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2. 지배자.
“훔프스(Humpuss) 그룹? 거기라면 토미 수하르토의 회사 아닌가요?”
“네. 맞습니다. 인도네시아 비공식 최고 부호의 회사죠.”
2008년 죽은 인도네시아의 독재자 수하르토의 막내아들이 설립한 회사가 훔프스 그룹이었다.
한때는 계열사가 60개에 이르기도 했고, 한국과도 나름 인연이 있는 회사였다.
1990년대 인도네시아의 국민차 ‘티모르’를 만들 때 한국의 기아자동차와 합작 생산을 했었는데, 그때 한국을 몇 번 방문하기도 했었다.
다만, 그 국민차 티모르는 수하르토가 하야를 하면서 같이 사라져 버린 차였다.
기아자동차가 모든 부품을 다 만들어서 보내주면 인도네시아의 ‘PT티모르 푸트라 나시오날’이 조립만 해서 출고한 이름만 국민차였기 때문이었다.
뭐 덕분에 45,000대분의 차를 수출했던 기아 차는 재미를 보긴 했었다.
그리고, 국민차 티모르의 생산을 위해 들어간 2억 달러는 그냥 녹아서 사라져 버렸었다.
그러다 아시아의 금융위기 시절 독재자 수하르토가 하야했고, 60개에 달하는 훔프스 그룹도 10여 개의 계열사로 쭈그러들었었다.
이후, 여러 사건 사고를 일으켜 공식적으로는 훔프스 그룹은 해체가 된 상태였다.
하지만, 토미 수하르토의 공식적인 재산은 8억 달러(9천억)가 넘었고, 수하르토 일가가 정치 권력은 빼앗겼지만, 수십 년간 확보해 온 유료도로와 발전소, 방송국, 제약회사 등등은 여전히 소유하고 있었다.
수하르토가 하야한 이후 이런 공공재를 정부에서 압수해서 국유화시켰다면, 인도네시아가 지금보다 더 발전했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아시아는 이런 과거청산이 시원하게 되는 일이 거의 없었다.
“기름값을 줄이는 건 힘드니 이 유료 도로 통행료를 훔프스 그룹과 한번 이야기해 보죠.”
“할인을 해주겠습니까?”
“블루버드까지 해서 유료 도로를 이용할 차량이 천 대가 넘는다고 할인해 주지 않으면 국도로 해서 갈 수밖에 없다고 한번 딜을 해 봐야죠.”
***
그렇게 훔프스 그룹의 토미 수하르토와 미팅 약속을 잡고 움직였는데, 생각지도 못한 사람이 훔프스 그룹의 빌딩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수도 이전 위원회에서 봤던 야니 뚜레일이었다.
“그럼, 수도 이전 위원회에서 이쪽으로 자리를 옮긴 겁니까?”
“하하하. 제 원래 자리가 여기였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사업권이 딜레이 되어 미안했는데, 그걸 어느 정도는 보상해 드릴 수 있을 것 같군요. 가시죠.”
앞장서서 움직이는 야니 뚜레일은 주고받는 것이 확실한 사람 같아서 마음에 들었다.
빌딩 60층의 펜트하우스로 안내가 되었는데, 같이 온 비서인 정윤이는 아래에서 대기해야 된다고 해서 혼자 올라갈 수밖에 없었다.
“오! 멋진데요.”
펜트하우스에 올라가니 별천지였다.
도심지가 보이는 인피니티풀이 설치되어 있었고, 술을 만들어 주는 바(Bar)와 선베드가 놓여 있었는데 호텔 루프탑 수영장 같았다.
문제는 선베드에 누워 있는 사람들이 팬티도 없이 올누드에 선글라스만 끼고 있다는 것이었다.
수영장에도 10여 명의 사람들이 들어가 있었는데, 남자는 물론이고 여자들도 다 전라의 모습으로 놀고 있었다.
백인, 흑인, 동양인이 다 섞여 있었고, 가슴은 물론, 다리 사이가 다 드러나 있는데도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 게 신기했다.
“토미님이 풀에서 언제 나오실지 알 수가 없는데, 안쪽에서 기다리시겠습니까?”
안쪽을 보니 나랑 비슷해 보이는 정장 입은 샐러리맨 두 사람이 대기를 하고 있었다.
저들처럼 기다리게 된다면 토미 수하르토가 풀장에서 즐겁게 놀고 있는 모습을 묶여있는 강아지처럼 지켜봐야 할 것 같았다.
모 아니면 도였다.
“저도 풀에서 놀면 안 됩니까?”
“네에?”
야니 뚜레일은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지만, 금세 미소를 지었다.
“일본인에 비해서 한국인은 조금 더 모험심이 강하다고 하던데 그 말이 맞는 거 같군요. 탈의실을 알려드리겠습니다. 이쪽으로.”
야니 뚜레일의 반응을 보니 그렇게 잘못된 건 아닌 것 같았다.
사실 일이 잘못되더라도 보상해 줄 수 있을 것 같다고 이야기한 야니 뚜레일의 말이 있었기에 한번 모험을 질러 본 것이었다.
탈의실에선 풀에서 놀고 있는 사람들처럼 다 벗고 나가야 할지 아니면 수영복을 입고 나갈지 고민했는데, 그냥 다 벗고 나가기로 했다.
비서인 정윤이가 레일리와 만난다고 끊어줬던 피부관리를 받으며 털도 정리를 했기에 당당하게 올누드로 탈의실을 나섰다.
양놈들보다는 못해도 내 주니어가 나름 두툼하다고 생각해서 자신 있게 나섰는데, 여자들과 놀며 커져 있는 양놈들을 보니 어깨가 움츠러들 수밖에 없었다.
사진으로 얼굴을 알고 있었기에 토미를 찾으니 여자를 양쪽에 끼고 자쿠지에 들어가 있었다.
수영장에 들어가 수영으로 자쿠지가 있는 곳까지 움직였고, 그 앞에 섰다.
“누구지? 처음 보는 얼굴인데.”
“2시에 미팅 약속이 있었던 스타 코퍼레이션의 임건호라고 합니다.”
“스타 코퍼레이션? 아아, 그랩의 창업자. 오늘 약속이었다는 게 기억나는군.”
50대 중반의 토미 수하르토는 나를 위아래로 훑어봤다.
“역시 북동 아시아인들은 피부가 희군. 그리고, 인도네시아에서 오래 있었다고 했는데, 몸이 하나도 안 탄 것을 보니 일본인들처럼 일만 했겠군.”
“네. 오늘도 일하러 왔습니다. 헌데 덕분에 좋은 경치(?)를 보면서 놀 수 있게 되었네요.”
“하하하. 저치가 들어올 수 있게 자리 비켜줘. 여기 칵테일 몇 잔 가져와!”
자쿠지에 들어가니 자연스레 양옆으로 여자가 붙었다.
바텐더가 가져다준 칵테일을 한잔하고 이런 신선놀음을 하는 토미를 보니 삶이 부럽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래서 대 놓고 이런 삶을 사는 토미가 부럽다고 해 줬다.
“사실, 미팅 약속을 잡고 알아보다 보니 선입견이 생겼었습니다.”
토미 수하르토는 독재자의 아들이자 망나니였다.
그것도 단순한 망나니가 아니라 여러 형사 사건과 그에게 징역을 내린 판사를 살인교사 했다는 혐의도 있는 사람이었다.
“하하하. 남자라면 다 그런 거 아니겠나? 그리고 그걸 다 이해하니 여기 온 것이겠지 안 그래?”
“맞습니다. 저는 그걸 다 알고 이해하기에 일 이야기를 하러 온 것입니다.”
“흥. 그래. 블루버드의 노니 푸르노모와 함께 하는 유통사업의 차량에 대해서 도로 할인을 협의하러 온 거라고 했지?”
“네. 다 기억하고 계시는군요.”
“헌데, 그러면 내가 무슨 이득이 있는 거지? 할인을 해 주지 않아도 어쩔 수 없이 유료도로를 이용할 거지 않나? 난 그게 이득인데. 안 그래?”
“그래서 여러 가지를 가지고 왔습니다. 여기서 이야길 해도 되겠습니까?”
“왜. 주물럭거리는 계집들이 자극되는가?”
“그것도 그렇지만, 비밀이 새나갈까 염려되어서 그렇습니다.”
“흠. 저쪽으로 가지.”
자쿠지를 나오자, 가운을 입혀줬는데, 야니 뚜레일까지 세 명이 테이블에 마주 앉았다.
“그래. 여러 가지 가져온 걸 한번 이야기해 봐. 내게 이득이 된다고 생각하면 그쪽이 원하는 걸 들어주지.”
“수도 이전 건에 대한 것은 잘 아실 겁니다. 저희가 누산타라 쪽의 유료도로 건설을 맡았다는 것까지요.”
“그래 알고 있지.”
“외부인인 제가 추측하기로는 아마도 다섯 축을 만들기 위한 것도 있겠지만, 다른 축들이 토미님께 유료도로를 주지 않으려고 했을 것 같습니다. 이미 자와섬이나 수마트라섬에 유료도로를 많이 가지고 계시니깐요.”
“추측이 맞아. 계속해 봐.”
“그래서 새 수도 이전지인 누산타라에는 훔프스 그룹의 유료도로가 없을 것입니다. 훔프스 그룹에게는 안타까운 사항이지요.”
“그래서, 자네가 하게 될 유료도로를 우리 훔프스 그룹에게 넘겨주기라도 하겠다는 건가?”
“다섯 축을 생각한다면 공사를 넘겨주는 것은 불가능할 겁니다. 하지만, 유료도로를 만든 이후의 관리와 분배에는 훔프스 그룹이 들어가도 되지 않을까요?”
임건호는 이야기를 하면서도 토미 수하르토의 눈치를 살펴 방향을 제대로 잡았는지를 계속 확인했다.
“물론 화교들이 원하는 팔렘방으로 수도가 결정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누산타라로 결정이 되고 정상적으로 프로젝트가 진행된다면 이곳 자와섬에 있는 유료도로처럼 보르네오섬에도 훔프스 그룹의 유료도로가 생기는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여러 가지를 가져왔다며? 다른 건?”
토미 수하르토는 재미있다는 눈빛으로 다른 것을 더 꺼내라고 했다.
“그럼 이제 한 70% 온 겁니까?”
“아니. 이제 5할이야. 더해 봐.”
어쩔 수 없이 가지고 온 패를 더 보여줘야 할 것 같았다.
“자쿠지에서 스타 코퍼레이션은 모르셨지만, 그랩은 아시더군요. 그랩은 내년 뉴욕증시에 상장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 말은 지분을 줄 수 있다는 건가?”
“투자를 하실 수 있는 찬스를 드리겠다는 겁니다. 현재, 소프트 뱅크의 손정의가 그랩의 IPO를 위해 움직여 주고 있습니다.”
“손 마사요시? 그자는 꽤 쓸 만하지. 그럼 다른 건?”
“전 이미 90%는 된 거라고 생각합니다.”
“하하하. 누구 마음대로 90%인가. 7할. 하나 더 꺼내 봐.”
“흠. 이건 대외비인데. 동남아시아를 대상으로 하는 쇼퍼백 쇼핑몰을 만들고 있습니다. 거기에 지분투자 할 수 있는 기회를 드리겠습니다.”
“크킁. 그건. 마이너스잖아. 알리바바가 라자다를 인수했는데, 그걸 이기기 힘들어 보이거든. 7할로 끝내지.”
토미 수하르토는 자기 마음에 7할 들었다고 말을 하고는 혹시 하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그리고, 저 뒤의 회의실 안에서 이쪽을 보고 있는 일본의 미쓰비시 상사 애들을 봤다.
오늘 만나기로 했던 두 곳 모두 자신에게 뭔가를 요청하고 협의를 하기 위해 온 자들이었다.
그리고, 지금 앞에서 가운만 걸친 채 이야길 하는 임건호라는 사람은 다들 유버가 엄청나다며 손을 들 때 그랩이는 것을 만들어 동남아시아를 먹어버린 사람이었다.
더해서, 이제까지 처음으로 권하지도 않았는데, 옷을 먼저 다 벗고 수영장으로 들어온 사람이었다.
일반인들과는 확실히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기에 마음을 바꾸었다.
“3천만 불을 그 쇼핑백인가 하는 사이트에 투자하지.”
“쇼퍼백입니다. 그렇다면 유료고속도로의 통행료 면제도 해 주시는 것으로 알겠습니다.”
처음에는 통행료 할인을 목표로 왔으나 돌아가는 눈치를 보고 바로 면제라고 입을 털었다.
“크하하. 면제? 그래. 그 배짱은 마음에 드는군. 하지만, 아무리 마음에 들어도 공짜는 안 돼. 그렇게 되면 다른 놈들이 난리 칠 거라고. 20%.”
“80% 할인해 주겠다는 겁니까? 감사합니다.”
이번에는 바로잡기 전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조폭 인사를 해줬다.
“쳇. 약삭빠른 놈이네. 20%만 받지.”
80% 할인을 해 주겠다고 하는 토미 수하르토는 화끈했다.
“감사합니다. 그럼, 야니 뚜레일 씨를 통해서 결정된 것을 정리하고 서류화하겠습니다.”
“그러지. 풀에서 좀 놀아. 그리고 저 일본 애들 데리고 와. 다 처리하고 쉬고 싶군.”
***
이전되는 수도가 누산타라로 결정이 되고 유료도로 공사를 그대로 진행하게 된다면, 유지 관리에 훔프스 그룹을 50% 지분으로 참여시키는 것을 서류화했다.
그리고, 손정의와 이미 알고 있었기에 뉴욕증시에 상장될 때 신주 1500만 주를 배정받는 조건으로 그랩에 투자를 받았다.
손정의도 토미 수하르토가 실질적인 인도네시아의 지배자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따로 불만을 표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쇼퍼백에 3천만 달러를 투자받았기에 쇼퍼백을 완전히 별도 법인으로 독립시키고 15%의 지분을 토미 수하르토에게 주었다.
“한국과 중국의 판매자들이 대거 등록을 하고 있고, 상품등록도 올라오고 있습니다.”
사이트가 오픈마켓으로 되었고, 한국, 중국 업체들이 판매자로 대거 등록하기 시작할 때 제트 핑크를 전면에 내세운 광고를 집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