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화 〉 축제(5)
* * *
“이제 손 좀 놓죠.”
어김없이 들려오는 퉁명스런 목소리에 잡고 있던 손을 놓자, 아이린이 주변을 둘러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수많은 사람들 틈 사이에 낀 지금의 모습이 그다지 맘에 들지 않는 것일까,
아까 누군가와 부딪혔던 어깨를 조심스레 매만진 그녀의 입에서 들려온 목소리는 아까와는 달리 꽤나 서늘했다.
방금까지만 해도 꽤 기분이 괜찮았던 것 같은데.
도대체 무얼 봤길래 이토록 표정이 안 좋아진 걸까.
“사람이 너무 많네요.”
“축제이지 않습니까. 아무래도 사람이 평소보다 훨씬 많을 거라 생각합니다.”
“위에서 볼 때는 그렇게 많아보이진 않았는데. 지금은 숨조차 쉬기 힘드네요. 여기서 무얼 기다리는 거죠?”
“글쎄요. 유랑단이라도 있지 않겠습니까?”
아마 소설 속 축제파트에서 유랑단을 구경하는 장면이 있지 않았던가.
내가 그 장면을 떠올리며 대답하자, 아이린은 ‘유랑단...’이라며 중얼거리곤 내게 시선을 돌렸다.
“유랑단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는데 말이죠.”
그건 조금 의외인데. 이런 것에 관심이 많을 줄 알았더니,
유랑단이라는 단어가 제 흥미를 꺼트렸는지 그녀는 다시 그 무감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가죠.”
“...알겠습니다.”
다시금 차가워진 그녀의 얼굴을 보며 쓰게 웃는다.
이런 것에 관심이 있었다면 차라리 나았을 텐데, 그녀가 좋아할만 한 게 과연 무엇이 있으려나.
평소에 쉴 때면 읽는 것은 책 몇권에 불과했고, 그 책도 심지어 학문이나 경제와 관련된 것이었으니까.
쉽사리 그녀의 취향을 알 수가 없어서 내 얼굴에 낭패감이 떠올랐다.
하지만 아직 축제에서 볼 것은 많이 남았고, 나는 한 번 어깨를 으쓱이곤 아이린의 옆으로 다가갔다.
“혹여 보려던 게 있으십니까?”
“아뇨, 축제에서 무엇을 하는지 대강 본 적은 있지만...인상적인 것은 없네요.”
“그렇습니까.”
의외로 그렇게 당황스럽지는 않았다.
유랑단에 대한 반응이 그다지 좋지 않았을 때부터 어쩌면 곧이어 시작될 행진이나 퍼레이드에 관심이 없으리라 생각했으니까.
다만 아까 봐두었던 행사 하나가 머릿속에 남긴 했는데, 이게 과연 그녀의 관심을 끌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
“혹시, 이 행사엔 관심이 있으십니까?”
“...마술?”
“네, 이건 좀 괜찮을 것 같아서요.”
내가 내민 전단지를 잠시 바라보던 아이린은, 이내 고개를 선선히 끄덕이며 대답했다.
“한 번 구경이나 해보죠.”
#
“...이런.”
중세의 마술 공연에 기대한 내 잘못일까.
눈 앞에서 펼쳐지는 우스꽝스런 광경에 입에서 절로 탄식이 새어나왔다.
처음에는 호기심으로 반짝이던 아이린의 눈에 담긴 것은 이제 얕은 짜증이었고,
이따금 눈을 마주칠 때면 나를 차갑게 바라보는 시선에 나도 모르게 고개가 숙여졌다.
나라고 이렇게 수준이 낮을 줄 알았을까.
하다못해 비둘기라도 제대로 꺼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자신을 마술사라 소개한 이가 보여준 것들은, 실상 마술이라 하기도 부끄러운 것들이었다.
카드 셔플을 실수하는 것도 모자라 제가 섞은 카드를 바닥에 떨어트리고,
그럼에도 아무렇지 않은 척 손가락을 꼬물거리며 무언가 대단한 게 있는 척을 시작했을 때 이미 모든 기대가 허물어졌다.
그래, 나는 망했다.
마술 공연이 끝난 뒤에 아이린은 내게 말조차 걸지 않았다.
그냥 내 앞에서 묵묵히 걷기만 할 뿐, 로페나랑 크리스 경이 어디 있는지도 묻지 않았다.
그녀가 걸을 때마다 주변이 얼어붙는 것만 같아서, 나는 순간 지금의 계절이 겨울이라고 착각할 뻔했다.
“...죄송합니다.”
“......”
“설마 추천해드린 게 이렇게 재미없을지는 몰랐습니다.”
“사전에 알아보지도 않고 추천한 건가요.”
돌아오는 대답은 하나같이 가시가 박힌 것 들 뿐이라, 나는 그저 쓰게 웃은 채 고개를 숙이는 것이 전부였다.
이런 것을 바란 것이 아니었는데.
어느덧 축제라는 말에 눈동자를 빛냈던 그녀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이 상황이 지루한 듯 주변을 무감한 얼굴로 바라보는 아이린만이 남았을 뿐이었다.
실망이라도 한 것일까. 괜스레 입 맛이 씁쓸했다.
좋은 마음으로 시작한 일이었건만, 그녀가 품었던 기대를 혹여 내가 무너트린 게 아닐까.
어느새 나를 앞서 홀로 걷고 있는 그녀의 분위기는, 주변의 색이 흐려지는 것처럼 보일 만큼 싸늘해보였다.
그토록 다채로웠던 빛깔들이 흐려지고, 이내 모노톤의 단조로운 배경으로 변해간다.
어두운 색의 도트로만 찍어낸 배경이 아마 이런 느낌일까.
역동적이던 사람들의 물결이 서서히 멎어가며, 드높던 하늘의 색이 점차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허나 그렇게 시간이 흘렀음에도, 여전히 아이린은 입을 열지 않았다.
축제란 것에 대한 기대감을 잃은 듯, 공작저에 있을 때처럼 무표정한 얼굴.
탁한 물감을 뿌린 듯, 그저 흐릿한 감정만이 묻어나는 그녀의 표정에 눈살을 찌푸린다.
내가 원한 것은 이런 것이 아니었다. 그녀가 조금이나마 이 축제를 즐겨주길 바랐던 것이 아니던가.
포기하긴 일렀다. 적어도 이 축제의 모든 것을 그녀가 보기 전까지는.
“저건 어떻습니까?”
잠시 어두워졌던 표정을 힘겹게 풀며, 아이린에게 다가가 밝은 목소리로 물었다.
대답하지도, 그렇다고 반응하지도 않는 그녀였지만.
나는 애써 웃어보였다.
#
“......”
축제에 대해 기대하지 않았다면, 아마 그건 거짓말일 터였다.
분명히 자신의 호위 기사가 축제에 가보는 것이 어떻냐고 물어볼 때만 하더라도,
하다못해 시가지 위에서 나부끼는 유리스의 깃발을 볼 때만 하더라도 자신의 기분은 썩 괜찮은 편이었으니까.
이제는 저번에는 겪지 못했던 건립일 축제란 것을 체험해볼 기회였고,
주변에서 떠드는 축제란 꽤 즐거워보였기에 나름 기대도 하고 있었다.
늘 서류 속에 파묻혀 지내던 자신에게 한 줄기 활력이 될 거라고, 솔직히 그런 생각도 했는데.
허나 이 축제라는 것은 자신이 품었던 기대를 하나도 충족시키지 못했다.
그저 시끄럽고, 귀만 아팠을 뿐. 처음에는 약간 기대했지만, 이내 제 눈에 보이는 것은 한심할 정도로 수준이 낮은 것 들 뿐이었다.
에반이 데려간 그 마술 공연이라는 것도, 결국 사기나 다름없지 않은가.
이미 사라져 버린 기대감을 다시 되돌리는 것은 아마 불가능하리라.
기대가 나름 컸던 만큼, 기분 또한 순식간에 가라앉기 시작했다.
자신이 이 축제에 흥미를 잃은 것은, 어쩌면 그저 마음 한 구석에서 피어오르는 감정에 대한 부정에서 비롯된 것일지도 몰랐다.
주변에 보이는 이들은 전부 웃고 있었다.
근심 걱정 하나 없이, 그저 자신의 눈앞에 보이는 무언가를 보며 웃고 떠들기 바빴다.
손에는 고기가 꽂혀진 꼬치 하나씩을 들며, 다른 손에는 술이 가득 따라진 잔을 든 채로.
소박한 모습이었지만, 그런 그들은 행복해 보였다.
자신과 비교하자면 보잘 것 없을 그런 곳에서 사는 그들은 진심으로 행복해보였고, 진심으로 즐거워보였다.
그런 모습이 들어올 때면, 자신은 그들이 사는 세상에서 소외된 것만 같은 느낌을 받았다.
저들과는 다른 세상, 누구보다 좋은 곳, 좋은 것만 보며 행복할 거라 생각하는 자신이 사실은 전혀 행복하지 않다는 걸 알게 되면 무어라 할까.
아마 비웃을 테지. 거짓말 하지 말라며, 자신들을 기만하지 말라고 할 게 분명했다.
하여 자신은 기뻐할 수 없었다. 이런 축제에 잠시나마 품었던 기대감이 거짓이라도 되는 듯, 늘 지었던 무감한 표정을 지은 채 두 눈에 한기를 담았다.
“...죄송합니다.”
자신이 잘못한 것이 아닌데도, 그저 내 변덕에 불과한 감정에 고개를 숙이는 호위 기사의 모습에 가라앉은 기분이 다시 한 번 나락으로 떨어진다.
마치 늪에 빠져드는 기분이었다. 점점 어두워지는 시야가, 점점 답답해지는 호흡이, 점차 찡그려지는 두 눈이.
시야가 담아내는 것이라곤 오직 밝은 것들 뿐이라, 자신은 마치 그림자 속에 가둬진 것만 같았다.
느릿하게 이어지던 발걸음이 멈추고, 턱밑까지 차오르는 숨을 버겁게 토해낸다.
당장이라도 어딘가에 앉아 쉬고 싶은 마음이 가득해서, 찌푸려진 얼굴을 쓸어내리며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녹안이 보인다. 언제나 시꺼먼 어둠 속에 웅크려 있을 때면 그 어둠을 가르고 찾아오던 그 녹색이 아른거렸다.
모질게 굴어도, 무어라 타박해도, 아무렇지 않은 듯 찾아와 부드럽게 웃던 그 얼굴이 보였다.
“저건 어떻습니까?”
“...에반.”
허나 이번에는 그 표정이 마냥 밝지만은 않았다.
웃고 있는 얼굴이었지만 그 속에 끼어있는 것은 분명히 부정적인 감정이리라.
마치 먹구름이 낀 듯, 얼굴에 옅게 내려앉은 그늘을 바라보자 가슴이 불편해졌다.
그 어둠이 자신 때문에 생겨났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시간이 조금 지나긴 했지만, 오히려 축제는 어두워질 때부터 시작하니까요.”
“......”
대답을 회피한다. 정확히는, 그 눈을 마주치기가 두려웠다.
제 손에 들린 장미를 더 이상 쥐고 싶지 않았다.
독이 든 사과를 삼켰던 그 공주처럼, 저를 유혹하는 붉은 구두를 신어 비참한 끝을 맞이한 소녀처럼.
자신은 그런 후회를 겪고 싶지 않았다.
어둑해진 하늘에 떠오른 별들이 해가 떠오를 때면 사라지는 것처럼, 결국엔 한 순간에 지나지 않을 감정이리라.
그렇기에 애써 무시한다. 귓가를 파고들어 머릿속에 맴도는 그 잔잔한 목소리를 회피하며, 그저 앞만 본 채로 발걸음을 옮긴다.
“여기에 꼬치가 명물이라 하더군요. 관심 없으십니까?”
귓가에 앵앵대는 목소리를 피하려 귀를 덮는다. 그럼에도 그 사이를 파고드는 목소리는 달콤했다. 빌어먹게도.
“아가씨.”
“...에반.”
“이제 곧 있으면 불꽃놀이가 시작됩니다.”
“에반 프리드.”
입 밖으로 튀어나오는 말이란 그 어느 때보다 싸늘했다.
자신은 이미 지친 상태였다. 이제 그만 자신을 놔두었으면 좋겠다.
자신이 빠진 늪은 깊고도 차가우니까, 자신에게 내미는 손을 그만 거두었으면 좋으련만.
주변의 공기가 얼어붙을 만큼이나 싸늘한 말을 듣고도, 자신의 호위 기사는 여전히 미소를 짓는다.
마치 깃털로 만들어진 붓으로 그려낸 것만 같은, 더없이도 부드러운 미소를.
“...그냥, 한 번만 봐주셨음 합니다. 제가 축제 얘기를 꺼낸 것도 아가씨가 조금이나마 편히 있기를 바라고자 한 얘기였으니까요.”
그런데, 그리 즐거워하시는 것 같지는 않네요. 씁쓸히 웃으며 눈살을 찌푸리는 그 표정이 눈에 밟혔다.
자신의 기분이 가라앉은 것은 그의 잘못이 아니었다. 그저 자신의 변덕이었을 뿐.
“건립일 축제의 불꽃놀이는 제국에서 가장 유명한 것이라고 들었습니다. 한 번 보시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
그제야 어두워진 거리가 눈에 들어온다. 무언가를 기다리며 하늘을 바라보는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 하늘이, 자신이 기억하는 것과 달리 무척이나 어둡다는 것도.
“밤...인가요.
그 질문에 자신을 빤히 바라보던 에반은, 이내 어깨를 으쓱이며 입을 열었다.
“시간이 많이 지났습니다. 아마 이번 불꽃놀이가 끝나면 오늘의 축제도 여기서 끝이겠죠.”
끝이라, 그 말에 조소를 짓는다. 자신이 오늘 이 축제에서 즐긴 것이라곤 하나도 없었다.
자신 만의 세계에 빠져서, 그렇게 이 거리를 서성였을 뿐이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제게 들리는 말에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고.
그럼에도 에반은 여기에 있었다.
아무렇지 않은 듯, 별 불만이 있는 내색조차 비치지 않은 채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도대체.
이해할 수가 없었다. 자신이라면 진즉에 포기하고 입을 다물었을 텐데,
아직까지도 불꽃놀이를 보자며 말하는 자신의 호위 기사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도, 자꾸만 시선이 이끌리는 것은 어째서일까.
피유우
하늘을 날아가는 붉은 색의 궤적을 바라본다.
어두운 하늘을 가르고 날아가는 형형색색의 불꽃들이 피워내는 여러 송이의 꽃들.
마법으로 만들어진 폭죽이 만들어내는 불꽃은 더없이도 찬란했기에, 그 것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을 단번에 빼앗아간다.
“아름답지 않습니까?”
“......"
그 칠흑과도 같은 어둠에서 피어나는 꽃들은 정말로 아름다웠다.
마치 제게 희망을 속삭이는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이토록 부정적인 감정 속에 파묻혀 있음에도, 언젠가는 그 것을 이겨낼 수 있다고 말하는 것만 같았다.
하늘에서 타오르는 불꽃을 바라보던 시선은 이내 자신의 호위 기사를 향했다.
저 새까만 하늘을 빛내는 불꽃이 신기한 건지,
멍하니 하늘을 쳐다보는 그의 얼굴은 어쩐지 바보 같아 보이기도 했다.
대화하고 싶지도 않은데 다가와서는 혼자 이런저런 말을 내뱉는다.
그도 알고 있을 터였다. 내가 자신이 하는 얘기를 듣고 있지 않음을. 가끔은 모진 말을 내뱉고, 차갑게 말을 끊으며 쏘아붙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그는 웃었다.
그런 그를 바보가 아니면 무어라 부를 수 있을까.
아무리 모질게 말하더라도 결국 제게 와 미소를 짓는, 그는 분명 바보이리라.
"...바보 같네요."
"네?"
"못 들었으면 됐어요."
무슨 말이냐며 묻는 에반을 빤히 쳐다보다가, 이내 고개를 돌려 다시 하늘을 바라보았다.
저도 모르게 튀어나온 말이었으니, 자신도 그런 말을 내뱉은 이유따위는 알지 못했다.
다만, 하늘은 이제 더 이상 어둡지 않았다.
어둠이 눈을 흐리게 만들지도,가슴을 답답하게 죄여오지도 않았다.
밝은 빛이 터져나감과 동시에 흐렸던 시야가 탁 트이기 시작한다.
퍼어엉
이윽고 날아오른 녹색의 폭죽이 하늘을 물들였다.
어느때보다도 더욱 밝고 찬란한, 마치 이 하늘에 태양이 다시금 떠오른 것만 같은 그 불빛이 밤하늘을 화려하게 물들였고.
그 녹색을 바라보는 눈이 아주 살짝, 부드럽게 휘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