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화 〉 축제(2)
* * *
제국의 건립일이란, 제국 내에서는 그 어떤 행사와도 비교할 수 없는 중요한 날이나 다름없었다.
일주일 간 열리는 축제, 제국의 시작을 축복하는 날이었으니 그만큼 많은 관심이 쏠리기 마련이었다.
문제가 있다면 그 축제가 이번엔 유리스 공작령과 수도에서 함께 열린다는 점과,
그 때문에 수도에 간 공작 덕에 아이린이 모든 일을 도맡아 한다는 점이었다.
사람이 날이 갈수록 말라간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을 만큼이나 비척해지는 아이린의 몰골을 볼 때면,
그런 그녀를 가장 가까이에서 보는 나나 로페나는 그저 안타까워 할 수밖에 없었다.
“저러다 과로로 쓰러지시는 게 아닐까요.”
“벌써 몇 시간째지?
“글쎄요. 해 뜰 때부터 저러고 계셨으니까. 밥 먹는 시간 빼면 족히 10시간은 될 걸요.”
이런. 나는 침음을 삼키며 아이린을 바라보았다.
나는 15살 때 뭘 했더라? 문득 밀려오는 씁쓸함에 잠시 한숨을 내쉬다가, 로페나의 어깨를 툭툭 건드렸다.
“왜요?”
“단 것 좀 가져다드려. 초콜릿 녹인 거라도 가져오던지. 힘들 때는 단 걸 먹으면 좀 낫거든.”
“알았어요.”
로페나가 나가자, 나는 아직까지도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서류 앞에 있는 아이린을 빤히 바라보았다.
사실 그녀가 일하고 있는 시간 만큼 나또한 서있긴 했으나, 나름 강화된 육체라 그녀와 내가 느끼는 피로를 감히 비교나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이제 조금 뒤에 축제의 개막식이 시작된다는 점이 아닐까.
잠시나마 저 지긋지긋한 서류에서 그녀가 눈을 뗄 수 있을 시간일 테니까.
“후우.”
잠시 서류를 바라보던 그녀가 한숨을 내쉬더니, 고개를 뒤로 젖히며 눈을 지그시 감았다.
눈두덩이를 주무르는 걸 보아 아무래도 꽤 피곤해보이는데.
“괜찮으십니까?”
그 말에 잠시 움찔거리며 눈을 끔뻑인 아이린은 이내 나를 바라보며 천천히 입술을 달싹였다.
“...아니요. 정말, 하나도 괜찮지 않아요. 마음 같아선 이대로 자고 싶은데그럴 수는 없겠죠.”
“30분 뒤면 개막 연설을 해야하니까요.”
“마법을 배울 걸 그랬어요. 그러면 분신이라도 대신 내보냈을 텐데.”
정말 피곤한 모양이었다. 평소 같았으면 그 힘든 일정에도 투정하나 내뱉지 않던 그녀가 이리 말할 정도였으니.
눈 밑을 잠시 주무르던 그녀는 이내 한숨을 푸욱 내쉬며 서류를 덮었다.
“로페나는 어디 갔죠?”
“초콜릿을 데우러 갔습니다. 피로할 때는 단 걸 먹으면 좋거든요.”
“...신경써줘서 고맙네요.”
“신경 쓴 건 아닙니다.”
그렇게 말한 나는 어깨를 한 차례 으쓱이곤, 씨익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냥, 불편해서 그런 거죠.”
그러자 아이린은 그런 나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이내 고개를 떨구며 조용히 중얼거렸다.
나조차도 듣지 못했을 뻔한, 아주 작은 목소리로.
“...고마워요.”
의외로 부끄러움이 많다니까. 괜스레 입꼬리가 씰룩이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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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어엉
제국의 건립일 기념축제가 시작된다는 것을 알리는 축포 소리가 공작저에 울려 퍼진다.
순간 폭탄이 터지는 것만 같은 굉음에 로페나가 흠칫 떨고, 아이린은 무표정한 얼굴로 그 소리를 향해 불만을 내뱉었다.
“언제 들어도 시끄러운 소리네요.”
5년마다 돌아가며 열리는 축제였으니, 그녀는 아마 나와 달리 몇 번 더 이 소리를 듣지 않았을까.
정말 질린다는 듯 고개를 내저은 아이린은 입고 있는 드레스의 치마 자락을 붙잡으며 쓰게 웃었다.
“가죠, 우리를 기다릴 사람들이 수천 명이니까요.”
화려한 금빛의 드레스를 입은 그녀가 입을 열자, 그녀의 뒤를 따라 수많은 인원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일단 호위기사인 나는 당연했고, 그녀의 드레스를 잡아줄 전속 시녀들, 혹시 모를 일을 대비하기 위한 기사단까지.
축제의 마지막 즈음 공작이 돌아오기 이전에는이 유리스의 주인은 그녀였으니 아마 당연한 모습이리라.
허나 그런 수많은 인원들 사이에서도 정작 아이린은 여전히 무감한 얼굴이었기에,
혹여 긴장하는 모습을 볼 수 있지 않을까 했던 나로썬 그저 허탈히 웃을 뿐이었다.
척, 척.
공작저의 입구에서 수많은 기사들이 도열한 채 아이린을 기다리고 있었다.
일정한 간격으로 땅과 부딪히는 창대의 소리가 시끄럽게 들려오고, 이윽고 아이린의 그 입구를 지나 붉은 색의 카펫을 밟자 누군가가 소리쳤다.
"유리스의 주인께 경례!”
“하!”
부우우
공기를 진동시키는 것만 같은 나팔소리가 허공에 울린다.
이윽고 겹치는 발소리, 부딪히는 창대 소리, 기사들의 입에서 일제히 터져 나온 함성 소리에 일순간 몸에 전율이 일었다.
수백 명의 기사였다. 기사 2만 명이라는 터무니없는 일이 이 곳에서도 실현되진 않았으나,
정예라는 이름으로 불리우는 기사들이 보내는 기운이란 그야말로 엄청났기에.
그 소리의 중심에 서 있는 내 몸이 움찔거리며 반응했다.
“그만.”
허나 그토록 시끄러웠던 소리는 일시에 사라진다.
유리스의 가주임을 상징하는 반지가 허공에 나타나자, 지금까지 이 곳을 잠식했던 소리가 거짓말이라도 되는 듯 그 모든 행동들이 착, 하고 멈춰졌다.
또각, 또각.
이윽고 그녀가 앞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마치 구름을 걷듯 고아한 그 발걸음에 사람들은 숨을 쉬는 것마저 멈춘 채 아이린을 바라보았다.
제국을 수호하는 5대 가문. 검의 로만, 마법의 메디브, 눈의 킬로그, 그림자의 하탄, 그리고 방패의 유리스.
그 중 방패를 상징하는 유리스의 주인이 보이는 자태에 누군가가 감탄한 듯 탄성을 내뱉었다.
“허어...”
감탄할 만 했다. 그녀와 함께 있었던 나조차도 그 모습에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 같았으니까.
만약 귀족이라는 이름을 단 한 명에게 내려야 한다면, 아마 그 것은 아이린에게 주어야 했을 만큼 그녀의 모습은 우아했다.
마침내 그녀의 발걸음이 멈추고, 저 앞에 보이는 수많은 군중들이 침묵한다.
이 영지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온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만큼 많은 사람들이었다.
시선 하나하나가 날아와 화살처럼 꽂힌다. 누군가는 싸늘한 시선을, 누군가는 호의가 가득 담긴 시선을.
허나 그 시선의 대부분은 아이린에게 향했으니, 대부분이 약간 기대가 서려있는 시선들이었다.
다른 영지에서 온 이들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가 지금 이렇게 보여준 모습이 언제까지 이어질지, 그것을 확인하려는 것이겠지.
그리고 그 기대를 충족시켜주려는 듯, 그녀는 이내 자신을 바라보는 모든 이들을 훑어보며 입을 열었다.
“오늘은 태양이 처음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날이다. 에반젤리움에 광영이 일고, 방패를 들어 올린 날이기도 하지.”
청아한 목소리가 좌중에 퍼진다. 마법을 사용하지 않았음에도 귓가에 여실히 들어오는 목소리에 수많은 이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말에 집중했다.
수많은 이들이 이 자리에 있었으나, 그들은 마치 한 몸이라도 된 듯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 않은 채 서있었을 뿐이었다.
이 드넓은 광장을 뒤덮은 것은 오직 고요였지만, 그 고요는 단지 한 사람에 의해 좌지우지되고 있었다.
아이린 유리스라는 한 여인이 입이 열릴 때면 광장을 메우는 것은 그녀의 목소리였으며,
그녀가 입을 다물 때면 남는 것은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적막이었다.
이런 것이 지도자의 재능이라 할 수 있는 것일까.
그저 말 한마디 내뱉었을 뿐임에도 좌중을 압도하는 그 모습에 나는 감탄을 흘렸다.
쉽사리 따라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따라 하고자 넘보는 것조차 불가한 것이었으니.
그런 그녀를 바라보던 크리스 경이 입술을 작게 벌리며 침음을 흘렸다.
“대단하군.”
하기야, 아직 성인식도 치르지 않은 공녀가 가질 위압감이 아니었다.
그녀는 이 자리를 지배하고 있는 하나의 왕이었고, 그야말로 유리스의 가주라는 자리에 어울리는 사람처럼 보였다.
감탄이 서린 크리스 경의 눈을 바라보다가, 다시 아이린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이윽고 아이린이 다시금 입을 열었다.
“그대들은 이 유리스와 제국을 위하여 노고를 다해주었고, 그 의무를 다해주었다. 비록 그저 소가주일 뿐이나 지금 이 자리의 나는 제국의 방패이자 유리스의 정당한 가주.그대들에게 감사를 표하며, 새로이 제국의 광영을 이끌기 위한 휴식을 부여하고자 하는 바이니.”
그녀는 잠시 지그시 눈을 감았다가, 이내 눈을 뜨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일주일간, 이 건립일 축제를 즐기도록 바란다. 아주 질릴 만큼이나.”
이윽고 함성이 터져 나온다. 순간 지진이 일었다고 착각할 만큼 거대한 함성이.
로페나가 그런 사람들을 질린 듯 바라보며 고개를 젓고, 아이린은 그런 사람들의 모습을 무표정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허나 그 표정 깊숙이 감춰진 감정은 곧 기쁨이었기에, 나는 그런 그녀를 흐뭇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유리스에 광영을!”
"에반젤리움에 광영을!”
휘이익
휘파람 소리와 함께 뒤섞인 그 즐거운 함성에 덩달아 광장이 뜨겁게 달아오른다.
멈췄던 나팔 소리가 다시 울려 퍼지고, 허공을 향해 흩뿌려지는 꽃잎이 가을의 색과 어울려 주변을 물들이기 시작했다.
건립일 축제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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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축제의 시작과는 달리 내 처지가 달라지는 점은 정말 하나도 없었다.
그나마 달라진 점이라곤 아이린 눈 밑에 생겨난 그늘이 점점 짙어진다는 점이 아닐까.
이쯤 되면 걱정이 될 따름이었다. 저걸 그대로 놔둬도 되는 건지.
달이 차다 못해 저 아래에 여명이 떠오르는 지금 이 시간까지도 그녀는 잠을 청하지 않고 있었다.
축제가 시작되어 새벽이 된 지금까지도 밖은 횃불과 가로등으로 밝은 빛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과연, 이렇게 밝을 정도면 마정석 광산을 얻으려 글라스칸 백작을 압박한 이유도 이해할 만 하지.
슥슥
그런 밝은 밖과는 달리 아이린은 촛불 하나를 의지하여 서류를 바라보고 있었다.
눈이 침침한지 쓰고 있던 안경을 벗은 그녀는, 이내 한숨을 내쉬며 내게 시선을 돌렸다.
“...끝이 보이질 않네요. 근데 로페나는 어디 갔죠?”
“아까 자러가라고 직접 말씀하셨습니다.”
“그랬나요. 내가 지금 정신이 없어서.”
“이제 슬슬 주무셔도 되지 않겠습니까? 나머지는 내일 처리하시는 게.”
“...이걸 보고도 그런 말이 나오나요.”
내가 말하자 그녀는 턱 끝으로 자신의 책상을 가리켰다.
책상에 가득 쌓인 서류더미를 본 나는 혀를 내둘렀고, 아이린은 고개를 젓더니 다시 안경을 쓰며 입을 열었다.
“아마 이틀 정도 밤을 새면 다 처리할 수 있을 거에요. 그리고 이걸 다 처리하면, 아마 또 다른 서류더미가 내게 오겠죠.”
씁쓸한 듯, 다 식어버린 차를 들이킨 그녀는 펜을 톡톡 두드리며 내게 말했다.
“피곤하면 그대 먼저 들어가도 좋아요. 나도 내 한 몸은 충분히 지킬 수 있으니.”
그 말에 나는 어깨를 으쓱였고, 아이린은 아무 반응 없이 다시 서류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오랜 시간 서있는 것은 힘들진 않아도 꽤 지루한 터라, 바닥에 깔린 타일을 하나씩 새며 그 지루함을 겨우 떨쳐내고 있었다.
‘스물 둘, 스물 셋...’
툭
그리고 들려온 소리에 집중이 깨진다.
무언가 종이 위에 떨어진 소리에 고개를 들자, 어느덧 책상 위에 엎어진 아이린의 모습이 보였다.
“...잠들었나.”
피곤했을 터였다.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짧긴 했지만 연설도 했고, 공작을 대신해 막중한 업무를 처리했으니까.
사실 그녀는 이미 한계에 다다른 상태였다. 이미 그 빡빡한 일상을 수행하는 것만으로도 힘들었을 텐데, 이런 일까지 묵묵히 맡았으니.
잠시 그런 그녀를 측은히 바라보다가, 그녀 얼굴 옆에 있는 안경을 조심스레 떼어내 한 곳에 두곤 몸에 얇은 담요를 덮어주었다.
제아무리 가을이라곤 하지만, 그렇다한들 감기에 걸릴 가능성이 있었다.
그리고 시선을 돌려 잠에 든 아이린의 얼굴을 바라본다.
꽤나 지친 듯, 살짝 벌려진 입 사이에서 새근거리는 숨소리가 들려왔다.
얼마나 피곤했으면 이렇게 쓰러지듯 잠에 드는 걸까.
언제나 그녀를 감싸고 있던 차가운 분위기도, 그 어깨를 짓누르던 압박감도 사라진 그녀의 얼굴은 너무도 편안해보여서.
그 얼굴을 잠시 바라보다 이내 조용히 뒤로 물러났다.
후우
촛불을 끄고, 창문을 커튼으로 가리자 방 안을 어둠이 순식간에 메우기 시작했다.
비록 얇은 커튼 사이로 그 빛이 살짝 비치긴 했지만, 그래도 밝아서 깨는 일은 없으리라.
끼이익
그녀가 혹여 깰까 천천히 문을 열며, 마지막으로 뒤돌아 아이린의 모습을 바라본 나는 조용히 속삭였다.
“...잘 자요.”
꿈에서 만큼은, 부디 편히 쉬기를.
철컥
그리고 문은 닫힌다. 내가 떠나간 자리에 남은 것은 오직, 잠든 아이린에게서 들려오는 작은 숨소리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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