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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판 속 악녀의 호위기사가 되었다-13화 (13/181)

〈 13화 〉 축제(3)

* * *

어스름히 피어오르는 빛이 주변을 감돈다.

따스한 기운, 겨울의 추위마저 녹일 듯 포근한 그 감각에 몸이 노곤해지고, 이윽고 눈꺼풀이 무거워지자갑작스레떠오른 생각에 눈이 탁, 하고 뜨여진다.

“......”

눈을 뜨자 보인 것은 커튼 새로 비치는 밝은 빛이었다.

자신이 기억하는 마정석의 빛도, 거리에서 피어오르는 폭죽과 횃불의 아른거리는 빛도 아니었다.

분명, 이 빛은 태양이 내는 그 광채였기에.

졸음으로 몽롱했던 정신이 그제야 조금씩 깨어나기 시작한다. 점점 엄습해오는, 가슴을 옥죄는 불안감에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들었다.

문 밖에서 들려오는 부산스런 소리, 그리고 자신이 기억하는 것과는 달리 환한 바깥의 풍경.

“...아”

인정해야 했다. 자신이 서류를 바라보다가 잠들었다는 것을.

지금 보고 있는 것은 꿈이 아니라 말하듯 눈앞에 산더미처럼 쌓인 서류를 바라보다가, 한숨을 내쉬며 눈을 지그시 감았다.

스윽,

“...이건.”

어깨에 걸쳐있는 담요를 보자 피식하고 웃음이 새어나왔다.

아마도 자신이 잠들기 전까지 곁에 있던 호위 기사가 걸쳐주고 간 것이리라.

분명 쓰고 있었던 안경도 책상 한 곳에 고이 두어져있는 걸 보아, 그가 자신을 나름 신경써주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9월, 나뭇잎이 그 빛을 잃어 붉게 물들 계절. 아마도 감기에 걸릴까 이렇게 한 걸까.

아직 가을이 왔다기에 는 꽤나 따듯한 날씨가 아니던가.

자리에서 일어나 창문을 향해 다가간다.

드르륵, 젖혀진 커튼 너머로 보이는 투명한 창에는 이미 거리를 빼곡하게 메운 사람들이 저마다 깃발을 하나씩 들곤 행진을 하고 있었다.

그 검은 물결을 잠시 바라보다가, 이내 한숨을 내쉬며 시선을 거두었다.

어차피 자신이 저 행렬에 끼어들 일은 없을 터였다. 저 책상에 쌓인 서류가 자신을 저주하고 있지 않은가.

잉크와 펄프가 자신을 향해 칼을 빼내어 들었다.

업무와의 전쟁, 오로지 자신만이 참전하는 이 외로운 전쟁을 시작하려는 그때에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들어와.”

지금 자신의 방에 들어오려는 이는 단 한 명뿐일 테니까.

“아, 일어나셨어요?”

“밥은 먹었니.”

“네, 저는 새벽에 깨서 먼저 먹었거든요. 아가씨 식사 준비 중이니까 조금 이따 내려오세요!”

“그래, 근데 에반은?”

“아, 훈련 중이세요. 아마 곧 들어오실 거예요. 어둑할 때 나가셨다고 했으니까요.”

“……어둑할 때라.”

밤이라도 샌 걸까. 아직 제 어깨에 덮여있는 담요를 떠올리자 괜스레 마음이 불편해졌다.

그 온기가 어깨를 타고 온 몸에 스며드는 것만 같아서, 담요를 걷어내며 어깨를 쓸어내렸다.

허나 담요를 걷어내자 남은 것은 뼈가 시릴 정도의 허전함이라서.

그 따스해 보였던 밖마저 어째선지 추워보였다.

“아가씨?”

로페나의 물음에도 그저 가만히 창문을 바라보자, 이내 조용히 문 닫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윽고 찾아오는 적막에 눈을 감는다. 귀로 들려오는 소리에만 집중하며, 그렇게 머리를 어지럽히는 생각을 차분히 정리한다.

에반 프리드. 이윽고 떠오르는 이름에 집중이 깨지고, 서늘해진 시선이 허공을 향했다.

한 달이라는 시간동안 호위 기사와 자신은 꽤나 가까워졌다고 할 수 있었다.

다른 시녀나 크리스 경이 놀랄 만큼이나, 자신이 이토록 호의적인 태도를 보인 것은 그 하나뿐이었으니까.

자신도 왜 이렇게 누그러지는 지 이해할 수 없었다.

다만 그의 얼굴을 볼 때면 얼어붙은 마음이 녹아드는 것만 같아서, 그 목소리에 온기가 담길 뿐이었다.

이 가을을 닮은 금발이 찰랑이고, 그 나이대의 소년처럼 해맑게 웃는 미소는 그림과도 같았다.

장난스레 웃을 때면 세상의 모든 순수함을 고스란히 담은 것만 같은 그 얼굴은,자신과 완전히 다른 세상에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고 보면 호위 기사가 된 뒤 자신의 시녀들과도 꽤 친해지지 않았던가.

처음 보는 시녀와도 말 몇 마디면 금세 친해지는 모습에 절로 감탄이 일곤 했다.

그 훤칠한 외모가 그 이유일까, 아니면 그를 항상 따라다니는 그 밝음이 이유일까.

철혈을 지닌 이가 품을 수 없는 그 상냥함은 이제 자신에게까지 그 영향을 미치고 있는 듯 했다.

아쉬운 듯 저도 모르게 꼭 움켜쥔 그 담요를 잠시 바라보다가, 이내 다시 어깨에 걸친다.

미련이나 다름없었다. 자신이 손에 넣을 수 없는 그 감각에 빠져 한참을 느끼다가, 결국 나중에 후회할 그런 미련.

허나 그 달콤함을 놓지 못한다. 이미 제 손에 쥔 장미의 가시가 손에 파고든지 오래였다.

들어온 것은 그리도 쉽게 들어왔으면서, 갈고리처럼 살에 파고들어 빠져나가려 하지 않는다.

제 어깨를 덮은 이 담요조차결국 내려놓지 못하는 자신이 아닌가.

오지 말라며, 다가오지 말라며 그토록 밀어내도 결국 다가오는 것은 자신의 호위 기사였다.

그 진한 감정이 담긴 녹안이 흔들릴 때면 마음 또한 흔들려서, 결국 밀어내는 손을 힘없이 떨어뜨리기 마련이었다.

허나 놓아야 했다.

놓아야 하는데. 이 미련을 버려야 하는데.

­신경 쓴 건 아닙니다. 그냥, 불편해서 그런 거죠.

제게 다가온 그 따스함을 결국 놓지 못하는 자신이 그토록 원망스러울 뿐이었다.

놓으려면 얼마든지 쉽게 놓을 수 있음에도. 한 발자국 씩 다가오는 호위 기사를 그렇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미련임을 알고 있었다. 이 이상 정을 들인다면, 언젠가는 결국 후회하리란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그 것을 알고 있는데도.

그 미련을 놓는 것이 참으로 쉽지가 않았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

문 너머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상념이 깨진다.

고요한 방에 그 낮은 목소리가 울려 퍼지고, 잠시 멍하니 그 자리에 서있던 자신의 입술이 달싹였다.

들어오지 않았으면 좋겠다. 차라리 자신의 호위 기사가 아닌 다른 일을 했으면 했다.

여기는 그와는 맞지 않는 곳이었다. 차갑고, 거칠고, 상냥함이란 전혀 찾아볼 수 없는. 몸속에 피 대신 쇳물이 흐르는 이들이 모인 곳이었다.

지금은 이토록 웃는 이들이 나중엔 칼을 들곤 덤벼온다.

자신에게 충성을 다한다고 생각했던 기사들은 결국 아버지의 것이었다.

자신의 것이라곤 이 방과 전속 시녀 몇, 그리고 호위 기사 하나 뿐이었고. 그 것조차 지키기 버거운 게 현실이었다.

차라리 문을 열고 들어오지 않았으면, 이대로 저 멀리 사라졌으면 좋겠는데.

그런 마음과는 달리, 입이 뱉는 말은 야속하게도 긍정이었다.

“...들어오세요.”

가시가 더욱 파고드는 것만 같은 아린 감각에, 그저 쓰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

“밤을 샌 건가요?”

방에 들어오자마자 그녀가 던진 말에, 나는 멋쩍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방에 돌아가서 잠을 자려했지만 영 잠이 오지 않아서. 이제는 몸에 익숙해진 훈련을 하러 조금 일찍 나간 터였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런 나를 물끄러미 바라본 아이린이 이내 입을 열었다.

“잠은 충분히 자는 게 좋아요. 제가 이 축제 기간 동안 자는 일은 거의 없을 테니까요.”

“제가 하고 싶은 말이군요. 잠은 충분히 주무시는 게 좋습니다.”

그녀는 마나를 제대로 다루지 못했다. 그 말인즉슨, 결국 자신의 몸에 쌓인 피로를 견딜 수 없다는 말이었다.

나야 마나를 이용해서 며칠이고 밤을 샐 수 있었지만, 그녀의 신체는 고작해야 단련된 일반인 수준이었으니까.

계속해서 무리하게 일을 하다보면 이번 일처럼 또 쓰러져 잠들 것이 분명했다.

내가 단호하게 말하는 것이 퍽 신기했는지, 아이린은 나를 빤히 바라보다 이내 시선을 거두며 책상에 앉았다.

그러다가 갑작스레 시선이 들어온 것은, 내가 어제 둘러주었을 한 장의 담요였는데.혹시 아직 잠이 덜 깨 담요가 둘러진 것을 모르는 걸까.

“근데, 혹시 추우신 겁니까?”

담요를 가리키며 묻자, 아이린은 그 담요를 바라보다 이내 빠른 속도로 담요를 거둬들였다.

눈 깜짝할 새에 거둬들인 그 동작을 바라보다가, 헛웃음을 지어보였다. 이런, 아무래도 여태 모르고 있던 걸까.

“...이런 게 있었네요.”

“아직 졸음이 덜 깨신 것 같습니다. 식사는 하셨습니까?”

“그대는 무어라도 먹긴 했나요. 이제 막 들어온 것 같은데.”

생각해보면 나도 오늘 먹은 것이 없긴 했다. 워낙 인간과는 궤가 다른 몸이라 그런가.

예전처럼 허기를 느끼지도 않아서 밥은 그냥 때가 되면 먹는 편이었는데.

그나마 다행인 점은 내 신분 덕에 이 곳의 요리장이 만들어주는 밥을 먹을 수 있다는 점이었다.

내가 고개를 젓자, 눈을 게슴츠레 뜬 아이린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입을 열었다.

“같이 식사나 하죠. 이번 축제가 끝난 뒤 계획에 대해서도 얘기해야 하니.”

“...겸상이라뇨.”

“명령이에요.”

명령이라니, 호위 기사 신분에 겸상을 할 수 없는 걸 알면서도 내게 왜 그러는 걸까.

하지만 어찌 됐든 명령이었으니, 내가 알겠다고 대답하자 아이린은 이내 나를 지나치며 말을 이어갔다.

“저 서류들은 오늘 안에 전부 처리할 생각이에요. 저녁은 거를 생각이니까, 든든하게 먹는 게 좋을 걸요.”

“건강에 좋지 않습니다.”

“서류가 저렇게 쌓인 것이 더 정신 건강에 해로워요. 내 마음 좀 이해해줬음 하네요.”

“...그렇게 생각하신다면야.”

왜 이렇게 일을 빠르게 처리하려 하는 걸까.

마치 무언가에 쫓기는 사람처럼 서류를 처리하려는 그녀의 모습을 의아하게 바라보다가, 이내 뇌리를 스쳐가는 생각에 피식 하고 작게 웃었다.

축제에 참가하고 싶은 건가.

하기야, 저번에 눈을 반짝이는 것이 말은 별 마음이 없는 것처럼 하더라도 결국 참가할 거라 생각하긴 했는데.

흠.

아무래도 아이린이 쓰러지지 않도록 옆에서 잘 지켜봐야 할 것 같았다.

어제처럼 무리하려 하면 억지로라도 재워야 할까.

사실 그녀가 많은 것들을 홀로 처리해야 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그렇다한들 이번처럼 쓰러지듯 잠드는 걸 두고 보겠다는 얘기는 아니었다.

호위 기사라는 것은 단순히 외부의 위협에서 그녀를 지켜내는 것이 아니라, 그녀의 몸 상태까지 신경 써야 했으니까.

게다가 보는 내 마음도 그리 편치는 않았다.

그렇지 않아도 창백하리만치 새하얀 그녀의 피부가 오늘 따라 더 창백해보여서, 나는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조금 몸을 챙겨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럴 시간이 없는 걸요.”

시간, 그래. 언제나 시간이 문제였다. 그녀는 무엇 하나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시간이 없었으니까.

어쩌면 그녀가 이번 축제에 미묘한 기대를 품는 것도 아마 그런 이유가 아닐까 싶은데.

탁­

내 앞에 놓이는 접시들을 바라보다가 이내 눈을 가늘게 떴다.

사실, 아이린을 이렇게 두고 싶진 않았다. 그녀가 제아무리 성숙하다한들 15살이었다.

그 나이에 서류에 파묻혀서,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다가 쓰러지듯 잠드는 것을 볼 때면 마음이 불편했으니까.

내가 오늘 잠에 들지 못한 것도 아이린이 상당 부분 그 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듣고 있나요?”

탁탁, 나이프로 접시를 두들기는 소리에 고개를 들자 아이린이 나를 바라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아뇨, 다른 생각을 하느라.”

“뻔뻔하기도 해라. 축제 이후의 이야기를 하기 위해 겸상을 한 게 아니었나요.”

축제라. 그녀가 참가하면 좋을 터였다.

마지막 날에 갈 수야 있겠지만, 그 때는 축제의 모든 행사들이 거의 끝나 즐길 거라곤 없을 게 분명했다. 기껏해야 폐막식의 불꽃놀이 좀 보고 끝나겠지.

아마 오늘, 아마도 축제의 대부분을 즐기기 좋은 오늘이 가장 좋을 텐데.

문득 머릿속에서 떠오른 생각에 한차례 빙긋 웃곤, 아이린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오늘 외출하시는 건 어떻습니까?”

“...말이 되는 소리를 해주세요. 아까 그 서류를 보지 못했나요.”

“예를 들어서, 축제가 진행되는 거리의 치안을 확인하기 위한 순찰이라던가.”

기긱­

고기를 썰던 나이프가 접시에 소리를 내며 부딪친다.

그 말이 진심이냐며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그녀의 눈동자가 잘게 떨리고 있어서, 나는 피식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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