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화 〉 수정궁 아래에서(6)
* * *
“...에반?”
귓가에 들려오는 목소리에 잠시 빠져나갔던 정신이 돌아온다.
방금 보았던 그 미소는 무엇이었을까.
달빛에 스며든 환상이었는지, 아니면 정말로 그녀가 미소 지은 것인지 분간조차 못할 만큼이나 나는 혼란에 빠져있었다.
앞으로, 잘 부탁해요. 에반.
호위 기사라는 것을 인정받았다.
앞으로 그녀가 먼저내치지 않는 한 자신은 쭉 그녀의 호위 기사일 터였다.
하지만 막상 그 것을 그녀의 입에서 듣게 되니, 어쩐지 이 모든 것이 그저 환상으로만 느껴졌다.
볼을 꼬집으면 혹여 이 환상이 흩어질까 봐, 나는 눈살을 찌푸린 채 아이린을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앞으로도 잘 부탁한다는 말씀은.”
“그대가 제 호위 기사를 계속하게 될 거란 얘기죠. 이제 곧 정식으로 서임도 하고.”
그 말에 허벅지를 꼬집자, 느껴져 오는 아릿한 통증에 이를 악물었다.
이건 현실이었다. 놀랍게도.
내가 했던 모든 생각들이 그저 착각에 불과했을까? 허나 그녀는 분명 말하지 않았던가.
분명 며칠 전까지만 해도 나를 내칠 생각을 하고 있었다고.
내가 제아무리 노력하고, 그녀에게 밉보이지 않으려 노력했음에도 그 생각은 변함이 없었을 텐데.
도대체 무엇이 그녀를 변하게 한 것일까. 눈을 지그시 감았다가 이내 뜨며, 나는 힘겹게 입을 열었다.
그녀에게 묻고 싶었다. 무슨 까닭에 생각이 바뀐 것인지.
호위 기사가 하는 질문이라곤 조금 주제넘은 질문이었으나, 아이린은 나를 바라보며 이내 천천히 입술을 달싹였다.
“글쎄요.”
“...네?”
“저도 잘 모르겠네요. 제가 왜 마음이 변했을까요. 분명 처음에는, 그대를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말이죠.”
분명, 아이린과 처음 만났을 때 그녀가 내게 보이는 태도란 서늘하기 그지없었다.
무엇하나 조금이라도 실수하면 스산한 시선을 보내왔고, 간혹 호칭을 헷갈리면 혀를 차며 나를 무심히 지나치곤 했다.
나중에 다과회에서 사과를 한 뒤로 그런 적은 없었지만, 그렇다한들 나를 대한 태도가 확연히 변하는 것도 아니었는데.
그녀의 얼굴에 씌워진 가면이 조금씩 무너져 내려가는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토록 노력했음에도 자그마한 실금조차 보이지 않았던 그 가면이 무너져내려서,
그 속에 있는 감정이 조금씩 고개를 들이밀고 있었다. 푸른 눈은 더 이상 차갑지 않았다.
잔잔한 샘물처럼, 차갑다기 보다는 그저 기분 좋은 시원함에 가까웠다.
청명한 두 눈이 밤하늘을 담아내었다.
별이 반짝이듯, 언제나 빛이 감돌지 않았던 그 두 눈이 반짝이며 그 시선이 내게 향하고 있었다.
그늘이 덧씌워져 있었던 표정도 이제 한결 후련해보여서,
이따금 그녀의 입꼬리가 올라갈 때면 나는 저도 모르게 시선을 돌렸다.
이전까지는 한 번도 웃지 않았으면서,
이렇게 웃으니 그녀의 외모가 특히나 부각되어 보이는 듯 했다.
밤과는 어울리지 않는 선홍빛의 입술이 또다시 호선을 그린다.
그리고 그럴 때면, 저도 모르게 숨을 삼키며 고개를 돌렸다.
그 미소가 제 논 앞에 아른 거려서, 저 휜 달보다도 그런 그녀가 더욱이 반짝이게만 보였다.
마음 같아서는 그녀에게 계속 묻고 싶기도 했다.
어찌하여 그리 마음이 변한 것이냐고, 이렇다 할 무언가를 하지도 않았건만.
내치려 했던 자신을 어찌하여 받아들이게 된 것이냐고. 허나 의미 없는 일 뿐이었다.
그녀는 마음을 정했고, 자신은 이제 그녀의 호위 기사였다.
아마도, 그녀가 훗날 비극을 겪는 그 순간까지도.
그 생각을 떠올리자 가슴에 무거운 돌덩이가 얹힌 듯 몸이 무거워지는 것만 같았다.
그녀가 겪을 비극이란, 후련한 표정으로 미소 짓는 지금의 아이린과 너무도 거리가 멀게만 느껴졌다.
어찌하여 이런 여인이, 그런 최후를 겪게 되는 것일까.
괜스레 가슴이 답답해져서, 저를 바라보는 아이린에게 시선을 떼곤 눈을 지그시 감았다.
어색한 침묵, 그 침묵을 뚫고 들어오는 것은 저 연회장에서 들려오는 왈츠의 음율.
피아노와 바이올린 소리가 어우러져 귓가를 파고드는 그 때에, 왈츠 소리에 섞여 들려오는 목소리가 하나 있었다.
“표정이 안 좋네요. 제가 말해줄 수 있는 것은 다 말해주었는데 말이죠.”
“...아가씨 탓이 아닙니다. 그냥, 가슴이 조금 답답해서요.”
그렇게 말하며 나는 한 차례 쓰게 웃어보였다.
아이린에게, 나중에 그녀가 비참한 말로를 맞이할 것이라며 말할 수는 차마 없지 않은가.
오직 이 세상에서 나만이 아는 사실이었다.
오직 나만.
그 단어가 전해주는 쓸쓸함이란 생각보다도 커다랬다.
분명 곁에 아이린이 있음에도, 이 발코니에 저 홀로 서있는 것만 기분이었다.
발코니 아래에 놓인 수십여 개의 텅 빈 주인 없는 마차들,
이따금 바람을 타고 떨어지는 붉은 색의 나뭇잎들. 그 모든 것들이 자신을 고독하게 만드는 것 같았다.
오직, 나만이.
그 말을 조용히 읊조리다가, 이내 시선을 돌려 아이린을 바라보았다.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탓일까, 나를 따라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는 그녀의 얼굴이 달빛을 머금어 반짝였다.
여전히 무감한 표정이었지만, 이전과는 달리 생기가 감도는 그 모습은 이전보다 퍽 괜찮지 않은가.
언제까지고 이랬으면 좋겠다. 앞으로도, 계속.
발코니에 팔을 걸쳐 턱을 괸 채, 그렇게 허공을 바라보는 아이린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은 무엇을 좇고 있는 것일까. 그저 어둡기만 한 이 밤에서, 그녀는 무엇을 보고 있는 걸까.
그렇게 그녀를 쳐다보기도 잠시, 별이 걸린 그녀의 눈이 내게 닿아 이내 일렁였다.
멍하니 허공에서 부딪히는 시선. 서로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먼저 웃는 쪽은 나였다.
영문도 모른 채 터져 나온 웃음에 입을 가리자 아이린이 그런 나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좀 괜찮아졌나요.”
“...글쎄요.”
어깨를 으쓱여 보인다. 솔직히, 아직 머릿속이 복잡한 것은 매한가지였다.
허나 무얼 어쩌겠는가.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것이 없는데.
“그래도, 아까보다는 나은 것 같습니다.”
당장 할 수 없다면, 나중에 생각하면 될 터였다.
지금 이렇게 눈살 찌푸리지 말고, 입술을 짓씹지 말고.
아직 5년이란 시간이 내게 남아있었다. 조금 여유를 가져도 되지 않을까.
지금은 그저 그녀의 호위 기사란 자리가 위태롭지 않게 되었음을 축복하자.
한결 후련해진 가슴에 옅게 한숨을 내뱉다가, 이내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들곤 눈을 지그시 감았다.
뺨에 부딪히는 바람이, 그저 시원하게만 느껴질 따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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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코니에 올 때와는 달리, 갈 때는 아이린과 함께였다.
촛불 하나 일렁이지 않는 복도를 그렇게 걷다가, 문득 그녀가 발걸음을 멈추어 나 또한 따라 멈추었다.
“......”
복도 한 가운데 휑하니 뚫려 있는 창문,
그 구멍 사이로 희미하게 새어나오는 달빛을 보는 것인지 그녀는 그 창문에 시선을 둔 채 그렇게 가만히 서있었을 뿐이었다.
나도 그녀를 따라 창문을 바라봤지만, 그저 거뭇한 하늘 위에 새초롬히 떠있는 별 몇 개만 보일 뿐이었다.
방금까지 실컷 본 하늘인데, 도대체 무얼 보려고 이렇게 멈춘 걸까.
“아가씨?”
“...역시, 닮았네요.”
무엇을 닮았다는 건지.
창문을 바라보다 이내 나를 힐끔 쳐다본 그녀는, 그렇게 영문 모를 말만 남기곤 다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이제 가죠. 공작저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니.”
벌써 그렇게 시간이 되었던가.
발코니에 있던 시간이 짧다고 생각했건만, 의외로 꽤나 길었던 것일까.
어두운 복도 끝에서 들려와야 할 소리는 더 이상 들려오지 않았다.
사람들이 떠들어 웅성거리는 소리도, 왈츠의 선율도 이미 잠잠해진지 오래였다.
무도회라 해서 또 누군가와 말을 하느라 실수를 하지 않을까 걱정하던 때도 있었는데, 의외로 싱겁게 끝났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것을 노리고 발코니에서 보자 한 것일까.
그리 소란스럽던 이들은 어느새 전부 자취를 감춰서,
연회장에 들어서자 보인 건 바닥을 굴러다니는 빈 잔과 그 것들을 치우는 하녀들의 모습들뿐이었다.
그냥 조금, 허무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토록 긴장을 하면서 왔건만, 리제한테 혼나면서 춤 연습도 했는데.
막상 이리 무도회가 끝나버리니 괜스레 허탈함이 몰려왔다.
사람이 춤 좀 못 출 수도 있지, 어찌 그렇게 화를 내던지.
그 무수한 노력이 먼지처럼 흩어졌다는 사실이 못내 씁쓸해서, 텅빈 연회장을 잠시 바라보다 이내 시선을 떼었다.
이제 이렇게 올 일도 없겠지. 애꿎은 미련은 털어내고, 깔끔하게 떠날 때였다.
차라리 아무도 없는 것을 다행으로 여겨야 하지 않을까.
만약 돌아왔을 때 그 수많은 이들이 있었더라면, 단 둘이서 돌아온 아이린과 자신을 무슨 시선으로 보았을지 안 보아도 뻔했으니까.
아이린은 이 텅 빈 공간에 별 감흥이 없는지, 늘상 짓는 무감한 표정으로 그저 앞을 향해 걸어갈 뿐이었다.
하기야, 그녀는 단순히 얼굴을 비치러 온 것이라 했으니 무도회 자체에 큰 생각은 없었겠지.
그렇게 그녀를 따라 걸어가자, 어느새 그 많던 마차들은 사라지고 덩그러니 한 마차만 놓인 것이 보였다.
마차 위에 보이는 가시 방패의 문양.
이윽고 우리를 발견한 말이 하얀색의 갈기를 떨며 푸릉 거리고 울자, 마차의 문이 벌컥 열리며 마부가 걸어나왔다.
"오셨습니까? 어서 타시죠. 지금 출발하면, 아마도 해가 뜨기 전엔 도착할 겁니다."
아무래도 우리를 기다리느라 지쳤는지 꽤나 피곤한 기색의 마부가 고삐를 잡으며 입을 열었다.
해가 뜨기 전엔 도착한다는 말에 절로 한숨이 터져나왔다.
그 덜컹거림을 또 느껴야 한다니. 도대체 마차에 언제쯤이면 적응할 수 있을지.
마차에 올라서자, 맞은 편에 자리한 아이린이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무언가 할 말이라도 있는 지, 연신 입술을 달싹거리던 그녀는 이내 힘겹게 입을 열었다.
"...고생 많았어요."
"별 말씀을."
그 말 한 마디를 하는 것이 그토록 어려웠던 걸까. 하지만 그럴 만도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항상 어딘가를 다녀오더라도, 아이린이 내게 이렇게 말한 적은 손에 꼽았으니까.
하지만 고생했다는 말은 조금 모순이 있었다. 애초에 고생할 만한 일도 없지 않았던가.
하여 옅게 미소 짓자, 그런 나를 물끄러미 바라본 아이린이 이내 고개를 돌리곤 입을 다물었다.
그 한 마디 하려고 그리 고민을 한 건가.
문득 그녀가 15살이라는 것이 떠올라서, 피식하고 웃음이 새어나왔다.
한창 수줍어할 나이였다. 비록 그 행동이 자뭇 어른스럽다 한들, 결국 어린 아이이지 않은가.
고개를 돌리자 시야에 들어온 것은 달을 향해 높게 솟아오른 수정궁이었다.
아까는 그 모습을 보곤 긴장에 몸을 움추렸건만, 이제는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저 지나간 한 때에 불과했으니까.
아마도 나중에 추억한다면, 아이린이 자신을 호위 기사로 완벽히 인정한 날로 기억하지 않을까.
공녀와 호위 기사. 이 당연한 관계가 무려 3개월 만에 제대로 인정 받았다는 사실이 우스우면서도, 한편으론 기분이 좋기도 했다.
가슴이 벅차오른다고 하면 너무 과장된 표현일까.
자신이 한 노력이 허사가 아니었다는 것이 가슴을 간질여서, 씰룩이는 입꼬리를 손으로 매만졌다.
이제야 비로소 시작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를 만나고 지금까지가 3개월, 처음에는 그녀와 눈도 못 마주쳤던 기억이 이토록 생생한데.
그녀 스스로 자신을 호위 기사라 칭하며, 앞으로 잘 부탁한다 하지 않았던가.
수정궁을 바라보던 시선을 떼어내 고개를 돌리자 어느덧 지그시 눈을 감은 채 마차에 기댄 아이린의 모습이 보였다.
새근거리는 숨소리, 그렇게 눈을 감은 그녀의 표정은 이 마차에서 내렸을 때 보였던 스산한 표정과는 전혀 달랐다.
그녀가 발코니에서 내게 지었던 미소처럼 편안하고 온화한 얼굴.
공작저에서 남들에게 늘 경계를 하는 것과 달리, 자신 앞에서는 이렇게 경계를 놓는 그녀가 퍽 신기하게만 느껴졌다.
저도 제가 왜 이런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그냥, 그대와 함께 있으면 마음이 편해지네요.
그녀는 알고 있을까. 그녀가 했던 그 한 마디의 말이, 자신에게는 그 어떠한 말보다도 커다란 파문을 일게 만들었다는 것을.
그녀의 죽음을 유일하게 알며 슬퍼했던 이는, 그 한 마디의 말이 그 무엇보다도 소중하게 느껴졌다.
이제 자신은 그녀의 호위 기사가 되었고, 그녀또한 이러한 관계를 인정했다.
원했든 원치 않았든, 이제는 그녀의 운명 속에 섞여 들어갈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었다는 소리였다.
그 생각을 떠올리자 찾아오는 중압감은 꽤나 무거웠다.호위 기사로써 자신은 그녀를 과연 지켜낼 수 있을까.
창밖을 바라보자 보이는 것은 피어오르기 시작하는 여명이었다.
다시금 생명의 박동들이 시작함을 알리는 그 찬란한 신호를 바라보는 자신의 표정은 아마 꽤나 복잡하리라.
그러나 이내 고개를 저으며, 복잡해진 상념을 한 껏 털어내었다.
그저 간단하게 생각하면 되는 일이었다.
아직 여주도, 황태자도 본격적으로 움직이지 않은 지금이라면 모든 것을 막아낼 수도 있지 않은가.
그녀의 처지를 그저 동정할 수밖에 없었던 자신은, 이제 그런 그녀의 호위 기사가 되었다.
하고자 한다면, 이루어 낼 수 있다는 소리였다.
새까맣게 물든 하늘, 그 하늘 사이에 떠오른 달과 별.
하지만 그 것보다 더욱 눈에 들어오는 것은 저 끝에 희미하게 보이는 여명이었다.
이제는 어둠이 끝나고, 다시금 밝은 빛들이 세상을 물들일 때였다.
아이린 또한, 그렇게 되었으면 좋으련만.
그녀의 앞에 있을 비극들을 전부 걷어내는 상상을 하며, 그저 옅게 미소지을 따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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