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7. 그가 오다 (3).
“데닐리. 일단 진정하고 생각해봐. 우리가 지분 30%를 넘겨주게 되면 손정의가 정식으로 대주주로서 경영에 참여하게 될 거야. 그러면 손정의의 손에 우리 그랩이 죽을 수도 있는 거야.”
“우릴 죽일 수 있다고요? 손정의가 왜 그런 짓을…아! 유버!”
“그래. 이제 머리가 좀 굴러가냐? 의도를 모른 채 무작정 경영에 참여시키면 안 되는 거야. 의도를 확인해야 해. 3억 달러를 받고 상장을 위한 준비작업으로 경영에 참여시켰는데, 다른 일을 할 수 있다고.”
“흑자가 나는 알짜를 유버에 넘겨주거나 난장판을 만들 수 있겠죠.”
“그래. 그렇게 경쟁자인 우리가 죽으면 유버는 시장에서 더 가치가 올라가게 된다고.”
경쟁자인 그랩을 처리하는 데 3억 달러를 쓰더라도 유버가 상장만 된다면 그 규모 면에서 상대가 되지 않을 정도로 손정의는 이득을 볼 터였다.
물론, 손정의가 그랩의 상장을 진짜 원할 수도 있겠지만, 사람 속마음은 알 수가 없는 거였다.
특히나 승부사, 모험가 같은 별명이 붙어 있는 사람이다 보니 조심할 수밖에 없었다.
“3억 달러로 경쟁자가 가지고 있던 인프라를 그대로 가져간다면 괜찮은 작업이겠지만, 설마, 그렇게 하겠습니까? 괜히 잘 돌아가고 있잖습니까.”
“확신할 수 없다고. 그러니 그랩의 운영 방침에 변경하거나 매각할 수 없다는 조건을 넣고, 한정된 경영에 참여할 수 있게 해 주는 방법으로 딜을 해야 해.”
그제야 데닐리 탄도 핑크빛 미래만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표정이 굳어졌다.
“네가 이미 손정의와 몇 번 이야기해서 친한 것 같으니 한 번 살짝 떠봐. 서비스 변화나 사업 분야의 분리를 금지하되, 상장을 위한 단기 매출 적용 부분만 맡아 준다면 그 투자 조건을 받겠다고.”
“알겠습니다. 일단 대표님도 이 건에 대해서 부정적인 건 아니군요. 제가 따로 이야길 해 보고 내일 연락을 드리겠습니다.”
데닐리 탄은 바로 회의실을 박차고 나갔다.
이 건에 열정적인 데닐리 탄을 보니 나도 그랩에 개인 자산을 더 넣기보다는 지분을 넘겨주고 상장한 이후 금전적인 보상을 받는 게 마음이 편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득을 위해서 손정의에게 상장을 맡기는 것이 좋을 것 같긴 했지만, 손정의가 진짜 그랩의 상장만을 원하는 것인지가 문제였다.
***
“하하하. 그랩 쪽에서는 그렇게 생각하실 수도 있겠군요. 3억 달러를 들여 그랩을 치울 수 있으면 유버에게 이득이긴 하겠군요. 하지만, 그럴 생각은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안심하셔도 됩니다.”
“그럼 2년 내에 상장하는 것만 목적으로 하시는 겁니까?”
“그렇습니다. 제가 가장 우선하는 것은 그랩의 상장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말끝을 흐리는 손정의에게 말이 나오길 데닐리 탄은 기다렸다.
“본래 그랩을 상장하고 난 이후로나 이 이야기를 하려고 했는데, 미리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겠군요. 그랩에 투자해서 상장하는 것에 다른 나쁜 의도가 없다는 것을 확인시켜 드리기 위해 이야기해 주는 겁니다. 임건호 대표에게는 비밀로 해 주셔야 합니다.”
“대표님에게 비밀로요?”
데닐리 탄은 고민을 할 수밖에 없었다.
임건호에게 손해가 가는 것이라면 비밀로 하지 않고 이야기를 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하하하. 그냥 제가 다른 의도가 있는지 의심할 때 그때 이 이유 때문에 그랩에 투자하는 것이라고 임 대표에게 이야길 해 주시면 됩니다. 그전까지는 비밀로 해 주시고요.”
손정의의 말에 데닐리 탄은 고개를 끄덕였다.
“본래 그랩을 뉴욕에 상장을 시킨 이후 한국의 ‘푸드 딜리버리’를 인수하고 싶다고 이야길 할 생각이었습니다.”
“푸드 딜리버리요? 아아. 그래서 임 대표에게 비밀로 해 달라고 한 거군요.”
“데닐리 씨가 아실지는 모르겠지만, 제가 이끄는 비전펀드에서 한국의 양팡에 투자를 하고 있습니다.”
“아, 그건 알고 있습니다.”
데닐리 탄도 손정의가 1조 원 넘게 한국의 양팡에 투자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한국은 인구가 1억 명이 되지 않지만, 서울과 경기권만 잡으면 된다고 할 정도로 인구 밀집도가 높습니다. 해서 새벽 배송을 앞세운 양팡이 온·오프라인 쇼핑을 휘어잡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더군요.”
데닐리 탄도 양팡을 들어서 알고 있었다.
한국계 미국인이 이석범이 야심 차게 미국의 아마존과 일본의 라쿠텐 BM을 벤치해서 한국에서 시작한 쇼핑 플랫폼이었다.
한국에서는 처음으로 새벽 시간이나 밤 9시 넘어 야간 배송을 해 주면서 인기를 끌었는데, 겉으로 보이는 것만큼 재미를 보고 있는 건 아닌 것 같았다.
“그래서 양팡의 점유율도 올리고, 온·오프라인의 합작을 위해 스타 코퍼레이션의 푸드 딜리버리를 인수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선은 그랩의 상장에 손을 모으고 싶은 겁니다.”
“역시….”
데닐리 탄은 감탄했다.
원래 목적을 좀 더 쉽게 이루기 위해 그 전에 포석으로 그랩을 선택한 전략이었다.
그 사전 전략도 단순한 후속 조치를 위한 전략이 아니었다. 먼저 둔 포석 자체만으로도 이득을 볼 수 있었으니 일석 삼조의 전략이었다.
데닐리 탄은 손 마사요시가 하는 일마다 성공하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럼 임건호 대표에겐 푸드 딜리버리 인수 건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네. 그랩이 상장된 이후로나 이야기해 줬으면 좋겠군요.”
“네 그때 이야기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내일 대표님을 좀 더 설득해서 연락을 드리겠습니다.”
데닐리 탄이 손정의에 대한 신뢰를 가지고 문을 나서자 손정의는 흐뭇하게 웃으며 데닐리 탄을 보았다.
‘반드시 꼭! 너만 알고 있어야 해!’하고 하는 비밀이야기들은 당연하게도 상대방에게 비밀스레(?) 전해지는 것이었다.
손정의도 그걸 알고 있었기에 데닐리 탄에게 이야길 해 준 것이었고.
자연스레 비밀이야기들은 비밀스레 입과 입을 통해 퍼져나갈 것이고, 2년 후에는 IT 플랫폼 기업의 숙명처럼 매각할 준비가 다 되어 있을 터였다.
그리고, 그랩이 상장만 된다면 적자 폭이 큰 유버의 상장도 그리 어렵지 않을 터였다.
***
“뭐? 푸드 딜리버리를 인수하기 위해 그랩 상장에 나서 주는 것이라고?”
“네. 그래서 그랩의 경영에 참여해서 상장시킬 생각이지 다른 마음은 없다고 합니다.”
건호는 데닐리 탄의 이야길 들으니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 고민이 되었다.
“푸드 딜리버리를 얼마에 인수하겠다는 금액적인 이야기는 안 하고?”
“네. 지금 당장은 그랩의 상장에만 집중하겠다고 합니다. 상장을 위한 준비작업에만 경영권을 행사하고 우리에게 무조건 보고하는 조건을 따르겠다고 했습니다.”
순순히 우리가 내건 조건들을 다 받아들이겠다고 하니, 진짜 손정의가 그랩의 상장에 목적이 있는 건가 싶었다.
그리고, 손정의가 푸드 딜리버리를 진짜 인수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면, 푸드 딜리버리 인수까진 문제를 일으키지 않을 터였다.
더해서, 건설 컨소시엄을 만들기 바쁘다 보니 경영권 때문에 손정의와 다투기도 싫었고, 다툴 시간도 없었다.
그에게 경영을 맡겨 보는 것이 지금으로서는 최선의 선택이었다.
이미 알리바바와 유버에서 음으로 양으로 영향력을 펼치며 움직였으니 그랩을 위해서도 좋은 일이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좋아. 손정의의 투자 건을 받자.”
우리가 결정을 하자 변호사들이 나설 시간이었다.
법률 담당인 정진이가 우리 이익을 위해 최대한 노력해 줬고, 손정의는 3억 달러를 투자하면서 지분 비율을 IPO 통과 조건에 맞게 재정리를 바로 시작했다.
“총 발행 주식 수는 1억 주로 재정리합니다. 먼저 데닐리 탄이 1000만 주. 그리고 각 나라별 그랩의 지분을 가진 은행과 투자자들이 총 1500만 주를 가지게 됩니다.”
손정의에게 준 지분의 대부분이 데닐리 탄의 지분이었기에 데닐리의 지분은 엄청나게 줄어 있었다.
“그리고 임건호 대표가 2500만 주. 우리 비전펀드가 2500만 주. 일반 주주 공개 2500만 주가 될 것입니다.”
지분 30%를 가져가기로 했었지만, 빠른 IPO 통과를 위해 일반 주주 공개 주식 수를 맞추려다 보니 이렇게 지분이 나뉘게 된 것이었다.
“상장 시에 시장의 반응에 따라 추가로 주식이 발행될 수도 있겠지만, 최대 1억 5천만 주 이상으로는 발행하지 않을 계획입니다.”
손정의는 자신의 주도로 상장 계획을 잡자 흑자가 나는 캄보디아와 말레이시아는 놔두고, 태국에서 2위인 고젝을 죽이기 위해 유버와 연합 전선을 펴는 데 집중했다.
그리고, 자신의 지분을 판 데닐리 탄은 천억 이상을 가져갔고, 그제야 행복해했다.
물질로 만족을 받은 것이었다.
“대표님. 부모님의 소개로 만난 아가씨와 결혼을 하기로 했습니다.”
데닐리 탄은 멋쩍게 웃으며 결혼식을 알리는 초대장을 붉은 봉투에 담아 주었는데, 그제야 큰돈에 욕심을 내었던 데닐리 탄의 입장이 이해되었다.
결혼 때문에 돈에 집착을 했던 것 같았다.
물론, 나도 내 개인 자산이 그랩에 투자되어 있었기에 지분정리를 하며 내가 투자했던 2200억을 돌려받았다.
뭐 앞으로의 그랩에는 많은 부채가 생기게 되겠지만, 신규 IT 기업에게 부채는 필요악(必要惡)일 수밖에 없었다.
나는 은행 돈을 빌려오는 것에 대해서 은근한 부담감이 있었지만, 손정의는 모험가, 투자가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이다 보니 은행 돈을 가져다 쓰는 것에 대해서 아무런 거부감이나 두려움이 없었다.
야쿠자 집안이라서 간이 큰 건지 소시민으로 살아온 나와는 베짱부터 달랐다.
***
“대표님. 이쪽입니다.”
데닐리 탄의 결혼식을 위해 말레이시아로 갔는데, 역시나 다들 쌍쌍이었다.
서양에서는 솔로라도 결혼식에는 커플로 오는 것이 예의라고 들었기에, 어쩔 수 없이 사촌 동생이자 비서인 정윤이와 참석을 했다.
사실, 스튜어디스인 이나린과 같이 참석해 볼까도 생각했는데, 그때 부산 집으로 와서 돌아간 이후 연락이 없었기에 마음을 접었었다.
“오빠 저쪽에 예쁜 언니들 많네.”
“많으면 뭐하냐 그림의 떡인데.”
“뭐어? 떠어-억! 여자랑 떠억!”
“야야. 놀리지 말고.”
“헤헤헤. 그런데, 신부도 화교이다 보니 확실히 말레이시아 사람들과는 다르네.”
“확실히가 아니라, 거의 북동아시아 계열의 화인들인 거지. 더구나 우리 쪽은 다 한국 사람이고.”
나라는 분명 말레이시아인데, 눈썹이 진하고, 피부가 검은 말레이인들은 거의 없었다.
간혹 보이는 말레이인들은 호텔에서 일하는 이들이 전부였다.
“오빠, 오빠! 저 여자 봐봐! 핑크색에 노란색 원피스 입은 여자. 엄청나지?”
정윤이의 호들갑에 보니 키가 180cm는 되어 보이는 모델 같은 여자가 런웨이처럼 포스를 풍기며 들어오고 있었다.
“모델인가 보네. 핏이 장난 아니네. 말레이시아에서 예쁘다는 화교들은 진짜 다 오는가 보다.”
“데닐리 사장이 성공한 기업인이니깐 비슷한 화교 자식들은 다 오늘 올걸. 내가 저 모델 전화번호 따줘?”
“아서라. 같은 한국 여자도 돌싱이라서 연애가 안 되는데 화교는 되겠냐? 야야 어디 가?”
정윤이는 건호가 말릴 새도 없이 여자들이 몰려 있는 곳에 끼어 들어갔다.
그러곤, 다 같은 일행이라도 되는 듯이 섞여서는 이야기를 하고 웃어댔다.
정윤이는 인싸 침투력이 확실히 있는 거 같았다.
시간이 되어 결혼식이 진행되었는데, 그제야 정윤이가 자리로 돌아와 내게 보고(?)를 했다.
“오빠. 레일리 언니는 화교가 아니래.”
“레일리? 그게 누군데?”
“아, 아까 키 큰 모델 언니. 핑크에 노란색 원피스 입은 여자 말이야. 오빠가 핏 좋다고 했잖아.”
“아아. 근데, 화교가 아니라고?”
“응. 혼혈인데, 한국인이래. 엄마는 한국인이고, 아빠는 네덜란드인.”
“그래? 근데, 한국인이면 어떻고, 네덜란드 사람이면 어떻냐. 내가 무슨 상관이 있다고.”
“상관있는데, 우리랑 엮이는 일이 있다던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