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5. 가족.
“그…그래. 맞네.”
“와, 이혼남이라고 하더니 쓰레기네요. 아무리 봐도 여자가 20대 초반으로 보이는데.”
쇼핑 카트에 잔뜩 쌓여있는 물건들과 스스럼 없이 몸을 밀착하는 모습을 보니 둘 사이가 보통 사이가 아닌 것처럼 보였다.
중국에서 중요한 일이 있다고 해서 연락 하기 힘들다고 하더니 아마도 어린 여자가 생긴 것 같았다.
이나린은 속에서 화가 치밀었지만, 제대로 사귄 것도 아닌 사이이다 보니 그냥 지나쳐 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날 저녁 임건호에게서 한국에 왔다는 카톡을 받자 그 뻔뻔함에 화가나 카톡으로 쏘아붙였다.
[면세점에서 젊은 여자랑 쇼핑하는걸 봤는데, 보험처럼 두고 연락하시는 거 불쾌하네요. 연락하지 말아주세요. 차단하겠습니다.]
[면세점에서 같이 쇼핑한 애는 사촌 동생입니다. 오랜만에 귀국한 거라 인척들 선물을 같이 산 거에요. 오해입니다.]
“쳇 다 똑같네.”
이나린은 바람피우다 걸리는 남자들이 하는 사촌 동생이라는 핑계에 코웃음이 나왔다.
돈 좀 있다고 이렇게 양아치 짓을 하는 이들을 많이 봐왔었다.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핑계처럼 들리겠지만, 진짜입니다. 뭐하면 부산으로 오시면 확인시켜드리겠습니다. 가족 모임에 다들 모이니 오셔서 확인해보세요. 오해를 풀고 싶습니다.]
차단을 하려는데, 구구절절하게 설명하는 톡을 보니, 진짜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진짜, 사촌 동생이 맞아요?]
[네. 내일 저녁에 귀국 기념으로 가족 모임을 하는데 오세요. 확인시켜 드릴게요.]
이나린은 속는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집 주소까지 카톡으로 찍어주자 부산으로 내려가는 비행기 표를 끊었다.
아직 정식으로 사귀는 사이는 아니었지만, 진짜 사촌 동생인지 확인하고 싶다는 마음이 컸기에 가족들을 만난다는 부담감을 이나린은 모르고 있었다.
***
“그런데, 건희야. 집이 너무 복작복작하다. 이사해야 하는 거 아니냐?”
큰외삼촌은 거실에 펴져 있는 상을 중심으로 20여 명의 친인척이 앉아있자 뭔가 만족스러워 하면서도 이제 큰집으로 가야 한다고 강요 아닌 강요를 했다.
“그렇지 않아도 옆 단지에 45평짜리가 나와 있길래 오빠랑 옮길까 이야기는 했어요.”
“그래. 건호가 한국에 와 있을 때 이사하고 해.”
“잠시만, 그렇게 큰집으로 가면 오빠가 청소할 거야? 24평만 해도 충분하다고!”
평상시 어머니를 모시고 있는 막내 이모의 말에 큰 외삼촌은 쭈그려 들었다.
“건호나 건희나 평상시 집에 없으니 24평만 해도 충분해. 누가 그거 청소하고 할 거야?”
“아니, 이제 신성전자하고도 거래하고 할 정도로 큰 회사 사장님이면 가정부도 들이고 해서 좀 편하게 살아도 되잖여.”
“남정네들은 집에 없으니 그런 말이 쉽게 나오지. 오빠가 한번 살림 살아봐 사람 써서 일 시키는 거도 마음이 편하지 않아.”
“맞아. 그리고, 이런 날에는 또 좁은 곳에서 복작거리는 게 사람 사는 느낌이 더 나지. 집이 넓어 봐 얼굴 보기도 힘들어. 다들 자기 방에 딱 들어앉아서는. 나오지도 않는다니깐.”
“맞아 맞아.”
큰이모도 막내 이모 말에 동의를 하자 큰집으로 이사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큰외삼촌은 한쪽 구석으로 쭈그려 들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건호가 여자를 데리고 온다는 게 진짜야? 정윤이 네가 중국에 같이 있었잖아? 건호에게 여자가 있었어? 중국인이야?”
“중국에선 거의 일만 했었는데요. 중국인은 아닐 거예요.”
서울에서 내려온다는 여자를 데리러 간 건호를 다들 기다리고 있었다.
***
이나린은 김해공항에 내린 그때서야, 질투심에 가려져 있던 부담감이 느껴졌다.
“내가 미쳤지. 어쩌다 부산까지 온 거야.”
아직 사귀지도 않는데, 가족부터 보게 되었다는 생각에 다시 비행기를 타고 서울로 가려는데, 그런 이나린을 건호가 먼저 발견해서는 차로 이끌었다.
“저…저기 그러고 보니 선물도 준비 못했고 해서 다음에 보는 게 좋지 않을까요? 면세점에서 본 여자는 사촌 동생이라고 믿을게요.”
잘나가는 기업의 사장이니 가족들도 그런 상류층일 것 같았고, 여동생의 남편만 해도 유명한 쉐프였기에 괜히 가족들을 본다는 것이 부담스러웠다.
어떻게든 몸을 빼고 싶은 이나린이 었지만, 이미 몸을 빼기에는 늦은 상황이었다.
“선물 같은 건 없어도 됩니다. 그리고, 그날 면세점에서 산 선물들 개봉하는 것도 나린씨가 오면 하기로 해서 다들 나린씨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어서 갑시다.”
빼도 박도 못하게 된 이나린은 끌려가는 소처럼 임건호의 집으로 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자기 생각과는 달리 작은 아파트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있는 대가족을 보고는 뭔가 사람 냄새나는 가족들이라고 느꼈다.
“왔다! 왔다! 드디어 왔어!”
나이가 있는 가족들은 이나린을 구경하기 바빴고, 나이 어린 가족들은 주방에서 최도협이 한 음식들을 상에 옮기느라 분주했다.
“서울에서 부산까지 온다고 고생했네.”
“서울 멋쟁이네!”
“내가 건호 큰 외삼촌이고. 어서 여기 앉아.”
“주책이네 이 인간이. 큰 언니부터 소개를 해야지.”
번갯불에 콩 볶아먹듯이 이나린은 가족들을 소개 받았고, 상에 앉아 식사도 했다.
“건호 형 그럼 이제 선물 뜯어봐도 되는 거죠?”
막내 이모 아들로 고등학생인 흥식이가 얼른 선물을 뜯어보자고 난리를 부렸다.
가족들의 선물을 골랐던 정윤이가 앞에 나서서 일일이 가족들 이름을 부르며 선물을 전달했다.
“봤지? 큰 이모 딸인 정윤이가 내 비서라서 면세점에서 선물 고르고 해줬다고. 오해 풀렸지?”
같이 밥을 먹고 해서 그런지 어느새 말도 편하게 했고, 이나린도 걱정처럼 부담스러운 상황이 아니었기에 고갤 끄덕였다.
“앗! 난 왜 허리띠지?”
“나도 그냥 향수.”
“오! 대박 이거 가방 비싼 건데 오빠 고마워요!”
“이거 나 진짜 가지고 싶었던 가방인데. 오빠 사랑해!”
선물을 받아 개봉한 사촌 동생들의 반응은 극과 극이었다.
남자애들은 3~10만원 대의 선물이라 실망했고, 여자애들은 몇백만 원짜리 명품 가방이었기에 난리가 났다.
“건호야 남자애들이랑 여자애들 차별이 너무 심한 거 아니냐?”
“맞아 정윤이 누나는 까르띠에 700만 원짜리 받았다드만!”
“인마 그럼, 너도 여자 하던지.”
“치이. 그래도 너무 차이 나는데.”
극과극의 반응에 외삼촌과 이모들의 반응도 차이가 났지만, 외삼촌과 이모들에겐 따로 봉투를 드리자 급 웃음을 지으셨다.
“딸은 용돈이나 물건을 팍팍 사줘서 키워야 하고, 남자애들은 가난하게 키워야 하는 게 맞는 거 같다고 느꼈거든요. 그래서 이렇게 샀어요. 외삼촌이랑 이모도 그렇게 애들 키우세요.”
“왜 그렇게 해야 하는 거냐?”
“이게 사회랑 연관이 있는 건데, 여자애들은 돈이 궁하면 남자들에게 기대거나, 돈의 유혹에 쉽게 혹 해서 넘어갈 수 있으니깐요. 여자애들이 돈에 쉽게 넘어가지 않도록 하고 싶은 거, 가지고 싶은 거를 다 해주는 게 맞는 거 같아요. 그래야 제대로 된 남자를 구분할 수 있죠.”
“맞는 말 같네. 그럼 남자애들은?”
“남자들은 돈이 넉넉하면 유흥비나 게임 같은 거에 돈을 쉽게 쓰게 됩니다. 늘 부모님이 돈을 많이 주다 보면 경제 관념이 헤프게 될 수밖에 없어요. 그래서 경제적으로 네가 벌어서 네가 쓰라는 그런 관념을 만들어 줘야 합니다. 자기가 힘들게 번 돈이면 술 먹고 흥청망청 쓰지 못할 테니깐요.”
“오호. 맞는 말 같으면서도 뭔가 여자에게 후한데. 남자만 손해잖아.”
“외삼촌. 제가 지금 점수를 따야하는 상황이지 않습니까?”
“하하하. 그렇지.”
여자들이 좀 더 돈을 쓰고 하는데 편해야 한다는 말뜻을 알아들었다는 듯이 외삼촌이 웃었다.
“흥식이 너도 대학교가고 졸업하면 정윤이처럼 형이 비싼 거 사줄 테니까 제대로 공부해. 요즘 게임만 하고 있다고 정보가 다 들어오고 있어.”
“게임만 하는 게 아닌데.”
흥식이나 남자 사촌 동생들이 구시렁거렸지만, 어쩔수 없었다.
남자는 강하게 커야 했다.
***
“사실. 확인시켜주겠다고 톡으로 이야길 했지만, 진짜 부산까지 올 줄 몰랐어요. 갑자기 가족들을 봐서 좀 불편하긴 했죠? 이건 집에가서 열어보세요.”
다시 김해공항으로 가는 차 안에서 이나린에게 귀국 선물을 건네주었다.
“전혀 안 불편했어요. 제가 상상하던 것과도 좀 달라서 오히려 편했어요. 성공하신 만큼 뭔가 상류사회 가족의 느낌일 줄 알았거든요.”
“사업으로 돈은 벌었지만, 나름 자제를 하고 있거든요. 그리고, 요즘 좀 나아지셨지만, 어머니가 치매이십니다. 그래서 부산으로 이사를 한거고, 이모 두 분이 케어를 해주세요.”
이나린도 어머니와 이야길 하면서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는 채고 있었다.
“치매가 왔을 때 어머니를 요양병원에 입원을 시켰었는데, 제정신으로 돌아오셨을 때 너무 울고 못 견뎌 하셔서 결국 집에서 모시기로 했었어요. 사실, 말이 집에서 모시는 거지 전처가 그걸 다 떠맡을 수밖에 없었죠.”
이나린은 그제야 이혼 사유를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한편으로는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이 감당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다.
“이런 조건 때문에 재혼을 생각하기 힘들었어요. 이해가 될까요?”
“…잘 모르겠어요.”
치매 환자를 겪어보질 못했기에 모르겠다고 대답을 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차 안은 조용해 질 수밖에 없었다.
건호는 이런 이나린의 태도가 이해가 되었다.
만약 나에게 딸이 있는데, 치매 어머니를 모셔야 하는 이혼남에게 시집 보낼 거냐고 물어 본다면 절대 안 된다고 했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결국, 이나린을 서울로 가는 비행기에 태워 보냈고, 다시 집에 오니 친척들은 다들 돌아가고 동생 내외만 있었다.
***
“오빠 그럼, 중국 쪽의 한류 콘서트는 이제 진행을 안 해도 되는 거야?”
“그래. LT 그룹에서 아마 자체적으로 추진할 거야.”
“에이 아깝다. 나름 중국 쪽이랑 인맥 만들어 두고 한 거 좀 아까운데.”
“아, 맞다. 공연 쪽 말고 네가 알아봐 줄게 있어. 한국에 와 있는 중국 아이돌 연습생들이 얼마 정도나 되냐?”
“숫자? 정확하게 집계한 그런 자료는 없을 건데, 못해도 1~200명은 될걸. 아이돌그룹 만들려고?”
“아니. 한국에 와서 연습생 생활을 했는데도 데뷔 못하고 한 연습생들을 네가 좀 리스트업 좀 해주라.”
“데뷔 못한 애들을? 왜?”
“연습생으로 한국에서 1~2년 있었으면 한국말도 좀 할거고, 중국 물이 빠져있을 거잖아. 그런 친구들이 좀 필요해.”
“흠. 보통 데뷔 못 한 애들은 바로 중국으로 가던지 다른 일을 알아보긴 할 건데. 한번 그런 친구들을 알아볼게. 그런데 아이돌 데뷔가 아니라면 어디에 쓰려고?”
“쇼호스트를 만들어 보려고.”
“쇼호스트? 중국에서?”
“그래. 한국의 물건을 중국에 소개하는 그런 쇼호스트로 쓰려고. 연습생으로 한국에서 있었으니 얼굴이나 춤은 어느 정도 될 거고. 중국어와 한국어를 다 쓸 수 있다면 충분히 쇼호스트로 활동할 수 있다고 보거든.”
아직 감을 잡지 못하는 건희에게 중국 위챗에서 만든 모바일 쇼핑 라이브 방송을 보여주었다.
건희는 이게 물건이 팔릴까 긴가민가했지만, 옆에 있던 매제는 바로 느낌이 오는지 알아봤다.
“쇼 쉐프가 이걸 해도 되겠는데요.”