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8. 쇼퍼백(shopper bag).
“엮이는 일? 우리랑 엮이는 일이 있다고? 뭐에서? 아니다. 엮인다고 뭐가 되겠냐?”
“아빠가 네덜란드 인인데, 부모님은 이혼하고 엄마랑 중학생 때부터 싱가포르에서 살고 있대.”
“야. 너 저기에 가서 한 시간도 안 있다가 왔잖아. 그런 속 이야기를 그 짧은 시간에 다 했다고? 그걸 다 이야기하디?”
“그럼. 우리 벌써 베프 먹었는데.”
“베프는 무슨. 얼어 죽을.”
1시간도 안 되었는데, 베프가 되었다는 말이 웃겼다.
그리고 그 짧은 시간에 부모님이 이혼을 했고, 싱가포르에서 살고 있으며 하는 그런 사생활 이야기를 다 했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오빠 연애 세포가 다 죽은 거네. 단감이라도 구해서 오빠 먹여야 되겠다.”
“단감은 왜?”
“감이 떨어졌으니깐 단감이라도 먹여서 감 돌아오게 해야지.”
“웃기고 있네. 근데 우리랑 뭐가 엮인다는 말인데?”
“아, 내가 화교 언니들이 있는 곳에 가서 소개하고 하니깐 바로 다 나를 알더라고. 나도 모르게 인플루언서가 되어 있더라니깐.”
“그게 말이 되냐? 그랩 대표인 나도 못 알아볼 것 같구만.”
“아니라니까. 저기 있는 언니들은 다 오빠를 알던데, 내가 사촌 동생이라는 것도 알고 있고.”
“그걸 다 알고 있다고?”
“응. 진짜 다 알아. 아마도 데닐리 사장이 신부에게 우리에 대한 것을 이야기했고, 저 언니들도 다 들었겠지. 그리고 다들 결혼 적령기인 언니들이다 보니 30대 후반인….”
“아직은 만으로 중반이다.”
“오케이 중반 인정해 준다. 하여튼 저 언니들도 다 결혼 적령기이다 보니 30대 중반 돌싱인 대기업 회장에 대한 정보를 파악해 두는 게 당연하지. 그게 화교들이잖아.”
그러고 보니 데닐리 탄도 부모의 소개로 신부를 만났고, 결혼을 결정했다고 했다.
이런 부분은 아직까지 중국 유교의 잔재가 남아 있는 것 같았는데, 연애보다는 조건을 맞추어 결혼을 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것 같았다.
그리고, 화교들은 화교들끼리만 결혼하는 게 기본이었지만, 본토 출신이나 북동아시아인들과는 그렇게 큰 문제없이 결혼을 하기도 했다.
“그래서 엮이는 일이 뭔데?”
“아 맞다. 레일리 언니가 쇼핑몰을 하더라고.”
“쇼핑몰? 모델급이니깐 의류 쇼핑몰이겠네. 그런데 그게 왜 우리랑 엮이는 거야?”
“블루버드 그룹의 배송 시스템을 알아보더라고. 쇼핑몰은 싱가포르인데, 말레이시아, 태국, 인도네시아, 필리핀 등등 다 배송을 하니 물류 쪽을 의뢰하고 싶다던데.”
“오. 나름 규모가 있는 쇼핑몰인가 보네. 근데, 배송비가 장난 아니겠는데. 배송기간도 그렇고.”
“그렇지. 배송이 문제더라고. 그래서 한번 그랩으로 찾아오겠대. 우리가 나름 해운 물류사업도 하고 있고, 그랩으로 유통망을 만들고 있으니깐 협업을 할 수 있겠다고 생각하는 거지.”
“괜찮겠네.”
“그래서 오빠가 이번 주까지 말레이시아에 있다고, 그전에 찾아오라고 했어. 잘했지? 언제 저런 미녀랑 데이트해 보겠어.”
“야이. 미치-게 고맙네. 그래. 언제 저런 모델이랑 이야길 해 보겠냐. 예식 시작하네.”
멋지게 꾸민 데닐리 탄과 신부가 입장을 하고, 천주교 신부님이 결혼식의 주례를 보며 축복을 해 주었는데, 중국식의 결혼식과는 완전히 달랐다.
피부색만 보지 않으면 그냥 서구의 결혼식이라고 할 만큼 서양식의 결혼이었다.
그리고, 서양처럼 결혼 피로연이 이어졌는데, 호텔 야외식당과 수영장을 다 빌려서 놀았다.
“신현이도 그렇고, 각국의 지사장들에게도 상장이 되면 배당이 될 거야. 최소 10만 주 이상씩 줄 수 있게 추가 상장을 할 거니깐 2년만 더 힘내자. 그때까지 다들 퍼지지 말고.”
각국에 있는 그랩 지사장들이 모일 일이 없었는데, 이번에 다 모이다 보니 상장 후 배당될 주식에 대해서 공개적으로 이야길 했다.
10만 주 배당에 주당 30불만 되어도 다들 백만장자가 되는 것이었다.
“아니 피로연에 회의를 하시면 어떻게 하십니까? 남자들은 다들 어서 여자들에게 갑시다!”
데닐리 탄이 신부와 함께 지사장들을 데리고 신부의 친구들에게 소개를 해줬다.
그리고, 신부와 함께 있던 정윤이가 훤칠한 미녀를 데리고 왔다.
“오빠 이 언니가 쇼퍼백 쇼핑몰을 운영하는 레일리 언니야. 신부와는 대학교 동창이고.”
“레일리 바스턴입니다. 레일리라고 불러주시면 돼요.”
가까이서 보게 된 레일리는 연한 갈색 눈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러면서도 한국인의 느낌이 들어서 뭔가 이제까지 봐 왔던 한국 여자들과는 다른 느낌이 났다.
혼혈이라서 백인의 유전자가 섞여 있다 보니 눈동자뿐만 아니라 두상도 달랐고, 전체적으로 이국적인 느낌이 확 들었다.
그러면서도 유창한 한국말을 하니 이게 또 신기했다.
이런 이국적인 아름다움을 눈앞에서 보고 있으니 절로 웃음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아 쇼핑몰을 하신다고 했죠? 쇼핑몰 이름이.”
“내가 이야기했잖아. ‘쇼퍼백’ 쇼핑몰이라고. 정신이 다른 데 가 있네. 크흐흐.”
정윤이는 분명 소개할 때 이야길 했는데 못 알아들었다고 눈치를 줬다.
쇼핑 가방을 파는 곳인가 싶어 폰으로 접속해 보니, 패션잡화를 판매하는 사이트였다.
“아, 쇼퍼백이란 이름이 가방을 파는 곳이 아니군요.”
“그런 오해를 많이 받아요.”
“그런데, 인도네시아의 블루버드 유통망을 쓰고 싶으시다고요?”
“아 네.”
“아, 잠시만요. 이거 두 사람 너무 한 거 아니에요? 결혼식 피로연에서 업무 이야기나 하고. 이러면 안 되죠. 자자. 저기 가서 같이 춤도 추고 술도 마시고 좀 해요.”
“맞습니다. 결혼식에서 무슨 업무 이야기입니까? 일단 한잔하세요!”
정윤이와 김신현이 우릴 데리고 DJ가 음악을 틀어주는 수영장 무대로 움직였다.
다들 결혼식을 축하해서 그런 건지 아니면 술에 취해서 그런 건지 모두가 흥겨웠고, 즐겁게 떠들어 대며 술을 마셔댔다.
***
“데닐리 사장은 아침 일찍 신혼여행으로 하와이로 출발했구요. 일단 점심시간에 업체 미팅이 있습니다.”
“업체 미팅? 그런 일정 없었지 않았나?”
“어제 생겼습니다. 기억 안 나시나요?”
오히려 되물어 보는 정윤이의 말에 기억을 더듬었지만, 미팅을 잡았던 기억이 없었다.
“쇼퍼백의 레일리 대표와 같이 점심 먹기로 했잖아요.”
“아. 그래? 응? 내가 일정을 잡았다고? 내가 어제 술을 많이 먹었었어?”
“아니요. 그냥 제가 잡은 거예요. 아침으로 커피만 마셨으니 레일리 대표랑 같이 속풀이로 식사나 하고 오세요.”
“뭐어? 왜 이런 일정을 네 마음대로 잡냐?”
“그래서 오빠는 싫어?”
“아니이. 그게 싫다는 게 아니라. 너무 갑작스럽다는 거지. 사실, 유통망을 통한 배송이라고 해도 내가 뭘 해 줄 것도 아니고.”
“됐고. 일단 로비에 차를 준비해 뒀고, 한인 식당에 따로 예약도 했으니깐 데리러 가서 가면 될 거야. 이건 레일리 언니 연락처고, 이건 식당 주소. 설렁탕집인데, 국물이 진짜 진국이더라고.”
“제대로 비서 일도 하네.”
“이건 비서 외적인 일이거든. 일단 레일리 언니 좀 만나봐. 쇼퍼백 쇼핑몰과 연계된 일을 하든 안 하든 그런 여자도 좀 만나고 해야 연애 세포가 살아나든지 하지.”
“그래. 정윤아 고맙다. 땡큐!”
신부 친구들도 다 호텔에 묵었기에 연락하고 데리러 가니 선글라스에 모델 포스를 풍기는 레일리가 로비에 나와 있었다.
바로, 픽업해서 한인 설렁탕집으로 달렸다.
“선글라스를 벗어야 하는데, 어제 술 먹고 잤다고 눈이 부어서요.”
“괜찮습니다. 그런 걸론 뭐라고 안 해요.”
설렁탕집에 가니 정윤이가 따로 방을 잡아 주었는데, 음식도 시키지도 않았는데 자동으로 나왔다.
“정윤이 말로는 여기 국물이 제대로 되었다고 하더라구요. 설렁탕 처음 먹어 보는 건 아니죠?”
혼혈이라 혹시나 처음 먹어 보는지 물었다.
“어머니 따라 한국에 갔을 때 먹어 봤어요. 이렇게 하얀색 국물은 진짜 오랜만이에요.”
음식을 먹기 위해 레일 리가 선글라스를 벗었는데, 내가 보기엔 그리 부은 거 같지도 않았다.
뽀얗고 따뜻한 흰 국물이 목구멍을 넘어가자 전날 술을 먹고 피곤했던 몸이 뭔가 축 처지는 느낌이 들었는데, 밥을 말아 먹으면 먹을수록 또 따뜻한 기운이 올라와 몸을 일으키는 느낌이 들었다.
눈앞에서 이국적이면서도 한국적인 미인이 밥을 먹고 있으니 기운이 날 수밖에 없기도 했다.
“와 진짜 여기 국물 맛있네요. 제가 한국인이라는 걸 느끼는 때가 이렇게 국물 음식을 먹을 때인 거 같아요.”
“그럼, 다음에 한국 오시면 곰탕이랑 국밥이랑 투어 한번 도셔야겠네요.”
“그것도 좋죠. 매제가 최도협 쉐프라고 하던데 그분이 국밥도 하던가요?”
“못한다고 해도 레일리 씨가 먹고 싶다고 하면 만들어 내라고 해야죠.”
“호호호. 저도 부엌을 부탁해랑 요리쇼 정말 재미있게 봤었거든요.”
“다음에 매제랑 여러 요리사를 소개해 드릴게요. 그럼 갑시다.”
식사를 마쳤으니 묵고 있는 호텔 비즈니스 센터로 움직였는데, 레일리가 호텔로 가고 있다는 걸 알곤 방향을 바꾸게 했다.
“정윤이가 사촌오빠의 연애 세포가 다 죽은 거 같다고 하니 진짜인 거 같네요. 우리 쇼핑센터로 가요.”
아차 싶었다.
개인 사무실도 아니고, 호텔에서 운영하는 비즈니스 센터는 공용 사무실인데, 그런 곳에 데리고 갈 생각을 한 것이었다.
그리고, 블루버드와 만든 유통망을 통해서 쇼퍼백 사이트의 배송이 이루어질 경우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던 것도 겨우 참았다.
그렇게 쇼핑몰을 잠시 걷고, 음료까지 마신 후에야 쇼핑몰의 루프탑 카페에 앉았다.
“사실. 쇼핑몰을 걸었을 때는 그냥 일 이야기를 하지 말까 고민했어요.”
“왜요? 일 때문에 만났지 않습니까.”
“왠지. 제가 임 대표님을 이용하는 그런 느낌이 들었거든요.”
레일리는 사실 데닐리 탄의 결혼식에서 그랩의 대표인 임건호와 사촌 동생인 최정윤이 자신을 주시하는 것을 느꼈었다.
그래서 최정윤이 와서 이야길 하고 자신에 대해 궁금해할 때 자신에 대한 여러 이야기를 해줬었다.
그리고, 그 결과 피로연에서 신부와 정윤이는 물론, 다른 이들까지 모두 다 밀어주는 느낌이 들어 일이 잘 풀릴 것 같은 생각도 들었었다.
하지만, 오늘 만나 식사를 하고, 바로 일을 하기 위해 비즈니스 센터로 가려는 임건호를 보니 뭔가 안타깝게 느껴졌다.
몇천억대 부자이지만, 일만 하려는 사람이란 게 바로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그런 일만 아는 사람에게 자신의 미모로 구슬려 좋은 조건의 거래를 만들어 내려고 했다는 생각에 양심에 걸렸었다.
그래서 고민을 했고, 임건호에게 그 이야기를 한 것이었다.
“이용이라. 사회 생활하는 사람이면 다 같은 거 아니겠습니까. 서로를 이용하는 거.”
“그건 그렇지만, 괜히 양심에 걸려서요.”
“레일리 씨는 좋은 사람이시네요. 헌데 저도 레일리 씨를 좀 이용해야 할 것 같습니다.”
“저를 이용하겠다고요?”
“네. 저도 쇼핑몰을 같이 걸을 때 좋은 사업 아이디어가 떠올랐거든요.”
“아, 다른 이용이 아니라 업무적인 건가요?”
레일리는 이 사람의 연애 세포는 확실히 다 죽었구나 하는 걸 느꼈다.
“네. 업무적인 이용요. 레일리 씨와 쇼핑몰을 걷다 보니 여러 광고판이 보였는데, 저에게 의문을 가지게 해 줬습니다.”
“어떤 의문인가요?”
“미국에는 아마존이 있어서 북미를 다 점령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경제 대국이 된 중국에는 알리바바가 있구요. 헌데 왜 동남아에는 그런 쇼핑 사이트가 없을까 하는 의문을 들게 해줬습니다. 인구는 7억 가까이 되기 때문에 충분하다고 봅니다.”
“그게, 동남아시아에는 라자다(Lazada)란 사이트가 있어요.”
“네. 저도 라자다를 압니다. 몇 년 전부터 동남아에는 ‘라자다’란 사이트가 있다고 이야기를 들었습니다만, 하지만, 몇 년이 지난 지금까지 크게 확장된 것이 없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흠. 그러고 보니 그렇네요. 몇 년 전만 해도 라자다가 동남아시아의 알리바바가 될 거라고 했었으니깐요. 뭔가 성장하지 못한 것 같네요.”
“그러다 제가 가진 자원들을 생각하니 동남아시아의 아마존, 알리바바 같은 사이트를 만들어도 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맨땅에 헤딩해서 사이트를 만들기보다는 기존의 사이트를 인수하는 게 빠를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구요.”
“설마….”
“네. 레일리 씨의 쇼퍼백 사이트 얼마면 됩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