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2. 자르지 못하는 싹.
변민규 단장이 이야기한 것처럼 해외 개척 사업단과 한국의 편의점 사업부는 같은 유통사업부 안에 있지만, 접점이 거의 없는 부서라고 할 수 있었다.
그래서 국내 편의점에서 콜라에 대한 유통 조건을 이야기할 때 자신이 뭘 할 수 있는 게 없다고 먼저 말을 한 것이었다.
하지만, 임건호 대표의 말마따나 인도네시아에서 이런 조건 제안이 있었고, 그런 조건을 들어 줬을 때 개척 사업단이 비용적인 측면에서 절약할 수 있다는 보고서는 올려줄 수 있었다.
실제 그 조건을 들어주고 유통망을 저렴하게 사용할 수 있다면 개척 사업단의 입장에서는 이득이었다.
한국 내 편의점에서 콜라들이 가격이나 맛 경쟁을 하며 치고받고 싸우는 것은 개척 사업단과는 별 상관없는 일이었다.
본사의 유통사업부에서 어떤 판단을 내리느냐에 따라 비용적인 측면과 편의점 콜라 매출이 달라지게 되겠지만, 그건 한국 편의점 사업부 내의 일이었다.
“좋습니다. 보고서를 올려보지요. 조건을 받아들였을 때의 유통 비용과 안되었을 때의 유통 비용에 대한 자료를 넘겨 주십시오.”
***
“구지환 상무님. 인도네시아 개척 사업단에서 올라온 보고서인데, 이게 상무님의 전결(專決)로 하지 않고, 사장님의 정규 결재를 꼭 거쳐 달라고 보고서에 첨부되어서 올라왔습니다.”
“뭐? 전결을 거부했다고? 이리 줘봐.”
보통의 업무 내용이라면 부장 선에서 전결로 결재가 되어 처리되는 것이 일반 기업의 일이었다.
하지만, 그런 전결로 처리하지 말고, 최고 경영자에게까지 올라가게 해달라고 정규 결재를 요청하게 되면 그만큼 위중한 사안의 보고서라고 할 수 있었다.
그래서 구지환 상무는 일부러라도 개척 사업단이 올린 보고서를 받아서 읽었다.
“스타 콜라를 우리 SG편의점에 넣어주면 인도네시아 개척 비용이 세이브 된다라. 흐음.”
구지환 상무도 이제까지 국내에서 콜라가 만들어 지면 어떻게 말려 죽였는지 잘 알고 있었다.
헌데, 개척 사업단에서는 그런 말려 죽이는 방법 대신 스타 콜라를 편의점에 넣어 달라고 하니 어이가 없었다.
하지만, 보고서에 첨부되어 있는 조건을 들어줬을 시 얻을 이익이 500억에 육박하자 정규 결재로 올리는 게 맞을 것 같다는 판단이 들었다.
“이건 회의가 필요하겠어. 각 사업부 부장급들에게 이 건 알리고 사장님 일정 맞춰서 회의 잡아줘.”
***
“내 참 이걸 왜 이제 안 거야. 816 스타 콜라라니. 새로운 콜라가 나왔는데, 왜 아무도 대응을 안 했어? 다들 콜라 인제 그만 팔 거야? 그냥 싹이 나서 크라고 놔두고 있었던 거야?”
구인상 사장은 중견 기업에서 콜라가 나와서 이렇게 조건을 내걸 정도가 되었는데, 자신에게 이때까지 보고가 되지 않았다는 것에 화가 났다.
“그것이. 스타 콜라 자체가 우리 유통망을 한 번도 거치지 않은 상품이라 그렇습니다.”
“우리 유통망을 거치지 않았다고? 그럼 LT쪽도?”
“네. 우리 유통망이나 LT그룹의 유통망은 물론이고 뉴세계의 유통망도 거치지 않았습니다.”
“그게 말이 되는 거야? 한국에서 가장 큰 유통망 세 곳을 제외한다면 그게 팔려? 그럼 얘네들은 콜라를 어디서 어떻게 팔고 있는 거야?”
“아직 미미하긴 하긴 하지만, 중소규모의 자체 마트인 ‘스타마트’ 52곳과 ‘푸드 딜리버리’ 어플을 통해 팔고 있습니다. 그리고, 군납도 들어갔습니다.”
“군납이 되고 있다고?”
구인상 사장은 올려진 자료에서 군납 관련을 찾아 확인했다.
1년에 300만 캔이 납품되고 있고, PX와 BX에는 캔뿐만 아니라 페트병 제품도 유통되고 있었다.
작은 물량이 아니라는 생각에 보고서를 차근히 살펴보니 제조·판매가 ‘스타 음료’로 되어 있었다.
“군납 물량도 꽤 되는데, 이거 어디서 생산되는 거야?”
“예전 용진 그룹의 자회사였던 용진 음료를 인수해서 거기서 생산하고 있습니다.”
“용진 음료? 거기면...이거 생산 여력이 더 있다는 거잖아.”
스타마트는 지나가듯이 들었을 정도로 작은 마트였기에 신경 쓰지 않았지만, 스타 코퍼레이션의 자회사 중에 국내 1위인 푸드 딜리버리 어플이 있고, 거기서 판매를 주력으로 하고 있다고 하자 사태의 심각성을 구인상 사장도 깨닫게 되었다.
“예전에 용진 음료에서 콜라 사이다 나왔을 때 말려 죽였더니 그걸 피해서 자체적으로 몸집을 키우고 있었구만.”
한국 3대 유통 채널을 통하지 않고, 군납과 자체 유통망으로 500만 캔 이상 팔 수 있는 저력을 가졌다면, 예전처럼 말려 죽일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을 했다.
하지만, 쉽지 않아 보였다.
“저희도 이 보고서를 보고 사태를 파악했습니다. 그리고, 예전처럼 LT그룹과 연계해서 작업을 하려고 했지만, 이미 깔아뭉갠다고 처리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간 거 같습니다.”
구지환 상무는 스타마트와 온라인 오픈마켓을 통한 유통, 푸드 딜리버리의 배송과 배달 전문점에서 저렴하다고 리뷰 이벤트로 주는 음료 물량까지 정리해서 보여주었는데 싹이 너무 커버렸다는 걸 깨달았다.
LT와 담합해서 가격을 다운시키고, 주류 납품 거부를 통한 요식업 찍어내기가 안 먹히는 상대였다.
“써글, 우리 대처가 늦은 거야?”
“대처가 늦은 게 아니라, 스타 코퍼레이션 측이 준비를 단단히 한 것 같습니다. 애초에 대형 마트와 편의점에 물건을 깔지 않고, 자기들이 컨트롤할 수 있고 유통할 수 있는 유통 루트로만 콜라와 사이다를 유통했기에 우리가 초장에 어떻게 할 수가 없었던 겁니다.”
“그럼, 맛은? 옛날처럼 인력 빼 오기는?”
“그것도 힘들 것 같습니다. 용진 음료를 스타 측에서 인수한 이후 실무자들에 대한 대우가 좋아졌고, 예전에 기술자들이 몇 년 있다 버림당한 것도 알기에 연봉 두 배를 제시하더라도 옮겨오지 않을 겁니다.”
“그럼 가격 낮춰서 장기전으로 가야 하는 건데, 예상치는?”
“3년 이상 스타 콜라보다 저가로 팔아야 가격으로 죽이는 게 가능하다고 나오는데, 모기업인 스타 코퍼레이션이 건실하기에 어쩌면 그 이상 걸릴 수도 있습니다.”
“써글. 그럼 이거 우리나 LT에서 손을 못 댄다는 거야? 이대로 3강 체재로 가자는 거야?”
방법이 없다 보니 다들 입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유통 루트를 이렇게 잡고 있는 놈이 나올 때까지 왜 다들 몰랐어! 용진 음료가 매물로 나왔을 때 새로운 콜라가 나오지 못하게 막아야 한다고 왜 아무도 예측보고를 안 올린 거야? 다들 노는 거야? 일 안 해?”
회의실 끄트머리에 앉아있는 김현석 과장은 작년에 용진 그룹이 해체되며 용진 음료가 매물로 나왔을 때 용진 음료를 인수해야 한다고 보고서를 올렸었다.
하지만, 용진음료에서 새로운 콜라가 나오더라도 LT그룹과 함께 담합해서 조질 수 있다고 그의 제안은 무시당했었다.
그래서 그런 보고서를 올렸었다고 말도 못 꺼내고 그냥 앉아있었다.
“써글 그냥 인정하고 받아줘야 한다는 거야? 그게 이득이야?”
“현재로서는 그렇습니다.”
“제길. 만약 우리 편의점에 스타 콜라가 깔렸을 때 우리 콜라 매출이 줄어들어 발생하는 손실을 계산해내. 그리고, 우리가 판매할 때 스타 콜라의 가격을 우리가 임의로 정할 수 있는 계약을 했을 때를 상정해서 얼마의 가격 책정이 되어야 하는지도 만들어 올려.”
구인상 사장의 판단은 빨랐다.
말려 죽이는 단계를 넘어섰다면 그 싹이 자라나 나무가 되었을 때 생기는 그늘의 크기를 알아야 했다.
“인도네시아 편의점 개척 관련 보고서 다시 올리고, 인도네시아에서 스타 물류의 유통망을 이용했을 때 얻을 이익을 다시 계산해서 가져와.”
“그럼 LT쪽 엔 어떻게 이야길 하실 겁니까?”
“뭘 이야기해. 그 새끼들도 발등에 불이 떨어지면 알아서 하겠지. 쌍놈들이 우리가 놓치고 있으면 자기들이라도 나서서 해줘야지. 써글.”
그렇게 인도네시아에서 정규 결재로 올라갔던 보고서로 인해 수십 종의 추가 보고서가 만들어졌고, 이익과 손실을 비교하던 SG 유통사업부는 일주일 후 인도네시아 개척 사업단에 서류를 보내었다.
***
“본사에서 방금 메일로 보내온 서류입니다. 직접 읽어보시지요.”
변민규 단장에게 건네받아 읽어본 서류에는 한국에 있는 12,000여 개의 SG23시 편의점에 우리 스타 콜라와 매실 사이다를 정식으로 유통하기로 결정했다는 서류였다.
절로 웃음이 나왔다.
철옹성 요새와 같았던 한국의 콜라 시장에 스타 콜라가 끼어든 의미 있는 순간이었다.
다만, 유통 조건을 저쪽에서도 달았는데, 스타 콜라의 가격 책정 부분을 자신들이 하겠다는 부분은 용인할 수 없었다.
고의로 팔리지 않게 코카콜라보다 500원씩 더 비싸게 진열하게 되면 사 먹을 사람이 없을 테니깐.
“가격 책정 문제는 실무자들이 붙어서 밀고 당기고 해야 하겠지요. 한국의 음료 담당자에게 협의하라고 연락하겠습니다. 그럼 우리도 유통망 사용에 대한 협의를 해 볼까요?”
***
“야 이거 1+1 행사해서 산 건데, 매실 향이 사이다랑 합쳐지니 의외로 괜찮은데. 새로 나온 건가?”
“스타 음료? 아 스타마트 PB상품인가 보다. 의외로 괜찮네.”
“나도 먹어봤어, 배달 음식 시킬 때 리뷰 이벤 신청으로 받아서 먹어봤는데, 가성비 좋더라고.”
“소화 안 될 때 매실이 좋다고 하던데, 짜장 먹고 이거 먹으니깐 뭔가 소화가 잘되는 느낌인데.”
“엇 시간 되었다고 영화관 입장 되네 어서 가자.”
한 손에 버터 구이 오징어와 다른 손에는 매실 사이다를 든 남자 세 명은 600만 명이 넘어 700만 명을 향해 달려간다는 영화 ‘명량대첩’을 보기 위해 극장에 들어갔다.
그리고, 감명 깊게 영화를 보고 나오는데, 700만 명 기념으로 배급사에서 이벤트로 준다는 음료수를 받아 들었다.
“이야. 캔에 태극기가 그냥 박혀 있는데. 크흑 국뽕이 오르네.”
“코카콜라 아냐? 펩시는 이 모양 아니던데.”
“816 콜라네. 콜라 독립했던 그 콜라. 국뽕 코인에 잘 올라탔네. 탄산도 강하고 먹을 만하네. 예전에 보니깐 맛이 없었다고 하던데.”
“엇? 이거도 스타 음료라고 되어 있는데, 아까 그 매실 사이다랑 같은 곳이야.”
“매실도 뭔가 한국 느낌이고, 태극기 전면에 넣은 816 콜라는 대 놓고, 콜라 독립이라고 하고. 이거 국뽕 영화랑 딱 맞네. 마케팅 잘하네 여기.”
그렇게 극장을 나서는 사람들의 손에 한 캔씩 쥐어진 816콜라는 영화 ‘명량대첩’이 흥행에 성공하면 할수록 사람들에게 알려졌고, 800만 명을 넘어가자 천만 명 공약 영상에도 나오기 시작했다.
“우리 명량대첩 영화가 천만 명을 넘게 되면 광화문 광장에서 주연 배우들이 분장을 다하고 짧은 뮤지컬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그 이벤트에 무대나 조명 사운드까지 협찬을 816콜라에서 해주기로 했습니다. 여러분 우리 천만 명 채우고 광화문에서 봐요~!”
오랜만의 천만 명이 넘는 영화가 나와서 그런지 언론에서는 명량대첩의 천만 명 관중에 대해 알려주기 시작했고, 과연 천만 명이 넘어 광화문에서 이벤트를 하게 될 것인지가 화제가 되었다.
그리고, 그런 이벤트에 협찬을 하는 816 스타 콜라의 이름도 알려지기 시작했다.
***
“SG유통 사업부에서는 스타 콜라를 그냥 넣어주기로 한 거야? 미친 거 아냐? 제살깎아먹기 하는 거냐고!”
“뉴세계에서도 스타 콜라를 유통하기로 했다고 합니다.”
“아이씨. 그럼 이거 끊어 낼 수도 없는 거잖아.”
심재일은 짜증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