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 분노해야 하는 사람들.
언론사는 진실만을 보도한다는 신조(信條 motto)를 내세우는 것이 기본이었다.
하지만, 반대로 생각해 보면, 그런 진실만을 보도한다는 신조(信條)가 흔들릴 때가 많기에 그런 표어를 만들어 내세우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었다.
언론사도 기업이기 때문에 어쩔 수가 없었다.
그러다 보니 광고를 내는 기업들을 우대해 줄 수밖에 없었고, 대기업은 그런 언론사의 중요한 고객이자 파트너인 것이었다.
그래서, 표어만 믿고 소신껏 기자가 기사를 올리더라도 언론사의 이익에 해가 된다고 생각되면 데스크에서 반려(返戾)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그러다 보니 지금 우유와 관련된 기사들은 기존의 유업체에게 유리한 논조의 기사들만이 올라왔다.
“한마음 일보 김길재 기자가 올린 게 유일하네.”
분명 회사 차원에서 일간지 주간지 구분 없이 모든 기자들에게 보도자료를 다 보냈었다.
지금의 원유 원동제와 쿼터제가 어떤 이유로 만들어졌고, 세월이 흐른 지금은 만들어진 취지와 달리 악법이 되고 있다는 그런 설명과 사례를 보도자료로 보냈었다.
보도자료를 받았다는 확인 메일도 받았지만, 김길재 기자를 제외하곤 그 누구도 관련 기사를 올리지 않았다.
그래도 김길재 기자가 올린 기사가 노출이 제대로 되었는지 댓글이 제법 달렸다.
[가격파괴 우유의 등장으로 유업체들의 납품 거부 사태가 생기는 것이 바람직한가?]
…17년이나 된 오래된 법으로 굴러가는 쿼터제의 문제점을 알면서 외면하는 당국과…. 판매 부진으로 원유가 버려지는데, 누구도 책임을 지지 않고 있다….
- 원유가 버려져도 우윳값은 안 내리지.
└원유 연동제인가 뭔가 하는 법 때문에 우유가 안 팔려도 가격을 못 내린대.
└그게 무슨 빨갱이 같은 말이야? 수요와 공급으로 가격이 정해져야지. 어디서 그런 빨갱이 같은 법으로 우유 가격을 정하는 건데?
└모르지.
└그럼 가격파괴 우유인가 하는 그건 뭔데? 그건 왜 1500원에 팔 수 있는 건데?
└그래서 가격파괴인 거지 ㅎㅎ
└그렇네. 존니 똑똑하네.
-그냥 수입 멸균우유 먹어. 6팩에 6천 원이야. 국산 우유 먹어주고 싶어도 가격 차이가 너무 나니깐 어쩔 수가 없더라고.
└시발 거의 3배 차이니깐 답 없네. 우유 업체 다 망했으면.
└그럼 저 빨갱이 같은 법은 안 바꾸는 거야? 젖소 키우는 낙농가는 낙농가대로 손해보고 하는데 왜 법을 안 바꾸지.
└국개가 자기한테 돈 안 된다고 신경 안 쓰는 거임.
└주옥 같네.
기사에 달린 댓글을 보면 분명 일반 사람들도 오래된 법으로 굴러가는 우유 시장의 문제를 알고 있고, 고치고 싶어 하는 게 보였다.
지금 언론에서 터트려주면 여론을 모아 악법을 고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유업체의 ‘굳건이’들이 지키고 있는지 보도되는 기사가 없었다.
김길재 기자도 기사를 데스크에서 엄청 막았다고 했다.
기사를 내면 유업체들이 광고 거부하기로 했다고 으름장을 놓았다고 하는데, 김길재도 나중에 스타 음료 광고 3개를 받아 오는 조건으로 기사를 올릴 수 있었다고 했다.
결국, 언론에 기사를 내기 위해서는 보도자료가 아닌 기사료를 광고비로 줘야 한다는 말이었다.
이게 현실이었다.
언론을 통한 여론 만들기는 생각을 접기로 했다.
“매출은 계속 떨어지고 있지?”
마트 총괄인 김민욱은 그래프로 된 서류를 보여줬다.
세계 과자로 어느 정도는 버텨주고 있지만, 전체적인 매출이 확실히 우하향으로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그래도 김길재 기사가 나가서 그런지 축산정책국장 주재로 관련 회의 한다고 하니깐 한 번 있어 봐봐. 회의 결과가 어떻게 나오는지 일단 보자고.”
***
김유환 국장은 근래 받는 스트레스로 인해 주름살이 늘었고, 속쓰림에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해 말라가고 있었다.
오늘도 유업체들이 쿼터제의 허점을 이용해 원유를 제대로 받지 않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모였지만, 해결책이 보이지 않았기에 속이 더 쓰렸다.
“결국, 50만 톤이나 들어오는 멸균우유가 문제입니다. 스타 음료가 가진 쿼터 30만 톤은 솔직히 지금 추세로 1분기 안에 다 쓰게 될 겁니다.”
쿼터제 안에서 뭘 하든 찻잔 속의 태풍으로 처리를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유업체들에겐 있었다.
하지만, 한국의 1년 원유 생산량의 25%에 달하는 50만 톤의 수입 멸균우유는 30만 톤의 쿼터와 함께 엄청난 파급력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그리고, 여차하면 더 수입을 할 수도 있었으니 50만 톤뿐이라고 단정 짓는 것도 위험했다.
“김 국장님 수입 우유의 관세를 더 올리는 건? 안됩니까? 관세를 40%씩 때리면 멸균우유의 장점인 가격을 어느 정도는 무너트릴 수 있을 것 같은데.”
“아, 그건 힘듭니다. EU와의 FTA 때문에 지금도 관세가 12%로 고관세입니다. 호주는 19%, 미국은 9%로 지금 정해져 있습니다.”
호주처럼 19%의 관세가 되면 참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유업체들은 했다.
“헌데, 다들 알고 계신지는 모르겠는데, 이 FTA 체결로 인해 매겨지는 관세는 2033년에 다 없어집니다.”
“응? 그럼 지금 19%나 12%의 관세가 아예 없어진다는 말입니까?”
“네. FTA, 말 그대로 자유무역협정이니깐요. 관세가 차츰차츰 낮아져서 2033년에는 관세 없이 거래되게 됩니다.”
“이런…그럼, 16년 후에는 폴란드의 멸균우유뿐만 아니라 호주나 미국 우유도 관세 없이 다 들어오게 된다는 말이잖아.”
회의에 모인 이들 중 절반 정도는 충격을 받았다.
유업체에 몸을 담고는 있지만, 유업 쪽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들이 아니다 보니 이런 낙농업 관련 FTA 사항을 모르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럼, 이거 16년 후에 닥칠 일이 지금 먼저 와 있다는 거네.”
“스타 마트 이 새끼들이 차츰 관세가 낮아지는 것을 알고는 미리 수입 우유 판을 장악하기 위해서 선수 친 거네.”
“어쩐지. 비정상적인 우유 유통을 바로 바꾸겠다고 입을 털더라. 결국 수입 우유 관세 철폐되고 나면 그 유통 주도권을 자기가 잡겠다는 거잖아. 햐 큰 그림 그렸네.”
“이야. 그 새끼 그거 엄청 길게 보고 사업하네. 난 놈은 난 놈이네.”
다들 긴 안목을 가지고 사업한다고 감탄을 했다.
그러면서 다들 드는 생각이 있었다.
관세가 낮아지다 없어지게 되면 자연스레 멸균우유의 수입가가 낮아져 더 수입되게 될 테니 국산 우유 가격도 낮아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자연스레 자신들도 멸균우유를 들여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멸균우유가 처음 풀릴 때는 일반 냉장 유통되는 살균 우유와 맛 차이가 있기에 멸균우유가 팔리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었다.
하지만, 가격이 깡패인지라 판매량이 꽤 나오고 있었다.
“이거 아직 시간 여유는 있지만, 관세 없어지고 나서는 골치 아프겠네.”
지금 폴란드 우유만 해도 이 난리인데, 호주와 미국 우유까지 들어오게 되면 한국 낙농업의 근간이 흔들리게 될 것 같았다.
“저기 심재일 상무님. 스타 음료의 의도를 이제 우리도 알았으니깐 스타마트 애들에게 합의하자고 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스타 음료도 극단적인 결론을 원하는 게 아닐 겁니다.”
“그럼, 어떻게 결론을 내자는 거지?”
“FTA로 인해 우유 관세 다 사라지면 생기는 일을 지금 미리 겪었으니 다 같이 머리를 맞대고 준비를 하자고 해야겠지요.”
“결국, 쿼터제랑 원유 원가제를 바꾸자는 말이야?”
“네. 하지만, 지금 당장 바꾸자는 게 아니라, 16년이나 남았으니 천천히 바꿔가면서 우리 모두의 이익을 지킬 방안을 만들어보자 하는 그런 결론을 내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겠습니까?”
시간이 길게 남아 있으니 어떻게든 길게 벌 수 있는 방법을 찾아 내자는 말이었다.
유업체들간의 의견이 모이고 회의가 끝이 나자 심재일은 남한유업의 서진석과 몇몇을 따로 모았다.
“16년 후를 보고 이렇게 분란을 일으킨다는 것이 난 이해가 안 가. 우유 관세가 없어지고, 한국 낙농가들이 다 자빠져도 그놈에게는 아무 손해가 없거든. 그런데, 왜 이렇게 나서는 거지.”
회의에서 이야기를 들었지만, 심재일은 임건호가 이렇게까지 하려는 이유를 쉽게 이해하지 못했다.
“스타 마트에서 ‘킬러아이템’으로 우유를 정해서 그런 거 아니겠습니까? 가지고 있는 음료 회사와도 연계가 되니 자신들이 힘을 내는 아이템으로 우유를 선택한 거 아니겠습니까?”
서진석 부장의 말에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따로 임건호를 불러내어 수입 우유 시장에 대한 전체적인 이야기를 해 봐야 할 것 같았다.
“우선 전화해서 따로 보자고 해봐.”
심재일의 말에 서진석 부장이 핸드폰으로 전화를 걸었지만, 전화를 받지를 않았다.
비서실을 통해서도 연락을 해도 잠시 기다리라고 해 두고는 결국 통화가 안 된다고 거절을 당했다.
“저기. 죄송합니다. 대표님이 남한유업 쪽과는 할 이야기가 없으시다고 통화하지 않으시겠다고 하십니다.”
서진석 부장은 황당했다.
그냥 무시를 당한 것이었다.
이래서는 회의결과를 두고 이야기할 약속을 잡는 것도 힘들 판이었다.
결국, 심재일이 다시 전화를 걸 수밖에 없었다.
“임 대표. 우리도 그쪽 의도를 알았어. 관세 없어지는 그때 대비해서 지금 미리 백신 주사 독한 거 놓고 있다는 거 알았다고.”
“네? 그게 무슨 말입니까?”
“FTA로 관세 없어지고 수입 우유가 물밀 듯이 들어오는 상황을 대비해서 한국 우유 시장을 개편해야 한다는 거 우리도 이제 안다고. 그러니 거기에 대해서 한번 다 같이 의논을 해 보자고.”
심재일의 말을 듣자 이거 뭔가 착각을 하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선은 통상부에 이야기해서 관세 폐지 기간을 더 늘리기 위해 작업을 할 거야. 그리고, 관세 폐지로 수입 우유가 들어오게 되면 그 손해를 메꿀 수 있게 보조금 지원이라던지 하는 금전적 대책도 한번 만들어보자고.”
전화로 몇 번이나 나를 찾고 심재일이 전화를 했기에 유업체들이 백기를 들고 논의하자는 건가 싶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그리고, 한숨이 나왔다.
헛다리를 짚고 있는 심재일이나 다른 유업체 관계자들의 착각은 자기 이익 중심으로 생각했기에 나온 결론이라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기업인으로서 국민들이 먹는 먹거리를 유통하고 있다는 기업가적인 사명이나 소명의식 같은 것이 있었다면 이런 착각을 하지도 않았을 터였다.
그런 생각이 없다 보니 이런 결론을 내는 것이었다.
“잘못 아신 거 같습니다. 뭐 관세 문제도 어느 정도는 있겠지만, 그 일은 아직 먼 미래입니다. 지금 당장 꼬여있는 유통 자체를 해결하겠다는 생각이 더 큽니다. 저는 담합을 하고, 후려치는 유통업 자체의 폐단을 없애고 싶기에 이러는 겁니다.”
“뭐어? 그래서 안 오겠다는 거야?”
심재일은 어이가 없었다.
정치에서는 현안에 대해서 서로 분쟁이 있고, 의견이 달라서 합의가 되지 않아 다툴 때에도 다른 쪽에서는 그 현안을 마무리하고 넘어갈 수 있는 전략을 짜는 사람이 있었다.
속칭 ‘출구전략’이라는 것을 짜는 것이었다.
심재일이 생각하기에는 지금 그 출구를 만들어서 임건호에게 열어주고 있는 것인데, 그 출구로 안 나가겠다고, 임건호가 버티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임 대표 잘 들어. 불이 났을 때 출구를 알려주고, 출구로 나가라고 안내를 해. 헌데, 안 빠져나가겠다고 버티는 사람이 있으면 어떻게 될 것 같아? 불에 타죽거나 숨이 막혀 죽는 거야. 스타 마트를 불태워 죽이고 싶은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