨겁게 달궈진 가슴을 천천히 식혀주는 듯 했다.
“표정이 아주 폈어.”
뒤에서 들려오는 걸걸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크리스 경이 씨익 웃으며 내 등을 세게 두드렸다. 얼마나 세게 두드렸으면 내 허리가 젖혀지는 걸까. 순간 찾아오는 고통에 눈살을 살짝 찌푸리자 크리스 경은 크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이제 곧 서임식이지? 벌써 이렇게 되다니, 시간도 참 빠르군.”
“...그러게요. 여름이었나요. 제가 호위 기사가 된 게.”
“어떻게 아가씨 마음을 얻었는지는 몰라도, 지금이 훨씬 보기 좋긴 하군. 너도, 아가씨도 예전과는 확연히 틀리니까.”
그 말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이다가, 문득 치솟은 의문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도 예전과는 다르다니, 그 말이 의미하는 게 도대체 무엇일까.
허나 대놓고 물어볼 수는 없어서, 어깨를 움켜쥔 크리스 경을 바라보곤 피식 웃어보였다.
“제가 예전하고 조금 다르긴 하죠?”
“그래, 호위 기사 얘기 꺼내기 전만 해도 당장 죽을 것처럼 보였으니까. 사실 그 날 널 데리러 가면서도 조마조마 했거든. 혹시 이 녀석이 문을 열면 죽어있지는 않을까.
“...죽다뇨.”
그 말에 눈매가 가늘어진다. 당장 죽을 것처럼 보였다니, 도대체 에반이란 녀석은 이 전에 어떤 삶을 살아왔던 건지.
허나 그런 상념은 금세 흩어졌다. 저 멀리서, 낙엽들을 밟으며 뛰어오는 가벼운 발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었다.
“기사님, 여기 계세요?”
늘 듣는 목소리였지만, 저 목소리를 들으면 기분이 괜스레 좋아지는 것은 어째서일까.
잠시 숨을 가다듬곤 크게 대답하자 이내 로페나가 쪼르르 하고 다가와 고개를 불쑥 들이밀었다.
“우와, 땀 엄청 흘리셨네요.”
“오늘은 좀 열심히 했거든. 근데, 갑자기 나는 왜?”
“아가씨가 찾으셔요.”
아이린이 나를 찾는다고? 허나 아무리 생각해도 그녀가 나를 찾을만한 일은 딱히 없어서, 나는 의문스런 표정으로 크리스 경을 바라보았다.
“글쎄다. 나도 잘 모르겠는데. 급한 일이라도 있으신가 보지.”
“그래도 평소에 훈련 시간엔 안 찾으셨는데 말이죠.”
크리스 경의 말대로 무언가 급한 일이라도 있는 것일까.
로페나를 잠시 빤히 바라보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이면서 발걸음을 옮겼다.
뭐, 가보면 알 수 있지 않을까.
#
복도를 걸을 때면, 이전과는 분위기가 참 많이도 달라졌다는 것을 깨닫는다.
처음엔 어색했던 시녀들의 시선도 이제는 꽤나 친근해졌고, 이렇게 옆에 있는 로페나도 처음에는 나를 껄끄러워 했으니까.
물론 다른 시녀에 비하면 금방 친해지긴 했지만.
그 때는 이 복도가 그리 삭막하게만 느껴졌는데, 이제는 이 분위기가 편안했다.
꼭 집에 들어온 것처럼. 아무리 힘든 일이 있더라도 결국 돌아올 곳이 있다는 건 이토록 행복한 것이었다.
그러고보면 최근엔 원래 세계로 돌아갈 생각도 잘 하지 않았던 것 같은데.
아마도 저번 무도회 이후였을까. 그 이후로 아이린의 태도또한 많이 달라졌고.
이따금 저를 향해 보내던 스산한 시선은 이제 더 이상 찾아볼 수 없었다.
가끔은 피식 웃기도 하고, 졸리다며 눈을 비비는 그녀의 모습이 되려 어색하게 느껴지기는 했지만.
그래도 무표정하던 이전보다는 훨씬 나으리라.
“어머, 어디 가니?”
“리제씨, 제 머리 만지지 말라고 했잖아요!”
어느새 다가온 리제가 로페나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내게 묻자, 로페나가 성을 내며 입술을 삐죽였다.
그 모습이 꼭 화난 고양이가 하악질을 해대는 것 같아 피식 웃으니 로페나가 고개를 휙 돌렸다.
참 잘 삐친단 말이지.
“아가씨한테 가고 있었어요. 훈련 중인데, 급하신 일이라도 있는 것 같은데요.”
“그런가? 딱히 우리를 호출하시진 않았는데. 그럼 빨리 가봐. 그래도 땀은 닦아야 하니까 이거 쓰고.”
리제가 건네준 수건을 받아 땀을 닦아내자, 무언가 떠올랐는지 손뼉을 짝, 하고 두드린 그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
“아, 맞아. 편지는 네 방 책상 위에 올려 뒀어. 오늘은 세 통 밖에 없더라.”
“...세 통이요.”
전보다 훨씬 늘었군. 내가 쓰게 웃자 리제는 뭐가 그리 좋은지 입을 가린 채 키득거리며 웃어 대었다.
무도회에 간 뒤로는 주에 한두 번 오던 편지가 아예 하루에 몇 통씩 오는 터라, 솔직히 체념한지 오래였다.
답장을 쓰는 것도 포기했고, 그저 조금 읽다가 봉인도 채 뜯지 않은 나머지 편지들을 쓰레기 통에 던져 넣을 뿐.
이내 생각을 털어내며 한차례 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지금 여기서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리제또한 그걸 알아차렸는지, 이제 자기도 가봐야 한다며 우리 등을 떠밀었다.
“진짜, 도대체 왜 저를 어린애 취급하는 건지 모르겠어요.”
“음, 그러게.”
솔직히 로페나를 보고 어린 애 취급을 안 할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하지만 면전에 대고 그런 말을 할 수는 없어서, 나는 그냥 로페나의 말에 맞장구를 치며 복도를 걸었다.
내가 그렇게 말해주자 또 기분이 풀렸는지, 로페나는 히히 웃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근데 요즘에 훈련을 되게 열심히 하시네요?”
“아무래도 서임식이 곧이니까. 예전에는 조금 게으른 편이었지.”
어쩌면 목표가 생겨서일지도 몰랐다. 아이린의 호위 기사가 되었으니, 적어도 황태자를 제압할 만한 수준의 기사가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솔직히 말하자면 막연한 목표일지도 몰랐지만, 그래도 그런 목표쯤 하나는 있어야 무얼 해도 할 것 같아서.
게다가 서임식이 있으면 곧 사냥제였다.
아마 사냥제에는 내가 나갈 확률이 꽤나 높을 것이었고, 이렇게 준비해두면 그 때 결실을 맺을 확률이 컸다.
이윽고 아이린의 문에 다다르자, 로페나가 문을 두드리며 작게 입을 열었다.
“아가씨, 로페나에요.”
“들어와.”
문이 열리고, 그 안에 보인 것은 차를 홀짝이는 아이린의 모습이었다.
전보다 훨씬 여유로워 보이는 그 얼굴을 바라보자 괜스레 마음이 편해져서, 그런 아이린을 바라보며 작게 고개를 숙였다.
“왔네요. 훈련 중에 불러서 미안해요.”
“괜찮습니다. 어차피 곧 끝낼 시간이었으니까요.”
내가 그리 말하자, 아이린은 피식 웃으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창문 한 켠에 놓인 장미꽃이 눈에 띄었다.
그 장미꽃을 잠시 멍하니 바라보고 있자, 아이린이 그런 날 바라보곤 다시 말을 이어갔다.
“무얼 그리 멍하니 서있나요. 할 말이 있어서 부른 거니까, 여기 앞에 앉아요.”
책상 앞에 있는 작은 소파, 검을 휘두르느라 피로에 절여진 탓일까.
그리 푹신한 소파도 아니었건만, 피로에 절여진 내 몸이 소파에 닿자 마치 구름처럼 푹신하게만 느껴질 따름이었다.
순간 나른해지는 표정을 숨기며 얼굴을 쓸어내리자, 아이린이 나를 바라보며 조심스레 입술을 달싹였다.
"힘들어보이네요."
"그다지 힘들지는 않습니다. 원래 조금 게을리 했을 뿐이었으니까요."
"조금은 쉬엄쉬엄 하세요. 그리 무리할 필요는 없지 않나요."
저를 걱정스레 바라보는 눈빛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이내 옅게 미소를 지었다.
그녀가 나를 걱정해준다는 게 왜 이리 어색한 건지.
저 푸른 눈이 따스하게 일렁일 때면 괜스레 얼굴이 뜨거워져 저도 모르게 숨을 삼켰다.
자신을 향하는 눈빛에 담겨있는 걱정이 참 우습게만 느껴졌다.
처음 만났을 때만 하더라도, 아가씨로 불렀다는 이유만으로 그리 타박을 하던 사람인데.
이제는 자신을 대하는 태도에 독기나 가시 같은 건 하나도 남아있지 않지 않은가.
아이린은 이윽고 내게 이런저런 것들을 물어보았다. 일상과 관련된 시시콜콜한 이야기들.
평소 시녀 들 중 성실하지 않은 이들이 있는지, 공작저 내에 있는 기사들의 태도는 어떠한지.
그런 것들을 대화하다 보면 어느덧 시간이 훌쩍 지나가서, 내 앞에 놓인 차가 금세 식어버리고 말았다.
허나 그윽한 향만큼은 사라지지 않는다.
비록 차는 식어 몸을 따듯하게 만드는 그 묘한 감각은 느낄 수 없었지만, 값비싼 다즐링의 향만큼은 여전히 남아 입안에 감돌았다.
눈을 지그시 감으면 꼭 이 삭막한 겨울에 다시 그 녹음을 맛보는 것 같아서, 그렇게 눈을 감고 있을 때쯤 아이린이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이제 곧 사냥제죠?"
"예, 이제 2주 뒤면 사냥제입니다."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자, 아이린은 이내 지그시 나를 바라보았다.
겨울에 무언가를 사냥할 수 있을까 싶었지만, 이 곳이 판타지 세상인 만큼 추운 날씨에도 멀쩡한 동물들이 많은 탓일 터였다.
달칵
아이린이 들고 있던 찻잔이 접시에 내려지며, 이윽고 나를 바라보던 그녀가 입을 열었다.
"아마 사냥제가 끝나면 더 바쁠 거예요. 그 이후에 열리는 행사라던지, 이제 서임식을 마치면 정식으로 호위 기사가 될 그대이니 그런 곳에는 항상 따라 와야겠죠. 지금처럼 여유를 가지긴 힘들 거란 소리에요."
"...각오는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지금 이렇게 열심히 하고 있지 않은가.
아마 서임식을 마치면 지금처럼 크리스 경이 대신 있을리도 없을 터.
정원에 앉아 쿠키나 먹으며 여유로이 보낼 시간은 이제 얼마나 남지 않았다는 것쯤은 나또한 잘 알고 있었다.
허나 이런 얘기를 그녀가 꺼내는 이유를 알 수가 없어서, 나는 그저 아이린을 힐끔 바라본 채 조용히 차를 홀짝였다.
"...솔직히, 저번에 무도회에 그렇게 데려간 것에 대해서는 아직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저는 괜찮습니다. 어차피 그 때에도 조금 놀랐을 뿐 별다른 감정은 없었으니까요."
내가 손사레를 치며 미안해하지 않아도 된다 말했으나, 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어갔다.
"그 때도 말했지만, 어디까지나 제 충동에 불과한 선택이었으니까요. 그래서 그대에게 사과도 할 겸 무어라도 주고 싶었는데...아무래도 딱히 생각 나는 것이 없네요."
"아무것도 안해 주셔도 괜찮습니다. 정말로요."
"그러니까 저랑 나가죠. 그대랑 처음 만났던, 그 날처럼 말이죠."
"...네?"
그 말에 나는 멍하니 아이린을 바라보았다.
갑자기 나간다니, 내가 옅게 눈살을 찌푸리자 아이린은 피식 웃으며 다시금 입을 열었다.
"그대에게 마지막 남은 여유, 제가 함께 해도 되냐는 말이에요."
다시금 그 입가가 부드러운 호선을 그린다.
그런 미소를 볼 때면, 어째선지 머릿속이 새하얗게 되는 것만 같아서.
나는 그저 멍하니 고개를 끄덕일 따름이었다.
정말로, 그렇게 웃는 것은 반칙이지 않은가.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