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3. 깊은 고리. (2)
“그럼, 가격을 그렇게 설정하는 이유가 있다는 겁니까?”
“그래. 이유가 있지. 농협이 용빼는 재주가 없기 때문에 가격을 맞춰 줄 수밖에 없는 거야.”
“용빼는 재주요?”
갑자기 용빼는 재주가 없어서 그렇다고 하니 이해가 가지 않았다.
“잘 봐. 이 만년필과 메모지로 설명해 줄게.”
김독수 전무는 책상에 필기구를 쭉 배열시켰다.
“농협은 농사를 짓는 조합원들이나 축협, 수협에서 물건을 받아 올 거야. 유통단계가 나름 깔끔해서 가격을 최저가로 맞출 수 있어.”
김독수 전무는 그러면서 절반 정도의 필기구를 뺐다.
“문제는 조합이나 다른 곳에서 바로 가져오지 못하는 물건들이야. 농협이 용빼는 재주가 없다 보니 이런 공산품은 어떻게 가져올 수가 없어. 대표적으로 과자류 음료류 같은 것은 일반 유통되는 곳에서 받아와야 해.”
그제야 알 것 같았다.
“아아, 그 이유 때문입니까? 무슨 말인지 알겠습니다.”
“그래. 농협마트도 다른 유통업체들에서 물건을 받아오니깐 어쩔 수 없이 가격을 맞춰 줄 수밖에 없는 거야.”
담합은 아니지만, 담합을 한 것이나 다름없다는 결론이었다.
유제품의 경우라면 축협에 속한 조합원들에게 받아올 수도 있겠지만, 우유 판매대에 조합원 우유만 진열할 수가 없는 법이었다.
LT그룹이 인수한 파지퇴르 우유나 남영우유, 투데이우유 등등에서도 물건을 받아 진열대를 채워야 했다.
그런 일반 유통되는 제품의 경우에는 유통사나 제조사에서 적정판매가를 제시를 했었다.
마트에서 그런 적정판매가를 무시하고 자기 마진을 포기하면서 최저가로 팔아 버릴 수도 있을 터였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주위의 다른 마트에서는 판매가 되지 않아 유통사나 제조사에게 따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 유통사나 제조사는 다른 마트 고객도 챙겨야 하기에 농협 마트에 적정가격을 지켜 달라고 하거나, 최악의 상황에는 적정판매가를 지키지 않으면 물건을 다 빼 버리겠다고 엄포를 놓을 수도 있었다.
물론, 농협 마트의 총괄사장이 그딴 거 필요 없고 너희가 물건 빼면 우리도 다른 마트에서 농수산물 빼 버릴 거라고 강하게 나가면 힘 싸움으로 해결될 수도 있는 문제였다.
너네 물건 없으면 다른 애들 물건 팔면 된다고 가격을 우리 마음대로 팔겠다고 강하게 나가 버린다면 제조사나 유통사에서도 울며 겨자 먹기로 물건을 계속 납품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봉급쟁이 총괄사장이 그렇게까지 칼을 뽑아서 휘두를 이유가 없었다.
최저가로 화제가 되고 돌풍을 일으키게 되면 예전처럼 최저가 전쟁이 다시 벌어지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이익률의 하락이 따라올 것이 뻔했기에 칼을 뽑아 강하게 나갈 이유가 없는 것이었다.
우리가 스타 콜라를 처음 만들었을 때 조사했었던 것이 생각났다.
신규 콜라가 나와서 싸게 물건을 납품해도 기존 양대 콜라 유통사인 LT그룹과 SG그룹이 힘을 합쳐 가격을 낮추거나 자사 콜라와 주류를 다 빼버리겠다고 압박을 가하니 신규 콜라는 유통이 되지 않아 말라 죽어갈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유통을 무기로 쓰는 상황.
이건 인터넷 오픈 마켓도 마찬가지였다.
A사이트에서 최저가로 라면 행사를 천 원 이상 싸게 판매하면 다른 사이트에서는 아예 그 라면의 판매 노출을 없애 버렸다.
그렇게 되면 아무리 A사이트에서 판매가 많이 되어도 라면 제조사는 손해를 입는 상황이라 이후로는 최저가 라면 행사 자체를 하지 않게 되는 것이었다.
경쟁업체에선 다른 상품을 최저가로 해서 경쟁하기보다는 그 최저가 상품을 배제해 버리는 게 더 편했다.
예전처럼 맞불 행사를 할 이유가 없는 것이었다.
“한국의 유통은 이미 구조적으로 다 완성이 되었어. 인구 4500만, 빽빽한 인구 밀집도, 일일 택배. 이미 모든 게 다 구축이 끝났으니 이익률을 줄여가면서 최저가 판매를 할 필요가 없다는 거지.”
그냥 유통사에서 제시하는 판매 적정가로 판매하면 다들 같은 가격이라 최소 판매는 보장을 받을 수 있다는 논리였다.
“생산되는 물건의 제조사나 유통사가 여러 곳이라면 서로 경쟁해서 이런 적정가격 가이드를 따르지 않았을 거야. 외국은 그렇거든. 하지만, 한국은 3~4곳의 제조사와 3~4곳의 유통사가 모든 것을 장악하고 있어. 경쟁할 이유가 이제 없다는 거지.”
대표적인 것이 LT그룹이었다.
과자와 라면, 아이스크림, 유제품, 냉동식품 등등 마트에서 판매하는 거의 모든 실생활 제품을 생산하고 유통하고 있었다.
거기다 자기들의 마트와 유통망도 있으니 자기 마트에 납품을 받는 조건으로 잔잔한 제조사들을 다 같이 움직일 수 있었다.
만약 LT그룹이 판매가에 불만을 가지고 다른 물건을 빼겠다고 하면 마트 개수가 가장 많은 농협마트라고 해도 답이 없는 것이었다.
“목줄을 잡고 있으니 파격 할인가격으로 농수산물을 팔 수도 없는 거군요.”
농협은행의 객장에서 판매하는 것은 농협 특성을 위해 터치를 하지 않을 테지만, 마트에서 그렇게 팔지 못하도록 유통사들이 컨트롤하고 있는 것이었다.
“절대 강자 없이 경쟁자가 많았다면 이런 컨트롤이 불가능했을 거야. 하지만, 우리나라는 섬이나 마찬가지라서 물건이 들어오기 힘들고, 구축이 완료된 유통망으로 인해 통제가 가능해진 거지.”
“LT 그룹은 사실상 한국 장바구니 물가를 조정하는 빅 브러더가 되었군요.”
“그래. 그러니 중국에서 5조 원 이상을 까먹어도 아무 문제 없는 거야. 유통에서 언제나 돈이 돌고 있으니 현금도 많은 거고. 이제는 그 돈으로 케미컬 쪽이나 석재, 시멘트업도 진출한다고 하더군.”
건설과 화학까지 생산 유통하려 한다는 거였다.
전자 제품을 뺀다면 일상생활의 거의 모든 것이 LT 그룹에서 나오고 있었고, 뚜렷하게 견제하는 곳이 없다 보니 한국에서는 독점적 지위를 만들어 가고 있는 것과 같았다.
한국은 신성전자의 공화국이라는 말이 있었지만, 그 안을 들여다보면 생활을 위해 소비하는 식음료는 LT의 손을 무조건 거치게끔 되어 가고 있었다.
“과자 함량이 줄어들었는데, 가격은 올랐고, 공기만 들어 있다고 욕을 하지만, 업체에서는 그걸 개선 시킬 이유가 없는 거야. 경쟁자가 없고 동업자들만 있으니깐.”
소비자의 요구를 맞춰 주지 않아도 선택의 자유가 없으니 결국 자신들의 경계 안에서 가장 입맛에 맞는 것을 고를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완벽하게 통제되는 시장인 것이었다.
“LT그룹은 한국에서 유통으로 버는 돈이 많다 보니 이번엔 ‘배송의 민족’이나 ‘저기요’를 인수하려고 하던데, 그만큼 현금이 많은 거야. 엇? 그런 말 못 들었어?”
유통망을 가진 재벌들의 횡포에 화가 나서 이런 담합을 어떻게 깨트리지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김독수 전무의 말에 금세 화가 식어 버렸다.
지금 발등에 불이 떨어진 것은 나였다.
“예전부터 그런 말이 있었기에 크게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진짜 인수해서 들어오겠다고 한다면 치킨게임을 할 수밖에 없겠지요.”
LT그룹에서 둘 중 어느 곳을 인수하든 대대적인 투자를 할 터였고, 배송 대행 전쟁이 벌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런 배송대행 시장의 싸움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해 유통망을 가진 LT그룹에선 다른 방향으로 우릴 공격해 들어올지도 몰랐다.
공격이 최선의 방어라고 말이 있듯이 어떻게 먼저 견제공격을 해야 할지 준비를 해야 할 것 같았다.
“먼저 가봐야겠습니다.”
“그래. 한번 쌈박질해 봐. 난 뉴세계와 연합하는 걸 추천해. 그쪽에서도 은근히 배달 대행 시장을 생각하고 있으니깐.”
김독수 전무가 명함을 건네주었는데, 뉴세계 그룹의 회장 명함이었다.
“마트 쪽으로는 LT그룹보다 우위에 있으니깐 연합한다면 지지 않을 거야.”
“네. 결정을 하면 전무님께 연락 드리겠습니다.”
***
김독수 전무와 헤어진 후 인수전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사람들에게 알아보라고 하고 계획을 짜고 있었다.
“뉴욕에서 전화입니다.”
“뉴욕? 손정의?”
맞다고 하는 정윤이의 표정에 얼른 전화를 받았다.
“그랩 상장 날짜가 잡혔습니다. 다음 주 수요일이니 이번 주말에 뉴욕으로 넘어오십시오.”
기다리던 소식이었다.
나쁜 일이 몰아쳐 올 줄 알았는데, 좋은 일도 같이 왔다.
“헌데, 상장 후 그랩의 경영은 데닐리 탄에게 맡길 생각입니까?”
지금은 IPO 통과와 상장을 위해 손정의가 CEO에 있었지만, 그도 상장 후에는 몸을 빼든지 할 터였다.
“동남아가 본진이기에 동남아에 세력을 가지고 있는 화교에게 맡겨두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제 성장하고 있는 고젝에 그랩이 투자해서 동류로 만드는 작업 중입니다.”
“흠. 떠오르는 고젝을 그렇게 처리한다면 그대로 맡겨보는 것도 좋을 수 있겠죠. 그럼, 상세한 이야기는 만나서 정리를 하죠.”
그랩의 상장으로 뉴욕에 갈 일이 생기자 한국에 들어와 있던 김신현도 데리고 가기로 했고, 레일리도 불러서 같이 가기로 했다.
패션의 중심지인 뉴욕에서 ‘아시안 걸스’ 관련으로 일이 있을지도 몰랐기 때문이었다.
***
뉴욕에 도착해 남은 서류 관련 일을 끝내자 손정의가 나와 데닐리 탄만을 데리고 센트럴 파크의 서쪽 벽으로 움직였다.
“센트럴 파크 웨스트가 유명인들이 많이 산다고 하던데, 누굴 만나게 해 주고 싶은 겁니까?”
“그래. 아마 보면 바로 알 거야.”
센트럴 파크와 길 하나 사이로 고풍스러운 중세 유럽 성 같은 고급 맨션들이 늘어서 있었는데, 어느 건물은 톰 크루즈의 집이고, 어디에는 마돈나가 살고 싶어 했지만, 사교클럽처럼 입주를 받아주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해줬다.
“차별이 없다는 미국이라지만, 사실 알고 보면 미국만큼 차별이 많은 나라가 없어. 이런 아파트 입주에도 사람을 가릴 정도니깐.”
그러다 10여 층 규모의 성 같은 건물로 들어섰고, 맨 꼭대기 층으로만 연결된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갔다.
센트럴 파크가 전면 통유리로 보이는 곳에는 한 사람이 앉아 있었는데, 티비나 인터넷으로만 보던 사람이었다.
“이쪽은 누군지 이야기 안 해도 알겠지? 하하하.”
“물론이죠. 제프 베이조스!”
아마존의 창업자로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대머리 중 한 명이었다.
그런 제프 베이조스를 직접 보게 되자 데닐리 탄은 놀라서 이야길 했고, 제프 베이조스는 그저 느끼한 웃음을 지으며 우릴 맞이했다.
“쇼퍼백에 아주 관심이 많습니다. 그리고, 신성스타페이에 대해서도 흥미를 느끼고 있습니다.”
제프는 자리에 앉아서 샴페인을 홀짝거렸는데, 단순한 인맥 인사가 아니라 경쟁자가 될지도 모르는 쇼퍼백에 대한 투자 상담 시간이나 다름없었다.
“이제 1300만 명의 회원이 있을 뿐이며 동남아 로컬 지역에서만 인기가 있는 사이트입니다. 그리고, 신성스타페이는 제가 만든 것이 아니다 보니 어떻게 해드릴 수가 없습니다.”
“직접 만들지는 않았지만, 동남아 은행권과 한국의 신성전자를 끌어들여 페이를 만드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랩과 쇼퍼백으로 2천만 명에 달하는 가입자를 만들어 내었고요. 그 점을 높게 평가합니다.”
“아마존은 북미와 유럽을 먹었으니 이제 동남아를 먹고 싶다는 거야. 좀 더 쉽게 가기 위해 건호 자네를 만나고 싶어 하더군.”
손정의는 말을 하면서도 뉘앙스 적으로 부정적이게 이야길 했다.
“페이팔도 뉴욕에 상장을 했으며, 알리페이도 뉴욕 상장을 노리고 있는 상황이니 신성스타페이도 북미 진출을 준비하고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거기에 서로가 도움이 될 수 있다고 판단이 되는데요.”
신성전자에서 그런 준비를 하는지는 건호도 잘 몰랐다.
그리고, 제프 베이조스가 원하는 게 쇼퍼백인지 신성스타페이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일단은 튕기는 게 나은 선택 같았다.
“페이와 쇼퍼백에 관심을 두시니 기분은 좋습니다. 하지만, 아직 투자나 상장에 대해서 생각을 해본 적이 없습니다. 시간을 두고 이야길 했으면 합니다.”
건호가 말을 끊어버리자 제프 베이조스는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였다.
그리고, 두 업체에 대한 이야기가 끝이 난 것이 손정의의 부정적인 늬앙스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우리는 투자자인 손 마사요시와는 다른 플랫폼을 운영하는 운영자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플랫폼의 힘은 다른 서비스가 연계된 연합효과에 있다고 보구요.”
“맞습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이미, 임건호 대표는 쇼퍼백과 스타페이, KAD 택배같이 연합효과를 일으키는 작업을 성공적으로 이뤄냈기에 당신은 충분히 가치가 있고, 이곳 뉴욕에서 존경받을 만합니다.”
제프 베이조스의 칭찬에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반대로 유버는 그렇지 못하죠. 유버는 그런 연합효과를 제대로 만들어 내지 못했기에 북미 한정으로밖에 성장을 하지 못하고 있는 겁니다.”
손정의를 보며 이야기를 했는데, 이건 척 보기에도 자존심 싸움이라는 느낌이 왔다.
“플랫폼은 연계된 힘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 힘을 가지고 싶지 않습니까?”
세계에서 가장 부자가 힘을 가지고 싶냐고 물어보니 뭔가 달콤한 유혹을 넘어 악마의 속삭임처럼 와닿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