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화 〉 축제(4)
* * *
“순찰이라 해도, 제가 구태여 순찰할 타당한 이유가 있긴 할까요.”
이 질문을 듣는 순간, 무심코 터져 나올 뻔한 웃음을 겨우 삼켰다.
왜 나가냐고는 안 하는 건가. 물론 나야 아이린이 나가겠다고 하는 편이 훨씬 좋긴 했지만.
그런 아이린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입 안으로 스테이크 한 조각을 넣곤 우물거렸다.
“...에반?”
내가 빨리 대답해줬음 하는 듯, 눈살을 작게 찌푸린 그녀가 내게 물었다.
이런 반응은 처음 보는 거라 조금 더 보고 싶긴 한데, 계속 그랬다간 그 손에 들린 나이프가 내게 향할 것 같아서.
나는 고기를 삼킨 뒤 천천히 입을 열었다.
“건립일 축제란 게 그냥 축제가 아니잖습니까. 5년마다 한 번씩 열리는 건데, 제대로 열리고 있는지 확인한다 말하고 나가면 되지 않을까요?”
“음.”
그 말에 잠시 눈을 지그시 감은 아이린은 이내 한차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괜찮네요. 근데, 그렇게 되면 서류들은.”
“그런 것들은 미래의 자신에게 맡기는 거죠.”
“...하기야, 당장 급히 처리할 것들은 이미 해두었으니까요.”
사실 내가 이렇게 제안한 것도 조삼모사와 다름없었다.
그녀가 가주로써 해야 할 업무는 아직 쌓여있었고, 축제를 언제 즐기던 그 시기만 달라진 것이었으니까.
하지만 지금 내가 한 선택이 조금이나마 나은 선택이길 바랄 뿐이다.
새벽에 보았던 그녀는, 아무리 봐도 너무 지쳐 보여서. 도저히 가만 둘 수가 없었으니까.
아까보다 식사하는 속도가 훨씬 빨라진 아이린을 바라보다가, 이내 피식 웃으며 포크를 들었다. 로페나한테도 말해줘야겠지.
#
“네?”
로페나는 내가 꺼낸 말을 듣다가, 이내 무슨 소리냐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조금 이따가 아가씨가 축제에 갈 예정이야. 너도 아가씨의 전속 시녀니까, 준비해두라고.”
“...진심이에요?”
“내가 너한테 거짓말 할 이유가 뭐가 있겠니.”
로페나는 잠시 눈알을 또르르 굴리다가, 이내 내가 거짓말이 아니라며 손을 내젓자 들고 있던 쿠키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입에 쿠키를 앙 하고 물더니, 이윽고 CD가 들어가듯 쿠키가 입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저런 건 어떻게 하는 건지, 가끔 로페나를 보면 신기한 광경을 여럿 볼 수 있어 눈이 즐거웠다.
대부분이 먹는 것과 관련돼있긴 했지만, 그런 재주는 아무나 가지는 것이 아니었으니까.
쿠키를 다 먹었는지, 입가에 묻은 부스러기를 털어낸 로페나가 나를 바라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아가씨는 지금 뭐하고 계세요? 왜 나는 안 부르셨지?”
“지금 간단하게 치장하고 계셔. 아무래도 눈에 띄면 안 되니까. 너는 내가 따로 부르러 나온 거고.”
“흠.”
겉으로는 진지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벌써부터 신나는지 눈동자가 연신 흔들리고 있었다.
아무래도 로페나또한 축제가 궁금했을 테니까.
아이린의 전속 시녀라는 직책에 묶여 나가지 못하는 걸 꽤나 아쉽게 생각하고 있을 터였다.
“갈 거지?”
“그런 당연한 거 묻지 말아요.”
하여튼 귀엽다니까.
어깨를 으쓱이는 모습이 귀여워 무심코 로페나의 머리를 한차례 쓰다듬자, 녀석은 그게 불만스러운지 입술을 삐죽이며 나를 올려다봤다.
도대체 키가 얼마나 작은 거지? 나랑 언뜻 봐도 머리 하나 만큼은 차이 나는 것 같은데 말이야.
“진짜 작다.”
“......”
아무래도 키가 콤플렉스인 건가. 순식간에 싸늘해지는 로페나의 표정을 보자 저절로 웃음이 새어나와서, 잔뜩 토라진 녀석이 고개를 홱 하고 돌렸다.
이걸 풀어줘야 하는 걸까. 이제는 이 쪽을 쳐다도 보지 않는 로페나를 보며 피식 웃다가,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에반, 준비는 다 했나요?”
벌써 준비를 다한 건가.
준비한다고 방에 들어간 지 5분도 채 지나지 않았음에도 벌써 채비를 마친 그녀를 빤히 바라보자, 아이린이 눈을 가늘게 뜨며 나를 바라보았다.
“벌써 다 하신 겁니까?”
“...불만이라도 있나요?”
아니요, 그럴 리가.
도대체 얼마나 가고 싶었으면 이토록 빨리 끝냈나 싶어서, 헛웃음만 나올 따름이었다.
#
준비를 한다곤 했지만 사실 크게 준비할 것도 없었다. 눈에 띄지 않아야 했기에 입는 옷은 원래 입던 평복이었고,
거기에 검만 드는 것이 전부인 터라 나가는 것에 시간이 지체되는 상황은 벌어지지 않았다.
“크리스 경도 가십니까?”
언제 왔는지 아이린의 뒤에 서있는 크리스 경에게 묻자, 그는 안 그래도 험상궂은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답했다.
“당연하지. 너는 아직 정식으로 서임하지도 않았으니까.”
“그건 그렇죠.”
내가 정식으로 그녀의 호위 기사로 서임하려면 아직 몇 달이란 시간이 남아있었다.
원래라면 성인식을 치룬 뒤에 하는 거지만, 내 실력 탓에 이례적으로 허용되었다고.
아마 그 전까지는 크리스 경이 쫓아다니겠지. 솔직히 말해 나로서는 다행이었다.
로페나까지 신경 쓰기엔, 지금 아이린이 너무도 들떠보여서.
“에반, 원래 거리가 이렇게 멀었나요?”
“아직 공작저에서 나온 지 채 1분도 지나지 않았습니다.”
“...음.”
무표정한 얼굴로 내게 묻는 아이린이었지만,
아까부터 그녀의 시선이 저 멀리 있는 시가지에 고정된 것을 진즉에 눈치 채고 있었다.
이런 모습을 처음 보는 터라 그냥 신기하기도 하고, 한 편으로는 씁쓸하기도 했다.
한 번은 그냥 마음 놓고 아무 생각 없이 축제를 즐겼으면 하는데, 과연 그녀가 그렇게 즐길 수 있을지.
내가 조금 더 노력해야 할 것 같았다.
잠시 숙였던 고개를 들자 시원한 바람이 뺨을 스치며 지나간다.
혹시 모를 위험 때문에 축제가 열리는 곳을 공작저와 분리했고, 그래서 이 부근은 무척 한산했다.
자갈과 흙으로만 이루어진 길, 원래 같았으면 검은색 아스팔트로 덮여있었겠지만 요즘은 이런 게 더 익숙하다 해야 할까.
어느덧 내 몸은 이 중세라는 시대에 완전히 적응한 듯 했다.
퍼어엉
저 멀리 보이는 시가지 한 가운데에서 폭죽이 터졌다. 초록색, 노란색, 붉은색.
아직 낮인데도 불구하고 몇 개씩 터지는 폭죽을 보니, 아무래도 내 상상보다 훨씬 규모가 클 거란 생각이 들었다.
하기야, 5년마다 한 번씩 이 곳에서 열리는 축제인데 사람이 적으면 이상한 거지.
가까워질수록 심장이 쿵쿵거리며 박동한다. 시끄럽게 들려오는 함성 소리와 나팔 소리,
심장 박동 소리에 맞춰 울리는 북소리가 온 몸을 찌르르, 떨리게 만든다.
축제란 사람을 고양시킨다.
제아무리 기분이 그다지 좋지 않은 사람도, 축제라는 현장 속에 빠지게 되면 흥분이란 감정에 흠뻑 빠지곤 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열기, 음식과 체취가 뒤섞인 향, 귀를 울려대는 시끄러운 소음들이 뒤섞여 만들어지는 하나의 마법.
비록 축제란 것을 직접 경험해 본 적은 몇 번 없었지만,
나는 축제가 만들어내는 이 마법같은 현상을 긍정적으로 생각했다.
지친 사람들이 피로함을 잊게 만들고, 잠시나마 그 열기 속에 물들게 하는 그 현상이란.
아마도 지금의 아이린에게 꼭 필요할 테니까.
사실 이렇게 축제에 가자 얘기한 것은 내 자그마한 욕심에서 시작된 제안이었다.
이번에 그녀가 쓰러지듯 잠든 것이 못내 마음에 걸린 것도 있고,
솔직히 말하자면 그녀가 잠시나마 그런 일들을 잊고 무언가를 즐겼음 하는 마음이 컸다.
맨날 퀭한 얼굴에, 식사를 하거나 잠을 잘 때가 아니면 늘 서류를 들여다 보고 있었으니까.
지켜보는 사람조차 고역이란 생각이 절로 드는데, 과연 직접 하고 있는 사람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그냥, 한 번쯤은 맘편히 놀 필요가 있었다.
"이제 거의 다 왔습니다."
저 멀리 바람에 나부끼는 유리스의 깃발이 보였다.
하늘에 걸린 수많은 실들에 걸린 오색찬란한 깃발들, 그 위로 흩날리는 수많은 꽃잎들.
가을의 색과 섞여 다채로운 빛을 보여주는 그 광경을 바라보기도 잠시, 아이린에게 시선을 돌리자 무심코 웃음이 새어나왔다.
처음 봤을 때는 그저 인형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했었는데.
축제라는 것 하나에 이토록 눈을 반짝이는 사람이 어찌 인형이겠는가.
언제나 가면을 덧댄 듯 무감한 표정을 짓고 있는 그녀였지만, 간혹 이렇게 감정이 비칠 때면 어째선지 미소가 지어진다.
"아가씨, 빨리 오세요!"
로페나는 벌써 아이린과 나를 앞질러 저 멀리 뛰어가고 있었고,
크리스 경은 그런 로페나를 불만스레 바라보다 이내 나를 쳐다보았다.
"뭐하느냐, 어서 가서 잡지 않고."
"...아."
하여튼, 나나 아이린과 동갑이건만 하는 짓은 완전 어린 아이이지 않은가.
로페나에게 조용히 손짓하자, 내 손이 칼 위에 올려져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로페나가 시무룩한 얼굴로 다시 돌아왔다.
이제 조금만 더 가면 되는데 뭐가 그리 급한 건지.
그만큼 축제를 기대하고 있었다는 건가. 괜스레 입 맛이 씁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이렇게 얘기를 꺼내지 않았더라면, 아마 축제를 그저 지켜보고만 있지 않았을까.
밤하늘을 수놓는 폭죽도, 수많은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그 다채로운 물결도.
환희와 기쁨, 훙분이 만들어내는 그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 갇혀 보는 것도 의외로 좋은 경험이 되리라.
이윽고 시가지에 도착했을 때.
나는 완전히 다른 세상에 도착한 것만 같은 느낌을 받아 순간 벙찐 표정을 지었다.
선선했던 가을의 날씨는 이 곳에 적용되지 않는 것인지, 온 몸을 뒤덮는 열기에 입꼬리가 잘게 떨렸다.
그래, 이게 축제지.
등골을 타고 전해져 오는 짜릿함에 잠시 눈을 지그시 감는다.
귓가에 맴도는 나팔 소리에 온 몸에 전율이 인다.
축제, 단 두 글자의 단어가 만들어내는 마법이란 이토록 신비하고 위대하기에.
부디 아이린이 이 축제를 즐겨주었으면 했다.
비록 핑계를 대고 나오긴 했지만, 어찌 되었든 축제에 오게 된 것 아니던가.
책상에 쌓인 서류도, 매일 같이 해야 되는 그 답답한 일상의 반복도, 손가락에 끼워진 그 가주라는 무게도.
전부 잊었으면 좋으련만.
"사람 진짜 많네요."
"뭐, 5년마다 한 번 열리는 축제니까."
사실 나도 이렇게 사람이 많은 광경은 정말 처음이었다.
이 좁은 길목에 어찌나 많은 사람들이 가득 차있는지, 자칫하다간 이러다 아이린을 놓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조금만 걸어도 사람들 탓에 더 이상 나아갈 수가 없는데다 어깨도 종종 부딪혔으니까.
"크리스 경, 로페나 없어지지 않게 잘 봐주세요."
"안 그래도 지켜보고 있다. 워낙 작아서 잘 안 보이거든."
"작긴 하죠."
크리스 경의 말에 한차례 웃음을 터트리자, 그런 나를 아이린이 빤히 바라보았다.
무엇이라도 바라고 있는 건지, 묘한 눈빛으로 쳐다보는 그녀가 이윽고 시선을 돌렸다.
"...가고 싶으신 겁니까?"
"......."
순간 헛웃음이 터져 나오려는 것을 꾹 참았다.
그녀의 시선이 향한 곳은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이었다. 둥글게 원을 그리고 있는 것이 아마 음유 시인이라도 온 게 아닐까 싶은데.
그 것에 퍽 호기심이 생겼는지, 빤히 그 곳을 바라보는 아이린을 잠시 바라보다 이내 입을 열었다.
"사람이 너무 많습니다. 괜찮으시다면 가겠지만"
"괜찮아요. 혹시 위험한 것이 있는 게 아닐까 싶어 확인하려는 것이니."
그냥 가보고 싶다고 솔직하게 말하면 될 것을.
하지만 사람이 워낙 많아 걱정이 되긴 했다. 혹여 저 인파가 한꺼번에 움직이기라도 하면 아이린을 놓칠 수도 있었으니까.
물론 손이라도 잡고 있으면 괜찮긴 할 텐데.
손이라.
여전히 저 인파에게 시선을 떼지 못하는 아이린을 바라보다가, 이내 조심스레 입술을 달싹였다.
"수많은 사람들에게 뒤섞이다보면, 제가 아가씨를 놓치게 될 수도 있습니다."
"손이라도 잡고 있으면 되는 게 아닌가요."
"...그래도 됩니까?"
너무도 흔쾌히 허락하는 모습에 순간 당황했으나, 어느새 내 앞으로 내밀어진 그녀의 손을 조심스레 잡았다.
무언가 조금은 부끄러워 할 거라 생각했는데 말이야.
문득 입 맛이 쓰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내 손을 타고 전해져 오는 체온에 그 생각이 흩어져 사라진다.
내 손에 완전히 들어온 그 손이 무척이나 작아서, 괜스레 얼굴이 뜨거워지는 것만 같았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