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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판 속 악녀의 호위기사가 되었다-11화 (11/181)

〈 11화 〉 축제(1)

* * *

그 날 정원에서 있었던 대화 이후로, 나와 아이린의 사이는 꽤나 괜찮아졌다고 말할 수 있었다.

일단 당연하게도 내게 모질게 대하는 일이 없을뿐더러, 괜히 그녀를 피해 다닌다며 하고 싶지도 않은 훈련을 하게 되는 일도 없었으니까.

크리스 경은 내가 게을러졌다며 이따금 호통을 치고는 했지만,

사람 목에 칼을 쑤셔 넣으려 하는 그런 걸 훈련이라고 보는 게 과연 맞을까 싶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어느덧 녹음이 샛노랗게 물들고, 하늘이 높게 솟아올랐을 때 즈음.

공작저의 시녀들이 바쁘게 움직이는 시간이 찾아왔다.

바로 제국의 건립일이 다가오기 때문이었는데,

5년마다 한 번씩 수도와 함께 열리는 축제가 열리는 해가 이번 해였기에 특히나 더 바쁘다 할 수 있었다.

덕분에 원래라면 공작이 했을 사무적인 일도 소가주인 아이린이 도맡아 하고 있었고,

자연스레 그녀의 기분 또한 가라앉기 시작했다. 로페나의 말로는 지금의 아이린을 절대 건드려서는 안된다고 하던데.

과연, 그 말이 맞는 것 같긴 하네.

서류를 들여다보고 있는 아이린의 시선은 써늘하다 못해 서리가 낄 것만 같았으니까.

그 옆에 서있던 로페나가 잠시 몸을 부르르, 떨며 나를 바라보았다.

‘추워요.’

입을 살짝 벌려 내게 구조 요청을 보내는 로페나를 측은히 바라보다가, 이내 쓰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마도 그녀가 추워하는 건 진짜로 추워서 그런 것이리라.

비록 익스퍼트는 아니지만, 나름 마나를 깨달은 아이린이었으니 아마 기분 상태에 따라 저도 모르게 마나가 움직일 터.

잠시 찻잔을 들은 아이린은, 이내 식어버린 차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로페나, 차가 또 식었어. 다시 가져오렴.”

“넵!”

“...왜 자꾸 차가 식는 건지. 따른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마나 때문에 그런 걸 아직 모르는 걸까. 분명 그녀의 검은 꽤 높은 수준에 있었지만, 의외로 마나를 깨닫고 다루는 능력은 기대 이하였다.

하기야, 원작에서도 그녀의 수준은 익스퍼트 초입에 그쳤으니. 마나야 말로 진정 재능의 영역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의미에서 이 에반 프리드라는 몸이 지닌 재능이란, 이루 설명할 수 없는 수준에 닿아있었다.

그저 숨을 들이 쉬는 것만으로도 마나를 느낄 수 있는 재능.

비록 마나에 대해서 이전까지 일자무식이었던 나였지만,

소설 속에 나왔던 대사만 봐도 이것이 평범하지 않다는 걸 눈치챌 수 있었다.

그러니까, 아마 황태자가 여주에게 했던 말이었을까.

마법을 배운다했던 그녀가 일주일 만에 마나를 미약하게 느끼기 시작했을 때, 황태자는 그런 여주에게 ‘세기의 천재’라며 치켜세웠다.

물론 눈에 콩깍지가 씌워진 이가 한 말이라 신빙성이 영 떨어지긴 했지만,

그런 것을 감안하더라도 숨 쉬는 것만으로 마나를 느끼는 이 몸의 재능은 엄청나다고 할 수 있을 터였다.

허나 그런 재능을 자각할 때면, 언제나 머릿속에 떠오르는 의문이 하나 있었다.

도대체 나는, 어째서 에반 프리드라는 아이린의 호위기사를 한 번도 본 적이 없는가.

유명한 천재라고 했다. 내가 그 것을 느끼고 있었고, 아마 노력한다면 마스터의 경지에도 쉬이 오를 만큼의 재능이라 할 수 있었다.

허나 어째서, 여주가 등장했던 소설의 그 시간대에서 에반 프리드라는 이름이 나오지 않았는가.

여러모로 의문으로 남을 수밖에 없었다.

허나 지금 알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으니, 그저 입 꾹 닫은 채 할 것 하면서 사는 것이었고.

아직 원래 세상으로 돌아갈 방법의 갈피조차 찾지 못하지 않았는가.

차라리 다른 소설처럼 상태창으로 표시라도 해주었으면 그나마 나았을 텐데. 아쉽게도 내게 그런 것은 보이지 않았다.

오로지 훈련을 통해서만, 그 미묘한 변화를 조금씩 감각으로 느낄 뿐.

“에반, 무얼 그리 생각하나요.”

허나 곧 상념은 깨졌으니, 아이린이 나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도 꽤 지루한 것일까, 흐리멍텅한 눈동자를 한 그녀는 턱을 괸 채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언제부터 보고 있던 걸까.

“그냥, 이번 축제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이 지긋지긋한 축제 말이죠.”

그녀는 서류를 다시 바라보더니, 이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뒤로 젖혔다.

눈 밑에 생겨난 짙은 어둠 탓에 더욱 퀭해 보이는 아이린은, 로페나가 다시 가져온 차를 홀짝이더니 내게 입을 열었다.

“잠시 후에 글라스칸 백작이 찾아온다 했으니, 그 사람이 간 뒤엔 조금 쉬도록 해요. 그대도 지루하기는 마찬가지일 테니.”

“신경써주셔서 감사합니다.”

“...신경써주는 건 아니고. 그냥, 내가 불편해서 그래요. 몇 시간을 그렇게 서있었으니까요.”

보통은 요령도 좀 피우지 않나요. 그렇게 묻는 그녀에게 나는 그저 고개를 갸웃거릴 뿐이었다.

요령이라니, 이제 겨우 기사생활 한 달 해본 사람이 무슨 요령을 피우겠습니까.

아무튼, 다과회에서 오해를 푼 뒤로 아이린은 내게 퍽 잘해주고 있었다.

그 전에 모질게 대한 것을 꽤나 신경 쓰고 있던 건지는 몰라도,

이런 태도는 여태껏 그녀의 호위 기사들은 겪지 못했던 것인지 크리스 경이 나를 묘한 눈빛으로 쳐다보기도 했었다.

­에반, 도대체 아가씨한테 무슨 짓을 한 게냐? 시녀면 몰라도 호위 기사한테도 그럴 줄이야. 혹시 약점이라도 잡은 건, 설마 그런 불경한 짓을 한 것은...!

­그랬다간 사지가 성벽에 걸릴 텐데요. 하나하나 뜯어져서 말이죠.

­...그건 그렇지.

잠시 그 때의 대화를 떠올린 내 입꼬리가 씰룩이기도 잠시, 쿠키를 먹던 로페나가 뭔가 떠올랐는지 아이린을 바라보았다.

그 로페나의 시선을 바라보던 아이린이 이내 옅게 한숨을 내쉬며 문을 향해 입을 열었다.

“손님을 맞이할 준비를 하거라.”

아무래도, 글라스칸 백작이 올 때가 된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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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라스칸 백작은 풍채가 좋은 사람이었다.

겉으로 보면 비록 후덕하기는 했으나 호인(?人)처럼 생겼고, 백작이라는 작위에 걸맞게 위엄이 흐르는 사람이었다.

다만 그의 위엄은, 유리스라는 이름 앞에 그저 개미 한 마리에 지나지 않는 것이 문제였다.

“예의가 없군.”

글라스칸 백작을 만난 아이린이 내뱉은 첫마디였다.

그 싸늘한 말에 글라스칸 백작의 얼굴이 노래지자, 나는 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한숨을 내쉬었다.

아마, 이 다음이 어떻게 될지 머릿속에서 훤히 그려졌기 때문이리라.

저보다 한참이나 어린 나이인 아이린의 말에, 언뜻 보아도 불혹을 넘겼을 글라스칸 백작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자신의 명예가 큰 상처를 입었다며, 노호 성을 치는 그에게 아이린이 말을 이어갔다.

“고개를 더 숙이는 게 좋을 듯한데.”

“이 어찌 방자한 태도가 아닙니까! 아무리 소가주라 한들 이런 태도를 참고 넘어갈 수는 없­”

“참지 않으면, 어찌할 것이지. 설마, 유리스와 한 판 벌일 생각이라도 하는 건가?”

“그, 그런 말이 아니지 않습니까!”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그 치켜든 고개를 숙여라. 거래를 하는 것은 그 다음이니.”

백작이 분개에 찬 듯 그 새하얗게 물들 만큼이나 꽉 쥔 손을 파들거리더니, 이내 이를 악물곤 고개를 숙여보였다.

보는 이가 안타까울 정도의 광경에 잇새로 탄식이 흘렀으나, 한 편으로는 필요한 일이기도 했기에 아이린에게 무어라 할 생각은 없었다.

지금의 그녀는 공작에게 직접 그 권한을 대행하도록 명받은 이,

이 유리스의 차기 방패가 아닌 이 순간만큼은 그야말로 방패 그 자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그 것을 모든 이에게 각인시키기 위한 행동일 뿐이었다.

다만 그 것을 위해 희생당한 글라스칸 백작의 입장은 곤혹스럽기 그지 없겠지만.

“이제야 조금 얘기를 할 마음이 드는군.”

글라스칸 백작을 바라보지도 않은 채 입을 연 그녀는, 이내 서류에 시선을 둔 채 입을 열었다.

“여기가 유리스임을, 지금은 내가 유리스의 가주임을 명심해라. 글라스칸 백작.”

“...알겠습니다.”

그렇게 상황이 일단락되자, 비로소 글라스칸 백작이 요청했던 접견의 원래 목적인 거래가 진행되기 시작했다.

글라스칸 백작 소유인 사파이어, 그리고 마정석 광산. 그 것과 유리스가 가진 막대한 자본이 그 거래의 대상이었다.

사파이어야 그렇다치지만, 마정석은 마법 물품의 근간이 되는 것이라 꽤 돈이 들어갈 텐데.

이런 것을 아이린이 어떻게 처리할지 은근히 기대하며 지켜보다가, 이내 이어지는 대화 내용에 맥빠진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결국엔 이렇게 되는 건가. 사실상 거래가 아닌, 협박에 가까운 수준이 아닌가.

“그 일대 광산의 채굴권을 영구히 유리스의 소유로 한다면, 그대에게 돈을 주지 못할 것도 없는데.”

“...허나, 그렇게 하면 영지를 유지할 수가 없습니다. 5년마다 계약을 연장하는 것은 어떻습니까?”

“기사단을 이끌고 글라스칸 일대를 짓밟는 것이 얼마나 걸릴까, 3일? 아마 그 즈음이면 전부 끝나지 않을까 싶은데 말이야.”

그런 말을 하던 아이린은, 이내 입꼬리를 비틀며 차가운 냉소를 지어보였다.

그저 한 번 해본 말이라며, 손을 살짝 들어 올린 그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서, 그대의 대답은?”

들어 올린 손, 그런 그녀의 검지에 끼워진 것은 가주만이 지닐 수 있는 증표였으며.

새하얗게 질린 글라스칸 백작의 대답은 너무도 쉽게 예상할 수 있었다.

“영구히...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제야 아이린은 맘에 든다는 듯 미소 지었고, 그 고혹적인 미소에 일순간 나는 멍하니 아이린을 바라보았다.

붉은 입술이 호선을 그리자, 마치 한 폭의 그림과도 같은 모습이었다. 역시 웃는 쪽이 훨씬 낫지 않은가.

“이제야 마음에 드는군.”

울상을 지은 글라스칸의 얼굴과는 달리, 아이린의 표정은 그 어느 때보다 흡족한 듯 보였다.

#

“...글라스칸 백작의 상심이 크겠습니다."

아까와는 달리 반짝이는 눈동자로 서류를 검토하는 그녀에게 입을 열자, 아이린은 서류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대답했다.

"그가 불쌍하다고 생각하나요."

"......"

"영지를 위해서 무언가를 하다보면, 신경써야 할 게 많아지죠. 돈, 영지민, 이외에도 공작저에 소속된 인원만 수십명에 달해요. 그런 그들을 신경 쓰는 것만으로도 벅찬데, 남의 영지까지 내가 신경써줘야 할까요."

"아닙니다."

서류에서 시선을 뗀 그녀는, 이내 나를 바라보며 말을 이어갔다.

"누군가 나를 악당이라 불러도 좋아요. 마정석 광산은 원래부터 중요했고, 게다가 이번엔 완전히 소유할 필요가 있었거든요."

이번 축제 때문에 더욱 많이 소모될 예정이니까요.

그렇게 덧붙인 그녀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영지를 위해서 였던 이 거래를 무어라 할 마음은 애초에 추호도 없었으니까.

제국의 건립일, 일주일간 열리는 축제는 제국의 수도와 더불어 5대 가문 중 하나인 이 유리스 공작령에서도 열리지 않던가.

그 어두운 밤을 낮처럼 환히 밝히기 위해서는 아마 어마어마한 양의 마정석이 필요하리라.

“근데, 축제에는 관심이 없으십니까?”

허나 축제에 그리 신경쓰면서, 정작 자신이 참가하는 것엔 별 관심이 없어보여 내가 묻자 그녀는 눈살을 살짝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관심이 없기 보다는, 축제에 참가할 수 없는 상황이니까요. 그 일주일 동안 내가 과연 이 방에서 나갈 수는 있을지.”

제 손가락에 달린 증표를 바라보던 아이린은 한차례 쓰게 웃곤 시선을 돌렸다.

체념이라도 한 것일까, 그래도 건립일 축제가 유리스령에 열리는 것은 5년마다 한 번이라 들었는데.

아무리 그녀라 한들 관심이 없을 수 있을까.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가, 이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한 번 가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나쁘지야 않죠, 허나 상황이,”

“축제의 마지막 날에는 공작님이 돌아오시지 않습니까. 그때라면, 다녀올 수 있지 않겠습니까?”

지금은 수도에서 열리는 건립일 행사 탓에 수도로 가있는 공작이었지만,

그런 그가 돌아온다면 아마 아이린이 하고 있는 가주대행 노릇도 끝날 터이니.

내가 아이린을 빤히 쳐다보자, 그녀는 눈을 가늘게 뜨며 입을 열었다.

“...그 것도 맞는 말이긴 하네요.”

그 가늘게 뜬 눈 사이로 보이는 눈동자가 너무도 반짝여서, 무심코 웃음이 새어나왔다.

그리도 가고 싶었던 걸까. 하기야, 저번에 서점을 간다며 거리에 나갔을 때도 그녀는 주변에 퍽 관심이 많아보였으니까.

푸른 눈동자에 이는 반짝임을 너무도 빤히 바라본 탓인지,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을 알아챈 듯 움찔거린 아이린이 고개를 휙 돌리며 무심히 대꾸했다.

“아무튼, 지금은 그런 것을 신경 쓸 시간은 없으니. 다음에 다시 생각해보죠.”

“...알겠습니다.”

아무래도, 그 속마음이 들킨 것이 영 부끄러운 모양이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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