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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판 속 악녀의 호위기사가 되었다-10화 (10/181)

〈 10화 〉 다과회(5)

* * *

에반을 그렇게 보낸 뒤, 자신이 한 생각이란 에반 프리드라는 이에 대한 생각이었다.

문득 우습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저 하던대로, 사무적으로 그를 대하면 될 텐데.

정을 주지 않고, 마음을 주지 않고. 단지 호위 기사라는 직책으로만 그를 대하는 것이 가장 편할 터였다.

그를 처음 만난 그 순간이라면, 그 것이 아주 쉬울지도 몰랐다.

상식조차 부족한 이, 아직 정식으로 서임하지도 않은 그가 저를 아가씨라 부를 때라면, 하다못해 암살자를 만나기 전이라면.

가능했을지도 몰랐는데.

어느덧 제 눈가가 잘게 떨리고 있음을 깨닫는다.

떨리는 눈가를 매만지며, 자신이 동요하고 있음을 알아차린다.

잔잔한 호숫가에 던져진 아주 자그마한 돌이, 그 마음에 거대한 파문을 일으키고 있었다.

“...하아.”

가슴이 답답했다. 무언가가 꽉 막은 듯, 숨구멍을 꽉 조이고 있는 그 무언가에 눈살이 찌푸려졌다.

역시나, 자신은 그 날 의무실에 들어가서는 안됐다.

그 때 들은 한 마디에 이토록 휘둘리게 되리라고 어찌 예상했겠는가.

식어버린 찻잔을 들었다가 이내 내려놓고, 잠시 눈을 감으며 숨을 들이쉰다.

초록빛으로 이루어진 정원에서 흐르는 맑은 공기가 폐에 들어오자, 답답했던 가슴이 잠깐이나마 트이는 듯 했다.

하지만 그 것은 아주 잠깐, 이내 또다시 답답해져오는 가슴에 무거운 숨을 겨우 토해낸다.

거슬려서, 신경 쓰여서. 이유조차 알 수 없었지만, 계속해서 머릿속을 맴도는 그 녹안이 자신의 평정을 방해하고 있었다.

그 입술에서 새어나오던 진중한 목소리가 바람에 섞여 들리는 듯 했다.

무슨 마법이라도 부린 것일까. 허나 그는 기사일 뿐, 마법사는 아니였다.

아마 심란한 탓에 이런 것이리라 짐작할 따름이었다.

이 지루한 티타임에 홀로 자리를 지키는 것도 지루한 터라, 이제 슬슬 일어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차라리 산책이라도 하면 이 답답함이 가시지 않을까.

자신은 아직, 이 이름 모를 감정을 알고 싶지 않았다.

그저 잠시만이라도 좋으니 이 답답함을 지우고 싶었을 뿐.

드르륵­

조심스레 자리에서 일어나자, 저를 향해 영애들의 시선이 집중 된다.

그토록 시끄럽게 얘기하던 와중에도 자신을 신경쓰고 있던 것인가.

진정 신경을 썼다면, 호위 기사에 대한 얘기를 하지 않았음 좋았을 텐데 말이야.

입꼬리가 비틀려지고, 얼굴에 지어진 비웃음을 지운 뒤 살짝 고개를 숙인다.

하던 얘기들마저 하라고, 자신은 이 자리에서 빠져 줄 테니.

잠시 새하얗게 질린 그녀들의 얼굴에 화색이 돌고, 이내 그 입에서 나오는 말들이 점점 시끄러워지기 시작했다.

자신의 존재가 그리도 불편했던 것일까.

불편하다면 차라리 초대를 하지 말 것이지. 어찌 이런 자리에 자신을 부른단 말인가.

예의상, 이라는 말이 있긴 했지만. 그런 허례허식 따위 아무래도 상관 없었다.

진정 자신의 마음에 들고자 했다면 차라리 다른 방법을 사용하는 것이 좋을 터.

혹여 저들을 보는 시선이 더욱 싸늘해질까 미련 없이 그 자리를 떠났다.

그러고보니 로페나는, 잠시 전속 시녀에 대한 생각을 떠올렸다가 이내 자신이 보냈음을 깨닫곤 침음을 삼켰다.

생각하느라 이런 것도 잊고 있었나, 아무래도 조금 차분해질 필요가 있었다.

자신이 쿠키는 주었겠지? 언제나 쿠키를 입에 물고 다니는 로페나는, 간식이 없을 때면 항상 기운이 없곤 했다.

그리 좋아하지도 않는 쿠키를 구워달라며 직접 요리장에게 요청한 것도 그런 이유였으니까.

잠시 로페나에 대한 생각을 하다가, 그녀처럼 저 멀리 보내버렸던 제 호위 기사에게 그 생각이 닿자 눈살이 절로 찌푸려졌다.

차라리 생각을 그만 두는 게 나을 성 싶었다.

머릿속을 어지럽히는 생각들을 비워내자, 가슴 속을 덮고 있던 답답함이 조금이나마 사라지는 것 같아 표정이 한결 풀렸다.

생각을 비우고, 눈으로 보이는 풍경에 집중했다.

태양이 서서히 저물어 붉게 물드는 하늘, 그 하늘 아래에 그림자가 져 거뭇하게 보이는 나무들,

천천히 시드는 해바라기, 노을빛에 붉게 물든 푸른 정원.

그리고 귓가에 들리는 한 목소리에 상념이 깨진다.

수평을 그린 눈꼬리가 서서히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이 목소리는 분명, 꽤나 익숙한 목소리가 아니던가.

“근데, 오래볼 것 같다니. 난 이제 잘릴 지도 모르는데?”

풀숲 사이로 보이는 것은 로페나와 자신의 기사였으니. 허나 기사의 입에서 나온 말에 얼굴이 와락 찌푸려졌다.

잘릴 지도 모른다니, 혹시 자신이 모르는 새에 아버지가 압력이라도 넣은 것일까.

제아무리 아버지라 한들, 유리스의 공작이라 한들 자신의 사람을 함부로 다루는 것은 용납하지 않는다 분명히 말해두었을 텐데.

순간 마음속에서 분노라는 감정이 피어오를 뻔 했으나,

다행히도 그저 추측에 지나지 않는 듯 어깨를 으쓱이는 기사의 모습에 가슴이 다시 차분해지기 시작했다.

아버지가 한 짓이 아니라면, 그가 이런 이야기를 꺼내는 것이 무엇일까.

로페나가 무어라 말하고, 다시 기사가 입을 열었을 때. 자신의 얼굴은 다시 와락 일그러졌다.

이번에는 분노도, 의아함도 아닌. 그저 황당하기에 찌푸려졌을 뿐이었다.

내가 그를 싫어한다고? 그런 감정을 품어본 적도 없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감정이란 것을 품을 만큼 그에 대해 깊게 생각하는 것을 피해왔으니까.

허나 맘에 들지 않았다는 추측은 분명히 부정할 수 있었다.

그는 제 역할을 잘 수행하고 있었고, 여태껏 그에게 모질게 굴었던 것들은 전부 자신의 혼란스런 감정 탓이었으니까.

그 일에 대해서는, 나중에라도 사과하리라 생각하고 있었는데.

자신의 호위 기사가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꽤나 충격으로 다가왔다.

자신을 싫어한다고 생각할 만큼 내가 모질게 대하고 있었나. 그를 싫어하지 않았다. 되려, 그에 대한 감정은 오히려 긍정적인 쪽에 가까웠다.

다만 자신을 볼 때면 더욱 깊어지는 것만 같은 녹안이 부담스럽다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그랬는데.

드레스 자락을 움켜쥐었다가, 이내 숨을 길게 내뱉으며 손을 떼었다.

로페나와 에반의 대화가 이어질수록 얼굴에 드리워진 그림자가 계속해서 커져가는 듯 했다.

“좋은 분이지.”

자신을 싫어한다고 생각하는 이에게 하는 평가라곤, 너무도 좋지 않은가.

그는 상냥한 사람이었고, 그에 비해 자신은 참으로도 우스운 꼴이 되었다.

설령 자기가 어떤 마음을 품었다 하더라도, 그것을 느끼는 이가 받는 느낌이 가장 정확하지 않을까.

틱­

또, 가면이 부서지려 했다.

제 입술을 씹으려드는 이빨을 안으로 밀어 넣으며, 다시금 차분한 표정을 연기한다.

아무렇지 않게, 그저 이 대화에 흥미를 가진 이처럼. 허나 그에게 말해야 할 것은 잊지 않아야 했으니까.

나는, 에반이라는 사람을 싫어하지 않았다고.

“참, 재밌는 얘기를 하고 있더군요.”

그를 보는 눈은 여전히 차가웠으나, 속마음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입 안에서 비린 맛이 감돌았다.

#

숨이 막히는 것만 같았다.

도대체 이를 어찌 해명해야 할지, 나를 바라보는 그 시선은 마주치지 않고 있음에도 나를 짓뭉개려는 것만 같아 숙여진 고개가 점점 기울기 시작했다.

“에반 프리드.”

“...죄송합니다.”

“내가 원하는 말은 그런 게 아니에요. 내가, 정말 그대를 싫어한다고 생각하나요.”

다물린 입이 쉽사리 열리지 않았다.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너무도 싸늘해서, 순간 몸이 얼어붙은 것만 같은 착각이 들었다.

아이린이 없을 때 그녀의 이야기를 했다는 것만으로도 잘못이었는데, 이렇게 그 본인에게 직접 들키다니.

어디서부터 듣고 있던 건지는 몰라도,

내가 한 말을 어떻게 수습해야 될 지에 대해 생각하는 머릿속이 금방이라도 터질 듯 과열되기 시작했다.

죄송하다고 앵무새처럼 대답한다한들, 이 답답한 상황이 끝날 것이라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차라리 솔직하게 말하는 것이 나을까.

용병, 나쁘지는 않을 터였다. 그런 생각을 하며 다시 마음을 단단히 먹는다.

어차피 잘릴 거라면, 이렇게 말하고 나서 가는 것이 오히려 후련하겠지.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저를 싫어하신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유는.”

“제가, 호위 기사가 된 일주일간 무엇을 잘못 했는지 전혀 모르겠습니다. 허나 아가씨께서는 질책하셨으니, 그 이유가 궁금할 뿐입니다.”

고개를 숙인 채 말하는 내 목소리는 그 어느 때보다 덤덤했다.

이미 체념해서 그런 것일까, 절로 지어지는 헛웃음을 억누르며 아이린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 푸른 눈에서 비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으니, 그녀는 내가 한 말을 듣고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일까.

허나 바라는 것이 있다면, 그녀가 상처를 받는 것을 원하지는 않았다.

이미 이 공작저에서 받았을 상처가 얼마나 될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으니까.

15살이란 어린 나이의 소녀가 짓는 표정이란, 모든 것에서 해탈한 승려와도 같은 표정이었으니.

그녀가 여태껏 느껴왔을 감정의 편린조차 나는 이해할 수 있을까.

소설을 읽던 내가 그녀의 호위 기사가 된 것을 나는 이렇게 해석했다.

그녀의 곁에서, 그녀가 겪을 비극을 막으라고. 아이린 유리스라는 여인이 겪을 비극은 단지 제 목숨을 잃는 처형뿐만이 아니었으니까.

그녀의 호위 기사가 된 것이 단순히 우연의 산물이었다면, 차라리 깔끔하게 끝나기를 바랐다.

용병일을 하던, 나중에 원래 세상으로 돌아갈 방법을 찾던 그 것은 나의 일이었고.

그냥 그녀의 안녕을 바라며 헤어지길 바랐다.

여전히 무감한 아이린의 얼굴을 바라보며 옅게 미소지었다.

그 푸른 눈동자가 한 차례 감기고, 그 입술이 달싹거렸을 때에 이미 나는 내 운명을 직감했다.

아마 곧이어 이어지는 말은, 이제 이 공작저에서 떠나라는 말이리라.

허나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은, 내 표정을 산산히 부수기에 충분했다.

“미안해요.”

더없이 무감한 얼굴에서 나온 것은, 한없이 따스한 음성이었기에.

무표정한 얼굴이라 생각했다. 그 푸른 눈동자 속에서 일렁이는 것은 그저 냉정함뿐이리라, 그렇게 생각했건만.

살짝 고개를 숙이는 그녀가 고개를 들었을 때, 그녀는 분명히 자신에게 미안해하고 있었다.

죄책감을 지니고, 사과하고 있었다. 내가 그렇게 생각하게 된 것에 진심으로 미안한 듯, 미약한 한숨을 내쉬는 그녀의 얼굴에는 그림자가 지어져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게 된 것에 대해서는, 내가 할 말이 없네요.”

“......”

“그대에게, 진심으로 사과하죠.”

그 가녀린 손이 가슴에 닿으며, 고개를 숙이는 그녀의 모습은 우아했다.

허나 가장 놀라운 것은 그녀가 내게 사과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럼, 내가 생각했던 것들은 전부 오해에 불과했다는 건가.

문득 치솟는 허탈한 감정에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저를...싫어하신다고 생각했습니다.”

평소와 별 다를 바 없는 행동에도 여지없이 싸늘해지는 그 눈빛이, 기분이 괜찮다가도 나를 볼때면 다시금 스산해지는 그 분위기는.

나를 싫어한다고 생각하기에 충분하지 않던가.

내가 의아해하며 묻자, 아이린은 옅게 한숨을 내쉬더니 이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마음이 복잡해져서 그런 것뿐이에요. 이제는 그렇지 않을 거라 내 약속하죠.”

“제가, 무어라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내가 해온 생각이 오해였다면, 내가 한 말을 들은 그녀는 무슨 기분일까.

사과하고 싶었으나, 그 입술이 달싹거릴 뿐 쉽사리 무어라 말이 내뱉어지질 않아서. 그렇게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았다.

“괜찮아요, 아무 말 하지 않아도. 이미 차고 넘칠 만큼이나 들었으니까.”

그 미묘한 말에 의문을 품기도 잠시, 이어지는 그녀의 말이 귓가에 들려왔다.

“잘릴 거라는 말을 함부로 하지 말아요. 설령 내 아버지인 가롯 유리스가 명하더라도, 그대의 처우를 결정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나 하나니까.”

“...네.”

“마음에 차지 않았더라면, 이미 진즉에 쳐낼 수도 있었어요.”

“......”

“그럼에도 그대가 계속해서 호위 기사로 있을 수 있었던 건.”

잠시 나를 응시하던 그녀가 시선을 거두고는, 이내 허공을 바라보며 입술을 달싹였다.

“상식이 부족해도, 가끔 씩 멍청한 모습을 보이는데다 저 혼자 주절거리는 버릇이 있어도. 그대의 성실함이, 그 실력이, 상냥함이. 내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에요.”

그러니까. 옅은 한숨과 이어지는 말은, 귓가를 통해 들어와 내 표정을 허물게 만들었다.

마치 한여름의 온기처럼, 그제야 이 정원을 감싸는 공기가 덥다는 것을 느낀다.

그녀의 말은 따듯했고, 허공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은 더 이상 차갑지 않았다.

“이제는 알겠나요. 내가 그대를 싫어하는 게 아니라는 것을.”

“...네.”

정말로, 그 뼈에 사무치도록. 그녀가 보내던 그 찰나의 온기를 가슴 속에 새겼기에.

나는 비로소 딱딱하게 굳어있던 표정을 풀 수 있었다.

어깨를 짓누르던 짐이 사라져 한결 가벼워진 마음에 이제는 편안히 숨이 내쉬어졌다.

코를 가득 메우는 풀 내음과 함께 보이는 풍경은 더없이 아름다운 정원인 탓에, 나는 아이린을 바라보며 환히 미소 지어보였다.

“감사합니다. 그렇게 생각해주셔서.”

그런 나를 빤히 바라보던 아이린은 이내 아무 미련 없다는 듯 등을 돌렸다.

자신이 할 말을 다했다는 것일까. 그렇게 저 혼자 정원을 걷던 그녀는, 잠시 발걸음을 멈추며 입을 열었다.

“가죠, 곧 어두워질 테니.”

“...네.”

그 말대로, 하늘은 어느덧 물감을 흩뿌린 듯 까맣게 물들어 있었다.

나를 보며 키득거리는 로페나를 잠시 바라보다가, 곧이어 아이린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어둠이 스며든 정원조차, 퍽 아름다워 보인다는 생각이 들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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