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 항복을 받아내다.
“총수의 교체를 생각하고 있는데, 회장님의 용퇴까지 거론하는 저의가 무엇입니까?”
황채근 전무가 굳은 표정으로 야마모토 야스키에게 되물었다.
‘잠시’라는 전제를 달았지만, 심정호 회장은 상징적인 존재였기에 흔들려서는 안되는 존재였다.
그룹을 총괄하는 총수는 언제든지 변경되어도 상관이 없지만, 회장은 달랐다.
‘왕’은 늘 그 자리에 있어야 했다.
“그만큼 지금의 매출 하락과 심 상무의 일로 인한 그룹 이미지의 타격을 심각하게 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사죄회를 해야 합니다.”
“사죄회요?”
임원들은 사죄회라는 말에 다들 얼굴이 굳어졌다.
하지만, 야마모토 야스키는 오히려 이렇게 반응하는 한국 임원들을 이해하지 못했다.
일본에서는 회장과 그룹 총수, 사장들이 티비 앞에 나서서 대 국민 사죄를 하는 사죄회가 심심찮게 있었다.
그리고 사죄회를 한 이후 잠시 물러났다가 은근슬쩍 복귀를 하기도 했는데, 이는 크게 흠이 되지 않는 일이었다.
오히려 자기가 벌려 놓은 일을 마무리하기 위해 다시 돌아왔다고 하여 책임감 있는 행동으로 보기도 하는 곳이 일본이었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회장이나 경영자가 공개적인 자리에서 고개를 숙이며 사죄하는 행위를 아주 부정적으로 보았다.
한국과 일본의 기업문화가 비슷하지만, 이런 부분은 완전히 다른 것이었다.
한국에선 기업이 잘못을 저지르면 그저 일간지에 광고를 내고 홈페이지에 사과문을 올리면 그걸로 끝이었다.
그리고, 그런 기업의 사과를 받았다는 듯이 대부분의 한국 소비자들은 그런 잘못에 대해 크게 따지지 않았다.
하지만, 일본에서 그런 사과문을 올리는 방식으로 사과를 했다면, 진정성 없는 사과라고 소비자를 우습게 보냐고 난리가 났을 터였다.
그래서, 일본인이 대부분인 지주사 신흥 홀딩스는 LT그룹의 심씨 일가에게 그런 사죄를 받길 원했다.
한국 경영자들은 국민에게 고개를 숙이는 것을 아주 큰 치욕으로 여기는 것 같으니 그렇게 사죄를 시켜서 두 세력 간의 기 싸움에서도 주도권을 잡길 원하는 것이었다.
“지금의 사태는 사죄회 같은 빅 이벤트가 있어야지 해결이 된다고 보고 있습니다. 신흥 홀딩스에서는 이번 건을 사드 사태와 같은 선상에 두고 있기에 최악의 사태를 피하기 위해 사죄회가 필요하다고 봅니다.”
사죄회를 강요하는 야마모토의 말에 황채근 전무는 받아 들일 수 없는 일이라고 받아쳤다.
“매출 하락은 신제품으로 만회할 수 있고, 이미지 타격은 시간이 조금 걸리겠지만, 다른 이슈가 있으면 금방 잊힐 겁니다. 오늘 당장이라도 탑 스타의 열애설이나 마약 사건이 올라오면 바로 잊혀질 겁니다.”
황채근 전무는 말을 하면서도 음주운전을 하는 연예인이나 마약 하는 뽕쟁이 연예인이 씨가 마른 건가 싶었다.
매달 나오던 사건 사고가 이번 달 들어 일어나지 않고 있으니 어서 그런 딴따라들의 사고가 나오길 기다리고 있었다.
“신흥 홀딩스에서는 이번 매출 감소를 중국에서 겪었던 사드 사태처럼 생각하고 있지만, 그 일과는 성격이 다릅니다. 우선 같은….”
황채근 전무가 이야기를 계속하려는데, 심정호 회장이 손을 들어 입을 막았다.
“지주사에서 원하는 사죄회를 하도록 하지. 한국에선 기업의 임원이 나서서 고개를 숙이는 모습이 흔하지 않으니 파격적이라고 이미지 개선이 될 게야. 그리고 심재일 상무는 일본으로 데리고 가게.”
야마모토 야스키는 심정호 회장이 사죄회를 받아 들이고 심재일 상무를 내놓자 한발 물러섰다.
“알겠습니다. 그럼, 그 이후를 보도록 하죠.”
야마모토의 말을 들은 이들은 생각이 많아졌다.
IMF가 터졌을 때 이후 처음으로 국민들에게 사죄하기 위해 대기업의 임원이 카메라 앞에 서는 것이었다.
그리고, 카메라 앞에서 고갤 숙여 사죄하게 될 심재일은 이제 끝이 났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차남이 이제 후계자가 되는 건가?’
‘중국에서도 그렇고, 한국에서 콜라도 매출만 깎아 먹더니, 이젠 그룹 전체 매출의 30%를 깎아 먹었잖아. 아무리 장남이라도 팽당할 만 하지.’
‘차남은 한국말 아예 못하던데. 이거 일본어 배워야겠네.’
***
“사죄의 뜻으로 유업체를 매각하는 발표를 하는 것으로 하지. 우유는 이제 꼴도 보기 싫군.”
황채근은 시간을 끌어 어떻게든 흑자인 유업체를 지키고 싶었으나 어쩔 수가 없었다.
결국, 다시 스타 코퍼레이션 쪽과 협의를 했고, 뻥카로 흘렸던 2500억 보다 더 싼 2300억에 LT유업과 LT파미퇴르를 스타 코퍼레이션에 매각할 수밖에 없었다.
“…우유 시장을 혼란케 하여 물의를 일으킨바. LT그룹은 유업체를 매각하여 혼란을 주었던 시장에서 물러나도록 하겠습니다.”
심재일은 연단 옆으로 움직여 허리를 90도로 숙였다.
찰칵! 찰각! 촤르르르르칵!
사방에서 플래시가 터지고, 카메라 셔터가 연사를 찍어대는 소리가 울렸다.
“LT 그룹의 사원들은 잘못이 없습니다. 전적으로 물의를 일으킨 사람은 저 한사람 이오니 저를 미워하시고 직원들과 LT 그룹은 미워하지 말아주십시오.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눈을 질끈 감으며 숙였던 고개를 드는 심재일의 눈에서는 눈물이 흘렀다.
카메라와 플래시가 연이어 터지며 그런 흘러 내리는 눈물을 영상에 담아 내었다.
그렇게 눈물의 사죄회 영상은 저녁 메인 뉴스에서 송출되었고, 눈물을 흘리며 사죄하는 모습이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는지 떨어지던 매출이 멈추었다.
하지만, 이미 꺾인 LT 그룹의 유통 매출은 쉽게 다시 치고 올라가지 못했다.
***
“대표님 모든 납품이 정상화되었습니다. 내점 고객도 15% 늘었고 푸드 딜리버리로 배송도 10% 가량 늘었습니다.”
김민욱 총괄은 이제야 고민들이 다 사라졌는지 웃으며 보고를 했다.
“다른 우유 메이커의 가격은?”
“전체적인 우유 가격도 300원가량 하락했습니다. 정부에서 담합에 취약한 문제가 있다고 우유 산업을 대대적으로 손보기로 했으니 추가적인 가격 하락 요인도 있을 겁니다.”
“이제라도 정부에서 나서니 다행이네. 그럼 정리하는 일이 남았구만.”
인수한 유업들과 3공장의 생산 설비 중 중복되는 설비와 인원을 재 편성해야 했다.
한국에선 우유로 10%대 이익만 봐도 충분했다.
한국의 철저한 생산 관리로 만들어진 유제품으로 중국에서 이득을 보면 되는 것이었다.
“대표님. 이번 일로 인해 여러 언론사에서 인터뷰 요청이 들어와서 며칠 동안은 계속 인터뷰 하셔야 해요. 메이크업, 코디하시는 분도 출장 요청해서 왔으니깐 일단 단장부터 하세요.”
이번 사건으로 시선을 받는 입장이 되었기에 보여지는 이미지에 신경을 쓸 수밖에 없었고, 정윤이 주도하에 잘 꾸며져서 인터뷰를 시작했다.
“대기업과 피터지게 싸우면서 우유 유통시장을 정상화하셨는데, 혹시 과자나 다른 상품도 그렇게 가격파괴를 하실 건가요?”
“이신애 기자님은 어떻게 했으면 좋겠습니까? 무조건 가격파괴를 해서 상품의 값을 낮추는 게 좋다고 보시는 가요?”
“사치품이 아닌 생필품의 경우에는 가격파괴가 저는 있으면 좋다고 봅니다. 뭔가 한국은 몇몇 유통업체가 유통을 다 장악한 상황이라 가격이 오르기만 하고 내리는 것은 본적이 없거든요.”
“맞습니다. 처음으로 가격을 대대적으로 내리는 것이라 국민들이 더 호응을 해주는 것 같습니다.”
이신애 기자와 다른 기자의 말에 동석한 다른 이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밀가루나 석윳값이 오르게 되면 생필품 생산 단가가 올랐다고 물건 가격을 바로 올리는 것은 자주 봤었다.
하지만, 밀가루나 석윳값이 내렸다고 해서 물건 값이 내렸다는 것은 본적이 없었기 때문에 이번 가격파괴가 남긴 결과가 대단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가까운 일본의 경우에는 우마이봉(うまい棒)이란 과자 가격이 40년 동안 오르지 않았는데, 비슷하게 70년대 나온 한국의 맛언덕 가격은 10배 이상 가격이 올랐거든요. 문제가 있다고 전 봅니다.”
“음. 기자님. 그건 일본이 장기간의 디플레이션(deflation) 상태이다 보니 단순 비교가 사실 좀 힘이 듭니다. 그리고 어느 정도는 가격이 오르는 게 맞는 겁니다. 하지만, 과자 스낵류가 너무 많이 오른 것은 맞는거 같습니다.”
“그럼, 스낵류도 가격파괴 해주시는 건가요?”
“하하하. 너무 반응이 빠르신데요. 이러면 기자님이 원하시는 과자 가격파괴를 위해서 공장을 알아봐야 할 것 같은데요.”
“호호호. 그럼 하시는 김에 빵도 어떻게 안될까요? 요즘 진짜 빵 몇 개만 집어도 그냥 만원이 넘어가거든요.”
“너무 원하시는 게 많은 거 아닙니까? 빵도 원가 절감할 수 있는 방법이 보이긴 하는데, 규모의 문제이다 보니 힘이 들 수도 있습니다.”
“그럼. 규모만 더 커진다면 하신다는 거군요. 호호호.”
“뭐, 이 기자님이 원하신다면 규모를 키워 해드려야지요. 하하하.”
“아마, 저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국민들이 원하는 걸 거예요.”
“그렇다면 어떻게든 하는 게 맞겠지요. 인터뷰는 여기서 끝내고 식사나 하러 가시지요.”
식사를 하면서도 화기애애하게 기자들의 장단에 맞춰주고 인터뷰를 끝냈는데 다음날 나온 기사에는 그런 장단을 맞춰준 것이 기정사실 화 되어 신문에 실렸다.
[…아직 시기는 멀었지만, 스낵류와 제빵 분야에서도 가격파괴 과자와 빵을 출시할 예정…디플레이션이 아닌 이상 가격이 오르는 것이 맞지만, 지금의 한국 생활물가는 너무 올랐다.
국민들이 가격파괴를 원하는 만큼 생활물가를 내리기 위해 노력할 것…]
“허허. 이거 아무 계획 없이 그냥 립서비스를 해줬는데, 기사가 이렇게 나네. 쯧쯧.”
건호는 신문을 던지며 혀를 찼다.
하지만, 정윤이는 뭔가 흥분한 듯이 다른 신문도 내려놨다.
“근데, 이 기사 때문인지 오늘 전화가 엄청 왔었어요.”
“전화가? 어디서?”
“청산에서도 왔고, 온리원, 클라운에서도 왔었어요. 스낵 업계에 진짜 뛰어드는 건지 확인하더라고요. 그래서 계획을 가지고 있긴 있다고 했어요.”
“진짜 그렇게 했어? 아직 계획도 없는데. 근데, 그렇게 이야기 하니깐 뭐라고 하디?”
“도둑이 제 발 저린 거처럼 가격 부분을 낮춰줄 수 있다고 유통 총괄 담당 연락처를 달라고 하던데요. 그래서 김민욱 총괄 연락처를 줬어요.”
“하하하. 웃기네. 알아서 기겠다는 거야?”
과자 업계는 LT 제과와 형제간인 용심 제과가 한국 시장의 60% 가까이 차지하고 있었기에 LT가 가격을 올리면 다른 제과업체들도 따라 올리는 분위기였다.
헌데, 이미 LT 그룹과의 싸움에서 승리한 우리가 제과업계에 진출 한다고 하니 먼저 꼬리를 말고 들어오는 것이었다.
“긍정적인 이미지로 소비자들이 가격파괴를 원하니깐 그 타깃이 되기 싫다는 거겠지요.”
“이거 진짜 과자를 하게 되면 또 LT 그룹을 때려야 하는데. 미안해서 어쩌지.”
“먼저 알아서 내리도록 한번 운을 띄워 보는 건 어떨까요?”
김민욱은 우유 건에서 승리했지만, 너무 고생을 했기에 싸우기 보다는 평화로운 방법을 원했다.
“싸우기 전에 LT에게 알아서 과자 가격 내리라고?”
“네. 가격 낮춰서 수익률 떨어진다고 하면 저렴해진 만큼 수출해서 수익률 올리라고 언플 한번 또 해주는 겁니다.”
“앗! 뜨거 하고 알아서 내릴 수도 있겠지. 뭐 가격을 내리지 않는다고 해도 손해는 없으니 한번 바람 넣어 보자고.”
“그럼, 스낵류 생산 업체 설립이나 인수를 알아본다고 언론에 한번 흘려 보겠습니다.”
다시 며칠간 나와 민욱이가 몇몇 매체에서 인터뷰로 입을 털어주자, 귀신같이 과자 가격을 내린다는 신문기사가 났다.
“이야. 이게 되네. 그럼 진짜 제빵도 한번 해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