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2. 깊은 고리. (1)
“비싸도 너무 비싸다고. 중국이든 동남아든 유제품을 수출하려고 해도 너무 비싸서 단가를 맞출 수가 없다고. 물론, 한국만 보고 장사하는 시대였다면 상관이 없었겠지. 하지만, 이젠 그렇게 안주하면 안 되는 시대잖아.”
“대표님. 가격 때문에 수출이 안 된다고 하지만, 프리미엄 가격 전략이라는 게 있지 않습니까? 한류가 있는 만큼 한국산 제품이니 프리미엄이 붙는다는 그런 방식으로 판매를 한다면 오히려 수익이 더 늘지 않겠습니까?”
김신현의 말은 나름 합리적이었다.
하지만, 이 프리미엄 전략은 우리 상품과는 맞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한류니깐 프리미엄 전략으로 가자. 이 말이 맞는 말이기는 해. 하지만, 한류가 끝나고 나면? 그땐 답이 없는 거야.”
사실 지금 동남아는 물론, 북미와 남미, 유럽에서 한류가 인기 있다지만, 언제 이 한류가 끝이 날지 알 수 없었다.
극단적인 예이긴 하지만 중국처럼 정부에서 한류 금지령을 내리게 된다면 한류도 반 토막이 날 수 있었다.
LT 마트가 그렇게 수조 원을 날렸지 않았는가.
한류의 등에 올라타더라도 그 이후를 생각해야 했다.
“한류 프리미엄 덕분에 비싸지만 한국산 우유를 사 먹고, 과자를 사 먹을 수도 있어. 하지만, 자국에서 팔리는 우유와 과자보다 3~4배 비싸다면 그걸 계속 사 먹을 수 있을까?”
“힘들겠지요. 하지만, 그 맛을 잊지 못해서 더 돈을 모으지 않겠습니까?”
“한두 번은 궁금해서 그렇게 사 먹겠지. 하지만, 그 이후로는 비싸서 사 먹는 게 부담이 된다고. 그 돈이면 자국의 과자 3~4개를 사 먹을 수 있으니깐. 그리고, 프리미엄 전략을 고수했던 소니는 지금 어떻지?”
프리미엄 전략으로 일본의 소니는 2000년까지 전자업계를 주름잡으며 엄청난 수익을 올렸었다.
하지만, 비슷한 퀄리티의 대체 브랜드들이 한국과 중국에서 나오자 일본 프리미엄은 사라져 버렸고, 전자 쪽에서 10여 년 넘게 적자를 기록하고 있었다.
“프리미엄 전략이 많이 남겨 먹을 수는 있어. 하지만, 영원하진 않아. 일류의 일본 제품이라는 프리미엄으로 구매하던 사람들도 손절을 했어. 반면에, 저렴하면서도 늘 사람들의 곁에 있는 저가 가격을 고수한 야쿠르트는 세월이 지나도 함께 하고 있다고.”
소니와 야쿠르트.
결이 다른 브랜드이기에 그 판매 전략도 달랐다.
소니가 프리미엄 전자 제품을 추구할 때 야쿠르트는 모두가 부담 없이 마시는 장 건강 음료를 지향했다.
그리고 야쿠르트 아줌마로 지칭되는 판매 배송 사원으로 구매자의 곁으로 한 걸음 더 다가가는 친밀함 전략을 펼쳤었다.
그 결과 프리미엄 전략의 소니 전자 제품은 적자를 기록하며 허덕이고 있지만 야쿠르트는 서민적인 이미지로 사람들의 생활 속에 녹아들어 있기에 한국과 일본에서 연속 흑자를 기록하고 있었다.
생활 속에 스며든 야쿠르트는 국민들과 함께 나아가는 브랜드가 된 것이었다.
“식음료는 전자 제품과 달라 클 때 자주 접하고 맛을 봤다면, 나이가 들어서도 찾아 먹게 된다고. 그런 친근한 브랜드로 중국과 동남아시아를 공략해야 해. 그러기엔 가격이 부담 없어야 해.”
한 걸음 더 다가가는 친근함을 위해서는 쉽게 구매 가능한 가격을 맞춰야 했다.
“인구 6억, 아니 몇 년 후면 인구 7억이 되는 동남아에 한류를 기반으로 하는 친근한 제품을 만드는 게 목표야. 그러기 위해서는 단가를 낮춰서라도 그들이 쉽게 접할 수 있게 만들어 줘야 해.”
당장 몇 년 후가 아닌 미래 시장을 보고 가격을 낮춰야 한다는 임건호의 말에 김신현도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당장의 이익이라면 담합해서 나눠 먹어도 충분했다.
한국은 대륙과 붙은 반도이지만, 섬과 같은 상황이었기에 가두리 양식하듯이 국민들에게 뜯어 먹어도 굴러는 갈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고가로 우유를 팔게 된다면 우유를 마시는 사람은 더 줄어들게 될 것이고. 생활이 빡빡해질수록 식음료 소비를 줄일 수밖에 없을 터였다.
그런 후유증이 다 부메랑처럼 돌아올 것이 뻔했는데, 유업체들은 자기가 있을 때만 아니면 된다는 마인드로 가격을 올리고 있으니 한번 판을 흔들어서 매운맛을 보게 해줘야 했다.
추가로 과자 사진을 띄웠다.
“이걸 보시면. 한국에서 3500원 하는 과자가 바다를 건너갔음에도 미국에서 3천 원에 팔리고 있습니다. 미국 생산도 아니고 한국 생산인데도 가격 역전이 되는 겁니다.”
다른 사진을 또 띄었다.
“LT그룹은 한국에선 우유를 1리터에 2700원에 팔지만, 일본에서는 2300원에 팔고 있습니다. 원윳값은 일본이 더 비싼데 왜 이런 가격 차이가 날까요?”
파는 업체가 다른 것도 아니고, 오히려 원윳값이 한국이 더 싼데도 더 비싸게 우유가 팔리고 있으니 다들 황당해했다.
“외국에서는 같은 과자나 우유를 파는 경쟁업체들이 많지만, 한국에는 경쟁 없이 서로 담합을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전에 만들어진 법들이 그런 경쟁을 하지 않아도 되게 만들어 주고 있습니다.”
“법이 막아주고 있는 담합을 깨기 위해서 판을 흔들어야 하는 명분이 생겼네요.”
정경배 사장은 기묘한 우유 가격에 빨리 폴란드에서 우유를 수입해 와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이 판을 깨서 정상으로 되돌립시다. 그렇게 수출 경쟁력을 쌓고, 한국과 동남아, 중국 시장을 노려 봅시다. 우리 안주하지 맙시다.”
***
낙농업 협동조합의 상호금융기관인 낙협이 공주시 금학동에 오픈하게 되자 리본 커팅을 위해 금학동으로 움직였다.
헌데 아직 이른 시간인데도 어르신들이 십여 명이나 줄을 서고 있었다.
“아니 어떻게 했길래 할머니들하고 사람들을 줄 세운 거야? 뭐 주기로 했냐?”
“선착순 10명에게 잡곡 5kg씩을 증정하기로 했거든. 오픈 날에는 시끌벅적해야 한다고 하더라고.”
선착순 증정 상품이 있으니 줄을 설 만했다.
선착순으로 주는 잡곡 외에도 시루떡도 나눠 주었고, 통장개설자들에게는 치약과 칫솔, 라면을 증정했다.
적금이나 보험을 가입하는 사람에는 우산과 식용유, 프라이팬, 장바구니를 준다고 현수막도 내 걸렸다.
뭔가 시중의 은행에서는 하지 않는 마트 오픈식 같았다.
“그런데, 10명에게만 잡곡을 준다며? 저건 다 뭐냐?”
객장의 한쪽에는 잡곡은 물론이고 쌀과 콩, 말린 버섯이나 식혜 같은 음료도 쌓여 있었다.
“이게 농·축·낙·협의 영업이야. 사실 시골에 인구가 몇 명 있겠냐? 이자로 낙협이 굴러가긴 하지만 인건비도 맞추기 빠듯하다고, 그래서 저런 지역 특산품 같은 것을 팔아서 비용을 충당하는 거야.”
과연 저런 곡식류가 팔릴까 싶었지만, 정진이의 말로는 직원 1명 인건비는 충당될 거라고 했다.
“그럼, 저건 어디서 받아오는데?”
“어디긴 농협이지. 시골에는 농협 말곤 없어.”
뭔가 느낌이 왔다.
이 잡곡이나 토산품의 매입 장부를 보여달라고 해서 보니 판매 마진이 20%나 되었다.
“이 판매 가격이 시중 슈퍼마켓보다 싼 거야?”
“뭐, 시골에서는 거의 비슷하지. 하지만, 공주시가 아닌 서울, 경기나 다른 광역시라면 슈퍼마켓보다 농협은행 객장에서 파는 곡식류가 더 저렴할걸.”
“아마도, 농협이 수급해서 바로 유통을 하니 저렴한 거겠지?”
“그렇겠지.”
“오케이 난 확인해 볼 게 있어서 이만 간다.”
리본 커팅식만 참석을 하고 바로 수도권으로 움직였다.
아파트 단지로 둘러싸여 있는 대형 리마트에 들려서 쌀과 잡곡, 우유와 유가공품의 가격을 체크했다.
그리고, 혹시 몰라 농산물의 가격도 일일이 적은 후에 지도를 검색해서 근방에서 가장 큰 농협 마트로 움직였다.
농협마트에서 가격을 비교하는데, 뭔가 이상했다.
“정윤아 넌 이상한 거 모르겠냐?”
“농협마트인데도 쌀이나 잡곡 가격이 낙협에서 본 것보다 비싼 거? 이게 이상한 거야?”
“그래. 쌀, 잡곡은 낙협에서 파는 게 제일 저렴한 거 같아. 물론, 쌀은 경작된 지역의 차이와 품종미인지 아닌지 하는 차이가 있겠지만, 잡곡은 국내산이면 거의 비슷한 조건일 거야. 그런데, 마트들보다 낙협에서 파는 게 저렴해.”
“낙협에 납품한 곳이 농협이라 그런 거 아냐? 아, 농협마트도 농협에서 받지. 그럼 왜 비싼 거지? 낙협 객장이 너무 싼 건가?”
“확인해 보니 리 마트와 농협 마트가 쌀은 물론이고 유제품까지 가격이 비슷했어. 농산물은 농협마트가 약간 저렴했고.”
“오빠, 옛날에 마트끼리 최저가 경쟁할 때는 단돈 10원이라도 더 싸면 차액만큼 돌려준다고 엄청 했었잖아. 요즘은 그런 걸 안 해서 가격이 비슷해진 거 아닐까?”
“흠. 지표가 두 곳뿐이니깐 서울로 올라가면서 마트 다 들려서 확인해보자.”
서울로 올라가며 대형 마트와 농협마트에 들려서 가격을 일일이 확인했고, 농협은행에도 들려서 잡곡과 쌀 가격을 확인했다. 그리고 혹시 몰라 스낵류 3개도 정해서 가격을 체크 했다.
“이거 신기하네. 농협은 조합원들이 농축산물 유통에 특화된 택배나 물류가 있어야 한다고 해서 농협물류라는 별도의 회사도 만들어서 운용하거든. 근데, 다른 곳이랑 가격 차이가 거의 없어.”
“그게 가격 경쟁하기 위해 서로 확인해서 조절하는 거 아닐까?”
“그럴 수도 있겠지만, 농협마트에서는 더 싸게 팔 여유가 있는데도 굳이 다른 마트와 가격을 맞췄다는 거야. 유통물류를 같은 회사에서 한다면 유통 가격이 있어서 그렇게 책정되는 것도 가능은 해. 하지만, 이야기했듯이 농협은 유통을 자체 물류회사를 이용하거든.”
“그럼, 싸게 팔 수 있는 것을 더 싸게 안 판다는 말이야.”
“그래.”
“흠. 그런데, 마진을 더 높게 만들기 위해서 그렇게 조절할 수도 있잖아.”
“그럴 수도 있겠지만, 예전에 최저가라고 손님들에게 차액을 돌려준다고 하면서 경쟁했던 이유가 뭐겠어? 가장 저렴한 물건이 있으니 여기서 최저가로 사고 다른 물건도 사가라는 뜻이야. 최저가로 어필해서 손님들을 모을 수 있는데, 그런 작업을 일부러 안 한다는 느낌이야.”
“흠. 하긴 최저가 판촉을 해서 손님을 끌어모을수록 이득인데, 그런 게 없긴 하네. 마트도 유업체들처럼 서로 좋은 게 좋은 거라고 담합을 하는 걸까?”
“단일 품목이 아닌 마트 내 전체 품목을 그렇게 담합 할 것 같지는 않거든. 서로 경쟁하는 유통사인데, 그렇게 다 담합할 이유가 없는 거야.”
임건호는 마트 전체가 서로 담합해서 가격을 맞추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헌데, 그런 담합이 아니라면 농협 마트가 더 저가로 팔 수 있고 손님을 끌어 올 수 있는데, 그렇게 하지 않는 이유가 있어야 했다.
단순한 판매마진을 위해서라고 하기에는 경쟁 마트에 대한 배려나 다름없는 짓이었기 때문이었다.
농협에서 수매하는 쌀과 곡식은 물론이고 농수산물 전체를 협동조합을 통해 가져온다면 가격 측면에서 다른 대형 마트를 압도해야 하는 것이 당연했다.
헌데, 농협은 경쟁사를 압도할 생각이 없다는 듯이 다른 마트 가격에 맞춰 주고 있으니 여기에 뭔가 이유가 있을 것 같았다.
농협 위쪽에 아는 사람이 있다면 연락해서 바로 물어볼 수 있겠지만, 농협 쪽에 아는 인맥이 없다 보니 거산의 김독수 전무를 찾아갈 수밖에 없었다.
***
“뭐? 농협마트가 가격을 낮출 여력이 있는데, 가격을 낮추지 않고, 다른 마트 가격에 맞춰 주는 이유가 궁금하다고?”
“네. 단순한 판매마진 극대화를 위해서 가격을 맞춰 주는 것은 아닌 것 같거든요.”
“허허. 그거 이상하네.”
김독수 전무는 헛웃음을 지었다.
“그럼, 전무님도 모르시는 겁니까?”
“아니 그게 아니야. 스타 코퍼레이션에서 스타마트를 운영하고 있잖아. 그런데, 그 이유를 모른다고 하니 그게 이상하다고 하는 거야.”
“아, 스타마트는 총괄사장에게 맡겨두다 보니. 그럼, 가격을 그렇게 설정하는 이유가 있다는 겁니까?”
“그래. 농협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