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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판 속 악녀의 호위기사가 되었다-7화 (7/181)

〈 7화 〉 다과회(2)

* * *

“다과회라.”

머리를 매만지는 손길이 부드러웠다.

고작해야 차를 마시고, 간식을 먹는 자리일 뿐일 텐데. 어찌 이런 거추장스런 치장을 해야 하는 것일까.

문득 머리카락 사이를 비집고 들어오는 악세서리가 불편하게만 느껴져 눈살이 찌푸려졌다.

당장 오늘 해야 할 것들이 산더미인데, 이런 쓸데없는 활동을 하는 것이 과연 맞는 일일까.

덜떨어진 영애들의 비유를 맞춰주고, 재미도 없는 농에 웃어주는 흡사 인형놀이와도 같은 그 사교회란.

상상만 해도 질리는 것만 같아 옅은 한숨이 새어나왔다.

“표정이 안 좋으세요.”

“가기 싫으니까.”

자신이 왜 그런 곳에 가야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영애들과 답 없는 화담을 잇는 것보다야, 차라리 검을 휘두르며 땀을 흘리는 것이 훨씬 보람찬 일이리라.

무릇 차후에 함께 제국을 이끌어 나갈 이들이니 관계를 쌓는 것이 좋다고는 했지만, 그 멍청한 이들이 과연 정치에는 관심이 있을까.

당장 황제가 만들어내는 정책보다는 옆집 가신들의 정열적인 사랑이야기에 더 관심 있어 하겠지.

푸른 눈이 다시금 가라앉자, 주변에 있는 시녀들의 움직임이 다급해졌다.

제 주인의 심기가 불편해졌으니 눈치껏 움직이는 것이리라.

허나 그다지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으니, 가볍게 손짓하자 소란스럽던 움직임이 일시에 그쳐진다.

참으로 편하지 않은가, 공작가의 공녀라는 위치는.

역설적이게도, 그 위치에 놓인 자신은 늘 숨구멍을 죄여오는 압력에 미칠 지경이었다.

제게 보내는 기대감이란, 설령 티를 내지 않는다 하더라도 쉬이 느껴지는 것이었으니까.

“로페나.”

“네, 아가씨.”

다시금 가볍게 손을 놀리자, 로페나가 주변에 있는 시녀를 물리기 시작했다.

아직 치장할 것이 남았다며 투정부리는 이는 친히 눈을 마주쳐주었다.

순식간에 새하얗게 질리는 안색은, 정말 언제 보더라도 진귀한 광경이 아니던가.

이윽고 로페나를 제외한 시녀들이 방에서 나가고, 문득 떠오른 존재를 입에 담는다.

“에반은.”

호위기사 에반 프리드,언젠가부터 가문에서 기사후보생으로 지내던 이.

그러나 그가 가진 재능이 꽤나 탁월했는지 천재라 불리며 호위기사가 되었다는 것 말고는 아는 것이 전연 없었다.

‘거슬려.’

처음 만난 그 때부터, 꽤나 제 심기를 거스르는 탓에 맘에 들지 않았다.

정확히는, 어서 빨리 시야에서 사라졌으면 하고 내심 바라고 있었다.

어째서일까, 생각해보면 그가 자신에게 한 일 중에 큰 실수랄 것도 없지 않은가.

오히려 실력적인 측면에서는 여태껏 만난 이들 중 가장 낫다고 할 수 있었다.

그 날 밤, 마주쳤던 살수들의 실력은 결코 낮지 않았으니까.

그런 이들을 쉽사리 제압하던 그 실력은 분명 익스퍼트의 수준을 넘고도 남았다 할 수 있었다.

“크리스 경이 부르러 갔으니, 아마 곧 올 거에요.”

“그런가.”

저를 바라보던 그 따스한 녹안을 떠올릴 때면, 괜스레 마음이 가라앉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어서.

그 예사롭지 않은 감각에 절로 눈살이 찌푸려졌다. 어찌하여 불평 한 번 내뱉지 않는 건가.

자신은 분명, 평소보다도 날카로이 그를 대하고 있을 게 분명했는데.

‘태만하다고 생각하지 않나요.’

그는 부지런했다. 오히려 성실하다는 칭찬이 어울릴 만큼이나 제 할 일을 척척 잘도 수행했다.

새벽녘에 일어나 크리스 경과 훈련을 했고, 그 외 여가시간에는 책을 읽는다하였으니.

훈련이 끝나면 퍼질러 자기 바쁜 기사들과는 궤를 달리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허나 그럼에도 그를 모질게 대했음은, 그를 볼 때면 떠오르는 한 마디의 말이.

쓰고 있는 가면을 처참히 무너트렸기 때문이었다.

­괜찮으십니까.

그 덤덤한 말투가 귓가에 맴돈다. 사라지지 않고, 제아무리 귓가를 틀어막는다한들 결국 그 말이 잊히지 않았다.

푸른 녹안에서 보이는 것은 분명 자신을 향한 연민이었고, 걱정이었고, 동정이었기에.

무덤덤한 말투에 담긴 감정 또한 그러함을 잘 알고 있었다.

어찌하여 그는, 몇 번 마주치지도 못한 이를 그런 눈으로 바라볼 수 있는가.

한 번도 제게 그런 시선을 보내는 이가 없었다.

자신을 바라보는 눈동자에 담긴 감정이란 하나 같이 두려움, 존경, 동경과도 같은 것이었으니.

저를 볼 때면 떨리는 그 눈동자가, 참으로 쉽사리 잊히지 않았다.

어느새 감긴 눈이 옅게 떨렸다. 부들거리는 속눈썹 사이로 들이치는 바람에 눈을 뜨자, 그제야 제 앞에 놓인 창문이 열려 있음을 깨닫는다.

창문 너머로 보이는 정원의 색마저 녹색이라, 어쩐지 가슴이 답답해지는 것만 같았다.

“...하아.”

부른 지가 언제인데, 도대체 아직까지 오지 않는 것인지.

갑작스레 피어오르는 짜증을 이 자리에 없는 에반 프리드에게 돌리는 것도 잠시, 이내 들려오는 노크 소리에 상념을 지운다.

똑똑­

문이 열렸을 때, 입꼬리는 다시금 수평을 그린 뒤였다.

#

“늦었네요.”

도대체 무엇을 보고 늦었다고 하는 건지. 내게 쏘아지는 그 싸늘한 시선에 무심코 숨을 토해냈다.

마음 같아서는 한 마디 따지고 싶었으나 그럴 수는 없었고, 그저 죄송하다는 말과 함께 고개를 숙일 뿐.

여상스런 그 목소리에 담긴 것은 분명히 한기였으니, 평소와는 달리 그녀의 기분이 그리 좋지 않다는 점을 금세 깨닫는다.

무엇이 그녀의 기분을 좋지 않게 했는지는 몰라도, 아마 지금은 조심하는 것이 신상에 이로울 터였다.

“다과회에 가신다 들었습니다.”

“참으로 안타깝게도 말이죠.”

다과회인가, 아이린의 기분을 이토록 엉망으로 만든 것은.

그러고 보면 훗날에도 그녀는 쉽사리 사교회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녀가 여주와 싸운 그 장소에서도, 아이린 유리스가 나타남에 사람들이 놀라지 않았던가.

하지만 가끔씩 이렇게 모습을 보이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터.

그녀 또한 그 사실을 알고 있기에 이렇게 사교회에 참석하는 것이리라.

그 영민한 두뇌라면, 제아무리 싫은 일이더라도 필요가 있다면 해야 함을 잘 알고 있을 터이니.

문득 그녀가 입고 있는 드레스에 시선이 쏠리자, 나는 절로 새어나오는 감탄과 함께 그녀의 옷차림을 바라보았다.

밤하늘의 별을 그대로 옮긴 듯 허공에서 찬란히 그 빛이 부서지는 드레스,

금, 은, 동색의 실들이 저들끼리 이어져 한 폭의 그림과도 같은 그 광경에 입술이 조금 벌어졌다.

새하얀 그녀의 머리카락이 이내 드레스 어깨자락에 떨어지고, 그 주변을 빛내는 악세서리마저 묻히게 만드는 그 유려한 외모가 찬란히 빛을 내니.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보는 내게 로페나가 눈치를 주지 않았더라면, 저도 모르게 아이린 앞으로 다가갈 뻔하였다.

“...정말이지.”

나를 한심하게 바라보는 그 시선에 가슴이 비수에 찔린 듯 아려왔다.

아름다운 이를 쳐다보는 것이 어찌하여 잘못이란 말인가.

잠시 고개를 숙이자, 한 번 혀를 찬 아이린이 발걸음을 옮겼다.

고개를 돌리자 보이는 것이 로페나가 나를 안쓰럽다는 듯 바라보는 그 동정어린 시선인지라, 나는 그저 쓰게 웃었다.

그렇게 한참을 걷자 이곳저곳에 말끔히 피어난 꽃들이 보이는 정원이 보였다.

공작저 내가 워낙 넓은 탓에 다 둘러보진 못했는데, 이런 장소가 있다는 것에 다시금 내 눈이 커졌다.

여름이면 피어나는 꽃들이 모두 한 곳에 모여 있었으니.

이 세상의 여름을 그대로 담아낸 것만 같은 청록의 정원 너머에 조잘거리며 떠드는 여인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마도 이 다과회에 초대된 영애들의 목소리겠지.

높게 솟아오른 해바라기는 저 멀리 떠오른 태양을 향해 아무도 모를 애정을 보내며,

그 사이로 드문드문 피어난 플록스가 푸른 풀잎사이에 보랏빛의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형형색색의 장미가 제게 있는 가시도 잊은 채 그 향을 그윽히 풍기고 있는 모습이란,

내가 밟고 있는 이 잡초마저 이름 모를 꽃인지 의심이 갈 정도였다.

그 그림과도 같은 풍경에 로페나가 두 눈을 반짝이며 도도도, 하고 뛰어간다.

마치 물을 만난 물고기처럼 주변을 끊임없이 둘러보는 로페나에게 아이린이 고개를 선선히 끄덕이자, 로페나는 들꽃을 하나둘 꺾어 제 손목에 엮기 시작했다.

“아가씨도 만들어 드릴까요?”

“아니, 나는 됐어.”

참으로 아이다운 모습에 절로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나나 아이린과 같은 나이임에도 아이의 순수함을 지닌 그녀는, 보는 이에게 기쁨이란 무엇인지 톡톡히 알려주는 존재였다.

잠시 아이린에게 시선을 돌리자, 그녀의 눈동자에 서린 짙은 혐오감에 헛웃음이 튀어나왔다.

그 시선이 향하는 곳이 로페나가 아닌 정원의 너머였기에, 나는 그녀가 이런 사교회를 싫어하는 이유를 쉬이 짐작할 수 있었다.

아마 저 너머에 있을 영애들이 그 이유이리라.

이해할 만도 했다. 내가 아는 아이린 유리스와는 완전히 대척점에 선다고 할 수 있는 것이 이 세상 속에 있는 대부분의 영애들이었으니까.

아직까지 아이와 같은, 어른들이 벌이는 그 치열한 암투와도 같은 사교회와 달리 그 나이대의 소녀들이 할 만한 얘기로만 가득 찬 것이 이 다과회일 테니.

그런 것과는 영 거리가 먼 아이린 입장에서는 그저 지루한 티타임에 불과할 것이다.

아마 내 생각엔 그냥 검을 휘두르는 것이 훨 낫다고 생각하고 있지 않을까.

문득 떠오르는 걱정은, 이 사교의 장에서 아이린이 소외되지는 않을지에 대해서였다.

아무래도 이런 다과회마저 진심으로 혐오하는 그녀였으니까, 아무래도 다른 파티 같은 곳에 쉽사리 모습을 드러내지도 않았을 테고.

이미 각자의 파벌을 생성했을 게 뻔했다. 물론 그 파벌에서는, 아이린 유리스라는 이름이 없을 게 분명할 터.

“...하아.”

소설 속에서 그녀가 쌓아두었던 기반이 적은 것도 아마 이 탓이겠지.

사교에는 영 관심이 없던 그녀였기에, 자신을 위해 진심으로 충성해줄 세력을 만들어두지 못했을 거고.

결국 황태자에게 수세에 몰리자 결국 그녀를 겉으로만 충성했던 세력들이 순식간에 떠나가 그녀 홀로 덩그러니 남게 되는 그런 상황.

그녀가 미래에 겪을 일은 분명히 그런 상황 때문에 일어난 일이리라.

문득 치솟는 걱정에 눈살이 찌푸려졌다. 이런 자신의 걱정을 그녀는 알고 있을까.

조언이라도 해주고 싶었건만, 저를 호위기사로도 인정하지 않는 것 같은 그녀의 태도에 쉽사리 말을 거는 것조차 힘들었다.

그 것이 진정 내게 하는 하나의 시험인지, 그 것이 아니라면 단지 자신에게 멀어지도록, 내가 그녀를 싫어하도록 바라는 그녀의 속셈인지.

시간이 흐르면 곧 알게 될 진실이었다.

그러니 지금은, 그저 묵묵히 곁에서 지켜볼 뿐.

“이제 슬슬 출발하셔야 합니다.”

“...그러죠.”

들꽃을 꺾는 로페나를 바라보던 아이린에게 조용히 말하자, 그녀는 고개를 선선히 끄덕이며 로페나를 불러들였다.

정원에 푸른 녹지 위로 피어난 꽃을 피하는 아이린의 발걸음은 꽤나 우아했다.

아니, 어쩌면 꽃들이 그녀를 위하여 비켜주는 모습처럼도 보였다.

마치 모세가 일으켰던 하나의 기적처럼, 그 푸르른 녹음을 조금도 해치지 않고 걷는 그 모습은 그녀가 천생 귀족인 것처럼 보였으니까.

그렇게 그 모습에 감탄을 하기도 잠시, 정원을 벗어나자 보이는 기다란 하얀 색의 탁자가 눈에 띄었다.

그 위로 보이는 것은 장미넝쿨이 감겨진 하얀색의 터널. 그 아래에 모인 것들은 참으로 즐겁게도 티타임을 즐기는 영애들이었다.

“어머, 그랬나요. 그런 일이 있었다니 저는 여태 몰랐네요.”

“그럴 수도 있죠. 그나저나, 최근에 백작령에 소란이 일었다면서요. 혹여 다치신 분이 있진 않았나요?”

“걱정해줘서 고마워요. 다행히도 저희 가족들을 전부 무탈하답니다.”

참새가 지저귀듯 소란스런 그녀들의 모습에 아이린의 눈에 한기가 일었다.

보는 이의 소름이 오스스, 돋을 정도의 한기. 그녀가 이 자리를 싫어한다는 것은 설령 어린 아해(??)가 보더라도 알 수 있으리라.

저벅.

시끄러웠던 정원을 가로지르는 차가운 발소리에 순식간에 적막이 찾아온다.

마치 그들의 공간을 꽁꽁 얼리기라도 한 듯, 방금까지 손등으로 입을 가리며 웃던 영애들의 표정은 이내 딱딱히 굳어 마치 조각상을 보는 듯 했다.

“...어머, 공녀님께서 오셨네요.”

“차기 방패께 인사 올립니다.”

이윽고 한사코 숙여지는 고개에 인사말이 이어졌지만, 내가 느끼는 감상이란 그 소란스런 인사와 꽤나 달랐다.

영애들이 아이린에게 보이는 태도가 벽과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저들끼리 만들어낸 그 끈끈한 무언가 속으로 아이린을 들이지 않을 거란, 너무도 굳건한 벽.

그 것을 알고 있음에도 여전히 무감한 아이린의 얼굴을 보았을 때는, 그저 실소를 흘리는 것이 전부였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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