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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판 속 악녀의 호위기사가 되었다-17화 (17/181)

〈 17화 〉 수정궁 아래에서(1)

* * *

부드러운 바람을 타고 가을이 넘실거린다.

울긋불긋하게 물든 나뭇잎이 그 바람을 타고 춤추다 이내 볼에 닿자,

제 볼에 붙은 노오란 나뭇잎을 살짝 집어 바람에 다시 태워 보낸다.

높게 뻗은 하늘에 피어있는 구름을 그저 멍하니 바라보는 지금은, 그야말로 여유로운 삶이라 할 수 있으리라.

“좋네.”

내가 옅게 웃으며 중얼거리자, 그런 나를 바라보던 로페나가 피식 웃으며 찻잔에 차를 따랐다.

건립일 축제도 전부 마무리 되었고, 이제 앞으로 남은 건 곧 있을 사냥제 하나 뿐이었으니까.

아이린도 소가주 역할을 마무리했고, 이제 밤을 새는 일도 없어 가끔 이렇게 정원에 나와 차를 마시곤 했다.

“그나저나 사냥제 준비는 하고 계세요?”

“뭐, 기껏해야 곰이나 호랑이 같은 게 나오지 않겠어.”

마나를 다루는 몸이었다.

이미 인간의 한계를 훌쩍 뛰어버린 몸.

평범한 사람이라면 그런 맹수를 상대할 수 없겠지만,

칼 하나로 건물을 부수는 익스퍼트의 경지에 다다른 내가 구태여 두려워할 필요는 없었다.

사람도 베어봤는데, 그런 동물 베는 것이 대수겠는가.

사람을 벤다, 라. 그 생각을 떠올리자 괜스레 입맛이 써 차를 들이켰다.

다즐링의 그윽한 향이 입안을 가득 채우자 그제야 조금 답답함이 풀리는 것 같아서,

옅게 한숨을 내뱉곤 쿠키를 하나 집어 들었다.

내가 단 걸 잘 못 먹으니 로페나가 새로 주문한 거라는데, 나름 괜찮단 말이지.

“뭘로 만든 걸까.”

“글쎄요, 코코넛으로 만들었다고는 들었는데.”

코코넛 쿠키가 이 쪽에도 있었던가.

디저트 문화가 꽤나 발달한 터라, 이런 쪽에서는 내가 살던 현대보다 더욱 대단한 것들이 나오곤 했다.

이 쿠키도 그런 것들 중의 하나겠지. 뭐, 역시 먹는 것에서 맛을 포기할 수는 없으니 오히려 좋은 거겠지만.

“근데 크리스 경은요?”

로페나가 묻자, 나는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아가씨랑 같이 있지. 내가 여기 있으면, 크리스 경이 거기 있는 거야.”

어차피 나는 아직 정식으로 서임하지도 않았으니까.

크리스 경이 거기 있는 게 오히려 더 맞다고 할 수 있겠지.

허나 로페나는 눈을 가늘게 뜨더니 이내 입술을 삐죽이며 나를 쏘아보았다.

“크리스 경 나이 좀 생각해주세요. 이제 곧 있으면 예순이 다 되어 간다구요.”

“그렇긴 한데.”

솔직히 그 경지에 이르면 나이는 별 의미가 없다.

수명이 다해 쓰러지는 그 때까지도 아마 정정하지 않을까?

그 또한 마스터는 아니었으나 익스퍼트의 경지였으니까. 아마도 괜찮을 거다. 단지 내가 쉬고 싶어서 그런 건 아니고.

“쿠키 맛있네.”

그렇게 딴청을 피우며 쿠키를 베어 물자, 로페나가 눈살을 찌푸리며 나를 쳐다봤다.

하여튼 크리스 경도 그렇고, 로페나도 그렇고 서로를 꽤 아낀다니까. 누가 보면 부녀지간이라 착각할 수도 있을 터였다.

“표정 풀어. 나도 겨우 시간 내서 이렇게 쉬는 건데.”

“...알았어요. 근데, 그거 들으셨어요?”

“뭐를?”

내가 되묻자, 로페나는 아가씨에게 관심이 없는 거냐며 한차례 타박하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이번에 황태자께서 무도회를 여신다 하셨잖아요. 거기에 아가씨도 초대 받으셨구요. 못 들으셨어요?”

“...그런 걸 들은 기억이 있긴 해.”

그냥 지나가면서 어렴풋이 들었던 것 같은데. 중요한 거였으면 아이린이 내게 진즉에 얘기하지 않았을까.

그나저나 황태자라, 그 이름을 떠올리자 절로 눈살이 찌푸려졌다.

아이린이 죽게 된 원인 중 가장 큰 것이 바로 여주에게 홀라당 빠져버린 황태자였으니까.

물론 제게 반역을 일으킬 거란 소문이 자자한 당시의 아이린을 그냥 두는 것도 이상하긴 했다.

하지만 그런 걸 제외하고도, 영 보기 껄끄러운 사람이라 할 수 있었다.

사랑이라는 감정이 도대체 무엇인지는 몰라도, 고작해야 사랑이란 것 하나 때문에 나라의 총 전력을 일으켜 5대 가문 하나를 박살내다니.

그 것이 사실인지도, 아니면 정확한 증거가 있는 지도 모른 채 오직 여주가 말한 ‘예언’을 듣곤 곧바로 행동하지 않았던가.

조금만 이성이 있었다면 먼저 진위부터 파악하는 게 옳았다.

아이린이 정말 반역을 일으킬 생각이었는지, 설령 검이 있다한들 그 검 끝이 어디로 향해있는지는 알아보았어야 했다.

차갑게 가라앉은 표정 속에서 떠오르는 것은 한 줄기 분노였다.

아이린을 동정했기에 품는 감정이 아니었다. 단지 그 어리석음에 대해 통탄할 뿐.

일국의 황태자라면, 조금 더 이성적으로 판단해야 하지 않은가.

사랑보다는, 5대 가문이 지니는 그 이름의 무게를 좀 더 살폈어야 했다.

아이린은 끝까지 반역에 대해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제 목에 겨누어진 칼을 보곤 작게 미소 지었을 뿐이었다.

단두대 위에 올라섰을 때, 그리고 그 차가운 날이 목을 향해 떨어질 때까지도.

반역에 대해 아무런 증언도 하지 않은 채 죽은 그녀는 무슨 생각을 하며 죽었을까.

아마 알 수도 없을 테고, 그걸 알게 될 상황이 오는 것을 바라지도 않았다.

“...음.”

정말로, 바라지 않았다.

뜨거운 차를 다시금 들이켰지만, 속에 들어가자마자 다시 차갑게 식어 내리는 듯 했다.

그 달던 쿠키가 어째선지 쓰게만 느껴져서, 씁쓸히 웃곤 찻잔을 조용히 내려 놓았다.

“황태자님을 별로 안 좋아하시나 봐요?”

“...뭐, 성격이 그리 좋으신 편은 아니니까.”

“그건 그렇죠. 그런데도 인기가 많으신 걸 보면 도대체 얼마나 잘생긴 걸까요.”

내 표정이 어두운 것을 눈치 챈 로페나가 물은 질문에 턱을 매만지며 생각에 잠겼다.

잘생기긴 했지. 문득 소설 속에 있었던 황태자의 삽화를 떠올리다가, 고개를 저으며 생각을 털어냈다.

애초에 그저 잘생겼다는 감상만 있을 뿐, 솔직히 말해 기생오라비에 가깝지 않던가.

물론 나중에는 마스터라는 경지에 도달하는 굴지의 강자라는 점은 기억해둬야겠지만.

카이셀 프레이아 디 에반젤리움. 5대 가문이 지켜야 할 황제의 유일한 아들이자 타고난 검재(??)를 지닌 이.

지금은 이 정도만 알아두어도 충분할 터였다. 아이린이 무언가를 하기엔 아직 그럴만한 힘이 없었고, 시간 또한 많이 남았으니까.

삽화 속에서 보았던 그 검은 머리카락이 눈에 아른 거려서, 나는 하늘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

“에반, 잠깐만 여기 와볼래?”

정원에서의 휴식도 잠시, 다시 호위를 위해 아이린에게 가는 도중 한 시녀가 나를 불러 세웠다.

눈 밑에 있는 점이 특징인 시녀, 아마도 이름이 리제였던가.

내가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는 내게 편지 하나를 내밀며 수줍게 웃어보였다.

꼭 화려하게 포장 되어 있는 게, 아무래도 꽤 값비싼 종이 같은데.

내가 그 편지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리자 리제는 이내 손으로 입을 가린 채 대답했다.

“저번에 한 영애분이 전달해 달라 했는데, 내가 까먹고 전해주질 못해서. 아마 프리첼 자작가의 여식이었던 것 같아.”

“...거긴 또 어딥니까?”

“아마 제국 북쪽, 여기서 얼마 안 걸려.”

그럼 그 다과회에 모였던 인원 들 중 하나 겠군. 나는 그 편지를 든 채 옅게 한숨을 내뱉었다.

이걸 좋아해야 하는 건지, 아니면 난감해 해야 하는 건지 모르겠다.

아마도 또 내게 온 고백 편지가 아닐까 싶은데. 처음에는 그저 좋았을지 몰라도 벌써 몇 십 통이나 받은 지금은 그저 덤덤할 따름이었다.

누가 보면 기만이라며 손가락질을 하지 않을까.

“기분이 별로 안 좋아 보이네, 이제 질려?”

“...솔직히 그렇죠. 제가 그 사람들한테 관심이 있는 것도 아니고.”

내가 눈살을 찌푸리자, 리제는 뭐가 그리 좋은 지 큭큭대며 웃더니 내 어깨를 두드렸다.

“힘내. 한창 좋을 때잖니.”

그 말에 그냥 어깨를 한 차례 으쓱였다.

서랍에 쌓인 편지만 해도 이걸로 꼭 50번째를 채울 것 같은데 말이야.

이제는 편지를 열지 않아도 그 내용이 보일 것만 같았다.

아마도 구구절절한 표현, 예를 들어 마치 온 세상의 숲을 한데 모아 깎아낸 보석이 있다면 그대의 눈과 같을 겁니다­ 같은 표현.

이런 끈적한 구애를 받는 것은 난생 처음이라 꽤나 놀랐지만, 이젠 그냥 무덤덤했다.

하나같이 내 외모에 대한 찬양이나, 그게 아니라면 어린 나이에 다다른 익스퍼트란 경지에 대한 경탄이었으니까.

결국 한 순간에 혹해서 보낸 러브 레터란 말이 아니던가.

그런 사람들에게 내가 관심 있을 리도 없을뿐더러, 애초에 지금 그런 이들에게 신경 쓸 시간도 없었다.

나는 호위 기사의 신분, 내가 누군가에 신경을 쓴다면 그 신경은 오로지 아이린의 것일 테니까.

애초에 다과회에 있던 이들은 하나 같이 경박하지 않았던가.

오로지 제 주변에서 벌어지는 사건사고에만 관심 있었을 뿐,

영양가 있는 이야기라곤 하나도 하지 않았으니 그런 이들을 좋아하게 될 리도 만무했다.

그리고 외모도, 흠.

아이린의 외모를 따라올 이가 과연 있긴 할까.

아무리 소설에서 악녀라 불렸지만 그 호칭 만큼이나 유명한 것이 그녀의 외모였다.

순백의 깃털을 모아 만들어낸 것 같은 새하얀 머릿결,

하늘의 청명함을 담아내어 깎은 보석과도 같은 벽안, 그 머리카락만큼이나 새하얀데다 살결도 비단처럼 고운 그녀의 피부까지.

그녀의 외모를 칭하는 수식어는 하나같이 칭찬 뿐이었다.

나또한 그런 수식어와 크게 다르게 생각하지도 않았고.

아마도 여주가 등장한다면 다시 생각해보겠지만,

아무래도 지금 당장은 아이린의 곁에 항상 있는 내가 외모에 혹해 누군가를 좋아하게 될 가능성이 없다고 해야 할까.

드득­

[평안하신가요. 조금이나마 참으려 했지만, 어째선지 들끓는 마음을 잠재우기가 쉽지 않아 이렇게 편지를 적어봅니다...그대의 숲을 담은 듯한...하여, 저와 함께 이번 무도회에 참가해주실 수 있으실지 궁금합니다...]

편지를 뜯어 예상과 조금도 다르지 않음에 헛웃음을 짓기도 잠시,

뒤에서 느껴진 기척에 고개를 돌리자 저 복도 끝에서 아이린의 모습이 보였다.

내게 다가오기라도 하듯 시선을 내 쪽에 고정한 그녀를 빤히 바라보자, 이내 내게 다가온 그녀가 편지를 쥔 손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또 편지를 들고 있네요. 고백이라도 받았나요?”

“...별 관심은 없습니다.”

“그대에 대한 찬양일색을 늘어놓았겠죠. 이번에는 어디를 칭찬하던가요, 눈? 코?”

“눈이요.”

내가 무덤덤하게 대답하자, 편지를 힐끔 바라 본 그녀가 조소를 지은 채 시선을 돌렸다.

“그대도 참 좋겠군요. 이토록 많은 영애들에게 관심을 받다니, 다른 자제들이 보면 그대를 질투할 지도 모르겠어요.”

“다른 사람에겐 관심 가질 일은 없습니다. 전 아가씨 한 사람만 신경 쓰기도 벅차니까요.”

내가 그리 말하자, 아이린은 어쩐지 멍한 표정으로 나를 응시하다 이내 눈을 가늘게 뜨며 입을 열었다.

“...사람 헷갈리게 하지 말아요.”

무엇을 헷갈렸다는 건지. 그런 그녀를 잠시 바라보다가 문득 생각난 것을 입에 담았다.

아까 그 편지에 적힌 것도 그렇고, 곧 있으면 황태자가 연회를 연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녀가 참가한다면 응당 나또한 따라갈테니, 미리 물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터였다.

“그, 황태자께서 여신다는 무도회에 참여하실 생각입니까?”

“무도회라. 그런 것이 열린다는 얘기가 있었죠.”

별 관심도 없던 건가.

허나 황태자가 여는 것에 그녀가 불참하는 것은 상식적으로 불가능했으니, 아마 가기 싫더라도 참여하긴 해야겠지.

그 생각을 아이린 또한 떠올렸는지, 한숨을 내쉬곤 내게 시선을 두었다.

“무도회에 가려면 같이 갈 사람이 필요하겠죠.”

“...혼자 갈 수는 없을 테니까요. 춤이란 곧 짝이 필요한 활동이니.”

“저와 같이 가죠.”

방금 내가 무슨 말을 들은 걸까. 순간 내 귀를 의심하며 아이린을 바라보자,

아이린은 여전히 무감한 시선을 내게 보낸 채 다시 입을 열었다.

“제 파트너로, 같이 가달라는 얘기에요.”

그 말에 내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마치 시간이 멈춘 듯, 무표정한 아이린의 얼굴을 바라보는 내 시선 속에 섞인 것은 오직 당황뿐이었다.

일렁이는 푸른 눈동자 속에는 한 치의 거짓도 담겨있지 않았다.

방금 내뱉은 말이 정말 진실인 듯, 저를 또렷이 바라보는 시선이 폐부를 꿰뚫는 것만 같았다.

허나 그래서 더욱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무도회의 파트너라니, 그런 것을 자신에게 부탁하다니.

처음에는 그저 잘못 들은 것이라 생각했다. 아마 말 실수를 했으려니, 그렇게 생각했는데.

다시금 내뱉어진 말의 의미는 전혀 달라지지 않은 탓에, 나는 그저 아이린을 황망한 시선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이 상황을, 누가 이해 좀 시켜줬으면 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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